(얼마 전에 요런 전시회에 갔다왔다. 누가 이런 전시회에 갈까 싶었는데, 내가 그런 데에 가고 있다...)
1.
50이 되면서 내 마음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키워드로 생각해보면, 살살 살기와 바쁘지 않기, 두 가지다. 원해서 그렇게 되었다기 보다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또래의 다른 남자들과는 좀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여의도에 있던 시절,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원로들의 삶이었다. 초선 국회의원이던 문재인이 고립되어 있던 시절에서 당대표를 거쳐 더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니던 시절, 그 시간을 그와 함께 했다. 캠프 만들기 직전까지였다. 그 시절에 70 좀 넘은 할아버지들이 여의도에 인공위성처럼 떠다니면서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는 것을 좀 보게 되었다. 안철수 탈당하고, 뭐 그런 사건들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원로들은 자기가 뭘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 또 맞춰줘야 한다. 그나마 국회의원들은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다. 문제가 생기면 직접 만나서 얘기하면 된다. 물론 될 일만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 그런데 원로들은, 누가 누군지 알기가 어렵다. 공식적인 자리에는 거의 안 나온다. 그 근처 커피샵이나 어딘지도 잘 모르는 사무실에 있다. 사무실 이름이랑 진짜 하는 일하고는 거의 연관이 없다. 그런데 이 원로들이 심통 나면 진짜 되는 일이 없다.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 사이에 얹혀 있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도 어렵다.
그 때 마음을 먹은 게 있다. 나는 원로가 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곱게 늙어야겠다는. 물론 한 명 한 명은 따로 만나면 대부분 훌륭한 사람들이다. 전직 국회의장, 전직 장관, 뭐 이런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장점들은 있다. 배울 점도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덩어리로 묶이면, 우와… 엄청나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도 늙으면 이런 할아버지 중의 한 명이 된다고 생각하면,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순수하게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순수하지 못한 것은 참을 수 있는 것 같은데, 더러운 것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몇 년이 지났다. 여의도에 있던 시절, 잘 났다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못난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시간이 지나니까 이제는 기억에서 잊혀져 간다. 많은 것들이 희미해지는데, 원로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만큼은 점점 더 강해지고 또렷해진다.
내가 50대에 갖게 된 삶의 원칙이라는 것이, 별 다른 것이 아니라 늙어서 원로가 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다. 난 그 사람들이 너무너무 싫었다. 그래서 늙어서 그런 모습을 갖지 않기 위해서 지금 뭔가 좀 노력을 하기로 했다. 그게 살살 살기와 바쁘지 않기, 두 가지다.
2.
21세기, 세계 경제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함께 찾아왔다. 이걸 간단하게 요약하면 ‘죽도록 살면 너는 행복할 수 있다”, 요렇게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한국식 특이성 하나가 더 붙는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고, 하나는 비경제적인 것이다. 많은 글을 분석해보면 한국 사람들의 숨어 있는 동기는 이 두 개의 결합 안에 들어간다.
이 생각을 처음 진지하게 하게 된 것은 2012년 대선이었다. 그 때 선거 마지막 순간에 내가 일종의 선대위원장이었다. 최저임금을 좀 더 빠르게 올리는 것을 그 때 내세우려고 했는데, 내부에서 반대가 너무 심했다. 정말로 어떤 반대들이 있는지, 그 때 진지하게 살펴봤다. 당사자들은 이게 될까, 시큰둥해서 별 찬성이 없었다.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거나 제대로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정도였다. 가장 큰 반대는 사장들도 아니고 경총이나 전경련도 아니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상승에 대해서 가장 진직하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알바들이 정규직인 자신들의 임금과 큰 차이가 없으면, 자신들의 삶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다. 이해는 간다. 그렇다고 자기들이 피해보는 것도 아닌데, 그 반대가 정말 심했고, 진지했다. 우리들의 많은 행위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것에서 시작한다.
열심히 살기,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오래된 것도 아니다. 21세기 들어와서 한국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살살 살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상 속에 강력히 들어가 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열심히’라는 말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그야말로 적들의 음모일 뿐이다. 대충 살아도 별 일 없는 것, 그게 사실 선진국이다.
나는 살면서 나에게 살살 살라고 얘기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모두들 나에게 열심히 살라고 했고, 최선을 다 하라고 했다. 없던 힘도 내서, 죽어라고 하라고 했다.
어느 날, 나는 삶을 잠시 세워놓았다. 그리고 살살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벤치 같은 삶 정도가 되면 좋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나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틈 나면 “살살 살아요”, 그렇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좋은 점은 확실히 있다. 확 열불나는 일, 이런 것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치솟는 분노가 금방 내려간다. “남들은 뭐 하는데…”, 이런 엄마 친구 아들 같은 얘기에 대해서는 이제 거의 반응이 없다. “그러시든지”,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븐노의 빈도와 분노의 강도가 내려가면, 이제 심심해진다. 내가 이렇게 화를 많이 내고 살았나? 시간도 많이 남고, 심심해진다. 올 봄,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이것저것 설정 맞추고, 노출값 잡고, 초점을 바꾸다 보면, 시간은 금방금방 간다. 사진 한 장 찍는데, 약간 과장하면 한 시간도 걸린다. 아니, 한 시간이 지나도 제대로 한 장도 못 찍는 경우도 많다. 살살 살면, 시간은 확실히 많아진다.
3.
바빠야 한다는 것도 오래된 이념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워싱턴 컨센서스의 강화와 함께 더욱 강화된 경제 이념이다. 그리고 한국적이다. Sehr koreanisch… 독일어로 매우 한국적. 이제는 너무 우리 옷에 잘 맞는 이념 같아서 그 기원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사상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OECD 국가 중에서 우리처럼 사는 나라도 없고, 우리처럼 서로 바쁘기를 권하는 나라도 없다. 미치도록 바쁘다. 바빠서 미치는 게 아니라, 미쳤으니까 바쁜 거다.
우리는 사랑도, 운동도, 투쟁도 다 목숨 걸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배웠다. 지나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목숨 걸고 사랑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 무서워서 사랑하기가 어렵다. 뒤집어 보면 마찬가지다. “자신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그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 사랑하기는 어렵다. 운동도 그렇다. 사회라는 게, 결국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고 사는 거 내팽개치고 사회만 얘기하는 사람이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사랑과 운동도, 다 병신이 되어서 하라고 하는 시대를 살았다. 사실, 목숨을 걸면 어느 것도 사랑하기 어렵다. 그리고 늘 섭섭하기만 하다. 나는 목숨을 걸었는데, 나한테 왜 이래, 이럴 수가 있어? 다 그럴만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늦게 알게 된다.
인생이라는 게, 바쁠 이유가 없는 것이다. 4당5락, 유신식 바쁘게 살기다. 중고등학생들이 바빠서 소설 읽은 시간이 없는 나라, 근본적으로 교육 설계가 잘못된 것이다.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소설이라도 읽게 되는 나라, 이런 나라가 국민소득 7만 달러, 8만 달러 갔다. 죽도록 공부해서 병신되는 길, 이게 우리가 만든 세상이다. 뭔 짓이냐?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만은 바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제 할 일을 오늘 해도 된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룬다. 그리고 내일 하려고 했던 일은, 기약 없는 먼 미래로 넘긴다. 그리고 오늘은, 사랑을 한다. 일단 돈부터 벌고 사랑은 나중에, 그런 거 아니다.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된다. 그러나 오늘 사랑하지 않으면 내일이 불행해진다. 내게 주어진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도대체 남한테 할 수 있는 얘기가 뭐가 있을까? 냉소와 야유 그리고 질시, 이딴 거 필요 없다. 오늘 감사하고, 오늘 사랑하고, 오늘 존경하면 된다.
사랑과 돈, 미룰 것은 돈이지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뭐 먹고 살아? 이 질문은 딱 국민소득 5천 달러짜리 질문이다. 지금 사랑해도 밥 먹고 사는 걱정 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경제성장도 하고 경제 활동도 하는 거다. 적당히 해도 먹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것이 경제다. 물론 아직 우리가 그 단계는 아니다. 그렇지만 정서적으로는 너무 만 달러 이전 시대의 것이 형성되어 있다.
바쁘지 않기로 결정을 한 다음, 나쁜 점은 내가 좀 야박해졌다는 점이다. 안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혜윤과 하던 라디오 방송을 그만해야겠다고 말하는 순간, 아마 평생 기억날 것 같다. 우정과 사랑과, 하여간 많은 것을 같이 했고 또 하고 싶은 멋진 친구에게, 더는 못할 것 같다, 이 얘기가 참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혜윤처럼 똑똑하고 잘 난 사람과 동료가 되는 일, 인생에 그렇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그 순간이 참 어려웠다.
그 다음은 쉬워졌다. 정혜윤과도 내가 안 하는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저 아세요? 덜 가슴이 아프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것은? 마음의 여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궁극의 상태에 드디어 도달하였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나는 이 상태에 꼭 와보고 싶었다. 이 궁극의 상태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절대로 하고 싶은 것을 만들지 않고, 되고 싶은 것도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이 궁극의 상태에서 모든 것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야구는 좀 이겼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진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없어야, 내 주변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기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아무 일도 안 해도 괜찮다. 옆 사람들이 충분히 성과를 내면, 나도 좀 묻어가고, 가끔은 좀 줏어 먹기도 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넉넉해지면, 그게 나에게도 편안한 일 아니겠나 싶다. 50이 넘으면, 꼭 자기만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상황이 된다. 내가 바쁘지 않게 되니까,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물론 애들 보지 않는 시간이라야 전화도 받을 수 있다. 그냥, 이렇게 살짝 묻어가면서 살아도 나쁘지 않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이런 개떡 같은 소리에서 벗어나는데 50년이 걸린 것 같다. 그냥 사는 거다. 그리고 기왕 사는 거, 바쁘지 않게 사는 게 남는 거다. 그러면 억울하지 않냐고 누가 물어봤다. 억울한 것도 바쁜 사람들이나 갖는 감정이다. 바쁘지 않게 지내면 그것 자체로 보상이다. 억울하고 말 것도 없다. 그러면 경쟁에서 지지 않을까? 좀 지면 어때. 넌 억울하지 않아. 괜찮아유, 잘 놀고 있으니께.
바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다음에, 통장 잔고가 꽤 늘었다. 폼은 나는데, 쓸 데 없는 일은 안한다. 폼은 안나도 의미 있는 일은 한다. 그래도 시간 너무 많이 쓰면 못한다. 그리고 펑펑 남는 시간에 아이들 돌보고, 사진 찍고, 산책 다니고, 근교로 여행 다닌다. 그리고 드는 생각, 이런 생각들이 나에게 먹고 사는데 불편하지 않은 돈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워낙 조금 먹기는 한다.
‘모닝을 타는 데 불편함이 없는 삶’, 이게 결국 내가 정리한 나에게 가장 최적화된 삶이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출발점이, 언젠가 많은 사람이 자기를 찾아줄 원로가 되지 않는 것, 거기에서부터 나왔다. 나는 존경받으면서 행사 맨 앞줄에 앉는 사람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인생 향로를 크게 한 번 틀었다. 초청받는 인생보다 초청받지 않는 인생이 더 행복하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은 인생, 이것도 별로다. 올 필요도 없고, 갈 필요도 없고, 이게 궁극의 삶이다. 최근의 유명한 가문의 종친들 좀 볼 일이 있었는데, 이 할배들, 오지 말래도 여기저기 엄청 싸돌아다닌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패악질이다. 이거 좀 아니다 싶다.
살살 살고, 바쁘지 않은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21세기적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