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에세이, 열 일곱번째 글 끝냈다. '기다려도 행복은 오지 않는다'고 제목을 달았다.

"사랑에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행복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에 목숨을 걸면, 생명은 늘어난다."

이 글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내가 쓰지 않는 오글거리는 방식으로 쓰는 게 원래의 목표였다. 역시 오글거린다. 그걸 참는 게 행복이다. 다음 글은, '참으면 암 된다 - 적당주의와 뻔뻐니즘'이라는 제목을 달려고 한다. 이 글은 마지막 문장이 먼저 생각났던 글이다. "마지막 순간에, 나를 믿는 수밖에 없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뻔뻐니즘이다. 뭔가 만드는 일, 마지막에 나를 믿지 않으면 완성을 할 수가 없다. 물론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믿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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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열 여섯번째 글 끝냈다. 책의 제목이자, 마지막 장인 4장의 제목이자, 이 글의 제목은 '달달한 50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지었다. 권총 자살한 프랑스 총리에 대한 얘기로 글을 시작했다. 확 무겁게 만들고, 그걸 받아서 몇 번을 꺾었다. 50이라는 나이가 그렇다. 친구의 죽음이나 총리의 권총 자살이나, 그냥 삶의 한부분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너, 그러다 진짜 뒤진다... 이 얘기도 그냥 부드럽게 할 수 있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하는 말에 독설이라도 섞여 있을까 봐, 3살 아기에게 생선 가시 발라주듯이 꼼꼼하게 발라내기 시작했다. 뒤돌아서면서 "근데" 하면서 야박하게 한 마디 하는 거, 그 버릇이 제일 고치기 어려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 생각하면서 그냥 씩씩하게 전진하는 것, 한 마디 더 하는 버릇을 겨우겨우 고쳐가는 중이다. 하나마나한 얘기를 꼭 하고야 마는 우리들의 개수작, 이제는 그 개수작과 결별할 시간이다. 아직도 우리는 50년이나 살아야 한다. 이제는 좀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달달한 50대'가 우리들의 새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개저씨, 꼰데, 386. 86그룹, 다 '알흠답지' 못한 이름들이다. 우리, 같이 좀 살자. 개수작, 사요나라, 아디오스,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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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마지막 장인 4장의 글 리스트를 확정했다. 포맷상, 다섯 개씩 넣었는데, 여기는 여섯 개. 줄이고 줄이는데, 너무 아까워서 도저히 빼지 못하는 것들만 살아남았다. 여섯 번째 글은, 당연히 김구 선생 패로디다. 제목만 패로디하고, 문체까지 패로디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섯 개는 먼저 쓰고, 여섯 번째는 김구 선생 자서전을 다시 한 번 꼼꼼이 보고 쓸 생각이다.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느낌이 없다.

4번에 있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남만 가득한 곳으로", 요 얘기는 아주 어려운 얘기가 나올 것 같다. 나는 가능한 한 쉽게 할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노마디즘 얘기를 한 번 할까 싶다.

글 숫자는 하나 늘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좀 짧게 끊어가는 식으로 하려고 한다. 형식 실험도 할 수 있는 한, 좀 해보고...

1. 달달한 50대, 우리들의 새 이름
2. 행복에 복리 이자를 붙이는 법 
3. 참으면 암 된다 - 적당주의와 뻔뻔주의
4.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남만 가득한 곳으로
5. 버킷 리스트는 바께쓰에
6.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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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둘째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 중이다. 어쨌든 둘째도 어린이집을 옮기기는 하나보다. 30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 두 군데를 아침 저녁으로 뛰면서, 진짜로 캑캑. 게다가 옮긴 큰 애는 매일 같이 울어서, 오후 2시에 데리고 왔다. 이 나이에 뭔 짓인가 싶었다. 이제 요번 달로 이 지랄도 끝나나보다. 사실, 멍하다. 아침에 아내 지하철역, 그리고 순서대로 돌아서 두 군데 어린이집. 하루는 정말 일어나기 싫었는데, 그래도 5분만에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지난 주에 보니까 입안이 헐었다.

요즘 오는 전화는 잘 받는다. 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다들 노니까 좋냐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정주부들이 이런 전화 받고 심통이 났을까, 상상이 간다. 바로 앞에 있었으면 소주병으로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성숙한 50대. 그려, 잘 지내.

이 생활도 다음 주로 쫑이다. 어린이집 두 군데를 도는 건 이젠 안 해도 된다. 한 군데만. 둘째가 다시 적응하는 기간이 있어서 한동안 오전에 다시 데리고 오는 지옥의 일정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은 금방 간다. 이젠 곧 봄이다.

연애도 별로 한 적이 없어서 손 잡고 어디 걸어가고, 그런 기억도 거의 없다. 애들 손 잡고 엄청나게 빨빨거리고 다닌다. 둘째 손 잡으면 큰 애가 자기도 손 잡아 달란다. 아빠 가방 들었잖아. 그래도...

어저께, 아내가 큰 애 하원 시켜준다는 얘기를 했었나보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갔는데, 날 보더니 운다. 엄마 안 와? 그래, 그럼 더 있다 와. 핑... 나는 빛의 속도로 다시 돌아나서려는데, 큰 애가 웃는다. 집에 가자... 하여간 일곱 살이긴 하지만, 대가리 핑핑 돈다. 눈치밥도 많이 늘었다.

이렇게 한 달을 지내니까, 예전에는 없던 생각 하나가 생겼다.

내가 살아있구나...

살아있기는 한가보다, 고통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렇게 또 하나의 겨울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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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는 이제 거의 마무리 분위기다. 일단 공개는 여기까지로. 나도 비장의 꽁수 하나는 남겨둬야. 4장 제목은 '달달한 50대'로 할 생각이고, 책 전체 제목도 '달달한 50대'. 삶의 기조를 명랑으로 정한 뒤, 거의 20년만에 달달함으로 바꾸는 거다. 30대 때에는 나만 명랑해도 되는데, 그러기에는 50대에는 조금 더 무거움이 있는 것 같다. 자 같이 손잡고 달달.

원래 4장 제목은 '개수작과의 결별'로 잡았는데, 이런 내가 개수작하고 결별을 못하겠는. 술도 팍 끊지는 못하겠고, 조금씩은 마셔야겠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것도 암이 된다.

옛날부터 나는 근엄한 거, 확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별 것도 없는데, 왜들 글케 폼들은 잡는지. 막상 내가 폼 잡을 나이가 되니까, 야야, 난 이거 못하겠다...

몇 년 전에 삶이 너무너무 무료해서, 국방대학원에 진짜로 가볼까 생각을 했었다. 예전에 재밌게 보던 해전사 전공으로. 물어보니까, 내가 국방대학원 가면 경력상, 안 받아줄 수는 없는데, 군인 아저씨들 충격받아서 곤란하다는. 그래도 악착같이, 좀 받아주세요, 갈까 싶었는데... 얼래, 갑자기 이전을 가버린다나? 논산인가... 집 근처라서, 악착같이 국방대학원 가려고 했었다. 결단코, 국방대학원 나 때문에 갑자기 이전 결정 난 것은 아니다. 아니, 장군님들 추천서 받아온다니까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군인 아우들 거느리고 국방대학원 모임 회장한 양반이 있었다.

국방대학원의 면학 분위기를 좀 명랑하게 바꿔보고 싶었는데, 후루룩, 저희 이사가요, 미안.

하여간 나머지 글들은, 이를 악물고 명랑 분위기로. 다 필요 없다, 웃는 게 남는 거다. 못 웃기면 내가 여기서 칵 디져버릴랑께...

웃기기는 어렵지만, 명랑분위기로 최대한 가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확 달려가기 전에, 오늘 저녁은 며칠 참았으니 술부터 한 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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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태학의 기본은 머리 수 세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체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 흔히 프리데이터-프레이 모델이라고 부르는 가장 대표적인 모델인 로테카-볼태라 모델인데, 정말로 아름다운 곡선들이 나온다. 이 세계에서는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얼마나 시스템이 오래 갈 것인가, 그것만이 문제다. 동물 생태계에는 노화 현상은 없고, 보통은 사이즈에 대한 얘기만 한다. 가장 쉽게 동물 생태계의 사이즈를 보는 것은 최상위 포식자의 존재 유무다. 호랑이나 곰이 최상위 포식자로 존재하는 시스템의 크기가 가장 크다. 늑대가 최상위인 곳은 그보다 사이즈가 작다. 멧돼지가 최고의 포식자인 생태계는, 정말로 아주 아주 작은 스몰 사이즈다. 고라니인 경우는? 포식자 없는 동물 생태계는 보존 지역일 뿐이다. 그렇다고 곰을 방사한다는 발상은, 이건 좀 기형적이다. 곰이 산다고 해서 동물 생태계 사이즈가 더 커지지는 않는다.

 

시스템의 변화하는 것과 개체의 변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개별적 존재는 공룡처럼 계속 자라는 것 즉 정비례 곡선인 경우와 뱀 같은 파충류처럼 계단식 성장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죽을 때까지 자란다. 그리고 포유류는 로지스틱 함수, 역으로 된 S자 곡선에 따라 일정 수준이 지나면 성장을 멈춘다. 경제가 포유류의 로지스틱처럼 생겼느냐 아니면 공룡처럼 순증형이냐, 오래 된 논쟁이다.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는 로지스틱처럼 생겼다고 썼다. 물론 <국부론>의 이 부분까지 읽는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몇 명 없다. 자연에 존재하는 많은 유기체들의 경제학자들이 쿠츠네츠 함수라고 부르는 역 U자형, 엎어높은 컴()처럼 생긴 모습을 갖는다. 열심히 올라가다가 피크점에 달하면 내려온다. 이런 피크점이 한 번 더 있으면 쌍봉형 모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많은 자연계의 현상은 피크점에 도달하면 내려오게 된다.

 

인간의 삶이 꼭 피크점이 하나인 것만은 아니다. 2 전성기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다. 프로야구 투수들은 나이 먹어서 속도를 포기하고 제구력이나 변화구 구종 추가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전성기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야구 선수는 되는데, 사람은 안 돼? 물론 된다. 사람의 삶은 자연 현상보다는 복잡할 수 있다. 어쩌면 인생, 그 자체가 생태학이나 경제학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학문에서는 그런 개인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은 무시한다. 특출난 개인이 있거나 특별한 개인이 있더라도 시스템의 운명에 큰 차이가 있거나 변화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한 인생을 제대로 관찰하는 데 연구자 한 명의 인생만으로도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은 줄 알아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한 소설이 경제학 보다 더 낫다는 말에는 동의!

 

인간을 변화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보고, 피크점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어떻게 보일까? 20대의 특징은 아름다움일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드문 경우라고 알고 있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키가 자랐다. 꽤 자랐다. 심지어는 유학 가서도 약간 자랐다. 내가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다면, 그 시절일 것이다. 20대에 성장과 노화가 엇갈리는 선이 온다. 더 이상 자라지는 않지만 아직 늙은 것은 아닌, 그 선이 교차하는 순간, 모든 사람은 아찔하도록 아름답다. 그 순간의 생각도 예리할 정도로 아름답다. 성장과 노화의 교차선, 모든 감각이 최고조에 달하고, 그 불균형이 극도로 달했을 때, 사람은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MB 20대 얼굴 사진 검색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도 20대에는 아름다웠을까? 가끔 현대건설 대표로 행사에 참석해서 순실이 얼굴과 교차로 나온 MB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 순간의 그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30대 한국인은 머리가 피크에 도달하는 것 같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노화하기 시작했어도 머리 만큼은 더 발달하는 것 같다. 몸이 위축되기 시작하니까, 모든 에너지를 뇌로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살아야겠다! 심지어 머리카락을 새로 만들 힘까지 뇌로 보내는 것 같다. 탈모가 시작된다. 차라리 머리를 좀 덜 쓰고, 더 많은 에너지를 모근으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수의근이 있는 것처럼, 자꾸 머리카락이 머리를 위해서 희생한다. 30, 내면보다는 외면을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여긴다. 만약 우리가 그 나이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어떨까? 소용 없는 회상이다. 20대에는 술을 마시면 토한다. 30대에는 이제 토하는 일도 힘이 없어서 못한다. 술 먹고 토하는 것, 가장 아름다운 나이인 20대의 특권이다. 어지간히 먹어서는, 육체가 배출도 못하고, 그냥 버텨, 나도 힘들어... 위장과 식도도 더 이상 토악질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그 나이가 대충 30대다. 위장이 남은 에너지를 전부 머리로 보낸다. , 같이 좀 살자, 술 좀 그만 먹어, 생각 좀 해라. 몸의 다른 부위가 에너지를 더 많이 보내면 보낼수록, 번민이 많아진 머리는 자꾸 술집으로 몸을 이끈다. 그렇게 먹을 수 없는데도 30대가 죽어라고 술을 먹는 것, 머리가 피크에 달하는 시기라서 그렇다. 천재들이 보통 33세에 죽는다. 예수도 그랬고, 모차르트도 그랬다. 하다못해 우리들에게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주고 색동회까지 만들어주신 소파 방정환도 33세에 죽었다. 진짜 천재가 모든 것을 이루고 떠나는 나이, 그게 30대다. 40, 안스럽지만 이제 천재들은 이미 사라졌고, 그냥 남은 사람들끼리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꾸려가는 것 아닌가?

 

30이 지나도 머리가 계속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그건 머리가 아주 나쁘거나, 한국 사람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술을 마시는 한국인의 머리는 30대가 피크다. 그리고 점점 나빠진다. 그걸 감안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걸 염두에 두면서 작전을 짜야 한다. 나이 먹으면 이해력이 좋아진다느니, 지혜가 늘어난다느니, 깨달음이 생겼다느니, 그런 얘기들을 한다. 원래 늙으면 그렇게 말이 맞아지는 법이다. 두뇌의 피크치는 30대에 지난다. 싫어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대머리가 된다. 결혼하기 전에 대머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남자들은 영혼도 팔 수 있다. 그리고 탈모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이미 진행된 탈모에 자기 마음을 맞추면서 살아야 한다. 아니면 정말 괜찮은 가발을 쓰고 정서를 거기에 맞추거나. 머리도 마찬가지다. 점점 안 좋아지는 머리에 맞추면서 사는 거지, 자기만 혼자서 머리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인생만 고달파진다.

 

40에는 무엇이 피크에 달할까? 지표상으로는 한국 직장인의 연봉이 최고치에 달한다. 50대 평균 보다는 40대 평균치가 높다. 그렇지만 이건 경제적인 것이다. 신체적으로 40대가 최고치에 달하는 것은 밸런스일 것 같다. 몸도 적당히 노화되기 시작했고, 머리도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퇴화의 시작이지, 퇴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인간의 삶이 가장 균형적이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나이일 것이다. 최고의 밸런스를 가질 나이다.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 호르몬이 분비에 변화가 오게 된다. 남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여성 호르몬의 분비로 예상치 못했던 마음의 동요를 겪는다. 여성들도 여성 호르몬의 감소로 밸러스가 갑자기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인간의 육체는 최고의 밸런스를 갖는다. 지덕체, 문무겸비, 외유내강, 혼연일체, 이렇게 전통적으로 좋다고 하는 덕목들이 대부분 밸런스에 관한 얘기다. 40대에 인간이라는 동물은 최적의 밸런스를 갖는다. 대통령하기 딱 좋은 나이다. 캐네디가 43살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 시절 미국, 정말 복 받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40대 총리는 여전히 계속 등장한다.

 

, 그렇다면 50대에는 무엇이 최고조에 달할까? 육체적으로만 보면, 흰머리가 최고조에 달한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있던 치아는 이미 더 이상 버팉 수 없어서 몇 개는 이별했다. , 다리, 근육, 연골, 관절,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을 감사하면서 고맙게 쓸 나이다. 아직 치매는 본격 오지 않았더라도, 부분적인 알콜성 치매는 다들 조금씩 가지고 있다. 머리를 얘기하기에는 이제는 진짜 쑥스러운 나이다. 두뇌회전 보다는 치매가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봐줄만한 것은 흰 머리다. 그 나이에도 인격수련이 덜 되고, 20대 때 했던 것처럼 민감하게 여기저기 참견질 하면 자기 성질에 자기 머리가 못 견디고, 아디오스! 60대에 흰머리라도 남아있던 시절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경제적 지표상으로는 50대가 자산상으로는 피크치에 달한다. 상대적으로 재산은 좀 많다. 그리고 아직 빚이 좀 적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는다. 한국의 60대의 경제 지표는 소득이 급격히 느는 대신에 부채가 빠른 속도로 늘어난다. 일본의 60대와는 다르다. 물론 지금 60대가 그렇다는 얘기고, 지금의 50대가 10년 후일 때 경제지표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 이론적으로만 보장이 없다는 얘기다. 지금 50대 하는 것만 외형적으로 봐서는, 10년 후에 이 추세가 더 나빠지면 나빠지지,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지나간 20대를 그리워하고, 오지 않을 30대를 그리워할 것인가? 흰머리라도 남았던 이 시기를 그래도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회상하면서 앞으로 딱 살았던 만큼, 50년을 더 살게 된다. 할렐루야, 아멘!

 

2.

학부 1학년 때, 우리 친구들은 경제학이라는 이 이상한 학문에 대해서 푸념이 많았다. 너무 평균치가 많고,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결론을 답이라고 써야 학점이 나왔다. 물론 완전 보수 쪽 선생님이라서 자기 수 틀리면 D학점과 F학점을 남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꼭 그런 거 아니라도, 직관적이지도 않고, 경험적 지식과는 다른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선형대수나 수리통계학 같은 수학 많이 들어간 과목에서 나오는 증명식 같은 게 예술적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수학 증명식이지만, 우린 대부분 일단 외워놓고 언젠가 이해 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버텼다. 사회학과나 정외과 친구들은 무슨 수학을 그렇게 많이 하냐고 놀려댔다. 그 시절에는 수학 많이 나오는 과목이 제일 좋았다. 그냥 풀면 점수 나오는 거라서, "저는 좌파 아니예요", 이렇게 군사정부 시절에 서술식 답안에 사상 고백을 할 일이 없었다. 생각하는 대로 쓰라고 해놓고서는 생각하는 대로 쓰면 너무 점수를 안 줬다.

 

한 번은 점수가 너무 이상해서 교수를 찾아갔다. 주섬주섬, 답안지를 꺼내시더니, 나에게 답안지를 보여주셨다. 채점하다 말고 빨간펜으로 죽 그어진 긴 줄이 보였다. 그나마 열심히 써서 이 점수라도 준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가 나를 미워한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을 미워한 것일 뿐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회개하라는 얘기를 하셨다. 날 사랑해서 이 점수를 주는 것이라는 말도 하셨고, 교회에 같이 가자고도 하셨다. 대학원에 꼭 들어오라는 말도 하셨다. 당신이 나를 빛으로 인도해준다고 하셨다. 점수는 최악이었지만, 그가 나를 미워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이라는 정도는 나도 이해했다. 아주 오랜 세월에 지난 후, 학회 끝나고 다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옛날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힐튼 호텔 로비에서 위스키 한 병을 사주셨다. 사람의 망각은 좋은 것이다. 나는 그 위스키를 마시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학교 정문으로 내려오면서 유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날까지 모르고 있었다. , 내가 미션 스쿨에 다니고 있었지. 아멘! 주여 함께 하소서.

 

사람들은 자신은 평균치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극값 혹은 코너 솔류션 같은 것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건 극히 예외적이다. 그리고 육체의 연령은, 생각보다 과학적이다. 정신의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잠시간의 시간에 가능한 것이다. 뚱뚱해져 버린 프로야구 감독들, 그들의 정신력이 나만 못하겠는가? 4시간 넘게도 진행되는 프로야구를 월요일 빼고 매일매일 지켜보는 사람들, 정신력 갑이다. 우리 중에 프로야구 감독보다 정신력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별로 없다고 본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하강 곡선이 예전에 지났고, 머리는 그나마 치매 안 걸린 것을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나이가 50이다. 나는 다르다? 다르지 않다. 전에 살았던 수많은 한국의 50대들이 그런 마음으로 살면서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집단이 되었다. 평균치보다 아래인 것을 걱정해야지, 평균치보다 위인 것을 자랑할 나이는 아니다.

 

그렇게 약하게 마음을 먹으면 정신적으로 확 늘어버릴 것 같다는 사람을 보았다. 그 정도면 병이다. 탐욕, 욕심, 집착, 성욕, 많은 경우 이런 것들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서 육체의 피크가 지난 다음에도 계속 커질 수 있다. 좋은 것은 점점 사라지고, 나쁜 것은 점점 늘어나는 것, 우리가 MB와 함께 이미 한 번 보지 않았는가? 끝까지 20만원 밖에 없다고 하는 전두환과 함께 본 것 아닌가? 사람, 다 거기서 거기다. 이걸 받아들여야, 지금부터 15년 정도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경제생활을 더 할 수 있게 된다.

 

3.

영화 <라디오 스타(2006)>는 흥행은 별로였지만, 최고 인기 예능방송과 제목 그대로 라디오 방송이라는 파생 상품을 만든 영화다. 한물 간 가수왕 박중훈과 그보다 더 한물 간 매니저 안성기의 얘기다. 영화 개봉 전 시사회 때 직업 매니저들을 많이 초청했다. 그들이 이 영화를 보고 폭포와 같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 들었다. 실제 영화는 지역색 강한 얘기들을 만들자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지만, 실제 의도는 뒤에 숨어서 누군가를 돕는 매니저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 초입에 결국 미사리 카페까지 몰린 박중훈이 결국 참지 못하고 난리를 친다. 카페 주인은 좀 화난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많이 화가 난다. 예전의 동료였지만, 가수 최곤을 결국 경찰서 유치장까지 집어넣는다. 그래서 돈을 물어주고 나와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다. 이 때 카페 주인이 하는 말이 있다.

 

"한 물 갔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있어야지, 이거야 원."

 

성공한 사람들은 지금은 100세 시대라서, 나이도 옛날 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그들 식으로 계산하면 아마 반 정도 나누면 될 것 같다. 40이면 옛날 20, 50이면 예전 25, 그렇다는 거다.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세종은 요즘 나이 90세에 한글을 창제하시고... 그런 식이면 이순신 장군은 104세에 명량해전을 이끄시고, 이렇다는 얘기다. 심심해서 하는 얘기지만, 하여간 전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그리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내가 50이니까 옛날 25세에 해당한다는 얘기인데, 정말로 꽃처럼 아름답던 나의 25세와 지금의 흰 머리 난 나를 어디를 놓고 비교한단 말인가! 내가 지금 아무리 늙고 한물갔다고 해도, 꽃처럼 아름답던 나의 젊은 시절에 대한 모욕이다. 50 50, 나의 나이는 호모 사피엔스 표준형이다. 경제 시스템이 변한다고 해서 인간의 육체도 변하지 않는다. 조금 더 처 먹어서 더 윤택하고, 더 부유하고 그래서 성인병에 더 많이 노출될 뿐이다.

 

이런 모습은 국회에 가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만 45세 이하를 청년이라고 규정한다. 그 기준이라면, 내가 <88만원 세대>를 청년, 그야말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썼다는 말이다. 그 때 내가 30대 후반이었지만, 우리 경제의 문제라고 생각은 했지, 바로 내 문제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여기는 좀 낫다.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당대표 되면서 청년 당원의 기준으로 50세로 올렸다. 오매나야. 내가 지금 자유한국당으로 가면 바로 청년이 된다. 한국의 자유로운 보수들의 세계에서, '마음만 청춘'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청년이 된다. 그런 정도의 시선이면, 43세에 대통령을 했던 미국의 케네디는 청년 정도가 아니라 보이스카우트 수준이다. 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농담 삼아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로 정치 특히 보수 쪽 정치에서 현실의 기준이 이렇다. 한참 농업경제학 공부할 때 농촌 지역에 자주 갔었다. 농촌 지역에 청년회장이 50, 55, 이러는 것은 본 적이 있다. 자기들이 그 동네에서 가장 젊다는 거다. 다 웃었다. 농촌의 현실이 그렇기는 한데, 지금 국회의 현실도 그렇다. 대선에서 졌으면 좀 부드러워져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은 청년 기준을 그나마 50세로 올렸다. 영 목이 뻣뻣하다. 그나마 청년당원을 35세로 규정한 정의당이 좀 사회의 기준과 비슷하다.

기대수명과 고령화 추세만 보면 자신이 상대적으로 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진다. 마음은 알겠지만, 경제적 추세는 그와는 반대다. 이미 직장인 기준으로 40대의 평균 연봉이 50대보다 많다. 법적 정년은 60세까지 점차적으로 올라가겠지만, 실질적인 정년은 구조조정과 감원 등으로 더 내려올 것이다. 경제적 지위가 내려가면 곧이어 사회적 지위도 내려간다. 힘은 빠지지만 나이만 먹는, 그 현상이 점점 더 밑으로 내려온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도 된다. 딱 봐도 자기는 장관은 한 번 할 것 같은 사람도 다르게 생각해도 된다. 이런 데는 작동 방식 자체가 좀 다르다.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면, 50대가 갖는 최대의 덕목은 '찌그러지는 맛'이다. 한 물 갔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능을 좀 더 활용할 수 있다. 좀 찌그러면 10, 제대로 찌그러지면 15년은 자신이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더 일할 수 있다. 제도가 거기에 맞춰져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후배들에게 찌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직종에서 단순 기능직을 하게 된다. 거기서는 맘대로 해도 된다. 어차피 돈을 조금 준다. 그렇지만 그런 거 다 싫다고 창업하는 것 특히 프랜차이즈 창업은 진짜 아니다. 그냥 퇴직금과 모아놓은 돈을 가지고 비실비실, 시름시름 사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확률, 99.99%이다.

 

20대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행보나 보들래르처럼 아름다운 시간이다. 그들이 지금의 50대와 일하고 싶을까? 30대는 머리가 핑핑 도는 나이이다. 그들에게 머리 자랑하는 50대는, 병신이다. 40대는 마지막으로 밸런스가 딱 맞는 나이다.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 경제의 야전사령관들은 그들이다. 그래서 아직 우리가 망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람들과 동료로, 수평으로 같이 일하는 것만이 50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는 길이다. 최고의 경쟁력은 찌그러지는 맛이다. 어차피 우리는 이미 아니면 수년 내에 한 번쯤 한 물 간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거나 아무 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실력은 자신이 찌그러질 때, 비로소 사회화되고 시장 안에서 상품화된다. 40대 이하, 전부 일하기 싫다는 50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10년 조금 욕심 내면 15년 더 현역으로 일하고 싶다. 큰 돈 바라지도 않는다. 한 달에 100만원 이상, 이거면 만족한다. 내가 찌그러지기만 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는데, 내가 머리에 권총 맞았다고 큰 소리 치고, 자존심을 내세우겠는가? 당연히 나는 한 물 갔으니까, 찌그러진 맛이 나는 삶을 살도록 나를 디자인했다. 그래서 요즘 나와 일하는 에디터들의 만족도가 조금은 높아졌고, 같이 일하고 싶은 저자가 되었다. 나랑 고만고만한데 아직 덜 찌끄러진 저자들이 있다. 20, 30대 에디터들이 기피한다. 요즘 청년들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어차피 그 돈 모아서 집 살 것도 아니니까, 싫으면 그만이다. 대표나 사장이 달래도, 싫으면 싫은 거다. 나도 그들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시절, 머리 팽팽 잘 돌아가는 시절, 왜 한 물 간 '꼰대들' 비위 맞추면서 인생을 낭비할 것인가? 나라도 그들 입장이면 그렇게 할 것이다. 자존심 세우고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것과 찌그러진 맛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며 그래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뭐가 낫겠는가? 당연히 나는 찌그러진다.

 

50대가 가장 잘하는 것, 그건 찌그러지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화는 안 날까? 물론 나도 가끔은 화가 난다. 아직 덜 찌그러져서 그런 것이다. 나는 반성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본다. 7, 5, 두 아이가 편하게 자는 모습을 보면 찌그러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 내가 죄가 많아서 남들 아이 다 낳을 때 팽팽 놀다가, 이제야 애를 키우니 좀 더 찌그러져야겠지...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 속에서 열불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이렇게 혼자 속삭인다.

 

그래 참, 지식을 개똥으로 알고, 문화를 자판기에 돈 넣으면 나오는 코카 콜라로 아는 나라에 살지. 문화강국을 얘기한 김구 선생은 총 맞아 돌아가셨고...

 

이렇게 생각하고, 소주 몇 잔 털어 마시면 다음 날 조금 더 부드럽게 찌그러질 수 있다.

 

50대의 찌그러지는 맛, 이것은 생태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최적의 해법이다. 아름다운 20대는 찌그러지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날 것의 맛이 나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잘 돌아간다. 머리 잘 돌아가는 30대가 벌써 찌그러지면 안 된다. 기술강국, 너무 멀어진다. 밸런스의 40, 그들이 찌그러지면 한국 경제의 기초 밸런스가 무너진다. 과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너무 슬프거나 너무 노하지도 않는, 그 밸런스, 그게 현장 사령관인 한국 40대의 강점이다. 그들도 찌그러지면 안 된다. 50, 이제는 찌그러지는 맛 외에 다른 걸 하면 안 된다. 좀 찌그러져서, "여기서 저 그냥 이 일 하고 있을께요", 그런 게 서로를 위해서 좋다.

 

물론 부모가 손자에게 상가를 물려줄 수 있거나, 당장이라도 건물 몇 채를 물려줄 수 있다면 찌그러지지 않아도 좋다. 원래 개망나니는 50이 되어도 개망나니다. 그저, 남 때리고 다니지나 않는 것으로 만족하며, 국가 부가가치세와 재산세 납세에 도움을 주면 그만이다. 안 찌그러져도 된다. 그렇지만 난 그런 거 없다. 기꺼이 찌그러지고, 20대와 30, 청년들하고 기꺼이 같이 일을 할 것이다.

 

"선생님, 좀 귀여운 맛이 있어요."

 

정말 잘 찌그러지면 어느 날 술 마시다가 젊은 동료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그날 나는 집에 와서 너무너무 기뻤다. 이제야 내가 좀 마음 속에서부터 제대로 찌그러지고 있구나. 그 때 내가 15년은 더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게, 술을 좀 줄이기 시작했다. 100만원이라도 매달 벌 수 있고, 그걸 15, 내 경제생활은 보너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보다는 돈을 더 많이 벌 때가 많다. 내 가슴 속에 자리잡으려던 암세포가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50대 한국인, 역시 찌그러지는 맛이 진정한 장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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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들은 모이면 맨날 의리를 말한다. 그렇지만 의리 외치는 사람 중에서 정말로 의리 있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대개는 돈과 권력이 있을 때 의리이고, 그런 게 사라지면 의리도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어느덧 나도 박사 22년차가 되었다. 한국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현장들을 지켜보게 되었고, 그 시간도 이제 짧지는 않다.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40~50대 남자들은 보통은 의리가 없고, 그 나이의 여자들은 그보다는 의리가 있다. 한동안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덧 나이가 먹어서 정년이 차서 은퇴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뭔가 한 자리 할 것 같거나, 교수 자리라도 좀 더 챙겨줄 것 같은 은퇴 교수 근처에는 남자 제자들이 여전히 길게 줄을 서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교과서 그대로 삶을 살았던, 우리 말 그대로 '훌륭하신 스승님'이 은퇴한 뒤에 주로 인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여자 제자들이다. 의리? 남자들의 의리는 모르겠고, 여자들의 애틋함은 알겠다. 정치계나 언론계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는 "우리 선생님이 측은해서", 여전히 스승의 날 찾아가는 여자 제자들이 마음 속에 간직한 애틋함, 그것만은 실체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은퇴한 후 외롭게 보내는 교수들이 번거로운 일들을 부탁하기 위해서 나한테 많이 연락들을 하신다. 물론 나는 심통 난다. 아니 자기 제자들이 수 십 트럭은 될 사람이 애 보느라고 정신 없는 나한테 부탁을 하신담? 정부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소리 소문 없이 딱 그 부탁한 일만 처리해주고, 아무 댓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조금 소문이 난 모양이다. 별 건 아닌 부탁들이다. 괜찮은 출판사를 소개해달라거나, 신문에 글을 쓰고 싶은데 좀 알아봐 달라거나, 뭐 그런 정도 수준이다. 좀 귀찮은 정도가 국회의원한테 얘기해달라고 하거나, 그런 정도다. 원래 내가 '아무 거나 상담소 소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별의별 부탁을 다 받으면서 살았다. 내가 성질이 정말로 지랄 맞은 게, 누군가 한테 머리를 숙이거나 내 부탁을 하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한다.

 

그런 영감님들한테 내가 조언하는 게, "선생님, 올 연말에는 망년회를 꼭 한 번 하세요", 그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나는 잊고 지내는데, 한참 후에 고마웠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는 한다.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행사는, 남의 결혼식은 아니고, 지인의 부친이나 모친 장례식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회식도 아니다. 바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하는 망년회다. 송년회, 아니다. 새로운 해를 맞기 위한 송년회는 성공한 사람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영광을 기원하면서 하는 행사다. 잘 나가는 조직이나 방송국에서 하는 '송년의 밤', 이런 데는 안 가도 된다. 그러나 그 해 망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위로하는 망년회, 이건 안 가면 안 된다. 물론 친구들이나 동창들끼리 하는 망년회는 안 가도 된다. 50이 되어서 그거 다 가면, 간질환으로 진짜 망하게 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망년회, 이것도 못하는 조직은 진짜로 몇 년 안에 망한다. 망한 건 망한 거고, 망한 사람들끼리 내년에는 이러지 말자고 서로 위로하는 망년회, 그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끼리는 울분을 서로 위로하며 의리가 생긴다. 그게 내가 아는 진짜 의리다. 그 의리는 오래 간다. 또 다른 한 해를 같이 지나갈 원동력이 된다.

 

지난 10년 동안, 기관장 끼고 보수 쪽 사람들은 연말이면 송년회 했다. 내 주변에는 누군가 잘리고, 지원 끊어져서 하던 일 엎어지기도 하고, 하다 못해 속상해서 병이라도 나서, 늘 연말이면 망년회였다. 그나마 망년회 아니었으면 여러 사람 정신질환으로 치료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린 그렇게 지난 10년을 버텼다.

 

2.

내가 망년회를 챙기기 시작한 것은 팀장 시절부터이다. 직급으로 하면 부장인데, 그 조직에서는 부장 보다는 팀장이 더 높았다. 보직 없는 부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장이 팀장이고 그 밑에 부장이 올 수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팀장이기는 팀장이지만, 나는 나이도 어리고, 외부에서 온 사람이다. 게다가 언제 그만두고 나갈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서, 나랑 잘 지내봐야 평생 자기 승진을 챙겨주지는 못할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다.

 

대부분의 공조직들이 연초에 인사발령이 나기 때문에 연말이면 이제 자기가 그 팀에 남을지 옮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된다. 나는 로비력 같은 게 아예 없었기 때문에 연말이면 잘 나가는 사람들은 승진할 팀으로 옮겨가고, 다른 팀장들이 끌어가지 않은 사람들 즉 남은 사람들 중심으로 나의 팀의 구성되었다. 물론 나도 틈틈이 반칙을 했다. 나는 경력직 공채를 열어서,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중간에 보강했다. 그래서 연말이면 우리 팀은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희한한 팀이 되고는 했다.

 

다른 팀은 그 시절, 모여서 룸살롱에 가기도 했다. 여직원들이 있는데도 여직원은 빼고 남자들끼리 룸살롱에 간다. 나는 룸살롱은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 중간에 타협을 본 것이, 망년회 때에는 가고 싶은 데에 간다는 거였다. 모두가 원하는 타협점으로 의견을 모아진 것이 분당 나이트클럽이었다. 좀 더 나이가 많은 팀은 공무원들이 주로 가는 인덕원에 있는 카바레 같은 곳이었는데, 그래도 그 나이들은 아니라서 분당 나이트 클럽이 결국 모두가 원하는 타협점이 되었다. 나이트클럽은 당연히 법인 카드로 결재하는 사업비를 못 쓴다. 그래서 여름부터 볼펜 사고 샤프심 사라고 나오는 수용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만 원이다. 택시비 같은 것을 조금씩 모으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푼돈 모아서 백만 원을 만들려면 벅차다. 진짜 꼬깃꼬깃, 잔돈푼을 모아서 분당 나이트 클럽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돈들을 모았다. 나중에는 내가 그냥 정부에서 하는 일명 '쿠폰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다.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수준으로 전문가가 정부에 제출하는 소형 보고서를 이렇게 부른다. 돈 세탁된 돈 백만 원, 그렇게 갔던 분당 나이트에서의 일탈, 그게 우리 팀의 망년회였다. 팀장이 총리실에 파견 나가 있던 시절에도 팀은 돌아갔다. 그 해에도 우리는 분당 나이트클럽에 갔다.

 

내가 떠난 후, 그들의 절반은 국제기구로 갔고, 또 다른 절반은 컨설팅 회사로 갔다. 그리고 몇 명은 끝까지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들에게 좋은 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30대 초반의 그 시절은 나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갔고, 나도 더 이상 분당 나이트를 갈 일은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기억이 내가 매년 치루는 망년회에 노스탈지아처럼 남았다. 그 때도 연말이면 망했지만, 지금도 해마다 망한다. 너무 좋은 일들만 만발해서 나도 진짜로 새로 오는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할 순간, 송년회를 치룰 수 있게 되면 나도 망년회를 안 할 것 같다. 아직 그런 날이 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른다.

 

비주류 학자들이 모인 학회에서 우리는 젊었을 때, 동고독락이라는 농담을 많이 했다. 같이 고생을 하지만, 기쁨을 같이 나누기는 어려웠다. 누군가 높은 자리에 갈 때, 즐거움을 같이 나누려고 하면 큰 일 난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했다.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즐거움까지 같이 나누려면 정말로 대형 스캔들에 들어가게 된다. 그 얘기가 나에게는 일종의 DNA처럼 되었다. 슬프고 어려운 일을 같이 나누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같이 나누지는 않으려고 한다. 어쩌면 평생 나는 망년회만 공식행사로 하면서 살 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 좋다. 망했을 때 망년회도 못하는 조직은, 진짜로 망한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멀어지면, 아무 일도 같이 할 수 없다.

 

언젠가 내 건강이 더 나빠져서 정말로 1년에 딱 한 번만 술을 마셔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걸 망년회 때 마실 것이다. 만약에 아예 술을 못 마시게 되면? 그래도 그 해에 망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망년회는 계속 할 것 같다. 내 주변, 누군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

 

3.

바캉스는 불어다. 바캉스 문화를 만든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라서 그렇게 말한다. 아르바이트는 독일어다. 일본과 독일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리랜서는 영어다. 거의 대부분의 모든 나라에서 프리랜서는 그냥 영어를 바로 쓴다. 미국식 특수 관계가 이 단어에 녹아 있다. 말 그대로 프리랜서를 혼자 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에 혼자 일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군다나 혼자 일하는 경우는 없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늘상 인용하는 가상의 인물, 로빈슨 크루우소우가 아니라면 이 사회에서 혼자 일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50이 되면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것을 생각하고, 조직에서 나와 혼자 일하는 것을 전제로 상상을 시작한다. 그건 미국식 노동체계에서 만들어낸 환상이고, 은유적 표현에 대한 오해다.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특수 고용이지, 혼자 일하는 것은 없다. 작업을 혼자 하는 스타일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일하는 것, 그건 착각이다. 자본주의는 돈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 얘기는 시장이 존재하고, 그 시장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각종 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혼자 일하는 경우의 예를 들자면, 돈 많은 사람의 완전한 개인 운전사 정도일 것이다. 개인 비서만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과 연락하고 협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자유롭게 혼자 일한다, 이건 순전히 개인의 착각이다. 아무리 단순한 일이라도 최소 3~4명이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하고, 임시적인 관계라도 한 배를 타게 된다. 큰 조직에 속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상하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고, 정말 지긋지긋한 갑을 관계에서 을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혼자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 일하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큰 조직에서 일했든 작은 조직에서 일했든, 50대에는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한 번쯤은 떠나게 된다. 그리고 점점 더 작은 조직으로 그리고 점점 더 임시조직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지나온 조직의 노스탈지아를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바보다. 지금 자기와 일하는 사람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은, 정말 바보다. 옛 애인의 좋은 점을 매번 말하는 바보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아내에게 첫사랑이 얼마나 멋있는지 얘기하는 것은 바보다. 그런 바보 같은 얘기를, 성공했던 남자들은 종종 한다. 자신이 얼마나 최고의 사람들하고 일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지금 "너희들이 영 못마땅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나온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에 대한 얘기는 동창회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자신과 일하는 동료들에게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면 더 바보다. 일부러 상처 줄 마음이 아니었는데, 지금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에게 왜 상처 줄 얘기를 하는가?

 

매년 나는 망년회를 2~3개 정도 한다. 둘째가 폐렴으로 두 번째 병원에 입원하던 날, 나는 내가 하던 사회적 행위들을 다 접었다. 언제 아이 병원비 크게 내야 할지도 모르는 아빠가 하는 대부분의 사회적 행위는, 다 허례고 허식이다. 명절이면 후배 부부의 사과 과수원에서 지인들에게 보내던 선물을 끊었다. 건너건너서라도 결혼이나 상가 소식 같은 것을 알게 되면, 꼭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얼마씩 보내는 것도 끊었다. 아이 아픈 아빠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 알게 되는 사람들의 생일 선물 같은 것도 일절 끊었다. 유일하게 안 끊은 것이 망년회다. 일은 같이 하는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내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망년회마다 약간씩 표현은 바뀌지만, 꼭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올해 저는 대한민국 최고인 여러분과 같이 일했습니다. 최고들과 같이 일해서 정말로 감사하고 즐거운 한 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얘기를 하려고 나는 매년 망년회를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팀장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가 아니지만, 나랑 일해준 사람들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생각했다. 이건 진심이다. 물론 우리도 다 안다. 대한민국 최고는 지금 근사한 곳에서 송년회하고 있지, 이런 좁은 삼겹살 집에서 소주 잔 기울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늘 대한민국 최고와 일한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아주 많이 망한 해에는 아주 많이들 울었고, 별로 망하지 않은 해에는 몇 명만 그리고 조금만 울었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나꼽살 망년회를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김미화, 선대인 그리고 스탭들이 같이 했다. 그날 미화 누님이 울었다. 나도 많이 울었다. 그렇다. 망한 해에는 서로 모여서 같이 위로하면서 우는 거라도 같이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에 안 망한다.

 

나는 늘 대한민국 최고와 일했다. 그래도 매년 망했다. 이건 누가 봐도, 내가 망해서 그런 거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매 번 그들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민망한 일이다. 1년에 한 번, 나는 그 얘기를 기회를 만든다. 공교롭게도 매년 우리는 망했다. 그래서 당신이 대한민국 최고라는 말을 듣고, 괜히 울음을 흘렸다. 망한 해에 망년회를 하면서 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그는 언젠가 대한민국 최고가 될 거다.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언젠가 같이 울던 그 동료들이 연말이면 송년회에 가고, 시상식에 가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지키면서, 망년회를 가질 것 같다. 어느덧 동고독락이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어려울 때 우리 같이 하고, 즐거울 때에는 정말로 온전히 네가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망해가는 한국 출판계 그리고 더더욱 망한 한국 사회과학, 그 한 구석에 영광이 들 일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언젠가 한국 사회과학에 르네상스가 올 때까지, 나는 계속 망년회를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대한민국 최고와 일을 한다. 돌아보면, 언제나 나는 대한민국 최고들과 일을 했다. 그 중에는 가끔 대한민국 최고 울보와 최고 술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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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데이빗 리카도)

 

1.

역대로 경제학자 중에서 주식으로 큰 돈을 번 사람으로 데이빗 리카도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 두 사람을 꼽는다. 그 외에는? 글쎄, 크게 주식으로 흥한 경제학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90년대에 미국의 전문직 중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직종으로 경제학과 교수가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하는 일은 많고, 집에는 잘 못 들어오는데, 아내들이 기대하는 연봉을 갖다 주지 못하니까 이혼율이 높을 것이라고 해석을 해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직업적으로 다루는 돈의 규모가 가장 큰 사람들이 경제학자지만, 자신의 삶에서 그런 돈을 만지지는 못한다.

 

리카도와 케인즈, 특징이라면 좌파나 우파가 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한국에서 리카도는 자유무역의 이론가이며 FTA 같은 무역질서를 주창한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에서 리카도의 후계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다. 옥중 후기로 유명해진 그람시와 그의 절친이었던 경제학자 스라파, 특히 스라파는 공공연하게 '네오 리카디안'이라는 학파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리카도는 아버지가 유명한 증권 브로커였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워낙 똑똑한 아들이라서 아버지 친구들이 그에게 고급 정보를 주었고,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걸로 유명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대중목욕탕에서 사람들이 모두 벗고 있는 것을 보고, 부자나 아닌 사람이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부로 경제학자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부는 평등한 인간들의 노동에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워렌 버핏이 어느 날 깨달음을 얻어 극좌파 경제학자가 된 것과 같다. 리카도는 좌우, 모두에게 존경 받는다.

 

케인즈는 누가 뭐래도 20세기를 만든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경제학 교과서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샤무엘슨이 마샬의 경제이론에 케인즈의 새로운 사상을 딱 앞뒤로 나누어, 절반 절반 집필하면서 생겨났다. 케인즈 좌파와 케인즈 우파로 나누면, 세상의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포함된다. 행정고시 중 재경고시용 경제학 책만 본 사람은 케인즈 우파이고, 자본론을 본 사람은 케인즈 좌파가 된다. 무조건 아파트 짓고 바다 매립하자는 토건파 경제 공무원, 얄짤 없이 케인즈 우파다. 이 두 군데 다 해당하지 않으면? 시카고 학파이거나 경제학자가 아니다. 21세기 주식투자의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포트폴리오 이론도 케인즈 작품이다. 그리고 그는 주식으로도 돈을 많이 벌었다. 어떻게? 이 어떻게가 요즘 워린 버핏이 투자하는 종목 만큼이나 그 시절에는 최고의 관심사였나 보다. 그는 여덟 살 연하의 러시아 발레리나와 결혼했다. 문학청년이던 젊은 시절부터 케인즈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많이 났는데, 하여간 결혼은 했다. 그 아내가 시키는 대로 주식을 사서 케인즈는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게 경제학자들이 술자리에서 주로 얘기하는 케인즈 주식투자의 비밀이다.

 

위대하시고도 위대하신 리카도와 케인즈도, 싫어하는 아버지 친구들의 정보, 발레리나 부인의 조언, 이런 걸로 주식으로 돈 벌었다. 그런 훌륭하신 아버지가 없거나, 예술적 영감 가득한 눈으로 미국 증시를 한 눈에 꿰뚫어 보는 아내가 없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워렌 버핏이 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워렌 버핏도 첫 투자는 자신의 아버지 회사에 했다.

 

한국의 경제학 교수나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주식으로 험한 꼴 당한 얘기가 책으로 치면 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나는 워낙 일찍 학위도 받았지만 교수 시켜달라고 줄을 안 서서, 할아버지들이 나만 보면 억울하고 분한 사연들을 한 시간씩 털어놓고는 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주식으로 흥한 얘기는? A4 1장 나올까 말까다. 주식 설명을 워낙 잘 해서 연봉 6억씩 받다가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 경제학 박사 얘기는 내가 안다. 그의 희망은 가늘고 길게, 옆으로 옆으로, 그리고 조금씩 밑으로, 버티고 버텨서 월급 더 오래 받는 삶이다. 나도 가끔 자문 받고 도움도 받는 아주 잘 나가는 경제학 박사의 얘기다.

 

그러니 주식 같은 걸로 노년을 보장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머리 속에서 지우는 게 낫다. 한국의 수많은 경제학과 경영학과 교수 중에 정년 전에 그냥 쉬고 싶다고 그만두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보셨는가? 우리나라의 그 수많은 증권사 딜러와 간부 중에, 나는 이 정도면 돈 벌만큼 벌었다고 은퇴하고 하와이에서 따뜻하게 노년을 보내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보셨는가? 300년이 넘는 세계 경제학의 역사에서도 그런 사람 몇 명 안 나왔다. 심지어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담 스미스도 해군으로 유명해진 귀족의 자녀 개인 과외교사도 했다. 귀족의 자녀와 떠난 유럽 마차여행이 너무 따분하고 지겨워서 틈틈이 쓴 책이 바로 경제학을 만든 그 <국부론>이라는 책이다. 그걸로 그가 경제학의 아버지가 된 거고.

 

2.

한국에 직업이 몇 개나 있을까? 만 개가 약간 넘는다. 사회 분석을 위해서 사용하는 전업주부라는 분류는 직업 분류에서는 뺀다. 한국 통계청에서 직업을 나누는 기준은 종사자 천 명이다. 그 분야에 천 명이 되어야 별도 항목이 생기고, 5단계인 세세분류로 잡히기 시작한다. 보통의 세세분류에서는 천 명에서 5천 명 정도가 들어가게 된다. 이 세세분류 기준으로 한국에는 1,231개의 직업 기준이 있다. 참고로 군인은 영관급 이상 장교, 위관급 이상 장교, 부사관, 기타 군인의 4개의 세세기준에 의해서 직업이 규정된다. 그리소 소위, 중위, 대위, 이런 계급이 자신의 최종 직업이 된다. 전문직이 가장 많아서 세세분류로 463, 군인의 100배가 된다. 세세항목 내의 지위나 직급 구분까지 따지면 만 천개 정도 되는데, 소위와 중위가 다른 직업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소위, 중위, 대위를 '위관급 장교'라는 하나의 항목으로 묶으면 그게 바로 세세분류다. 그 정도 선에서 세금 내고 일하는 직업은 대체적으로 한국에서 천 개 내외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건 통계청과 세무서가 하는 일일 뿐이다. 사기꾼을 직업군으로 잡아주지는 않는다. 전문 투기꾼도 직업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심지어 깡패도 그 자체로는 직업이 아니다. 슬프지만, 백수도 직업으로 통계청에서 파악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경우, 세상을 살면서 통계청의 표준직업분류표를 열어보는 경우는 20대에 한 번, 50대에 한 번이다. 집을 구해야 할 때 혹은 방을 구해야 할 때, 환하게 불 켜진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서 한 번씩 탄식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가 살 집은 없지? 나는 그런 탄식을 4번 정도 했던 것 같다. 통계청 분류표를 보면 좀 더 냉정해진다. 직업이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한국에서는 천 개 정도 밖에 안 된다. 영관 위상, 위관 이상, 너무 냉정한 현실이다.

 

1,000개 약간 직업이지만, 경제학자들은 이걸 좀 무식하게 두 개로 나눈다. 마르크스는 자본과 노동으로 나누었지만, 그 후에는 블루칼러와 화이트칼러, 푸른 색 유니폼을 입는 사람과 흰색 와이셔츠를 입는 사람으로 나눈다. 진짜 무식한 분류법이다. 1996 <애인>이라는 드라마에서 유동근이 황신혜와 연애할 때 블루 칼라 톤 와이셔츠를 입었다. 한국에서 남자들이 흰색 와이셔츠를 벗고 최소한 블루 칼라 정도를 입어도 되는 시대는 바로 유동근이 열었다. 나도 그 시절, 유동근 덕분에 툭하면 얼룩이 묻는 흰색 와이셔츠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그 시절 경제학과 사회학 학회마다 뒷풀이 때, 젊은 학자들이 푸른색 와이셔츠 입은 사람은 블루칼라냐, 화이트칼라냐, 노교수들에게 들이댔다는 전설적 후일담이 있다. 약간 맥락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대기업을 비롯한 회사는 관리직과 생산직이라는 아주 간단한 두 개의 기준으로만 직업을 나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업자라고 부른다. 그 중에 특히 불쌍한 사람들을 혀를 차면서 '자영업자'라고 꼭 찍어서 부른다. 유시민이 한 때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불렀던 것은, 슬픈 얘기다. 업자는 물론이고, 자영업자 수준도 안 된다고 자신을 낮추고 낮춰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유시민이 책 쓰던 시절, 우리에게는 '자영업자'라는 사회적 기준도 없었다.

 

블루칼러는 분야나 직급별로 기준이 훨씬 더 세분화된다. 화이트칼러는 하는 일이 훨씬 더 단순하다. 별도의 항목으로 넘어가는 관리자를 제외하면, 화이트칼러가 하는 일은 만드는 일과 평하는 일, 딱 두 가지다. 물론 둘 다 위로 올라가면 사장이 있고, 간부들이 있다. 그렇지만 직업 분류상, 이건 관리자로 별도 분류한다. 국회의원, 장관, 사장, 하다못해 총장이나 유치원 원장까지, 분류 대항목 1, 관리자, Manager 항목으로 별도로 관리된다. 물론 회사에 과면 과장급이 manager라는 직급을 달지만, 국가가 보기에는 하다못해 유치원 원장은 되어야 진짜 관리자다. 그게 국제표준으로도 그렇고 한국 기준으로도 그렇고, 1번 직업들이다. 괜히 고등학생들한테만 일진이라고 뭐라고 그러는 것은 좀 이상하다. 2번은 전문직, 3번은 사무직이다. 2번이든, 3번이든, 혹은 큰 4번의 서비스직이든, 부장급 이상의 관리직은 모두 1번으로 분류된다.

 

내 인생을 놓고 보면, 나는 20대 후반에 2번에 있다가, 30대 초반에 1번으로 갔다. 그리고 2번과 1번을 왔다갔다 하다가 50대가 되었다. 대분류 9분은 단순노무 종사자다. 50쯤 되면 한국표준직업분류표를 놓고 이제 지도놀이를 한 번쯤 할 수 있을 것이다.

 

2부터 8사이에서 20대를 보내고, 40대 중반쯤 1번에 갔거나 못 갔거나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50대 초반에 1번에 갔거나 아직 못 가서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사냥꾼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사회가 우리에게 권하는 일은 9번 항목의 일이다. 60이 되면 이 변화는 더더욱 극명해진다. 1번에 들어간 사람들, 9번에 가기 싫은 사람들, 그렇게 60대의 경제활동이 구성된다. 65, 거의 대부분의 직종에서 이미 은퇴했을 나이, 1번과 9번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고,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통계청은 1번 직업과 9번 직업을 대분류에서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마음은 1번에 있는데, 현실은 9, 취향은 1번인데 실력은 9, 친구들은 1번인데 나만 9, 어떻게 생각을 해도 상관없다. 통계청 표준국가항목분류를 화이트칼러 출신답게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살펴본 50대라면, 아마도 주저 없이 그날 밤 소주 두 병을 마시게 될 것이다.

 

이 사회는 50이 되면 이제는 1번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1번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고, 그 이유로 세상을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87 6월을 다 함께 했던 것이, 1번 직업만이 존중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다.

 

노회찬, 공지영 등이 201년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노회찬은 직업분류표로 1110번 국회의원, 1번 직업군에 속한다. 공지영은 28112번 문학작가, 2번 직업군에 속한다. 유시민은 28119, 그외작가라는 분류번호를 갖는다. 좋든 싫든, 우리가 만든 세상은 <1번만 되고 싶은 더러운 세상>이다. 가끔 2번에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웅들이 들어가 있다. 약간은 거칠게 한국 50대의 직업관을 생각해보자. 남자들은 50이 되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1번 직업을 가지고 싶어한다. 사냥꾼의 세계다. 어차피 처음부터 남자들 틈에 끼어서 1번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 여성들이 2번을 비롯한 틈새 시장에 들어간다. 판사는 2611, 변호사는 2612번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하면 뒤늦게라도 1번이 된다.

 

2년 전부터 두 아이를 열심히 돌보는 나는 표준분류상 95120, 육아 도우미다. 9번 분류이기는 한데, 아내가 나에게 아이 돌보는 월급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그나마 직업 분류상에서도 제외된다. 직업분류표는 요즘 내가 하는 일을 직업적으로는 이렇게 규정한다.

 

ㆍ아이의 우유나 간식을 먹이고, 놀이기구로 유희를 하며 놀아 준다.

ㆍ육아의 의복세척 및 침구손질을 하기도 한다.

 

내 인생은 2번과 1번 사이에 있다가, 지금은 9번에 있다. 10년 후, 내 많은 친구들이 결국은 지금의 나와 같은 9번 항목으로 오게 될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런 것이다. 대항목 9번은 '단순노무 종사자'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나마 영어로는 좀 낫다. Elementary Workers, 초등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 앞의 50대들은 1963년 표준산업분류표가 경제기획원에 의해서 도입된 이후로 1번 직업군을 희망하면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모두가 1번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사회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들은 50살이 되면서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들의 우울증, 할아버지들의 습관적 분노조절장애, 가족들이 모이면 꼭 밥상을 엎고야 마는 무의식 속까지 들어간 분노, 기본적으로는 1번 직업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번 직업군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을까? 그게 아니면 인생의 실패자이고, 루저인 것인가? 내가 50이 되면서 맨 처음 분석한 것이 바로 그 표준직업분류표이다. 그리고 수많은 형님들이 술 마시다가 내 눈을 슬프게 쳐다보는 이유를 약간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곧 1번 직업군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번 직업, 마력이 있다. 놓고 나오기 싫어지는... 애인하고는 헤어져도, 1번 직업군에서는 못 헤어지는 것, 그게 한국의 50대 남자들이다. 병신들이다. 한국에 나와있는 자기계발서의 거의 대부분은 1번 직업군을 갖는 방법에 관한 얘기이거나, 나는 이렇게 1번이 되었다, 그런 얘기들이다. 병신들이 병신들에 관한 얘기를 넋 놓고 보는 형국이다. 근대화 한국, 그렇게 우리는 '1번 증후군'에 걸린 병신들이 되어갔다. 농업의 대분류는 6번이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농민과 어민의 자손들이다. 상당수의 우리 아버지,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우리 할아버지는 6번 직업군에 속해서 20세기를 살았다. 우리 모두는 6번에서 출발한 6번의 자식들이다.

 

9번에 속한 직업분류, 육아 도우미 생활을 메인으로 2년 넘게 하면서 나에게 행복을 준 것은, 수많은 경제관련 책이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빨간색 모닝이었다. 그래도 모닝이라도 타고 아이들 등하원시키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그 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3.

내가 40이 되었을 때, 나도 한 가지 선택을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영화를 진짜로 만드는 일과 영화를 평하는 일, 두 가지 모두 선택할 수 있는 경우였다. 그 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빠르면 5년 길면 10년은 걸려야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예 못할 가능성도 50%는 되는 것 같았다. 영화 평론을 쓰는 일은 바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출간은 되지 않았지만 그 때에도 영화와 관련된 책에 번역을 해놓고, 출간할 수 있는 출판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나는 워낙 영화를 좋아했다. 그리고 많이 보기도 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제안을 놓고, 정말로 몇 달간 고민을 했다. 우리나라의 표준직업분류표를 처음 본 것도 그 시절이었다. 내가 50이 되었을 때, 책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심각하게 책 시장이 위축이 되어서, 쓸 수는 있더라도 팔 수는 없게 될 수도 있다. 그 때 몇 달에 걸쳐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업 전망을 했다. 문화 분야는 진짜로 꼼꼼하게 총량 지수부터 시작해서 고용지표는 물론, 내 나름의 자기 전망도 했다. 이런 연구를 정부 용역으로 하면 몇 억 원 정도 들어간다. 그러나 내 인생의 미래에 관한 일이다. 잡지에서 방송 광고 분야까지, 진짜로 꼼꼼하게 지표를 들여다봤다. 당장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내가 50이 되었을 때 만약 막다른 골목에 들어간다면? 나도 돌아나올 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했던 자료들과 조사들을 다시 정리한 책이 <문화로 먹고살기>였다. 이 책은 내 책 중에서 덜 팔린 책에 속하지만, 아마도 세상을 가장 많이 바꾼 책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문화 분야에 표준계약서 보급 등, 실제로 적지 않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MB 정권이었지만, 문화부 공무원들이 물어봐서 자문도 많이 해주었다.

 

그 때 알았다. 문화를 포함해서, 지식과 관련된 많은 일들은 딱 두 가지로 분류된다. 만드는 일과 평을 하는 일, 그게 두 가지 요소다. 물론 시키는 일도 있지만, 그건 1번 관리자 직업 분류로 들어가기 때문에 좀 결이 다르다. 만들든지 평을 하든지, 어차피 돈을 버는 것은 1번들이 벌어간다. 영화 쪽으로 분야를 좁히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한 게 만드는 쪽과 영화 평론가라는 두 가지를 놓고 진짜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불확실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 그리고 확실하고 바로 할 수 있는 일,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마침 그 때쯤 부산영화제와 전주영화제 같은 데에서 초청이 왔고, 영화 쪽 잡지에서도 기고를 해달라고 부탁이 왔다. 꽤 긴 시간을 고민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한에서는, 정말 치밀하다 못해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알아봤다. 배우 김중훈, 영화배우 류승완 감독의 아내이자 영화사 외유내강의 대표인 강유정 같은 같은 사람들이 그 때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이다. 형식적으로는 문화경제학 책을 위한 인터뷰였지만, 내가 나에게 했던 질문이 '문화로 먹고살기'였다.

 

꽤 시간이 지나고 결정을 했다. 나는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도 만드는 쪽을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조언을 참고했다.

 

"우 선생은, 평론 쪽에서는 어려우실 겁니다. 일단 서울대를 안 나오셨쟎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준 조언의 핵심은, 내가 서울대 그것도 서울대 학부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평론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평론을 꼭 하시면 좋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쓰는 책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팔리거나, 장관 같은 것을 하면서 부업으로 하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 돌려서 말했지만, 택도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 때가 내 책이 베스트셀러 전체 1위는 못해도 10위에서 20위 사이에서 맴돌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들의 조언을 이해했다. 평론은 영어로 크리틱이다. '문화로 먹고살기' 시절, 외국의 주요 미술대학교 커리큘럼과 강사진들에 대한 조사를 했었다. 절반 가까이는 크리틱들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출신도 다양하고 했던 일들도 다양하다. 꼭 박사일 필요도 없고, 해당 분야에서 엄청나게 두각을 낸 사람들 그들이 대학에서 후학들을 크리틱이라는 직함을 달고 가르치고 있었다. 당연히 존경스러운 사람이고,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 맞다.

 

우리는 짧은 기간에 산업화를 하면서, 문화와 지식 등 다른 분야도 너무 짧은 시간에 틀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크리틱이라고 하는 분야가 제대로 형성이 되지 않았다. 만드는 사람보다 몇 배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평론가들이다. 산업의 각 분야로 들어가면, 전문 잡지 몇 개가 중요한 분석을 하고 방향을 제시하면서 해당 분야를 이끌어나간다. 기초 소재, 정밀기계, 정밀 화학, 이런 분야들이 대부분 그렇다. 심지어는 우리가 그냥 명품이라고 부르는 럭셔리 산업도 중요한 잡지들이 방향을 제시하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그런 전문 잡지가 없거나, 있던 것들도 1세기로 들어와서 문을 닫거나 문을 닫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더 커지고, 더 다양해졌어야 할 분야인 평론이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 출신들이 주로 하고, 그들과 진짜로 친한 다른 사람들이 곁다리로 약간 얹히고... 그런 기형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한국 평론의 역사적인 발전을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내가 미래의 직업을 고민했던 것도 아니고.

 

영화를 만드는 일은, 한국에서 학벌이 가장 없는 집단 중의 하나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류승완 감독은 고졸이다. 그게 아무 문제도 안 된다. 내 주변에서는 이준익 감독이 미대 출신이라서 그나마 좀 비슷하고, 나머지는 경영학, 공학, 산업공학,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응당 했을 것 같은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평소에 대학 얘기를 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보다는 일본산 소주가 감자로 만들었는지 쌀로 만들었는지, 그런 얘기를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리고 차를 운전하기는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가장 인기 있다.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데리고 가야 해서 술을 안 마시는 사람, 미안해서 같이 마시기가 어렵다. 만드는 사람들의 세계, 잘 만드는 사람이 장땡이다. 한국 평론의 세계와는 조금 다르다. 대학 불문, 전공 불문, 고향 불문, 잘 만드는 사람이 최고 상석에 앉는다. 그 사람이 돈을 제일 많이 벌었으니까 술값도 낼 거 아니야.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에서도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matics) 붐이 불면서 '메이커'라는 개념이 떴다. 20세기 후반에 결국은 머니 게임으로 전락한 클린턴 시대의 신경제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메이커들이 늘어나고 메이커에게 돈이 갈 것인가, 미국 버전의 기술경제학에서 최근 핵심으로 고민하는 내용이다.

 

50대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활동의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사회적으로는 관리인 1번 직업군과 9번 단순노무직 두 가지를 제시한다. 사장되면 1번이고, 그렇게 사장된 사람 밑에서 일하면 9번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만들기와 평하기, 두 가지가 남는데, 선택은 비교적 쉽다.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으면 메이커 외에는 별 다른 길이 없다. 직접 뭔가 만드는 것, 이건 학력, 연줄, 전공, 다 필요 없다. 잘만 하면 된다. 말은 쉽지만 '바담 풍' 같은 얘기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일을 평생했던 사람들이 잡지나 협회에서 분석하고 조언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관련 분야를 늘려나가는 것이 맞다. 집자도 늘어나고, 분석 기관도 늘어나고, 2차 평가기관도 늘어나야 한다. 그래서 '크리틱'이라고 스스로 부르는 사람들의 권위도 높아지고, 존경도 받고, 그렇게 가는 게 맞다. 프랑스, 독일 심지어는 미국의 좋은 미대들이 운영되는 방식은, 딱 문화사회와 지식경제가 가는 길의 축소판과 같다. 서울대 안에서도 단과대 별로 나뉘고, 사범계열이냐 아니냐 나누고, 스승이 누구냐고 나눠서 자기들끼리 거대한 한국을 대변하는 지금의 크리틱 모습, 선진국과는 좀 많이 다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다름 가수 김장훈의 바둑 해설이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해설자들을 싫어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메이커와 해설자, 딱 두 개로 많은 일이 나뉘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에서 메이커는 경제적으로 푸대접 받고 해설자는 사회적으로 미움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두 개 모두 중요하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문화경제이고 지식경제다. 갈 길은 뻔한 데, 갈 길이 없다. 50대에 우리 모두 한 번씩 해보게 하는 경제적 질문이다. 만들 거냐, 논할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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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넘버 38. 용인 아파트 개발현장 인근의 나대지, 어두운 쓰레기 더미 속 - 어느 명함의 독백

 

나는 명함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겠지만, 나도 최선을 다 해서 산다. 그리고 티 내지 않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표준에 맞춘다. 국제적으로 가로 9 센티, 세로 5 센티가 국제 표준형이다. 가끔 튀어보기 위해서 표준을 벗어나려는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 남의 명함철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바로 버려진다.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사명을 잊어버린 등신 같은 놈들이다. 악착 같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살아남아서 몇 달 후, 아니 몇 년 후 주인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다. 그리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우리는 안심하고 사망한다.

 

나는 전생이 없다. 오피스 물품은 오피스 물품끼리 윤회한다. 우리는 그 윤회의 맨 밑바닥이다. 이 윤회의 끝은 만년필이다. 최근에는 노트북에서 끝나기도 한다. 중간 단계에서는 불을 밝히는 독서등이나 스탠드가 되기도 하고, 프린터가 되기도 한다. 아직 몇 단계 더 넘어야 최종적인 주인의 분신, 만년필이 된다. 만년필 다음은? 자동차나 카메라로 태어난다. 진공관 앰프나 스피커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걸 다 마치면? 잘 모른다. 어지간한 큰 공덕을 쌓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개나 고양이 같은, 정말로 명함 보다는 몇 단계 높은 동물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과 다른 것은, 우리의 생애 주기는 짧다. 명함으로 태어나는 것, 진짜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갈 길이 멀다.

 

그렇지만 모든 명함이 이렇게 사무기기 윤회의 길을 걸어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명함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의 손을 한 번은 거쳐서 세상의 빛을 보아야 한다. 꼭 다른 사람에게 건네지지 않아도 괜찮다. 불법 주차를 하면서 자동차 와이퍼에 끼워놓은 명함이 불법 견인을 막으면 대박이다. 바로 볼펜 수준으로 환생할 수 있다. 물론 수 십억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명함들은 바로 만년필로 태어나기도 한다. 만년필은 우리처럼 주인의 영혼 한 조각이 담기는 게 아니라, 영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 주인이 명함을 손에 집을 때, 그의 영혼 한 조각이 우리에게 담긴다. 그 전에는 그냥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무기기 윤회의 첫 단계인 것이다.

 

나는 명함이다. 그리고 명함인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나에게는 아직 긴 운명 같은 윤회가 길게 남아있었다. 지난 달까지, 나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내가 명함으로 태어나서 이제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두 달 전, 드디어 나는 명함 통 맨 앞 줄에 서게 되었다. 통에 들어간지 1주일,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왔다. 내 앞에 있던 녀석들은 이미 진짜 명함이 되어 주인의 영혼 한 조각과 함께 자기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내 차례다, 그랬었다.

 

주인, 아니 그 새끼는 지난 주에 퇴사했다. 그것까지는 알겠는데, 우리를 그냥 버리고 갔다. 나와 내 친구들은 주인의 영혼을 얻기는 커녕, 명함통에서 나와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면 나는 그냥 소멸이다. 그냥 집에 가지고 가서 태우기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찢어서 버리기만 해도 나는 다시 명함으로 환생한다. 인쇄소 공장의 좁고 불결한 기계를 지나고 다시 크기에 맞게 재단되는 과정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해볼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새끼, 아니 이 개자식이 그냥 버리고 가버렸다. 그뿐이냐? 심지어 선물로 받은 만년필도 버리고 갔다. 수 십 년을 돌아서 겨우 만년필로 태어났는데, 잉크 한 번 채워보지도 못하고. 이 대학살을! 이런 무식하고 야만스러운 개새끼는 내 명함 인생에 진짜로 처음 봤다.

 

다른 동료 명함들이 며칠 전부터 내게 복수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같이 쓰레기통에 누워있는 만년필과 서류뭉치들도 나에게 그 얘기를 한다. 난 아직 결심을 못했다. 그러나 결심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바로 내가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 난 명함 통 속 맨 위의 명함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도 아니고, 바로 내가 맨 앞이다.

 

2.

어느 날 아침이었다. 용인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엄청난 규모의 폐기물 불법 투기가 있었는데, 하여간 거기에서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된 게 나라는 거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현재로서는 불법 투기의 유일한 용의자되십니다! 그러니까 한 번 경찰서로 오셔서... 니가 올래, 우리가 갈까, 그런 분위기였다. 원래 내가 이런 저런 사건에 연류되어서 경험을 해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한다. 만약 며칠 전에 은평경찰서에 갔던 일만 아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MB 서울시장 시절의 일이다. 그의 뉴타운 사업 1호가 은평뉴타운이었는데, 이게 불법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에서 이 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철거깡패가 멀쩡하던 동네를 온통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드라마에서 맨날 나오는 일 중의 하나였는데, 문제는 다음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MB의 일이었다. 이래저래 눈치 보면서 빠질 단체와 사람들은 빠지고, 아무 눈치 안 보는 나 같은 막장들이 결국 기자회견에 이름 걸고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MB 쪽의 철거회사에서 소송을 걸어왔다. 시민단체에서는 잘 걸렸다, 이걸로 대법원까지 가자는 건데, 난 그 때 건강이 안 좋아서 무리한 일은 하면 안 되는 때였다. 아내는 대법원까지 가는 건 힘들고, 그냥 약식기소 나오면 벌금 내고 말자고 했다. 결국 벌금 100만원이 나왔고, 그냥 냈다. 나는 MB와 긴 송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MB 대통령 시절, CBS 라디오에서 내가 했던 얘기를 방송통신위원회가 문제 삼아서 결국은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박근혜 시절, 대법원에서 이겼다. 그리고 다시 방송으로? 그건 아니다. 이적이 <응답하라 1988>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노래 불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안 그래도 경찰서 여기저기 골치 아프던 기간이라 나는 용인경찰서 형사한테 설명을 해주었다.

 

"선생님, 거긴 제가 퇴사한지 3년 넘구요. 그 명함은 그 때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거예요."

 

형사는 쉽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래도 내 얼굴은 봐야겠다는 얘기를,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리고, 그러고 있었다.

 

"몰라요, 그럼 선생님 하고 싶으신 대로 알아서 하시구요."

 

잘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를 계속 해서, 결국에는 내가 전화를 끊었다. 대학교 시절에도 나는 내부수배만 받았지, 실제로 검거된 적도 없고, 당연히 감옥에 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시민 운동 쪽에 있으면서 생각보다 경찰서 갈 일도 많아졌고, 재판에도 종종 나간다. CBS 건은 행정재판에서 증인대에 서기도 했다. 지난 수 십 년 간의 부가가치세 세율추이 그래프와 추세선, 역진세 효과를 가지고 있는 정부조치에 대한 통계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국회 청문회 증인은 몇 번 했었는데, 실제로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한 것은 그게 유일한 경험이었다. 옛날에 어른들은 호적에 붉은 줄 간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을 아주 무서워했다. 우리는 그런 건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고문은 정신적으로 겁나게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밀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정말로 부담스럽다. 어차피 다 사람 아닌가. 정부가 하는 걸 반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이래저래 경찰서 들락날락 할 일들이 많아진다. 군사정권에서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일종의 사상범처럼 처리되었는데, 요즘은 잡범 처리한다. 도로를 불법으로 건넜다거나, 파업이 경제적 영향을 주었으니, 벌금을 내라... 그런데 이 벌금이 좀 세다, 툭하면 수 십억 대다.

 

용인경찰서에서 다시 전화가 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 때 은평 경찰서 왔다갔다하는 일이 없었으면, 나도 궁금해서 결국에는 용인경찰서에 가서, 거기서 나왔다는 옛날 내 명함을 직접 보는 일이 벌어지기는 했을 것 같다. 회사를 그만 둘 때, 워낙 일찍 결정했기 때문에 무거운 책 같은 짐들은 몇 번에 걸쳐서 집에다 갔다 놨다. 가벼운 건 좀 그냥 뒀었다. 그러다 총무 쪽에서 어차피 그만둘 거, 집에서 좀 쉴 수 있게 이렇게 저렇게 연차 등 휴가 처리를 해줬다. 그래서 약간의 짐이 내 자리에 남았었다. 국무조정실장이 주었던 장관표창장이 그렇게 분실되었고, 별로 신경도 안 썼던 명함 박스가 그 때 남았던 것 같다. 몇 년 후에, 진짜로 그 때 두고 간 명함들을 다시 만날 뻔 했다. 버려진 명함의 복수였을까? 그리고 그걸 막아준 건 당시 진짜로 아끼면서 애지중지 사용하던 후지츠 노트북이었고? 진작에 버리자는 걸, 내가 아껴 아껴 쓰고 있었다. 꽤 팔린 책 대부분이 살살 달래가며 쓰던 그 고물 노트북에서 나왔다.

 

어쨌든 그 명함 사건 이후로, 나는 명함을 덜 돌리게 되었다. 한 때는 나도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명함 뿌리는 게 일인 직업 협상가이기도 했다. 엄청나게 돌렸다. 그 명함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요즘 가끔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10년 전의 내 명함을 가지고 와서 그 시절의 기억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의 명함을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도저히 정리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냥 버리지도 못하겠다. 아내가 대청소하면서, 가끔 뿔난 얼굴로, "이거 어쩔겨?", 이렇게 한 무더기의 명함을 가지고 온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명함에는 영혼 한 조각이 담기는 것 같다. 그냥 아무런 종이가 아니다. 그 한 장이 나 같은 경우에는 경찰서에서 좀 오세요, 이런 역할을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비즈니스의 기회가 되거나, 출세의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고 돌아서 사기꾼 손에서 '호구 리스트' 작성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어느 편이든, 그냥 종이 쪼가리 하나는 아니다.

 

명함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준다. 이름을 한글로만 쓴 사람은 주로 국내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름을 한문으로만 쓴 사람은, 외국 활동이 중요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다. 한문 이름은 중국과 일본에서 유용하다. 그렇지만 요즘 청년들은 잘 못 읽어서 불편해한다. 상대방을 세밀하게 만나야 하는 사람은 그깟 명함 한 장으로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가능하면 편안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명함에 '청소년 선도위'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경력이나 하는 일을 잔뜩 단 명함이 있다. 초짜 변호사이거나 그만큼 자신이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결국 단촐하게 명함을 쓴 사람에게 연락하게 된다. 대통령, 국회의장, 장관, 다 명함이 단촐하다. 내가 본 명함 중에서 가장 멋졌던 것은, 미국 유명대학 교수였는데, 그걸 그만두고 정부 협상에 자문하러 다니는 경제학자였다. 말년을 그냥 학교에 있기 보다는 정부에 좀 기여를 하고, 덤으로 전세계 여행도 하고, 그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일에서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국 국무성만 표기되어 있고, 직함에 Senior Economist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가 학회를 비롯해서 자신의 업적을 쓰려면 A4 한 장이 넘었을 것이다. 내가 실무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똑똑한 할아버지였다. 미국 국무성 자문 경제학자, 폼은 안 날지 모르지만 아는 것만큼은 진짜 최고였다.

 

3.

명함에 준 사람의 영혼이 한 조각 실려 있을지 아닐지, 진실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명함이 요물인 것은 맞다. 특히 50이 넘은 사람들에게 명함은 때때로 진짜 요물이 된다. 요물에게 정신이 홀려서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이고 미래의 재산도 절반을 차압 당한 사람들을 몇 명 안다. 흔한 '바지사장' 같은 경우는 기본이다. 예전에는 장부에 이름 올리는 등기이사들이 회사에서 대출할 때 연대보증을 서기 때문에, 왕창 망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50이 되어서 자기 조직에서 나간 사람들이 근사한 명함을 위해서 너무 많은 희생을 하게 되었다. 너무 이런 피해자들이 많아지니까 제도 개선이 좀 생기기는 했다. 연대 보증도 완화되었고, 월급도 기본 생활은 가능하게 절반 이상은 차압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차압이 된 사람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차관까지 가는 건 보았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학문적 양심을 팔았다.

 

조금 더 근사한 명함을 위해서 재단을 만드는 사람도 가끔은 보았다. 그냥 가진 돈 가지고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그걸 또 쪼개서 '이사장' 같은 직함을 위해서 재단을 만드는 성가신 일을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50대는 명함이 없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뭐라도 한다. 그리고 점점 더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명함이 요물은 요물이다. 종이와 잉크, 명함은 평등하다. 그러나 명함을 든 사람들끼리는 여전히 평등하지 않다. 더 든든한 명함을 가지고 싶어하고, 더 쎈 명함을 가지고 싶어한다. 50이 되면 명함이 진짜로 요물로서의 자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정년이 65세까지 보장된 교수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50이 되면 쓰던 명함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이 온다.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을 먹는 사람은 득도한 사람이다. 대부분, 그 때부터 다음 명함을 위해서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 쪼가리 한 장이 거대한 요물로, 심지어는 꿈자리까지 찾아오게 된다. 열심히 살았던 표준적 50대 남성들은 여기서 대부분 무너진다. 영혼 한 조각이 아니라 영혼이 뭉터기로 명함에게 빨려 들어간다.

 

여의도는 4년 내내 거대한 명함 쟁탈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별 의미는 없지만 명함은 팔 수 있는 자리가 수 천 개는 된다. 저강도 전쟁이 4년간 벌어지다가 고강도 전쟁이 몇 달간 벌어진다. 살아남은 사람의 영광 뒤로 수 천명이 상처 투성이로 남는다. 청와대는 정년 없이 명함을 발행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는 권한이 있다. 5년에 한 번 목숨을 걸고, 나머지 5년 동안 줄을 선다. 명함이 요물 아니라고? 20대에 받는 첫 명함과 50대의 마지막 명함의 무게를 생각해보자. 명함 한 장을 위해서 목숨도 걸 수 있는 나이가 50대다.

 

좋든 싫든, 50이 되는 순간, 지금 쓰는 명함을 내려놓는 순간을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 사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노회한 사냥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민주투사? 죽어라고 노력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성숙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면, 100%의 확률로 명함 투사로 변하게 된다.

 

명함에 관해서 내가 들은 얘기 중에서 가장 슬픈 얘기는 한국의 보수들이 해준 얘기다.

 

"책이요? 명함 대신 쓰는 거 아니예요?"

 

한국의 돈과 학계는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이 쥐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진짜로 솔직하게 해 준 얘기는, 명함 대신 돌리는 게 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5년 후, 한국의 보수 정권은 무너졌다. 책 앞에 한 줄 쓰고 명함 대신 돌린다고 생각하는 보수적 학자들을 앞세우고 통치하기에, 한국은 이미 너무 커졌고 복잡해졌다. 명함 대신 돌리는 게 책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보수 정권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함이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할까? 박근혜 탄핵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헌법재판소다. 대통령 탄핵, 과외 금지, 요 정도 사안들이 헌재까지 간다. 누가 명함을 돌릴 것인가, 이 질문이 헌재까지 갔다.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배우자는 명함을 돌릴 수 있는데, 이게 배우자 없는 사람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결국 명함 사안은 헌법재판소까지 갔다.

 

50, 결국은 자기 명함을 돌아보는 순간이 온다. 나는 누구인가, 헤겔 등 독일 성철학파가 했던 질문은 한국에서는 아예 필요 없는 질문이다. 지금 헤겔이나 칸트가 우리의 50대에게 그 질문을 했다면, 묵묵히 자신의 명함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 것이다. 뭐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하시느냐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나는 명함인가, 명함이 나인가? 내 명함이 나는 아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데 명함을 들이미는 것은 상대방의 지성을 모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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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 2쇄 찍는답니다. 정말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다시. 사회적 경제 책이 얼마 전에 3쇄 들어갔구요. 예전에 10쇄는 간단히 넘어가던 시절에는, 쇄 넘어가는 줄도 잘 몰랐고, 그런가보다 했었습니다. 옛날 얘기입니다. 요즘은 책이 진짜로 잘 안 팔립니다. 쇄 넘어갈 때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신 건가, 요즘에야 좀 느껴집니다. 역시 좀 어려워져야 고개를 숙이는... 출판사에서 대학생 티타임도 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고맙습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도 그렇더군요.

한동안 사람들이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여기에 더해서, 출판사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했던'이라는 수식어를 더 달아줍니다. 출판계가 다 어렵지만, 사회과학은 초죽음이라고 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써야겠다고 몇 번 생각을 했는데, 사회과학 md를 비롯한 요 쪽 분야 사람들이, 그래도 명맥이라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시라, 요렇게 가끔 부탁들을.

저는 아직도 한국의 사회과학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습니다. 좋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한 번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만에 날이 풀려 볕이 따사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따사한 볕이 드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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