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를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와 글을 좋아하기는 했다. 대학에들어가자마자 연세문학회에 갔었다. 1시간 정도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 때 바로 알았다. 내가 여기서 이 사람들과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언덕길을 내려오고 그 길로 바로 가입한 동아리가 국악반이었다. 시를 쓰더라도 연세문학회에서 쓸 것 같지는 않았고, 어차피 시도 안 쓸 거, 악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형도는 만나지 못했지만, 기형도가 만났던 장정일은 만났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 시인들만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도시의 천재 소년 장정일... 그랬드랬나보다. 그리고 나는 장정일을 선배라고 부른다. 서로 동선을 맞추다 보니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벤치에서 만났다. 그리고는 드립다, 술만 마셨다.

세 번째 술자리였나. 그 때 선배로서 장정일이 그런 말을 했다. 책을 10년쯤 쓰면 밥은 먹고 살게 될 거라고. 듣자마자 나는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예로 들었던 게 신경숙이었다. 이청준의 글을 필사하면서 습작 시절을 보냈던 신경숙의 얘기는 워낙 유명한 얘기다. 그 때 나는 괜히 토를 달았다. 신경숙이 다행히 이청준을 필사 대상으로 했으니까 그렇게 되었지, 만약 요즘이라서 김훈을 필사했으면 밥 먹고 살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20대, 김훈의 글을 아주 좋아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김훈의 신문기사를 필사하지는 않았다. 유학 시절, 한국의 일간지를 배달받기에는 너무 비쌌다. 김훈의 글을 보기 위해서 당시 시사저널을 구독했다. 그렇지만 나라도 이청준과 김훈 중에서 필사 대상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이청준을 골랐을 것 같다.

나도 책을 쓰기 시작한지 10년은 벌써 넘어갔다. 10년간 책을 쓰면 먹고는 살게 된다는 말은, 내 경우는 맞았던 것 같다. 물론 아내의 경차를 빌려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세 끼 밥 먹일 걱정하지 않고 산다. 인류는 10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날 하루 세 끼를 뭐 먹고 사나 고민했었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을 뿐이다.

20대에 경제인류학 공부를 생각보다 많이 했다. 파리 10대학에서 내가 속해있던 연구소 이름이 경제인류학 연구소였다. 나는 기준이 하루에 세 끼 밥 먹을 걱정을 하는가, 안 하는가, 그렇다. 나머지는? 프레스티지, 허영에 관한 이야기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난 게 그렇게 오래 되지 않고, 우리는 더더욱 그렇다. 지금 선진국이라고 하는 스위스도 20세기 전반은 굶어죽을 정도로 온 국민이 가난했던 나라다.

문학은 뭐고, 예술은 뭐고. 그런 생각을 온 국민이 해보게 되는 것 같다. 아내는 오태석 희곡상을 탔다. 내가 늘 자랑스러워하는 일이다. 아내가 아침에 재수없다는 얘기를 했다. 오태석도 성희롱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언론에서 들어보지 못한 얘기들을 아내에게 들었다.

글에 대한 내 태도는 언제나 같다. 밥이나 먹고 살면 고마운 거다... 친한 친구들은 이제 책 좀 그만 쓰고, 좀 편하게 즐기면서 살라고 한다. 생각만큼 나는 책을 쓰면서 고통스럽지는 않은데, 녀석들은 무슨 판타지가 있는지, 쥐어짜면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내가 보내는 줄 안다. 고통스러운 것은, 10분만 더 자고 싶은데, 큰 애가 내 얼굴을 쥐어짜고, 둘째가 "아빠 일어나", 그러면서 내 배 위로 올라가 뛰는 것이다. 진지하게 묻는다. 책 안 쓰고, 그냥 편하게 살면 안돼? 지금 나는 태어나서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편하게 산다. 이보다 더 편한 삶이 있을까?

사회학 하는 친구들은 내가 아주 나쁜 사례라서 많은 대학원생들을 망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써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되지도 않는 환상을 준단다나... 그 환상을 빨리 깨달라고, 진짜로 진지하게 부탁하기도 한다.

책을 10년을 쓰면 먹고는 산다, 장정일의 얘기는 맞는 것 같다. 한국을 발칵뒤집은 최영미의 시 '괴물'이 7만원짜리라고 알고 있다. 최영미쯤 되는데, 원고료가 그렇게 밖에 안돼? 뒤집으면, 그 7만원짜리 시가 한국을 바꾼다. 가성비, 최고다. 예전에 소형의 날치라는 이름의 엑소세가 항공모함을 잡은 적이 있다. 프랑스 엔지니어들이 엑소세의 guidage를 해줬는지 안해줬는지, 외교전으로까지 번진 적이 있다. 시는 엑소세 같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은? 항공모함 갑판 위에 던져져서 그냥 깨진 코카콜라 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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