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데이빗 리카도)

 

1.

역대로 경제학자 중에서 주식으로 큰 돈을 번 사람으로 데이빗 리카도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 두 사람을 꼽는다. 그 외에는? 글쎄, 크게 주식으로 흥한 경제학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90년대에 미국의 전문직 중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직종으로 경제학과 교수가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하는 일은 많고, 집에는 잘 못 들어오는데, 아내들이 기대하는 연봉을 갖다 주지 못하니까 이혼율이 높을 것이라고 해석을 해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직업적으로 다루는 돈의 규모가 가장 큰 사람들이 경제학자지만, 자신의 삶에서 그런 돈을 만지지는 못한다.

 

리카도와 케인즈, 특징이라면 좌파나 우파가 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한국에서 리카도는 자유무역의 이론가이며 FTA 같은 무역질서를 주창한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에서 리카도의 후계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다. 옥중 후기로 유명해진 그람시와 그의 절친이었던 경제학자 스라파, 특히 스라파는 공공연하게 '네오 리카디안'이라는 학파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리카도는 아버지가 유명한 증권 브로커였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워낙 똑똑한 아들이라서 아버지 친구들이 그에게 고급 정보를 주었고,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걸로 유명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대중목욕탕에서 사람들이 모두 벗고 있는 것을 보고, 부자나 아닌 사람이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부로 경제학자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부는 평등한 인간들의 노동에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워렌 버핏이 어느 날 깨달음을 얻어 극좌파 경제학자가 된 것과 같다. 리카도는 좌우, 모두에게 존경 받는다.

 

케인즈는 누가 뭐래도 20세기를 만든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경제학 교과서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샤무엘슨이 마샬의 경제이론에 케인즈의 새로운 사상을 딱 앞뒤로 나누어, 절반 절반 집필하면서 생겨났다. 케인즈 좌파와 케인즈 우파로 나누면, 세상의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포함된다. 행정고시 중 재경고시용 경제학 책만 본 사람은 케인즈 우파이고, 자본론을 본 사람은 케인즈 좌파가 된다. 무조건 아파트 짓고 바다 매립하자는 토건파 경제 공무원, 얄짤 없이 케인즈 우파다. 이 두 군데 다 해당하지 않으면? 시카고 학파이거나 경제학자가 아니다. 21세기 주식투자의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포트폴리오 이론도 케인즈 작품이다. 그리고 그는 주식으로도 돈을 많이 벌었다. 어떻게? 이 어떻게가 요즘 워린 버핏이 투자하는 종목 만큼이나 그 시절에는 최고의 관심사였나 보다. 그는 여덟 살 연하의 러시아 발레리나와 결혼했다. 문학청년이던 젊은 시절부터 케인즈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많이 났는데, 하여간 결혼은 했다. 그 아내가 시키는 대로 주식을 사서 케인즈는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게 경제학자들이 술자리에서 주로 얘기하는 케인즈 주식투자의 비밀이다.

 

위대하시고도 위대하신 리카도와 케인즈도, 싫어하는 아버지 친구들의 정보, 발레리나 부인의 조언, 이런 걸로 주식으로 돈 벌었다. 그런 훌륭하신 아버지가 없거나, 예술적 영감 가득한 눈으로 미국 증시를 한 눈에 꿰뚫어 보는 아내가 없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워렌 버핏이 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워렌 버핏도 첫 투자는 자신의 아버지 회사에 했다.

 

한국의 경제학 교수나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주식으로 험한 꼴 당한 얘기가 책으로 치면 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나는 워낙 일찍 학위도 받았지만 교수 시켜달라고 줄을 안 서서, 할아버지들이 나만 보면 억울하고 분한 사연들을 한 시간씩 털어놓고는 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주식으로 흥한 얘기는? A4 1장 나올까 말까다. 주식 설명을 워낙 잘 해서 연봉 6억씩 받다가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 경제학 박사 얘기는 내가 안다. 그의 희망은 가늘고 길게, 옆으로 옆으로, 그리고 조금씩 밑으로, 버티고 버텨서 월급 더 오래 받는 삶이다. 나도 가끔 자문 받고 도움도 받는 아주 잘 나가는 경제학 박사의 얘기다.

 

그러니 주식 같은 걸로 노년을 보장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머리 속에서 지우는 게 낫다. 한국의 수많은 경제학과 경영학과 교수 중에 정년 전에 그냥 쉬고 싶다고 그만두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보셨는가? 우리나라의 그 수많은 증권사 딜러와 간부 중에, 나는 이 정도면 돈 벌만큼 벌었다고 은퇴하고 하와이에서 따뜻하게 노년을 보내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보셨는가? 300년이 넘는 세계 경제학의 역사에서도 그런 사람 몇 명 안 나왔다. 심지어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담 스미스도 해군으로 유명해진 귀족의 자녀 개인 과외교사도 했다. 귀족의 자녀와 떠난 유럽 마차여행이 너무 따분하고 지겨워서 틈틈이 쓴 책이 바로 경제학을 만든 그 <국부론>이라는 책이다. 그걸로 그가 경제학의 아버지가 된 거고.

 

2.

한국에 직업이 몇 개나 있을까? 만 개가 약간 넘는다. 사회 분석을 위해서 사용하는 전업주부라는 분류는 직업 분류에서는 뺀다. 한국 통계청에서 직업을 나누는 기준은 종사자 천 명이다. 그 분야에 천 명이 되어야 별도 항목이 생기고, 5단계인 세세분류로 잡히기 시작한다. 보통의 세세분류에서는 천 명에서 5천 명 정도가 들어가게 된다. 이 세세분류 기준으로 한국에는 1,231개의 직업 기준이 있다. 참고로 군인은 영관급 이상 장교, 위관급 이상 장교, 부사관, 기타 군인의 4개의 세세기준에 의해서 직업이 규정된다. 그리소 소위, 중위, 대위, 이런 계급이 자신의 최종 직업이 된다. 전문직이 가장 많아서 세세분류로 463, 군인의 100배가 된다. 세세항목 내의 지위나 직급 구분까지 따지면 만 천개 정도 되는데, 소위와 중위가 다른 직업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소위, 중위, 대위를 '위관급 장교'라는 하나의 항목으로 묶으면 그게 바로 세세분류다. 그 정도 선에서 세금 내고 일하는 직업은 대체적으로 한국에서 천 개 내외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건 통계청과 세무서가 하는 일일 뿐이다. 사기꾼을 직업군으로 잡아주지는 않는다. 전문 투기꾼도 직업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심지어 깡패도 그 자체로는 직업이 아니다. 슬프지만, 백수도 직업으로 통계청에서 파악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경우, 세상을 살면서 통계청의 표준직업분류표를 열어보는 경우는 20대에 한 번, 50대에 한 번이다. 집을 구해야 할 때 혹은 방을 구해야 할 때, 환하게 불 켜진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서 한 번씩 탄식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가 살 집은 없지? 나는 그런 탄식을 4번 정도 했던 것 같다. 통계청 분류표를 보면 좀 더 냉정해진다. 직업이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한국에서는 천 개 정도 밖에 안 된다. 영관 위상, 위관 이상, 너무 냉정한 현실이다.

 

1,000개 약간 직업이지만, 경제학자들은 이걸 좀 무식하게 두 개로 나눈다. 마르크스는 자본과 노동으로 나누었지만, 그 후에는 블루칼러와 화이트칼러, 푸른 색 유니폼을 입는 사람과 흰색 와이셔츠를 입는 사람으로 나눈다. 진짜 무식한 분류법이다. 1996 <애인>이라는 드라마에서 유동근이 황신혜와 연애할 때 블루 칼라 톤 와이셔츠를 입었다. 한국에서 남자들이 흰색 와이셔츠를 벗고 최소한 블루 칼라 정도를 입어도 되는 시대는 바로 유동근이 열었다. 나도 그 시절, 유동근 덕분에 툭하면 얼룩이 묻는 흰색 와이셔츠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그 시절 경제학과 사회학 학회마다 뒷풀이 때, 젊은 학자들이 푸른색 와이셔츠 입은 사람은 블루칼라냐, 화이트칼라냐, 노교수들에게 들이댔다는 전설적 후일담이 있다. 약간 맥락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대기업을 비롯한 회사는 관리직과 생산직이라는 아주 간단한 두 개의 기준으로만 직업을 나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업자라고 부른다. 그 중에 특히 불쌍한 사람들을 혀를 차면서 '자영업자'라고 꼭 찍어서 부른다. 유시민이 한 때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불렀던 것은, 슬픈 얘기다. 업자는 물론이고, 자영업자 수준도 안 된다고 자신을 낮추고 낮춰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유시민이 책 쓰던 시절, 우리에게는 '자영업자'라는 사회적 기준도 없었다.

 

블루칼러는 분야나 직급별로 기준이 훨씬 더 세분화된다. 화이트칼러는 하는 일이 훨씬 더 단순하다. 별도의 항목으로 넘어가는 관리자를 제외하면, 화이트칼러가 하는 일은 만드는 일과 평하는 일, 딱 두 가지다. 물론 둘 다 위로 올라가면 사장이 있고, 간부들이 있다. 그렇지만 직업 분류상, 이건 관리자로 별도 분류한다. 국회의원, 장관, 사장, 하다못해 총장이나 유치원 원장까지, 분류 대항목 1, 관리자, Manager 항목으로 별도로 관리된다. 물론 회사에 과면 과장급이 manager라는 직급을 달지만, 국가가 보기에는 하다못해 유치원 원장은 되어야 진짜 관리자다. 그게 국제표준으로도 그렇고 한국 기준으로도 그렇고, 1번 직업들이다. 괜히 고등학생들한테만 일진이라고 뭐라고 그러는 것은 좀 이상하다. 2번은 전문직, 3번은 사무직이다. 2번이든, 3번이든, 혹은 큰 4번의 서비스직이든, 부장급 이상의 관리직은 모두 1번으로 분류된다.

 

내 인생을 놓고 보면, 나는 20대 후반에 2번에 있다가, 30대 초반에 1번으로 갔다. 그리고 2번과 1번을 왔다갔다 하다가 50대가 되었다. 대분류 9분은 단순노무 종사자다. 50쯤 되면 한국표준직업분류표를 놓고 이제 지도놀이를 한 번쯤 할 수 있을 것이다.

 

2부터 8사이에서 20대를 보내고, 40대 중반쯤 1번에 갔거나 못 갔거나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50대 초반에 1번에 갔거나 아직 못 가서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사냥꾼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사회가 우리에게 권하는 일은 9번 항목의 일이다. 60이 되면 이 변화는 더더욱 극명해진다. 1번에 들어간 사람들, 9번에 가기 싫은 사람들, 그렇게 60대의 경제활동이 구성된다. 65, 거의 대부분의 직종에서 이미 은퇴했을 나이, 1번과 9번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고,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통계청은 1번 직업과 9번 직업을 대분류에서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마음은 1번에 있는데, 현실은 9, 취향은 1번인데 실력은 9, 친구들은 1번인데 나만 9, 어떻게 생각을 해도 상관없다. 통계청 표준국가항목분류를 화이트칼러 출신답게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살펴본 50대라면, 아마도 주저 없이 그날 밤 소주 두 병을 마시게 될 것이다.

 

이 사회는 50이 되면 이제는 1번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1번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고, 그 이유로 세상을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87 6월을 다 함께 했던 것이, 1번 직업만이 존중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다.

 

노회찬, 공지영 등이 201년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노회찬은 직업분류표로 1110번 국회의원, 1번 직업군에 속한다. 공지영은 28112번 문학작가, 2번 직업군에 속한다. 유시민은 28119, 그외작가라는 분류번호를 갖는다. 좋든 싫든, 우리가 만든 세상은 <1번만 되고 싶은 더러운 세상>이다. 가끔 2번에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웅들이 들어가 있다. 약간은 거칠게 한국 50대의 직업관을 생각해보자. 남자들은 50이 되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1번 직업을 가지고 싶어한다. 사냥꾼의 세계다. 어차피 처음부터 남자들 틈에 끼어서 1번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 여성들이 2번을 비롯한 틈새 시장에 들어간다. 판사는 2611, 변호사는 2612번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하면 뒤늦게라도 1번이 된다.

 

2년 전부터 두 아이를 열심히 돌보는 나는 표준분류상 95120, 육아 도우미다. 9번 분류이기는 한데, 아내가 나에게 아이 돌보는 월급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그나마 직업 분류상에서도 제외된다. 직업분류표는 요즘 내가 하는 일을 직업적으로는 이렇게 규정한다.

 

ㆍ아이의 우유나 간식을 먹이고, 놀이기구로 유희를 하며 놀아 준다.

ㆍ육아의 의복세척 및 침구손질을 하기도 한다.

 

내 인생은 2번과 1번 사이에 있다가, 지금은 9번에 있다. 10년 후, 내 많은 친구들이 결국은 지금의 나와 같은 9번 항목으로 오게 될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런 것이다. 대항목 9번은 '단순노무 종사자'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나마 영어로는 좀 낫다. Elementary Workers, 초등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 앞의 50대들은 1963년 표준산업분류표가 경제기획원에 의해서 도입된 이후로 1번 직업군을 희망하면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모두가 1번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사회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들은 50살이 되면서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들의 우울증, 할아버지들의 습관적 분노조절장애, 가족들이 모이면 꼭 밥상을 엎고야 마는 무의식 속까지 들어간 분노, 기본적으로는 1번 직업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번 직업군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을까? 그게 아니면 인생의 실패자이고, 루저인 것인가? 내가 50이 되면서 맨 처음 분석한 것이 바로 그 표준직업분류표이다. 그리고 수많은 형님들이 술 마시다가 내 눈을 슬프게 쳐다보는 이유를 약간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곧 1번 직업군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번 직업, 마력이 있다. 놓고 나오기 싫어지는... 애인하고는 헤어져도, 1번 직업군에서는 못 헤어지는 것, 그게 한국의 50대 남자들이다. 병신들이다. 한국에 나와있는 자기계발서의 거의 대부분은 1번 직업군을 갖는 방법에 관한 얘기이거나, 나는 이렇게 1번이 되었다, 그런 얘기들이다. 병신들이 병신들에 관한 얘기를 넋 놓고 보는 형국이다. 근대화 한국, 그렇게 우리는 '1번 증후군'에 걸린 병신들이 되어갔다. 농업의 대분류는 6번이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농민과 어민의 자손들이다. 상당수의 우리 아버지,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우리 할아버지는 6번 직업군에 속해서 20세기를 살았다. 우리 모두는 6번에서 출발한 6번의 자식들이다.

 

9번에 속한 직업분류, 육아 도우미 생활을 메인으로 2년 넘게 하면서 나에게 행복을 준 것은, 수많은 경제관련 책이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빨간색 모닝이었다. 그래도 모닝이라도 타고 아이들 등하원시키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그 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3.

내가 40이 되었을 때, 나도 한 가지 선택을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영화를 진짜로 만드는 일과 영화를 평하는 일, 두 가지 모두 선택할 수 있는 경우였다. 그 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빠르면 5년 길면 10년은 걸려야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예 못할 가능성도 50%는 되는 것 같았다. 영화 평론을 쓰는 일은 바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출간은 되지 않았지만 그 때에도 영화와 관련된 책에 번역을 해놓고, 출간할 수 있는 출판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나는 워낙 영화를 좋아했다. 그리고 많이 보기도 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제안을 놓고, 정말로 몇 달간 고민을 했다. 우리나라의 표준직업분류표를 처음 본 것도 그 시절이었다. 내가 50이 되었을 때, 책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심각하게 책 시장이 위축이 되어서, 쓸 수는 있더라도 팔 수는 없게 될 수도 있다. 그 때 몇 달에 걸쳐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업 전망을 했다. 문화 분야는 진짜로 꼼꼼하게 총량 지수부터 시작해서 고용지표는 물론, 내 나름의 자기 전망도 했다. 이런 연구를 정부 용역으로 하면 몇 억 원 정도 들어간다. 그러나 내 인생의 미래에 관한 일이다. 잡지에서 방송 광고 분야까지, 진짜로 꼼꼼하게 지표를 들여다봤다. 당장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내가 50이 되었을 때 만약 막다른 골목에 들어간다면? 나도 돌아나올 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했던 자료들과 조사들을 다시 정리한 책이 <문화로 먹고살기>였다. 이 책은 내 책 중에서 덜 팔린 책에 속하지만, 아마도 세상을 가장 많이 바꾼 책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문화 분야에 표준계약서 보급 등, 실제로 적지 않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MB 정권이었지만, 문화부 공무원들이 물어봐서 자문도 많이 해주었다.

 

그 때 알았다. 문화를 포함해서, 지식과 관련된 많은 일들은 딱 두 가지로 분류된다. 만드는 일과 평을 하는 일, 그게 두 가지 요소다. 물론 시키는 일도 있지만, 그건 1번 관리자 직업 분류로 들어가기 때문에 좀 결이 다르다. 만들든지 평을 하든지, 어차피 돈을 버는 것은 1번들이 벌어간다. 영화 쪽으로 분야를 좁히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한 게 만드는 쪽과 영화 평론가라는 두 가지를 놓고 진짜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불확실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 그리고 확실하고 바로 할 수 있는 일,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마침 그 때쯤 부산영화제와 전주영화제 같은 데에서 초청이 왔고, 영화 쪽 잡지에서도 기고를 해달라고 부탁이 왔다. 꽤 긴 시간을 고민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한에서는, 정말 치밀하다 못해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알아봤다. 배우 김중훈, 영화배우 류승완 감독의 아내이자 영화사 외유내강의 대표인 강유정 같은 같은 사람들이 그 때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이다. 형식적으로는 문화경제학 책을 위한 인터뷰였지만, 내가 나에게 했던 질문이 '문화로 먹고살기'였다.

 

꽤 시간이 지나고 결정을 했다. 나는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도 만드는 쪽을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조언을 참고했다.

 

"우 선생은, 평론 쪽에서는 어려우실 겁니다. 일단 서울대를 안 나오셨쟎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준 조언의 핵심은, 내가 서울대 그것도 서울대 학부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평론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평론을 꼭 하시면 좋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쓰는 책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팔리거나, 장관 같은 것을 하면서 부업으로 하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 돌려서 말했지만, 택도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 때가 내 책이 베스트셀러 전체 1위는 못해도 10위에서 20위 사이에서 맴돌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들의 조언을 이해했다. 평론은 영어로 크리틱이다. '문화로 먹고살기' 시절, 외국의 주요 미술대학교 커리큘럼과 강사진들에 대한 조사를 했었다. 절반 가까이는 크리틱들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출신도 다양하고 했던 일들도 다양하다. 꼭 박사일 필요도 없고, 해당 분야에서 엄청나게 두각을 낸 사람들 그들이 대학에서 후학들을 크리틱이라는 직함을 달고 가르치고 있었다. 당연히 존경스러운 사람이고,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 맞다.

 

우리는 짧은 기간에 산업화를 하면서, 문화와 지식 등 다른 분야도 너무 짧은 시간에 틀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크리틱이라고 하는 분야가 제대로 형성이 되지 않았다. 만드는 사람보다 몇 배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평론가들이다. 산업의 각 분야로 들어가면, 전문 잡지 몇 개가 중요한 분석을 하고 방향을 제시하면서 해당 분야를 이끌어나간다. 기초 소재, 정밀기계, 정밀 화학, 이런 분야들이 대부분 그렇다. 심지어는 우리가 그냥 명품이라고 부르는 럭셔리 산업도 중요한 잡지들이 방향을 제시하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그런 전문 잡지가 없거나, 있던 것들도 1세기로 들어와서 문을 닫거나 문을 닫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더 커지고, 더 다양해졌어야 할 분야인 평론이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 출신들이 주로 하고, 그들과 진짜로 친한 다른 사람들이 곁다리로 약간 얹히고... 그런 기형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한국 평론의 역사적인 발전을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내가 미래의 직업을 고민했던 것도 아니고.

 

영화를 만드는 일은, 한국에서 학벌이 가장 없는 집단 중의 하나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류승완 감독은 고졸이다. 그게 아무 문제도 안 된다. 내 주변에서는 이준익 감독이 미대 출신이라서 그나마 좀 비슷하고, 나머지는 경영학, 공학, 산업공학,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응당 했을 것 같은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평소에 대학 얘기를 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보다는 일본산 소주가 감자로 만들었는지 쌀로 만들었는지, 그런 얘기를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리고 차를 운전하기는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가장 인기 있다.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데리고 가야 해서 술을 안 마시는 사람, 미안해서 같이 마시기가 어렵다. 만드는 사람들의 세계, 잘 만드는 사람이 장땡이다. 한국 평론의 세계와는 조금 다르다. 대학 불문, 전공 불문, 고향 불문, 잘 만드는 사람이 최고 상석에 앉는다. 그 사람이 돈을 제일 많이 벌었으니까 술값도 낼 거 아니야.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에서도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matics) 붐이 불면서 '메이커'라는 개념이 떴다. 20세기 후반에 결국은 머니 게임으로 전락한 클린턴 시대의 신경제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메이커들이 늘어나고 메이커에게 돈이 갈 것인가, 미국 버전의 기술경제학에서 최근 핵심으로 고민하는 내용이다.

 

50대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활동의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사회적으로는 관리인 1번 직업군과 9번 단순노무직 두 가지를 제시한다. 사장되면 1번이고, 그렇게 사장된 사람 밑에서 일하면 9번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만들기와 평하기, 두 가지가 남는데, 선택은 비교적 쉽다.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으면 메이커 외에는 별 다른 길이 없다. 직접 뭔가 만드는 것, 이건 학력, 연줄, 전공, 다 필요 없다. 잘만 하면 된다. 말은 쉽지만 '바담 풍' 같은 얘기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일을 평생했던 사람들이 잡지나 협회에서 분석하고 조언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관련 분야를 늘려나가는 것이 맞다. 집자도 늘어나고, 분석 기관도 늘어나고, 2차 평가기관도 늘어나야 한다. 그래서 '크리틱'이라고 스스로 부르는 사람들의 권위도 높아지고, 존경도 받고, 그렇게 가는 게 맞다. 프랑스, 독일 심지어는 미국의 좋은 미대들이 운영되는 방식은, 딱 문화사회와 지식경제가 가는 길의 축소판과 같다. 서울대 안에서도 단과대 별로 나뉘고, 사범계열이냐 아니냐 나누고, 스승이 누구냐고 나눠서 자기들끼리 거대한 한국을 대변하는 지금의 크리틱 모습, 선진국과는 좀 많이 다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다름 가수 김장훈의 바둑 해설이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해설자들을 싫어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메이커와 해설자, 딱 두 개로 많은 일이 나뉘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에서 메이커는 경제적으로 푸대접 받고 해설자는 사회적으로 미움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두 개 모두 중요하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문화경제이고 지식경제다. 갈 길은 뻔한 데, 갈 길이 없다. 50대에 우리 모두 한 번씩 해보게 하는 경제적 질문이다. 만들 거냐, 논할 거냐...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