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가끔은 기도한다...)

 

1.

살면서 지켜 본 아내는 참 강한 사람이다. 대충대충 살아온 나보다는 몇 배는 더 강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더 강하다. 그리고 인정사정 없다. 부모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는다.

 

몇 주 전 일요일 밤이다. 아내가 정말로 '엉엉' 소리내면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이제 일곱 살이 된 큰 아이는 이것저것 해달라는 게 너무 많아졌다. 그리고 말도 잘 안 듣는다. 다섯 살 둘째는 말 듣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두 아이가 같이 있으면 2배가 아니라 3승 아니 4승으로 힘들다. 아내는 30분이 넘게 울었다. 두 아이는 결국 손 들고 벌섰다. 아이들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은 거대한 울음 바다가 되었다. '행복한 우리 집'의 화목했던 일요일 밤의 모습이다.

 

나 때문에 아내가 운 적이 몇 번 있기는 하다. 100%, 내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간 날의 일들이다. 그래도 그렇게 크게 우는 걸 보기는 처음이다.

 

"엄마가 너네들한테 뭘 잘 못 했니?"

 

울다가 아내가 꺼낸 말이다. 애들은 영문을 모른다. 나도 울고 싶은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그러나 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그리고 아내가 별 거 하지도 않고서 티 낸다고 놀릴 것도 무서웠다. 왜 나는 애들을 이렇게 열심히 볼까? 별 다른 선택이 없어서 그렇다. 아이들이 늦게 태어나서 외가든, 친가든, 좀 더 아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무리다. 장모님이 많이 도와주신다. 그래도 숨이 턱턱. 아이 둘 볼 때, 둘이 보면 둘이 다 뻗고, 셋이 보면 셋이 뻗고, 넷이 보면 한 명이 좀 쉴 여유가 생긴다. 누군가 놀러 와서 네 명이 볼 여유가 생겼을 때, 아이들은 두세 배로 늘어난다. 국가도 더 이상 도와주지는 않는다. 시장에 지원을 받기에는 내가 "도니가 음따". 그리고 마을 공동체 혹은 육아 공동체, 그런 건 너무 멀리 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른이 되지 않았다고 무시하는 전통이 우리 나라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평등 사회를 못 만든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의미, 그거 순전히 꼰대적 발상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성숙해가는 느낌 보다는, 내가 해체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해? 방법 없잖아. 진짜로 나는 하루하루가 내가 해체되는 것 같았다. 조폭들 용어로는 그걸 인수분해라고 하는 것 같다. 조직에서 밑의 부하들이 강제로 다 떨어져나간 중간보수들을 인수분해 당했다고 한다. 죽이지는 않고, 그냥 혼자 있게 고립시키는 작전이다. 영화 <신세계 (2021)>에서 인수분해 되었던 장이사가 뭘 좀 해보려고 하다가 정말로 죽게 된다. 인수분해, 진짜 찰 지게 나왔던 대사였다.

 

2.

50, 내 위에 아무도 없고, 내 밑에 아무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 아버지 등등 내 위에도 한참 많다. 내 밑, 굳이 따지자면 고등하교 후배, 대학교 후배, 기타 등등, 엄청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내가 50이 된 지금, 그들이 내 밑일까? 그런 위계가 새삼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까지, 나도 식구 같이 지내던 한 편들이 있었다. 그리고 위, 아래,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형식으로는 칼 같이 지켜지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 진짜로, 문자 그대로, 내 위에도 아무도 없고, 내 밑에도 아무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의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러한 삶을 만든 것일까? 나는 별 생각 없이 산다. '인수분해' 된 것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리하여 21세기 들어서, 나는 처음으로 평등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평등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평등 안으로 밀려들어간 것이 조금 더 정확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일을 한다. 그리고 혼자 일하지는 않는다. 내 주변에는 많은 동료들이 있고, 적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 애 보다가 잠깐 잠깐 만나서 고민하는 사이라서, 대부분의 관계가 임시적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주도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우리들 사이에서 평등을 내 건 적은 없다. 우리는 나중에 그걸 '오대오'라고 불렀다. 누구나 5의 역할을 한다. 물론 상징적이다. 애 보면서 움직이는 나는 '깨꿈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실제로 5의 기여도 못한다. 그냥 오대오라고 불렀다. 누가 5인지는 모른다. 그냥 5.

 

좀 멋있게 표현하면 우리가 살았던 80년대 혹은 그 이전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 관계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게 군대와 교회다. 현대 조직론에서는 그렇게 분석을 한다. 물론 군대와 교회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같은 수직적 위계 조직이지만, 교회에서는 말단에 있는 신도들에게도 예수처럼 되라고 한다. 군대에서는 하급 병사들에게 장군처럼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 좀 더 솔직하게, 그냥 장군님을 본 받으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군대와 교회만 분석하면 군대가 조금은 더 모던하다. 평등한 군대를 상상하기 어렵듯이, 평등한 교회도 상상이 어렵다. 그래도 군대에서는 천천히 인권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교회는 군대보다 인권에 대한 얘기가 더 어렵다. 절도 마찬가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니라의 기업은 일제의 영향을 받아서 군대식 조직 위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몇 개의 기업이 군대 조직 위애 교회 모델을 덧붙였다.

 

70년대와 80년대, 지난 20세기 후반은 사회의 군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대형 교회가 등장한 이후, 사회의 교회화가 진행된 것 같다. MB가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 이후, 우리의 전면적인 사회의 교회화와 함께 21세기를 맞았다. 할렐루야! 하나님 밑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 밑에는 목사님이 계시고, 그 밑에는 장로님과 권사님이 계시고, 그리고 다시 그 밑에는 집사님이 계신다. 중간에 아직 목사님의 위대하신 위계까지 올라가지 못하신 전도사님이 계시다. 그리고 우리는? 평신도 아니면 아직 회계하지 못해서 영혼이 지옥의 저승불 어디론가 갈 죄 많은 양들이다, 아멘.

 

인류학에서는 이걸 사냥꾼과 채취꾼 모델로 나눈다. 여기서부터는 머리 아프다. 남자는 사냥을 담당하고, 여자는 열매를 모으고 일을 하는 채취를 담당한다. 그렇다면 사냥과 채취, 누가 더 시원 사회의 경제에 더 기여를 하였느냐, 이런 걸 따지면 경제인류학이나 생태인류학 같은 것들이 나온다. 그리하여 "도대체 남자는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는 현대 인류학과 페미니즘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냥꾼의 후예이거나, 채취꾼의 후예가 된다.

 

이도 저도 싫어서 혼자 있는 사람은? 왕따다. 49년을 사냥꾼으로 살았던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인수분해된 이후로 수렵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왕따가 된다. 그렇지만 일찍이 헤겔이 말했다. 주인과 노예 중에서 진짜로 진리를 얻어서 자유롭게 되는 사람은 노예이고, 내 몰린 사람이라고. , 헤겔 만쉐이! 왕따가 되고서야, 나는 21세기의 지평선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평등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적당히 세 끼 먹고 살다가, 때 되면 떠나게 되는, 그 존재론적이면서도 본질적인 평등이 있다. 예수가 말하지 않으셨던가. 먼저 온 자 나중 되고, 나중 온 자 먼저 된다고. 성경에 있는 말이다.

 

3.

나는 내가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20대 이후로는 계속 했던 것 같다. 독일 성찰학파의 출발을 만든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이 되게 중요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 아이 둘을 데리고 50줄을 넘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가는 지금 하나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몇 시에 어린이집에 갈 것인가, 토요일 저녁 메뉴는 뭘로 할 것인가, 일요일 점심은 뭘 만들 것인가, 이런 것만 중요하다. 나머지는? 일단 아이들 저녁에 재워놓고 생각하자.

 

50이 되면서, 내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하나 생겨났다. 사회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 아니면 하기가 싫어졌다. 물론 별로 의미가 없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별로 재미가 없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참고 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나에게 다 마찬가지인 것은, 어떤 일을 하든, 조각난 시간에 잠깐 일을 하는 나에게 많은 돈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과 관련된 일, 한국에서는 영혼을 팔 거나, 양심을 팔 거나 아니면 24시간을 전부 팔지 않으면 괜찮은 돈을 주지 않는다. 49을 넘으면서, 그 표현이 정중하든 혹은 직접적이든, 아니면 남을 통해 넌지시 말하든 "너 말고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비겁하니까, 속으로만 "그러세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50에서 한 발씩 한 발씩 걸어갈 때마다, 군대나 교회 혹은 그렇게 생긴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 점점 더 "너 말고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아"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게 우리의 50이다. 열심히 살면 10, 정말 운 좋으면 15년까지 유예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사람은 평등해진다. 어차피 큰 돈 못 받을 것,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일만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조금 받을 것,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좀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런 궁상 따위 떨고 있기에, 나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다.

 

'일생의 과업'이라는 게 있을까? 근대를 만들면서 서양에서는 소명(calling)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게 한국에 들어와서는 근대식 공장 교육의 적성 같은 개념과 결합되면서, 마치 신이 우리에게 준 고유한 능력과 영역 같은 게 있다는 미신이 되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는 어떤 과업을 신에게 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일찍 발견하고, 빨리빨리 영재로 키우고, 그리하여 이 소중한 아이가 자신의 적성과 소명을 빨리 찾아 이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길! 아멘. 나는 고등학교 때 육사 그것도 싫으면 공사라도 가면 좋겠다는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면서부터 길 잃은 탕아가 되었다. 다행히 나는 눈이 나빠서 어른들은 잠시 그 꿈을 포기했다. 그리고 끝끝내 행정고시도 보지 않겠다고 얘기하면서, 아버지와 어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50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일생의 과업 따위는 없다. 신은 나에게 개떡 같은 시력과 엉망진창인 기억력을 주었고, 이제 그 시력과 기억력도 노안과 알콜성 치매로 거의 무의미해지기 직전에, 남자 아이 둘을 던져놓았다. 나에게 신이 준 마지막 소명이 있다면? 설거지와 밥하기? 지하철 역 앞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신이 그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생의 과업이 없다는 생각이, 대충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루에 세 끼, 간식 두 번, 낮잠 한 번, 이거라도 제대로 하려면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나는 60이 되어있을 것이고, 일생의 과업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성립하지도 않는 명제 가지고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생의 과업은, 20대에게만 유효한 말이다. 아직 살 날이 많기 때문에, 그의 '일생'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분히 무게감 있는 말이다. 50이 넘은 사람의 일생은, 어차피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일생이든 이생이든 혹은 반생이든, 별 의미는 없다. 객관성을 보여주는 저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직도 혹시 50년을 더 살아야 하지 않는가? 100세가 되어도 그 영혼이 탐나서 메피스토텔레스가 유혹하는 파우스트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난 파우스트급은 아닌 것 같다.

 

평생을 바쳐서 해야 할 일, 그런 게 불행히도 내게는 없다. 만약 있었다면? 이미 없는데 뭘 자꾸 '있었다면'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질문을 할까? 소명이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평생 할 일이 있어야 삶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어코 그 일을 완수해야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소명이라는 질문은 21세기적이지 않다. 나에게 소명이 있다고 말하면, 소명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한 저 많은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게 생각하게 된다. 소명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지금부터 살아갈 21세기는, 소명을 받은 사람은 열심히 자신의 소명대로 일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의미와 이유대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자신에게 일생의 과업이 있지 않다는 것을 50에 아는 것이 60에 아는 것보다는 낫다는 점이다. 60살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그러나 50, 아직 10년은 남아 있다. 소명 같은 것 없어도, 평생의 과업 없어도, 충분히 재밌고,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신이 세상에 우리를 내보낼 때, 사냥하고 서로 어깨싸움하라고 보낸 것 같지는 않다. 한 번 더 예수의 말을 빌리면,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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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여덟 번째 글의 제목을 잡았다. '일생의 과업, 그런 거 없다'. 원래는 아내 이야기가 요 자리에 올 거였는데, 룸쌀롱 얘기를 빼면서 이 자리가 비었다. 딱 요기가 중반부로 넘어가고, 후반부로 달려갈 첫 동력을 얻는 자리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달리 길게 뭘 쓸지 고민하게 되기도 하였다.

최소한 20개 이상의 주제가 이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갔다. 너 아니고, 너도 아니고, 어럅소, 너는 진짜 아니다... 그 지랄을 며칠간 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도 안되고, 진심이 아니어도 안되고, 폼 잡아도 안되고, 나만 재밌어도 안되고, 니미럴... 뭐, 이렇게 조건이 까다로워?

그러다 아예 며칠 때려칠까, 이러는 순간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제목이 일생의 과업, 이딴 거, 개소리, 요런 류의 생각이. 50이 되면, 남은 목숨 다 바쳐서, 이런 게 없어지는 게 정상적이다. 남은 목숨이 얼마 없는데, 바치긴 뭘 바쳐.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아니면 하던 거 하거나.

그리고 그걸 평생의 소명이라고 치장한다. 그렇게 해서 그냥 살던 대로 산다.

60이 되면, 아마도 뭔가 크게 바꾸기는 이제 어려운 시간이 된다.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일생의 과업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 그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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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딱 1/3 정도 지나는 시점이다. 4개로 나누어서 20개의 글을 쓸 생각이다. 이미 쓴 것과 아직 배치하지 않은 제목들을 다시 돌아봤다.

1. 어영부영, 50살이 되었다
2. 센치멘탈 블루스와 궁상의 시대
3.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4. 아홉수와 경차
5. 스텔라 인생관의 종말과 통닭집 사장
6. 우리의 21세기는 이제야 시작한다
7. 어디 가서 100만 원만 벌어와

엘레꽝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남만 가득한 곳으로
창고 대방출
편의가 있는 곳에 편안함이 없다
돈으로 결정되지 않는 삶
딱 30년만 더 살고 싶다
다운사이징 50대

아직 제목을 못 잡은 글들이 몇 개 있다. 그리고 큰 것들 몇 개는, '국가의 사기' 정리하라다 빼서 써 버렸고. 룸쌀롱 얘기를 빼면서 톤의 기조는 살렸는데, 어깨걸이로 치로 나갈 지점이 얇아졌다. 한 번 더 쳤어야, 팍 치고 나가는 지점이 생기는데, 받침대가 약하다.

치고 나갈 때 '창고 대방출'이 결정적으로 때리면서 승의 승, 바로 이거야 하고 나갈 수 있는데, 지금은 밟고 나갈 발판이 없다.

100만원을 밟고 나갈 수는 없는. 홉, 스텝, 점프, 3단 뛰기의 3요소 중 스텝이 하나 필요하다. 개운하고 가볍게 딱 뛸 수 있는 얘기가 필요하다.

점프 앤 스파이크, 여기에서의 스파이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잠시 정리하면서 스텝용으로 쓸 수 있는 얘기를 다시 생각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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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큰 애, 어린이집 옮기는 마지막 날. 표정 안 좋다...)

 

1.

가끔 아내에게 맞고 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맞고 살지는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도 아내에게 맞는 일은 거의 없다. 큰 애가 둘째를 밀어서 아찔하게 위험하게 하는 경우에 볼기 맞는 정도다. 그렇지만 큰 애가 아내에게 맞고 정말 서럽게 운 적이 있기는 하다. 여섯 살 때 큰 애가 장난한다고 갑자기 엄마한테 덤볐다가 순간적으로 2단 옆차기를 배에 맞고 떼굴떼굴 구른 적이 있다. 놀라서 아내의 반사신경이 작용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자 유도 금메달을 딴 김미정이 고등학생인 아들이 반항하느라고 덤볐을 때 "기술 들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같은 일이다. 깜짝 놀라서, 그야말로 기술 들어갔다. 졸지에 배에 2단 옆차기가 들어온 큰 아이는 놀라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지, 아이 같지 않은 '꺼이꺼이'하면서 울음보가 터졌다. 아내도 놀랐다.

 

"미안해, 엄마가 일부러 한 게 아니야."

 

엄마는 늘 받아주기만 하는 줄 알았던 큰 애가 진짜로 여섯 살 인생을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생각하는 순간이 되었을 것 같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다. 앉은 자리에서 급하게 발차기가 나와서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별 일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짜로 별 일 아니다. 그렇지만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아프거나 배고파서 혹은 장난감을 압수당해서 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울음이 아들에게 흘러 나왔다. 아내가 다리에 힘을 주면, 어지간한 강판은 그냥 부숴진다. 예전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다.

 

"이거, 힘주면 그냥 부숴져, 돈 들어. 그냥 나오지 그래?"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갔다가, 아내한테 너무 심하게 혼이 났다. 그래서 잠시라도 모면할까,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구었다. 아마 다른 집에서는 잘 안 벌어질 장면 같은데, 아내가 옆차기로 방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문을 잠그고 들어가면 아내는 옆차기로 문을 부술 수도 있다. 잠시 생각해봤는데, 문 고치는 비용이 싸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문 열고 나왔다. 어색하지만, 다음 날 문 고친다고 돈 들이는 것 보다는 그냥 혼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내는 태권도 4단이다. 처음 봤을 때에는 2단이었는데, 어영부영 3단을 땄다. 4단은 결혼하고 땄다. 승단시험 볼 때에도 강남에 있는 국기원까지 내가 모시고 갔었다. 보통 결혼하면 여성들은 태권도를 그만두는데, 내가 잘 보필해서 4단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했다고, 아내의 사범들이 나에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태어나서 훌륭한 사람, 그것도 진심으로 하는 얘기를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내의 사범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 코포아메리카나 대회에서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금메달을 안겨주면서 대통령 전용기로 돌아와 카퍼레이드를 한 사범님도 있고, 나중에 하버드 대학에 태권도 과정을 연 사범님도 있다. 4단을 따고 나서 아내도 사범연수를 받고 태권도 사범이 되었다. 가끔 태권도 하는 사람끼리 사범연수 얘기를 하면, 서로 남들이 오해한다고 눈치를 준다. '' 연수가 아니라 사 '' 연수라고 반드시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 아내의 뒷배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의리 하나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나도 기세에서 그렇게 밀리지는 않는다. 나는 태권도 4단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태권도 4단으로 뒷바라지한 남편이다. 여느 태권도 4단의 남편과는 다르다. 살면서 내가 전설이 될 그런 일은 한 게 없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내를 뒷바라지해서 결국 사범을 만들어낸 훌륭한 남편이 있다고, 태권도 피플 내에서는 이미 약간이 전설이 되었다. 나는 그게 제일 자랑스럽다. 우리나라에는 성인 태권도가 거의 없고, 성인들이 다닐 수 있는 태권도 도장도 없다시피하다.

 

나도 청와대에 아는 사람들이 조금은 있다. 그렇지만 아내를 당하지는 못한다. 가끔 청와대 근처를 지나면 검은 양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 발라 넘긴 아저씨가 갑자기 뛰어와서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 누나, 저예요, ."

 

아내와 같이 운동하던 남자 후배들이 청와대 경호실 같은 데에서 일한다. 이 얘기를 해줬더니, 사람들이 아내가 엄청난 운동권인 줄 잘못 알아들었다. 운동권이 아니라, 운동, 진짜 운동! 한참 아내가 운동 많이 하던 시절은 진짜로 어마무시했다. 궁금하다고 태극권 도장도 다니고, 별의별 희한한 중국 무술 도장들을 다녔다.

 

나는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는지 알았는데, 큰 아이는 어떤 엄마랑 사는지 잘 몰랐다. 결혼 초에 술 먹고 늦게 들어갔더니 정권이 바로 나왔다. 아내는 진짜로 때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뭘 잘 모르고 그걸 막았다.

 

"막아? 부러져."

 

진짜로 그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팔굽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고, 송곳으로 전체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때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손해다. 한 방이면 간다.

 

나는 아내가 태권도 5단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다. 게다가 5단부터는 논문도 써야 한다는 것 같다. 아내는 태권도 대신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 낳은 다음에 요가도 잠깐 하고, 라인 댄스도 잠깐 했다. 결국 발레로 바꾼 건, 운동이 안 된단다. 준비 운동만 하고 막상 본운동을 안 한 댄다. 요즘 아내는 다시 몸 만들기가 한참이다.

 

가끔 설거지 할 때, 반대편에 있는 냉장고에 다리를 올려놓고 한다. 아찔하다. 페미니즘이나 양성 평등 같은 복잡한 얘기는 난 잘 모른다. 그러나 아내에게 진짜로 맞으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진다는 정도는 나도 안다. 나만 손해다.

 

2.

아내와 함께 한 약속이 많다. 학번으로 치면 아내와 나는 9년 차이다. 내가 살았던 시대와 아내가 살았던 시대는 다르다. 80년대 한 가운데, 90년대 한 가운데, 우린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산다. 그렇지만 아내는 내가 아내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터무니 없이 일찍 죽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내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대충 이렇게 막 살 거면 이혼하자는 얘기를 했다. 여자로서, 자신이 가장 좋은 때라고 했다. 지금 더 지나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을 때 내가 죽으면, 자신은 아주 곤란하게 될 거이라고 얘기했다. 맞는 얘기다. 아내가 그냥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많은 것을 고민하고 꺼내놓은 얘기다.

 

우리는 타협이 아니라, 봉합하는 결론을 내렸다. 저녁 9시가 통금 시간이 되었다. 대충은 지키는데, 9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9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나는 수시로 통금 시간을 어겼다. 그 뒤로 내 삶은 변명투성이 삶이 되었다.

 

혹시라도 이혼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소득은 물론이고, 미래에 발생할 소득도 모두 아내에게 주기로 했다. 아이 둘을 맡은 아내에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뭐 먹고 살아? 그러니까 잘 하란 말이야! 말 대답 해봐야 맞아 죽는다.

 

내가 가진 것 모두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도 아내에게 주기로 했다. 그 와중에 남은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절반의 명의, 공동명의의 절반이다. 물론 그것도 행사할 수 없는 권리이고, 별 의미는 없는 자산이다. 그러면 혹시라도, 불안하지 않은가? 잘 하란 말이야!

 

이러면 뭐가 많이 바뀌었을까? 원래도 내 소득은 전부 아내에게 갔고, 나는 용돈 타서 썼다. 말만 그렇게 한 거지, 실제로 현실이 바뀌는 것은 별로 없다. 용돈이 더 늘거나 줄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소득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쓰는 돈을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수준으로 줄였다. 5. 7, 아이들은 점점 더 많이 먹는다. 옷과 신발도 점점 더 비싸진다.

 

통금시간과 재산분배는 요식적이고 실효성 없는 행위였지만, 실제로 의미 있는 행위도 있었다. 2016 4, 총선이 끝난 후 나는 정말로 아내를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총선에서 나는 민주당 정책공약단 부단장으로, 사실상 정책 라인을 총괄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행히 선거는 최악은 면했고, 당시 새누리당은 1당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몇 년간 파트너처럼 일했던 정세균, 그가 국회의장이 되었다. 태어날 때 숨을 못 쉬고 바로 집중치료실로 갔던 3, 둘째는 폐렴으로 연달아 입원을 했다. 아내는 결국 회사를 퇴직했다.

 

아내가 퇴직하기 전, 우리 집은 아내가 버는 돈으로 먹고 사는 데 충분했다. 그 시절 아내가 출퇴근용으로 산 차가 바로 지금의 모닝이다. 나는 밖에서 하던 일들을 내려놓고 아내가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돕기로 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두 아이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내서 돌보는 일이다.

 

아내가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시간을 좀 쓰기 시작한 다음 해, 아내는 작은 연구소에 비상근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좀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준비하려고 했는데, 정부의 어린이집 기준이 바뀌었다. 취업하지 않은 엄마들은 하루 종일 아이를 맡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애들 어린이집 등원을 원래는 아내와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했었는데, 그걸 내가 다 맡기로 했다. 아내는 탄력시간제이기는 하지만, 다시 상근을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 계산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소득이 더 많으니까, 내가 일을 더 하고, 아내가 아이를 보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다. 그건 단기적 계산이다. 아내가 나보다 10년 더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소득이 좀 적더라도 아내가 경제적 능력을 갖는 편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을 것 같다. 내가 떼돈을 벌거나, 고액 연봉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능력을 과하게 생각해준 얘기라서 고맙게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떼돈을 기대하면서 내 삶을 꾸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시간강사 시절, 도저히 강사 수입으로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취직시켜주는 대로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 강사 시절보다 조금 낫게 살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내가 아내를 사랑해서 혹은 아내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한 것일까? 나는 내가 가진 약간의 양식과 계산을 통해서 아내의 재취업을 지지하고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3.

"어디 가서 100만 원만 벌어오면 되겠네."

 

아내가 상근을 시작하기 직전, 연봉 협상이 다 끝나고 나한테 한 얘기다. 원래도 작은 연구소라서 많이 주지는 못하고, 탄력근무를 하니까 더 줄었다. 아내는 딱 우리 집 생활비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얼추, 100만 원이 비었다.

 

어디 가서 100만원을 벌어오지? 물론 아이들 본다고 해도 그 이상은 번다. 큰 소리 탕탕 쳤다. 얘기치 않은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 다음 달, 나의 소득은 0원이었다. 그런 때도 가끔 있다. 외부 웹 드라이브를 쓰는데, 해외 결제 자금 2천원이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문자가 떴다. 아이고. 창피해서 아내에게 말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다른 게 또 못 나갈지 몰라서 아내에게 죽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궁상 떨었다. 아내는 웃었다. 내 통장에 200만원을 넣어주었다.

 

한 달에 100만원만 벌어오면 되는 삶, 그게 나의 50대가 되었다. 해방의 느낌은 아니다. 거친 남자 아이 둘을 맡는 거라서,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홀가분한 것도 아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도원, 몽생미셀에 갔을 때, 거기서 방을 빌려주는 것을 보았다. 몇 달간이라도 거기에서 너무너무 살고 싶었다. 시도는 했는데, 여건이 안되었다. 몽생미셀 높은 탑의 창문에서 홀연히 바다를 보면서 지내면 홀가분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런 건 아니다. 어깨 위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추운 날 노천온천에서 한 시간 이상 땀을 흘리고 났을 때 드는 아무 생각 없음, 그런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린이집을 옮기기로 했다. 원래도 알았지만 실제로 옮겨보니까 진짜로 한국의 행정은 여전히 좀 너무했다. 형이 먼저 옮겨가야 둘째의 우선 순위가 높아져서 빨라야 한 달, 늦으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자리가 먼저 난 아주 먼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좀 편하기 위해서 집 근처로 애들 어른이집을 옮기는데, 그 때까지 나는 아침 저녁으로 두 군데를 돌아야 한다. '일시적 오버 티오 허용', 요런 작은 문구 하나면 해결될 일을 아직도 안 한다. 그들에게는 작은 일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침 저녁으로 지옥의 레이스를 하게 되었다. 한 달에 100만원만 벌어도 되는 상황을 음미하며, , 이제 내가 21세기에 왔군, 이러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의 행정은 20세기적인 것 같다. 전산으로 움직이고, 인터넷으로 개방한다고 해서 21세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잘 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들도 있다고 들었다. 잘 이해는 가지 않는 마음이다. 난 좋다. 아내가 강한 것도 좋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좋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좋다. 남들 보기에는 넉넉하지 않은 돈이겠지만, 그래도 다시 경제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도 좋다.

 

그리고 내가 100만 원만 벌어도 되는 상황이 된 것도 좋다. 원래도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크게 되고 싶은 것도 없다.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돈의 크기가 욕망의 크기다. 욕망이 커서 더 큰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돈을 결정해놓고 거기에 욕망의 크기를 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제 100만 원 만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걸 욕망이라고 사람들이 부를까? 내가 어렸다면 왜 사람이, 아니 남자가 왜 그렇게 쫀쫀해, 그렇게 사방에서 난리를 쳤을 것이다. 나도 이제 나이 50이다. 나에게 추례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쫀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결정을 하고, 아내는 나에게 몇 달만이라도 술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렇게 한다고 했다. 마지막 날, 정말 친한 친구 두 명과 남대문 시장의 정말 허름한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진짜 맛있었다. 술을 영영 끊지는 못할 것 같다. 진짜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21세기,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이제 21세기로 간다. 그 준비가 되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21세기로 넘어오는데 필요한 돈이 88만원이었다. 돈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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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이 막혀 헉 헉, 못 살겠어요

뭐라고? 헤어지자구?

등 뒤에서 하나둘 창문이 스르르 닫히는, 혁대가 딸각 풀어지는 소리 헉헉, 그러나 말로 번역될 수 없었던 말들, 때리지 마 제발 때리지만 말아요

도둑맞은 첫사랑이 부패하기 시작하는 냄새 진동하던 그 여름의 오후, 기억을 통과한 상처는 질겨져 있다 저기 저 방충망 바깥에서 윙윙대는 모기처럼 지금은 위험할 것도 없는데......

 

(최영미 시짐 <서른, 잔치는 끝났다>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집을 끼고 사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일상에 시를 자주 읽으면서 살 것 같기는 했는데, 막상 서른이 되니까 그렇게 시를 많이 읽지 못했다. 바쁘다는 건 다 거짓말이고, 시인들이 날 것으로 던지는 시대의 진실에 마주 서기가 무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가 첫 직장이었다. 번듯하고 연봉 잘 주는 직장에 가면서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 상처도 분명히 생겼던 것 같다. 시를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은 그 상처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황석영 선생에게 시인과 소설가의 차이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87, 시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연단 앞 쪽에들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가들은 조금이라도 많이 보기 위해서 연단 뒷줄에들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보다 했다. 어차피 우리는 연단 근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저 멀리에 서 있었다.

 

1994년에 최영미의 시집을 읽고서 나는 충격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집을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표현으로 기억한다. 상업적이고 트렌드를 만든 시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시는 별 거 없다.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 시가 시집의 나머지 최영미의 시 그리고 그녀의 문학적 삶을 이해하게 되는 단서라고 생각한다.

 

"때리지 마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

 

최영미는 나도 읽었던 원전 중의 일부를 번역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운동권 선배와 짧은 결혼생활을 했던 정도로 알고 있다. 아마 엄청나게 잘 나고,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던 남자였을 것이다. 혁대로 상대방을 때리는 일, 시인이 결국 펜을 들게 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약간 먼저 나온 김형경의 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도 충격적이었다. 80년대, 운동권, 대학생, 복잡한 해석들이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간단하지만 충격적인 얘기였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 선배가 후배를 강간했고, 그래서 진정으로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간을 했던 남자 선배와 여자는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어쨌든 삶을 꾸려나가게 된다. 이건 문학적 봉합이다. 그들은 과연 행복하게 되었을까? 1993년에 김형경의 데뷔작은 운동권 문학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는 그 수많은 운동권 강간 사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봉합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의 얘기를 바로 다음 해인 최영미의 시,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딱 한 번 혁대로 맞아본 적이 있다. 6학년 때 아버지에게 맞았는데, 다음 날 아버지는 날 데리고 냉면집에 갔다. 그게 처음 냉면을 먹어본 날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은 별로 없다. 그렇게 폭력적인 양반은 아니었고, 적어도 내 기억에는 어머니를 때린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에게 뭔가 심경적으로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그 정도로 이해한다.

 

성추행, 성희롱, 우리가 살았던 그 80년대는 그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혁대로 때리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을 최영미를 통해서 알게 된 후, 정말로 나는 충격이었다. 이런 일들은 내부에서 조용히 무마되는 경우가 많았다. 혁대 혹은 그 이상의 운동권 데이트 폭력 사건은 201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폭행사건, 이런 것들은 내부적으로 무마되었고, 당사자들과 일부 관계자 선에서 징계가 내려갔다. 그리고 이 사회는 거의 몰랐다.

 

1994, 최영미가 '때리지 마'라고 외치던 순간, 우리에게 21세기는 부쩍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21세기 하고도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21세기가 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아직도 20세기에 살고 있었다. 공장으로 내려간 비밀조직 내에도, 유명한 노조 지도부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끊임없이 벌어졌다. 민중 운동에서 시민 운동으로 큰 틀이 바뀌었지만, 그 시대의 찬란한 전통은 끝나지 않았다. 좋아했던 후배 활동가가 성희롱 사건으로 단체를 결국 떠나게 된 게 몇 년 안되었다.

 

21세기적인 최영미의 시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최영미의 시집을 읽었다. 최영미가 혁대로 맞았던 사건을 절절하게 썼다는 대목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의 잔치가 끝났다는 것을 슬퍼하기만 했지, 그녀가 보았던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다.

 

2.

우리는 모두 약간씩 운동권이었다. 우리가 싸웠던 사람들에 비해서 도덕적 우월성이 우리에게 있을까? 남자 엘리트 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크게 우월하게 내세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상처가 남는다. 자기 상처가 아프다는 얘기만 했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데, 진짜로 우리는 별 거 없었다.

 

21세기가 왔다. 달력에서만 왔다. 진보와 보수가 10년씩 정권을 나누어 가졌다. 80년대를 사는 사람들과 70년대를 사는 사람들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80년 광주로부터 자신의 출발점을 찾는 엘리트들 그리고 72년의 유신으로부터 자신의 근거를 찾는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정권을 잡았다. 술자리에서 찬란한 80년대를 논하는 사람들과 화려했던 70년대를 논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았다. 시대는 지체되고 정체되었다. 박근혜는 새마을 운동과 함께 더 앞으로, 60년대로 가고 싶어했다. 이건 좀 너무했다. 70년대, 80년대까지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허용하더라도, 60년대는 좀 심하다. 김기춘이 결국 감옥에 가게 된 이유가 이런 너무한 과거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청년들은 70년대, 80년대, 다 아무 상관도 없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에서 자신들이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헬조선'이라는 용어 아닌가? 청년들이 이번 생은 망했어, 이생망을 외치고 있을 때, 남성 엘리트들은 70년대와 80년대를 가지고 온갖 사상 투쟁을 벌였다. 한국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었을까? 혹은 좌우로 나뉘었을까? 남성 엘리트들의 권력 다툼과 자기들끼리의 어깨 싸움만 있었지, 그렇게 이념으로 우리가 나뉜 적도 없는 것 같다.

 

우리의 21세기는 2016 5, 강남역에서 오기 시작한 것 같다. 노래방 화장실에서 그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강남역 출구에 여성들이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그 공포감, 그것이 외면화되면서 사회로 드러났다. 2000년 밀레니엄이라고 불꽃놀이도 하고 수많은 행사를 했다. 시대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하는 관제행사, 자본이 하는 마케팅 행사, 시대가 그렇게 오지는 않는다.

 

그 사이에 촛불집회가 있었고, 정권이 바뀌었다. 서지현 검사가 오래된 성희롱 사건을 고백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 외침은 20년 전에 나왔어야 했다. 1998, IMF 경제 위기 한 가운데에서 DJ가 집권했다. 그 때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여전히 남성 엘리트들의 시대였다. 좌파든 우파든, 좋은 대학 나오고, 10대 때 공부 잘 했던 남성들이 모든 것을 쥐었다. 우리는 아주 짐승처럼 살 거나, 그보다는 약간 덜 짐승처럼 살 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걸었다. 70년대나 80년대나, 교활하거나 약간 덜 교활하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유리한 시대였다.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 하겠나?

 

그 얘기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21세기가 온다는 것이 왜 여성의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 이렇게 물어볼 수는 있다. 노동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 심지어는 지역의 작은 풀뿌리 운동까지, 내부의 성폭행, 성희롱 사건으로 골머리 한 번도 안 썩어 본 단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할 정도 아닌가?

 

우리의 몸만 21세기로 왔지, 정신과 영혼 모두 20세기 저 언저리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낭만과 행복도 심지어는 개수작까지, 우리는 20세기형 인간들이었다. 첫사랑, 그리움, 아름다웠던 추억들과 함께 개수작까지, 우리 몸에 훈장과 상처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게 떨어질까? 잘 안 떨어진다.

 

3.

내가 가장 최근에 본 성희롱 사건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친한 변호사들까지 붙어서 같이 고민한 사건이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편의상 그를 '성희롱'이라고 불렀다.

 

과거의 일은 차치하고, 내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4년 정도 되었다. 직원 회식이 있던 날, 성희롱은 비정규직 직원을 회식이 있다고 불렀는데, 막상 도착해보니까 유흥 주점이었다. 그곳에 성희롱과 여성은 단 둘이 있게 되었다. 회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큰 회사의 자회사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회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대표적 회사인 것은 맞다. 성희롱은 정규직이었고,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많은 성희롱 사건은 술이 중간에 끼지만 이 사건은 술과는 상관없이 사전이 계획된 것이다. 구조적이고 상습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 일을 접하게 된 우리 모두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

 

많은 여직원들이 이 일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회사에서 생겨난 이 일에 본사의 오래된 여직원들이 사건에 개입하였다. 고졸 출신으로 이제는 간부가 된 선배 여직원들이 여성을 만났고, 자신들의 얘기를 해주면서 위로도 하고 힘도 보탰다.

 

며칠 후 성희롱은 여성의 집을 찾아갔고, 부모를 만났다. 그래서 결론은? 비정규직인 여성은 퇴사했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여졌다. 자회사는 감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여러 경로로 본사 감사실로 제보가 들어갔다. 자회사는 감사가 별도로 없기 때문에 감사업무를 행정이 담당하는데, 성희롱이 바로 그 감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었다. 자기가 자신을 감사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사건은 종료하였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움직이기 전에 외부의 제3자가 실제로 사회에 공개하는 일 외에 행정적으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법률적 자문 결과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성희롱은 우리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산다." 20대 비정규직 여성, 30대 파견직 여성, 이들은 누가 보호할 것인가? 방송을 하면서 톨 게이트에서 근무하는 파견적 여성들의 성희롱 사건들을 접하게 되었다. 노래방 2차 등등 차마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진짜로 형편무인지경의 일들이 비정규직 여성과 정규직 남성 특히 관리직 남성 사이에서 횡행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펼쳐진 21세기였다. 70년대 서울에 일하러 온 '공순이들' 사건은 소설에서만 접했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늘어나지만 비정규직 비율도 함께 올라간다. 눈 감고 있는 것 외에 우리가 무슨 일을 했나? 이제 50이 된 우리들이 행정직을 하고 중간 관리자를 하는 시기에 벌어진 일들이다. 우리는 약간 비겁했거나, 많이 비겁했거나, 그렇게 40대를 보냈다. 성희롱의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조직에서, 그걸 관리하고 처리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 많은 비정규직을 포함한 여성들의 성폭행과 성희롱 사건을 누가 덮고, 누가 쉬쉬했겠나? 우리는 아무도 이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1세기? 직원 회식한다고 나갔더니 유흥주점에 행정직원이 혼자 기다리고 있는 그 황당한 사건을 경험한 비정규직 여성에게 물어보라. 이게 21세기냐?

 

4.

우리 모두가 완벽하게 무오류이며 무결점이 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잘못도 하고, 가끔은 너무 미안하고 창피한 실수도 한다. 사랑과 추행이 밀리미터 단위로 잴 수 있는 그런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것,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게 생각했던 짝사랑, 거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지금 기준으로는 스토커다. 이젠 더 이상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발만 더 나아가면 경범죄, 주거침입죄, 협박죄, 이런 처벌이 따를 수도 있다. 사랑한다고 계속 이메일 편지를 쓰면 법은 사이버 스토킹으로 규정한다. 그리운 마음은, 그야말로 마음만... 그게 21세기다.

 

70년대든 80년대든, 남성 엘리트 사회를 모델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왼쪽에 설 것인가, 오른 쪽에 설 것인가, 위계가 확실하고, 위아래가 질서 정연한 사회 모델이다. 우리는 몸만 21세기로 왔지, 위 아래 구분을 철저하게 지키는 그 20세기적 위계 질서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얼래? 그런데 사회적 기준이 변했네? 70년대가 보수의 시대라서 그렇다고 치자. 그들은 늘 자기 자리에 있고 싶어했다. 시대보다 뒤에 있는 것, 그들에게 흠도 아니다. 우린, 원래 이래요! 80년대는 진보의 시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어느덧 우리도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시대가 변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정서적으로, 시대보다 뒤에 놓이게 되었다. 그게 강남역에서 시작된 21세기의 서막이다.

 

우리가 술 마시면서 즐겁다고 하는 옛날식 유머, 반 이상은 이 시대가 성희롱이라고 부르는 내용들이다. 학술적으로 얘기하면 아나싱크로니, 시대착오다. 부드럽게 얘기하면 개저씨들의 아재 개그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말하면, 개수작들이다. 그런데 그런 농담을 안 하면 왠지 경직된 것 같고, 노는 것 같지가 않다. 그게 우리가 맞게 된 50대다.

 

공부 같이 한 친한 친구가 있었다. 정말로 친했고, 1년 정도를 붙어 다닐 정도로 너무너무 친했다. 그 친구는 이대를 꼭 '계화여대'라고 불렀고, 기생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했다. 약간 어색하기는 했는데, 그 시절에는 정색을 하면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냥, 시골 출신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러고 넘어갔다. 지금 그런 말 하면 큰 일 난다. 공식적으로 내가 대학에 연구원으로 등록된 마지막 직장이 이화여대였다. 마지막 대학원 강의도 이대에서 했다.

 

우리가 20세기에 두고 왔어야 하는 건데 21세기로 가지고 온 것은 우월감이다. 그걸 거기에 두고 왔었어야 했다. 그러나 희망의 21세기, 밀레니엄이라고 하는 데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이것저것 다 싸질머 매고 21세기로 왔다. 정작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큰 일 난다는 얘기를 하면서 20세기적 가치를 너무 많이 가지고 왔다. 수많은 성폭행과 성희롱 사건의 핵심에는 우월감이 있다. 그 반댓말은 평등이다. 한 때 사회가 우리를 '평등파'라고 부를 정도로, 진짜로 평등, 평등, 평등만 외쳤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성에서, 단 한 번이라도 평등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경차를 몇 년간 타고 다니면서 평등의 소중함을 배웠다. 평등하게만 대해주세요... 생각해보니까 나도 늘 우선순위였고, 특별 대우를 받고 살았다. 힘들어? 뭘 잘 몰라서 했던 찌질한 변명에 불과하다. 경차를 타고 나서야 삶의 평등, 일상성의 평등,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국의 수많은 조직의 관리자와 의사결정자들은 곧 우리 또래, 내 친구들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성폭력 은폐 사건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더는 할 변명이 없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 정도에 맞춰서 겨우겨우 변한 것이 된다. 그게 엄청난 일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50대가 되어서도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리워할 수도 있다. 못 견디게 그리울 수도 있다. OECD 평균 혼외출산율이 40% 정도 된다. 이혼하는 것도 사회적으로는 아무 문제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평등한 것이어야 한다. 평등한 영혼의 평등한 사랑, 그것이 21세기가 시작되는 출발이다.

 

21세기는 평등의 세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가 가장 결핍한 요소가 평등이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차별이 늘어나는 시대였다.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경제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21세기는 평등을 갈구하고, 평등을 찾는 시대가 될 것이다. 순실이도 민주주의라는 말은 알았다. 그러나 순실이가 평등이라는 단어를 알았겠나?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겠나? 에이 21세기인데, 평등 같은 그런 옛날 말이! 아니다. 순실이와 순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단 하나의 개념은 바로 평등이다.

 

1994, 시인 최영미는 때리지 말라고 노래했다. 그 얘기가 21세기적인 것이다. 그 노래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정말로 그 노래가 사회의 핵심으로 가는 시대가 열린다. 우리는 그 시대를 열지 않았다. 너무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여성 비정규직, 여성 조교, 여성 작가, 여성 스탭, 이들과 평등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 우리처럼 하라는 시대는 20세기에 끝났다. 이제 우리의 21세기가 시작된다.

 

여기에 와야 한다. 그래야 다음 길이 열린다. 그게 우리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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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 노트북 없이 지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올해는 하나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놀이 겸, 뭐가 있나 살펴보는 중이다. 그 사이에 노트북 브랜드가 확 줄었다. 성능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고, 거기서 거기다. 혁신이라고 할 게 별로 없다. 콤패크에서 하이버네이션 기능을 만들 때, 이게 많은 경제학자들을 자극했다. 오래 전 책장에서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가 나왔던 게, 바로 이 하이버네이션 기능 때문이다. 한 시대를 이끈, 작지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정도 변화는 없는 것 같다.

이재용이 얼렁뚱땅 감옥에서 나왔다. 나도 내가 살펴보는 노트북 리스트에서 삼성을 뺐다. 소심한 복수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그 추운 겨울에 애들 데리고 촛불집회 근처에 얼쩡거렸던 게 너무 억울할 것 같다. 그리고 언제 삼성이 보낸 킬러들이 밤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소심하게... 삼성 불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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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이 글 부탁하시면서 저녁 때 멜로 보내주신 사진...)

 

 

정말 추운 날이다. 내일은 더 추워진단다. 집은 따뜻하다. 일곱 살 큰 애는 혼자서 책 보고 있고, 다섯 살 둘 째는 혼자 로봇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손이 끼었다고 울면서 뛰어온다. 일하다 늦게 들어온 아내는 내가 비벼준 비빔밥을 맛있다고 크게 한 입 먹었다. 나만 혼자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특별히 되고 싶은 것도 없지만, 특별히 미워하는 것도 없는 삶이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냥 그러세요 하고 만다.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너무 비싸, 이러고 만다. 행복하기 위해 먼저 불행해져야 하는 건 이젠 좀 지겹다. 그리고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고, 더 큰 혐오를 갖는 것도 이젠 좀 피곤하다. 추운 날, 따뜻한 집에 있으면 더 바라는 게 없다.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고, 냉장고에 적당히 먹을 게 있고, 집은 따뜻한데, 뭘 더 바랄 것인가? 천국의 모습을 누군가가 그린다면 이것과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재용이 감옥에서 풀려났다. 아주 희한한 판결이 나왔다. 그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지옥갈겨! 잠시 생각하다가 기도를 한 마디 더 한다. 생지옥 갈겨! 그들의 부모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아멘...

천국을 먼 곳에서 찾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추운 겨울, 잠시만 돌아보면 사방에 보살이고, 천국은 천지에 널렸다. 추운 날, 더욱 감사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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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가 밤새 열이 올랐다. 아이들 아프기 시작할 때에는 이유가 없다. 이것저것, 일정 일단 다 스톱.

 

아침에 안 그래도 늦었는데, 둘째는 공룡 가지고 전투 놀이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선생님, 여기서 이러면 안됩니다.

 

좀 웃길려고 둘째한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랬더니 둘째는 물론이고 큰 애도 웃음보가 터졌다. 선생님, 선생님, 그러면서 둘이 뒹굴기 시작한다. 이거 아닌데...

선생님, 또 해봐...

 

아침부터,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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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둘 키우느라 부엌 등 온 서랍마다 다 이렇게 안전장치를 해놓고 살았었다. 이제 둘째도 다섯 살이 되었고, 같이 쓰는 방을 하나 마련해주고 따로 재운다. 기저귀의 시대가 끝나더니, 이제 아이의 시대는 완전히 우리 집에서 끝나간다. 7년의 기억이 아련하다. 한 시대가 또 이렇게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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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륜 구동 승용차 스텔라, 한국 중산층 논의의 시작을 알렸다...)

 

스텔라 인생관의 종말과 통닭집 사장

 

1.

"20대에는 20평 아파트에 엑셀을, 30대에는 30평 아파트에 프레스토를, 40대에는 40평 아파트에 프레스토를 타고 살았으면 좋겠어. 전세든 자기 집이든 그건 상관없고. 그리고 그 때 그 때 전자 제품 좀 살 수 있고. 난 그렇게 좀 인간답게 살았으면 좋겠어."

 

89년에 친구가 했던 말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엑셀은 악센트, 프레스토는 아반떼, 스텔라는 쏘나타 정도 된다. 그 시절에는 차가 흔하지는 않았으니까 차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는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다른 친구가 얘기했으면 그게 인생 목표냐고 뭐라고 한 마디 쏴붙여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걸 얘기한 친구는 대학 시절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상황이었다. 그 때는 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 정도 생각했다. 게다가 그 시절에 우리 아버지가 타던 차가 바로 그 스텔라였다. 내가 여기에 뭐라고 보탤 말은 없었다.

 

80년대 대학생들의 가정은 지금보다는 어려웠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지금에 비할 것은 아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드물게 사장님 아들을 제외하면 정말로 힘든 농가에서 온 경우가 많았다. 서울이라고 해서 사정이 딱히 낮지는 않았다. 집이 없는 친구들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집이 너무 가난해서 자기만이 아니라 아직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 걱정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막 넘어서는 시점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시점에는 1인당 국민소득 2,800달러, 3천 달러를 바라 보는 순간이었다. 3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의 경제는 10배 정도 커졌다.

 

대학 진학률도 많이 높아졌다. 20% 내외였던 대학진학률이 80% 가깝게, 4배 정도 커졌다. 주가소유율은 비슷하다. 1950년대에는 국민의 80%가 자기 집에 살았다. 박정희 시절부터 자기 집에 살지 않는 국민이 급격하게 늘기 시작해서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시절 58% 정도의 국민이 자기 집에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수치는 거의 비슷하고, 약간 줄었다.

 

모든 대학생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20대에는 20, 30대에는 30, 40대에는 40평 아파트를 사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때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군인들의 시대가 만들어놓은 삶의 방식이다. 요즘은 이걸 중산층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지만, 80년대에는 중산층 개념은 지금처럼 광범위하지는 없었다. 나중에 분석해 본 결과로,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이 중산층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중산층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부자와 서민, 한국에는 이 두 개의 집단만이 있는 듯했다.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를 서민이라고 생각했다. 그 서민의 일부가 분화해서 지금의 중산층이 되었고, 나머지는 그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1997 12월 이후에 벌어진 그 엄청난 현상을 그 시절의 우리는 아직 몰랐다.

 

나는 20대에 20평 아파트에 엑셀, 30대에 30평 아파트에 프레스토, 40대에 40평 아파트에 스텔라를 타겠다는 그 마음을 '스텔라 인생관'이라고 불렀다. 그래서인가? 내 친구들은 취직하자마자 엑셀들을 엄청나게 샀던 것 같다.

 

지금 평범한 대학생들이 20대에 20. 30대에 30, 40대에 40,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차를 사고, 그리고 식구들을 위해서 더 큰 아파트를 사겠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대학생이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파트는 커녕, 대학생 자동차 면허 취득 비율도 줄고 있다.

 

80년대에 많은 대학생들이 꿈꿨던 스텔라 인생관, 그것은 이미 한국에서 종료하였다. 대학생들의 꿈은 이제 더 소박하고, 더 작아졌다. 50이 될 때까지, 아마 다들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처음에 이 얘기를 나에게 했던 내 친구도 자신이 생각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살았다. 그도 진짜 열심히 살았다. 가끔은, 너무 열심히 산다고 걱정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열심히 살았다 치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 세상은? 중산층 2세가 다시 중산층으로 재탄생 할 수 없는 시대를 만났다. 바로 우리들의 자녀에 대한 얘기다. 열심히? 너무 열심히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텔라가 아니라 강남 쏘나타로 불리는 렌서스나 아우디를 탔다고 치자. 강남 산테페로 불리는 레인지로버 이보크 아니 디스커버리를 탔다고 치자. 그러면 인생에 행복만이 남을까? 50이라는 나이는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세상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다. 집단적으로, 집체적으로 말이다.

 

2.

87년 대선이 끝나고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어차피 술은 마시는데, 이 핑계 대고 마시고 저 핑계 대고 마셨을 뿐이다. 그 선거가 끝나고 참 많이들 울었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 때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 진짜 좋은 세상 만들자."

 

그 때 뭐 별 거 알지도 못했지만, 힘이 없는 게 너무 아쉬웠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정말 억울했다. 이탈리아 좌파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감옥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걸 '헤게모니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괜찮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사회에 더 많이 진출해서 세상을 좋게 만들자, 그 정도 얘기로 짧게 요약할 수 있다.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 맞는 얘기도 아닌 것 같다. 이탈리아는 마피아 혹은 그림자 권력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게 더 편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나는 결혼이 좀 늦었고, 아이는 그것보다 훨씬 늦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자녀들이 어느덧 대학에 가거나, 고등학생이 되는 동안, 약간은 비켜서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출판계에서는 한국의 출판의 미래에 대해서 아주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386의 자녀들이 10대가 되고, 20대가 될 것이니까, 교양 서적과 사회과학 서적 등 소위 양서, 좋은 책들의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들 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내 친구들이 부모가 되자, 원정출산이 생겨났다. 미국 본토까지는 못 가더라도 하와이에서 아이를 낳아서, 태어날 때부터 미국 국적을 주는 현상이 유행했다. 견디다 못한 미국에서 원정출산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걸 피해서 아예 몇 달 전부터 하와이 등 외국에 미리 가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걸 위해서 방을 빌려주는 렌트 사업이 다시 유행을 했다. 건너 건너 아는 미국인이 하와이에서 몇 년 전에 그 사업을 시작했다. 큰 떼돈은 아니더라도, 괜찮게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게 뭐냐!

 

죽어라고 대치동까지 가고, 그게 안되면 지역의 비싼 학원이라도 가는 흐름을 내 친구들이 선도했다.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 열풍을 주도한 사람들, 그게 어디 다른 외계나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386들이 부모가 되면서 생겨났거나 강화된 현상들이다. 우리는 두환의 과외 금지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과외 안하고 자란 첫 세대다. 그래서 그들이 부모가 되면 자연스럽게 사교육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 교육 전문가들도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다. 딱 그 모양이다. 이게 뭐냐!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과 삶의 일상성은 좀 다르다. 우리의 정신은 고상한 것을 추구했을지 몰라도, 집단적으로 우리의 일상성은 개판이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우리는 모두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다. 일부는 아주 열심히 스텔라 인생관대로 40대 아파트를 위하여 뛰었다. 그렇지 않고 정말로 민중단체나 시민단체에서 자신의 인생관대로 살아온 친구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이 되었다.

 

내 주변을 잠시 돌아본다. 아주 잘 사는 친구들이 있다. 성공한 친구들은 돈을 아주 많이 벌었다. 그렇지만 평생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벌써 벗어난 친구들은 얼마 없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도시빈민들이 있다. 나머지는 다 비슷비슷하다. 거기서 거기다. 집단적인 정치적 지향성은 민주당 대부분, 정의당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녹색당, 그 정도다. 그렇지만 삶도 그렇게 이념적으로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간단하게, 자녀들에게 극성으로 과외를 시킨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대충 절반 절반 정도로 나뉘어진다.

 

우리들의 50대는 어떻게 될까? 불행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20대 때 50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스텔라 인생관도 40대에서 끝난다. 그러면 50대에는 50, 60대에는 60? 그렇게 자세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미 40평대 아파트를 가지고 최소한 쏘나타 정도는 탄다면 승, 아직도 그 정도의 최소한의 중산층 자산을 만들지 못했다면 패, 이렇게 되는 것일까? 승자승, 패자패, 우리를 기다리는 50대는 이런 모습일까? 적어도 지금까지 한국의 50대들이 살아온 방식은 그랬다. 그들은 MB와 근혜를 구세주처럼 여기면서, 아파트값이 오르기를 불공 들였고, 동네에 큰 개발 사업이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새벽 기도회에 나갔다.

 

앞으로도 승자승, 패자패, 50대에는 더 이상 변화가 없는 시대가 계속 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진 거다. 이미 이긴 얼마 안 되는 친구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물려주겠다고 움켜쥐고, 나머지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녀들까지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건 이미 우리가 진 거다. 그리고 우리가 졌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평균적으로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

 

20, 우리는 결혼할 생각은 했지만, 자녀는 아직 없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식만 살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앞의 50대들은 그렇게 살았다. 우리도 그렇게 살 것인가? 윤리적이거나 사회적인 필요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간단한 게임 이론이다. 전체를 위한 공동의 해법은 그냥은 도달할 수 없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 (2001)>의 수학자 내쉬가 증명한 것이고, 그걸 내쉬 균형이라고 부른다. 우리 앞에 있던 50대가 살았던 그 삶이,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내쉬 균형이다. 이걸 지금부터 우리가 깰 수 있을까? 87년에 전두환 앞에서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시대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때와 논리적이고 구조적으로 상황은 같다. 그 때는 우리의 청춘이 걸려 있었고, 지금은 우리의 자녀가 걸려 있다. '' 청춘이냐, '우리 모두의' 청춘이냐, 이게 87년의 구조다. '; 자녀냐, '우리 모두의' 자녀냐, 지금 이게 우리가 부딪힌 게임의 구조다. 조금만 틀을 바꾸면, 우리는 많이 바꿀 수 있다.

 

4.

40대에 40평 아파트와 스텔라를 위해 죽어라고 달려가는 스텔라 인생관은 이미 몇 년 전에 종료했다.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원래의 이 프로그램은 40대까지 최대한 에너지를 축적했다가 50대가 되면 다시 그걸 팔아서 일부는 자녀에게 주고, 나머지는 평생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동물 생태학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많은 동물들은 새끼를 낳는 과정에 에너지의 거의 대부분을 사용한다. 그걸 위해서 몸의 다양한 부분에 지방과 같은 에너지들을 축적한다. 80년대부터 한국인은 그 에너지를 외부 기관에 저장했다. 그게 아파트다. 물론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살 필요도 없고, 그렇게 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최소한 지난 50년간, 한국에서는 아파트를 출산용 에너지의 축적기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점종이었다. 연어의 암컷처럼 같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자신도 급격히 노화하면서 죽는 생명체와 다른 것은, 자기도 좀 먹고 살야아 한다는 점 아니겠는가? 인간의 2세들은 너무 약하게 태어난다. 부모도 꽤 긴 기간을 살아야 한다.

 

간단하게 보면, 스텔라 인생관은 DNA 정보 구조와 같다. 메인 시그널은 딱 두 개다. 아파트와 자본, 큰 집을 가지고 싶은 본능은 아파트로부터 나오고, 좋은 차를 가지고 싶은 욕망은 자본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이 두 가지의 본능을 가지고, 나머지 소소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이 본능을 뛰어넘어 공공의 선을 위해서 생각을 한다. 나쁘게 표현하면 집단 현상이다. 좋게 얘기하면 종 폴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 같은 책에서 얘기한 인간만이 갖는 실존적 선택이다.

 

우리 대부분은 일상 속에서 그냥 이끌려서 행동한다. 맨 번 숙고하지 않고, 매 번 무한한 정보를 처리면서 의사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진화경제학에서는 이걸 '루틴'이라고 부른다. 거의 대부분은 루틴대로 움직이고, 그게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와 소소한 판단 오류들을 줄여준다. 스텔라 인생관, 그건 우리 윗 세대부터 우리까지 갖추게 된 루틴과 같은 것이다. 루틴을 따를 것이냐, 따르지 않을 것이냐, 그건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였다.

 

30대가 되면서 자기가 살던 집을 20대에게 넘기고, 40대가 되면 다시 30대에게 넘겼다. 그렇게 40대에 40평의 아파트를 가지게 되었다면?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20대들은 20평 아파트 따위는 꿈으로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이라는 거대한 개념이 아니라, ''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최고의 방은, 창문 달린 방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방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 2010년대가 되었다. 그들은 차를 살 필요도 느끼지 못했지만, 결혼 따위는 "개나 줘버려", 그렇게 되었다. 40대에 가졌던 40평은 누가 사주나? 20대가 20평 아파트를 사지 않으니, 모든 것은 지체되고, 결국에는 맨 마지막 40평 이상의 아파트에서 문제가 생긴다.

 

몇 년 전부터 대형평수 아파트는 거래도 별로 없고, 가격도 거의 오르지 않는다.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20평 아파트, 30평 아파트, 40평 아파트, 전세 가격이 거의 같다. 그 이상 큰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크면 클수록 관리비만 더 나오니까 결국 전세비가 같아진다. 작은 아파트에 전 연령대가 다 모여서 같은 시장에서 경쟁한다. 40평 아파트는 점점 더 애물단지가 되어간다. 앞으로 더 할 거다.

 

지금부터의 50대는 설령 그가 40평대 아파트를 40대에 구했다고 하더라도, 별 볼 일 없는 시대를 맞게 된다. 30년을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아냐, 이 앞에 서게 된다. 근혜 시대에 청와대 경제수석인 우병우가 결국 감옥에 갔다. 그가 우리 또래이고, 한 다리만 건너면 알만한 사이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보다 아주 열심히 산 것 같다. 그도 별 수 없이 감옥에 갔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딜레마다. 열심히 살았어도 별 볼 일 없고, 정말로 열심히 살았으면 이제 감옥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지낸 40대가 그랬다. 그 시절에 영웅적으로 잘 나갔으면, 이제 어려운 시대를 맞게 된다. 그 시절에 어려웠으면? 계속 어렵게 될 것이다. 40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랐거나 정치적으로 어려웠다고 해서, 그 후에 보상해주거나 그런 사회는 아니다. 우리가 만든 사회의 룰은, 아주 소수를 제외하면 한 번 어려우면 계속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럼 지금이라도 슈퍼 리치가 되면?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의 30%가 다단계 판매원이다. 그 반대편에는 비트코인으로 상징되는 암호화폐가 있다. 그 양극단을 피하면? 그게 바로 온 국민이 공부를 했든 안 했든, 문과든 이과든, 결국에는 도달하게 된다는 통닭집 사장이다. 슈퍼 리치는 커녕, 골목 상권 붕괴로 슈퍼 주인도 이제는 어렵다. 그런데도 전두환은 여전히 건강하고, 여전히 잘난 척 하다. 지금 우리처럼 헤롱헤롱 살면 전두환 보다 오래 살기도 쉽지 않다. 벌써 여러 ''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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