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둘째가 어린이집 마지막 등원한 날이다. 3.1절 연휴가 끼어 있고, 화요일부터는 초등학생이다. 그리고 2016년부터 시작된 나의 어린이집 등원도 마지막 날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나 혼자 감개가 무량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3월이 되면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그렇게 두 군데로 행가레를 치면서 다닐 일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다시 올 일도 없다. 

정말로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오후가 되면서 이 날을 기념하고 싶어졌다. 아이들하고 슈퍼에 한우 사러 갔다. 작년 봄에 아이들 몫으로 재난지원금 나왔을 때, 재래시장에 가서 한우를 사다 먹고는 처음이다. 그래도 막상 집으려니까 손 떨려서, 결국 육우로 한 단계 낮추었다. 

어제는 생일이었다. 원래도 생일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신경도 안 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나를 키워주셨는데, 마음 속에서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난다. 할머니는 대보름에 낀 날이 생일이라서 평생 굶지는 않겠다고 좋아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생일 잔치 같은 건 따로 안 하지만, 언제가 생일인지는 알고는 지나갔는데, 둘째 폐렴으로 입원한 이후로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고기 산다고 슈퍼 갔다가 대보름 나물 있는 거 보고, 참 어제가 생일이었지.. 그나마 올해는 지난 다음이라도 알고는 넘어가게 되었다. 작년까지는 그런 것도 다 까먹고 지냈다. 

2.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감정에 아무 동요도 없다면 거짓말인데, 그런다고 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글 하나 쓰는 걸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하기로 했다.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를, 그것도 나처럼 지속적으로 하면 모든 것을 열어놓고 개활지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넓은 길을 두고 좁은 길로, 안전한 길을 두고 위험한 길로 굳이 걸어가는 것인데, 그냥 천성이 그런가 보다 한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났으면 독립군이 되었을 자신은 없지만, 아마도 적극적 친일파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만주로 달려가서 뭔가 열심히 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 것 같은 자신은 없고. 그저 적극적 친일은 하지 않았음, 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다. 

잠시 내 인생을 돌아보니, 여전히 나는 까칠하다. 그냥 입 다물면 되는데, 그러면 속이 너무 부대낀다. 피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난 B형이다. 

3.
시대는 어느덧 토건의 시기로 다시 돌아간다. 4대강 이후로 몇 년 잠잠했다. MB 서울시장 할 때 뉴타운 시작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고, MB 대통령 되고 4대강으로 클라이막스에 돌입했다 .그리고 몇 년 잠잠했는데, 서울은 모두가 다 ‘디벨로퍼’라고, 그야말로 디벨로포 전성시대에 들어갔다. 각 지역은 공항과 함께, 온갖 토건시대 청사진이 다시 내걸린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과는 몇 년간 정말 자주 보면서 지냈고, 지난 몇 년간은 좀 뜸했다. 나도 애들 보느라, 어디 돌아다닐 형편이 아니었고, 오늘은 김종철 선생의 미간 잔뜩 찌뿌리면서 코 아래만 웃는 그 웃음이 그리워졌다. 그 양반 계셨으면 뭐라고 한 마디 하셨을 것 같은데. 그 양반 안 계시니, 이제 지나가는 말이라도 뭐라도 한 마디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거 보면 그 양반이 좀 꼰대틱하기는 했어도, 강단만큼은 정말 조선 최고였던 것 같다. 문득 그리움에 쌓인다. 원로의 시대는 이제 정말 끝나가나 보다. 

4.
불금이다. 술이라도 때려 먹고 싶은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밀렸다. 내가 잘 처리를 못해서 그런 것도 있고, 시대를 잘 못 만나서 그런 것도 있고, 이것저것 얘기치 않게 엉켜서 그런 것도 있고. 하여간 불금이라고 술 처 먹을 형편이 아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 올라가는 길이 있고, 내려가는 길이 있고, 짧은 1년 사이에도 그런 흐름들이 있는 것 같다. 시방 나는 내려가는 길에, 최근에는 꼭두박질 하는 사이클이다. 확 미끄러져 코 박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속 상해도 속으로 삭이고, 힘들어도 혼자 술 처먹고 털어버리는 편이다. 

그래도 세상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하루를 산다. 좋아지지 않으면, 술이라도 처 먹고 나 혼자 기쁘면 그만이다. 프로이드의 ‘문명의 비판’ 책 앞머리에 ‘소마’로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고기 굽기 전에 한 자 쓴다는 게 너무 길어졌다. 오늘 사온 고기 구우러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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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의 어린이집 마지막 등원. 큰 애도 여기 다녔다. 나의 마지막 등원이기도 하다. 시원섭섭. 큰 애 태어날 때는 없었는데, 나중에 생겼다. 큰 애도 1년 기다려서 겨우겨우 차례가 온. 나의 50대 초반도 이렇게 지나가고, 이제 50대 중반으로 넘어간다..

아디오스 어린이집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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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덕도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 통과하는 날이다. 오전에 전화가 엄청 와서, 이 문제로만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게 되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의 빈 자리가 무척 크게 느껴지는 날이다. 살아계셨으면 뭐라도 한 소리 하셨을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원로가 한 분도 안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이게 말이 되느냐", 그런 사람들의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공존하면서 한국이 그럭저럭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질서정연한 바보짓'을 하고 있다..

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003.html

 

가덕도는 제2의 4대강이 될 것인가

국토부마저 반대한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 국회 국토위 통과

h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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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기업에서 강연 요청이 왔는데, 학기 중이라서 어렵다고 했다.

40대에는 좀 묻어가는 일들도 있었는데, 나이를 처먹고 나니까 묻어가는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다 무겁고, 대가리 뽀개지게 만든다.

예전 같으면 화도 좀 내고, 막 뭐라고 할 일도.. 대부분 그냥 참는다. 니나 내나, 그러고 막 싸우기도 했는데. 역시 나이를 처먹으니까, 늙어서 쟤도 이제 승질 막 부린다, 그런 소리 들을 것 같다.

차라리 내가 며칠 귀찮고 말지.

팬데믹 국면을 보내면서 나는 깨침에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살아서 도를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깊게 심호흡 한 번 하고, 휴우, 내 팔자야, 이러고 만다.

그래도 좋은 일도 좀 생기기는 한다. 동네 수영장이 다시 열었다. 시간은 예전보다 빡빡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아자, 올 여름까지는 배 다시 집어넣고. 2년 전 여름부터 겨울까지 열심히 수영해서 그럭저럭 회복기로 들어갔다가, 팬데믹 이후 완전 망!

가덕도 신공항 문제로 부산 토론회에서 발제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정말 이 문제는 아무도 다루지 않고, 그래서 뒤로 여러 발 빼고 물러서 있던 나에게까지 부탁이.

친구들은 그거 하지 말라고 했다. 해야 어차피 질 거고, 민주당 국회의원들에게 미운 털이나 박히고, 나중에 니가 뭐라고 할 때.. 그때 고초를 겪을 거다.

구구절절히 다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그렇게 이것 피하고 저것 피하면 내가 뭐하러 경제학을 공부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럴 때면 성질 진짜 까칠하다. 나이 처먹으면 적당히 좀 찌그러지고, 눈치 보는 맛이 있어야지.

이 결혼 난 반댈세!

이렇게 꼬장부리는 할배 느낌 들었다.

부산에서 공항을 짓든 말든, 순환 도로를 몇 개를 더 만들든 말든, 그게 내 삶과 무슨 상관이랴. 그냥 찌그러져서 자빠져 있으면 스트레스도 없고, 크롬 번역기 돌려가면서 일본 국토교통성 홈페이지에서 수치를 눈 빠져라고 지켜볼 일도 없고, 그걸 엑셀에 다시 기록할 일도 없고.

이게 다 성격 까칠한 게 천성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대에 기재부 과장들하고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우와.. 청와대 한두 번씩 갔다오더니 하다못해 청장이라도 다 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냥 얌전하게 그런 사람들한테 찰싹 붙어있었으면 나도 좀 더 순탄하게 살았을 것 같은데.

돌아보면 순탄하게 살 기회가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냥 몇 번만 남들 하듯이 머리 숙이고, "사장님, 나이스샷!", 이렇게 살았더라면.

그래도 입에 세 끼 밥 들어가는 데 크게 어렵지 않았다는 정도가 거의 유일한 위안 아닌가 싶다. 그저 책 쓰면서 살 수 있게 해주신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

가적도 신공항 문제는 아마도 내 인생 후반부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남을 것 같다. 까칠한 인성 아직도 그대로, 이건 아니지!

그저 남은 내 인생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누군가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내 삶에 대해서 부탁하는 일이 없도록.

(처음 했던 언론 인터뷰가 중앙일보였는데, 97년이었다. 진짜 수십 년만에 뭐라고 했었나, 찾아본 ㅠㅠ. 헛소리했다.)

news.joins.com/article/3439073

 

탄소세 도입 오히려 유리한 조치 - 현대환경연구원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줄이기 위해 석유.석탄.가스등 화석에너지 사용량에 따라 세금을 물리는 탄소세 도입이 일반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우리나라에 유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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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똥 굵다!

아이들 메모 2021. 2. 24. 21:02

"아빠, 변기 막혔어."

여덟 살 된 둘째가 화장실 변기를 막을 정도로 대변을.. 진짜 제대로 막혔다. 겨우겨우 뚫었다.

그렇지만 둘째는 왠지 자랑스럽고 뿌듯한 분위기다.

"그래, 니 똥 굵다!"

이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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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둘째가 어린이집 졸업식을 했다. 코로나 때문에 부모들은 못 들어가고 그냥 바깥에서 기다리는. 

어린이집과 학교로 나뉘어서 등하교가 두 번이다. 아침에 큰 애는 아내가 출근하면서 데리고 가고, 둘째는 좀 늦게 내가 데리고 가고. 오는 건 태권도장에서 오고, 이게 우리가 찾아낸 최적의 상황이었다. 

이제 진짜로 나의 시간이 온다. 등교도 학교로 한 번만 하면. 너무나 편해질 것 같다. 

오십이 넘어가면서 나는 나와 관련된 욕심이든 욕망이든, 하여간 다 내려놓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러나 보다 하고 만다. 싫다고 하면, 그러세요 하고 만다. 

그 사이에 나에게 뭔가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다 떠나갔고, 이래저래 나와 꼭 뭔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애들 키우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깽깽발로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괜찮을 사람들만 주변에 남았다. 

그 사이에 세상의 계산법과 나의 계산법은 많이 다르게 되었다. 나는 아주 게으르게 계산하고, 소심하게 판단한다. 코로나 이후로는 언제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올지 몰라서, 진짜 위수 지역 지키듯이 30분 내에 학교로 튀어와서 아이들 하교 시킬 수 있는 거리 외로는 잘 안 나간다. 방법이 없다. 

그렇게 지내면 좋은 점이 한 가지는 있다. 아주 멀리 보게 되고, 아주 낮게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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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에게 로망이 있듯이, 어렸을 때 나는 위인전을 쓰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위인전을 너무 재밌게 읽었던 것도 있고. 40대에는 별로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 시기에 내가 뭐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김미화, 선대인과 팟캐스트를 5년 넘게 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시기에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슨 자료들을 보고 살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희로애락, 그 나이에도 감정만큼은 격정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슬픔도 많았고, 기쁨도 많았다. 

그 시기를 지나면서, 언젠가 여건이 되면 이승만에 대한 얘기를 써보고 싶고, 최종적으로 이완용 평전 같은 걸 써보고 싶어졌다. 물론 이건 나의 로망이다. 실제 그걸 다룰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이완용이 독특한 인생이라는 생각은 든다. 

예전보다 이런 로망이 있어서 그런지, 직접 누군가를 만나서 작업을 하는 걸 피하지는 않는다. 사람에 대한 이해, 이건 늘 어렵다. 사람은 변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생각도 변하고, 삶도 변한다. 안 바뀌는 사람도 있다. 이재영, 노회찬, 죽은 친구들은 변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변한다. 안 변하면 늙기라도 한다. 

2. 
박용진, 김세연과 한 대담집은 사람들이 초기에 말렸던 책이다. 정치인들 얘기하는 데에 끼어봐야 내가 얻을 게 없고, 괜히 정치 구설수에 휘말리기나 한다고, 좀 말렸던 책이다. 그들에게 내 오래된 로망인 이완용 얘기를 했다. 우리 시대의 눈으로 이완용 얘기를 다루는 게 내 오래된 로망인데, 좀 더 복합적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연습을 나도 좀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 책은 이래저래 사연이 좀 있는 책이다. 우여곡절 끝에 박용진, 김세연 그리고 얘기를 정리하는 공희준으로 라인업이 결정되는 데까지 몇 달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 니가 맞니, 내가 맞니, 그런 치고받고 하는 건 안 한다.. 그런 건 나 말고도 하는 사람이 많고, 나보다 훨씬 더 잘 할 사람이 많다. 나는 “우리는 미래로 간다”, 그 정도의 작업 방향을 정한 것 같다. 좌든 우든, 당분간 한 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제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정책은 더더욱 그렇다. 21세기 들어, 정책에서 좌우는 요소라로만 남는 것 같다. 이리저리 섞이고, 혼합된다. 기든스가 제 3의 길을 얘기한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환경이나 젠더 등 신좌파가 전면에 나서면서, 정책에 대해서는 좌우 보다는 좀 더 통합적으로 가거나 아니면 좀 더 예리하게 예각으로 자르고 들어간다. 

3.
처음부터 그렇게 디자인한 것은 아닌데, 결국 출연진이 좌우 대담처럼 잡혔다. 나는 두 입장이 너무 감정적으로 충돌하거나, 도저히 더 이상 같이 앉아서 얘기하기 어렵다고 자리 박차고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진행하면서 보니까 좀 쓸 데 없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 정도의 양식은 충분히 갖춘 사람들이라서, 연금 문제나 기업 개혁 등 처음에 생각했던 것 보다는 좀 더 깊게 들어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하다 보니까, 기술 얘기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내가 어렴풋이 생각한 것보다 김세연은 미래 기술에 의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이 좀 더 확고했다. 어쨌든 자기 나름대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4. 
정책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인기가 없고, 고루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정책이 아니라 그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고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인기가 없을 것 같다. 역시 싸움은 날이 선 상태로 죽이거나 죽거나, 그렇게 피가 튀어야 재미지다. 

그렇지만 그 정책이 만들어지기 전에 정책의 출발점과 한계를 짚어보는 일은, 과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체크 리스트 정도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책적 관점에서는 매우 화려하지만, 전투적 관점에서는 밍밍한 책이다. 그래서 더욱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게 될 것 같다. 박용진, 김세연, 이 두 사람은 젊은 정치인들이다. 6.25에 대한 기억이 없고, 4.19와 박정희와의 관계로 정치를 하지 않은 세대다. 그런 사람들이 논의를 하면 뭔가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는데, 그런 것은 어느 정도 충족시킨 것 같다. 

확실히 기존의 정치 담론과 많이 다르다. 합의하지는 못 하더라도, 공유할 수 있는 문제의 출발점이 더 많다. 

5.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공동으로 뭔가를 놓고 고민하는 일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이런 일이 또 벌어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자기 노선이 있어야 자기 생각을 더 열어놓고 만날 수 있는데, 그 정도로 자기 노선을 가진 정치인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기왕에 길이 열렸으니까, 비슷한 시도가 좀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정치가 꼭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정책을 마련하고, 발전시키고, 살아갈 길을 열어 나가는 것이 궁극의 정치 아니겠는가? 

우리는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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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백기완 선생 집에 놀러가자고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애 봐야 해서..

집에 보일러가 망가지고, 등등 최근 사는 얘기들은 좀 들었었다. 어쩌면 늘 거기 계시는 것 같은, 그런 익숙함에 무뎌져서 살아가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87년부터 집회 때면 종종 뵙는, '민중'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어른 아니었나 싶다.

이제 진짜 한 시대가 끝나는 것 같다.

같은 동네 사는 이재오는 아직도 펄펄한 것 같은데.

하늘 나라에서나마 한적하고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걱정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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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한테 오늘은 덕에 대해서 가르쳤다.

왜 양보를 해야 하는지, 같이 잘 지내기 위해서 왜 먼저 자기 입에 넣으면 안 되는지. 그런 인생 사는 얘기들을.

그렇지만 맛있는 거 보면 먼저 먹고 싶지? 원래 사람이 다 그래.

큰 애가 막 웃는다.

그렇게 하는 걸 덕이라고 불러. 배워야 하는 거지, 원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큰 애한테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은 장애인 친구와 잘 지내는 법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다.

빌라 사는 친구나 아파트 사는 친구나, 다 같은 친구고, 절대로 그런 걸 따져서는 안 된다. 그런 것도 얼마 전에 가르쳤던 것 같다.

벌써 애들 사는 사이에서도 계급이 갈라지는 게 느껴진다. 좀 여유 있는 집들은 학교 끝나면 학원으로 가기 시작한다. 이미 학원 뺑뺑이 도는 애들이 상대적으로 좀 넉넉한 집인 것 같다.

부모들이 애들한테 붙어 있기가 어려운 우리 집 같은 집이 돌봄 교실에 남는다. 1학년 때는 안 그랬는데, 2학년 끝나가니까 애들도 그런 거 대충 아는 것 같다.

가르친다고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배워야 할 덕목들이 좀 되는 것 같다.

나는 우리 집 애들 엄청 학원으로 돌릴 생각도 없고, 기를 쓰고 사립학교에 다니게 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남들에게 폐는 덜 끼칠려고 하고, 늘 양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고 싶다.

많은 경우, 양보하면서 살았고, 내가 손해를 좀 더 감수하는 쪽의 선택을 하면서 살았다. 물론 늘 어버버하면서 산 건 아니다. 양아치는 주변에서 멀리 하면서 살았다.

다른 건 안 까다로운데, 밥 먹고 술 먹는 건 엄청 까다롭다.

모르는 사람하고는 가급적 밥은 같이 안 먹고, 밥 먹으면서 인사하는 일은 거의 안 한다. 인간적으로, 밥은 좀 편하게 먹고 싶다.

술 마실 때에는 더 까다롭다. 30대가 지난 이후로, 술 마실 사람들 정확하게 멤버 구성이 안 되면, 그냥 혼자 마시고 만다. 맥주 한 잔 마시러 2차를 가게 될 때에도 미리 정해진 동선이 있는 경우에만 간다.

술 마실 때에는 맛집 안 가고, 너무 분위기 좋은 곳도 안 간다. 적당히 넓고, 조명 밝고, 너무 시끄럽지 않은 곳. 분위기 좋은 곳에 가면 사고 난다. 와인바 안 가고, LP바 안 가고 등등, 바 종류도 안 간다.

요즘은 덜 그러는데, 40대에는 1차로 고기 먹고, 2차로 횟집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일어나기에는 그 편이 더 낫다. 1차든 2차든, 내가 술값 낼 거 아니면 술집도 잘 안 가고.

대부분의 일은 그냥 남들 하자고 하는대로 하는데, 밥 먹을 때, 술 마실 때, 거의 미리 정해진 루틴대로 움직인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지킨 단 하나의 덕목이라면.. 남들도 다 이렇게 해, 그런 일들을 절대 안 한다.

남들도 다 한다고 관행대로 한다면, 뭐하러 내가 빨갱이로 살아가나 싶나, 그런 생각이 팍 든다. 선행으로 가득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소소한 부패는 절대 안 하려고 한다.

나는 적이 많았고, 여차직하면 투서 넣을 사람들 주변에 깔린 삶을 살았다. 그냥 존재 자체로 나를 싫어하는 상사들도 엄청 많았다. 저런 빨갱이를 누가 뽑았어, 대놓고 칼 가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삶을 살았다.

양보 많이 하는 아이, 그게 내가 생각하는 자녀 교육의 1번이다.

옛날 사람들은 그걸 덕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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