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낸책, 낼책 2021. 1. 28. 12:33

2012년, 예전 살던 집에서 바보삼촌..

 

둘째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오는데, 정말 간만에 보는 폭설이다. 어릴 적에는 눈이 오면 그냥 좋기만 했던 기억인데, 이제는 이것저것 머리 복잡하기만 하다. 

팬데믹 경제학은 내일까지 쓰면 초고는 끝낼 것 같다. 20년 가까이 사회적 논쟁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책을 낸 걸로 봐도 15년은 그랬던 것 같다. 그 동안에 딱히 쉰 기간도 거의 없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칼럼을 1년 정도 내려놓은 기간이 있기는 한데, 그 동안에도 책은 계속 썼다. 

2년 전에 워낙 헤매느라고 책 데뷔하고 처음으로 책을 못 낸 한 해가 되었다. 작년에도 책은 당인리 한 권 밖에 못 냈다.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이 책이 내 삶에서는 일종의 분기점이 된 것 같기는 하다. 원래도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삶을 평생 살았던 것 같다. 장래희망, 그딴 건 옛날에도 없었다. 희망직업란에 외교관을 써넣기는 했는데, 처음 그 조사를 할 때 단짝 친구 아버지 직업이 외교관이라서 그냥.. 대학 준비할 때에도 국문과나 사학과 같은 데에서 적당히 간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찌어찌 점수 맞춰서 들어가다 보니 경제학과에 가게 된 거고. 

요즘 가끔 뭐 안하겠느냐는 얘기를 듣기는 하는데, 그때마다 질색을 하고 "머리에 총 맞았어?", 이렇게 대답을 한다. 내 나이도 이제 50대 중반으로 넘어간다. 점점 더 아무 것도 안 하다가 완전히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되는 게, 나름 꿈이라면 꿈이다. 김상조 등 여러 사람의 삶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말년에 그게 뭔가 싶다. 잘 좀 하지. 저렇게 욕망이 많은 존재인지, 미처 몰랐다. 

공직을 안 하기로 하고, 방송을 정리하고 나서 내 삶은 그래도 좀 단촐해졌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코로나 2단계로 올라가면서 카페가 문을 닫았다. 내 인생에 잘 없는 휴식 같은 시간을 좀 가졌던 것 같다. 집 앞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정 급한 사람들 중에서는 집으로 오는 사람들도 좀 있는데, 워낙 친한 사람들이다. 전직 차관 한 명이랑 밖에서 소주 마시다가 방법이 없어서 그냥 집에 와서 술을 처먹은 적이 있었다. 아내한테 겁나 깨지고, 손 들고 벌 설뻔 했다. 

농업 경제학은 작년 봄에 초고를 끝냈는데, 에디터가 그만두고 나서 이래저래 책은 표류 중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바뀌어서 대대적인 수술을 한 번 하기는 해야 하는데, 담당자가 없는 셈이라서 그냥 밀리고 밀린다. 나도 내 일에 치어서 지나간 초고를 다시 들여다 볼 겨를이 없고. 이래저래 농업 경제학은 워낙 인기가 없다보니, 초고를 써놓고도 책이 찬 밥 대접이다. 올해 안에 나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이것저것 밀린 것들 처리하면서 올해에 최우선 순위는 젠더 경제학이다.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는 안 넘기려고 한다. 내년의 최우선 순위는 밀리고 밀려서 뒤로 가게 된 도서관 경제학.. 원래는 작년 여름에 필라델피아에 가면서 시작하려고 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꽝. 올 겨울 방학에는 무조건 간다.. 고 일정만 잡고 있는데, 진짜로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고. 

에세이집은 요즘 판매가 그닥이라, 딱히 우선 순위가 앞으로 올 것 같지는 않은데.. 나름 나이를 처먹다 보니까, 요즘 또 새로운 감성 같은 게 생겨서 적당한 시기에 한 번 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뭐 하나 찔러넣을 틈이 당분간 없다. 올해 카메라 살 여유가 좀 생기면 포토 에세이 같은 거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기는 한데, 애들 보면서 카메라랑 렌즈 들고 다닐 손이 없다. 딱히 찍고 싶은 게 당장 있는 것도 아니고. 피사체는 역시 고양이 만한 피사체가 없다. 인간은 고양이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나이 먹으면 경제 다큐 만든다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영 주변 여건이 마땅치가 않다. 그냥 마음 속의 로망 같은 것으로 품고 살아간다. 

그저 살면서 만들어보고 싶은 삶이라면, "꿈꾸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삶이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래도 살아보니까 밥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면 별 집착이 없기 때문에 양아치 짓도 덜 하게 된다. 눈만 감으면 보고 싶은 애틋한 사랑, 그딴 것도 없다.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어 죽겠고, 눈 감으면 조는데, 무슨 아스라한 그리움 같은 거가 있겠나 싶다. 

축구를 원래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2002년 붉은 악마 응원전 열기에 확 질려서, 축구 안 보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월드컵 축구에 응원을 안 한 건 아닌데, 그게 최고의 놀이고, 그냥 좀 즐기면 안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 보기 싫어서.. 국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과도한 국가주의는 싫다. 나도 성격 참 모났다. 중간중간 축구를 보기는 하지만, 그 후로 90분 게임을 전부 앉아서 본 적이 없다. 2002년 생각이 나서, 영 마음이 불편하다. 

움베르트 에코 책을 그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재밌게 보기 시작한 게.. 이탈리아에서 축구 싫어하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곤란한 상황을 많이 겪었는지, 그런 에코의 글을 읽은 다음부터다. 음, 에코도 축구 안 좋아하는군, 이거네, 딱이다. 

원래도 비주류였는데, 2002년 응원전을 싫어하게 되면서, 나는 완전 제대로 비주류 감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문인가? 마초들의 세계에서 일찍 나오게 되었다. 남자들이 군대 가서 축구 얘기하는 것처럼 그 시절에 모이면 하던 얘기들이 골프 치러가서 캐디랑 연애한 얘기들이었다. 이것들이 주머니에 돈 좀 생기니까 운동권 얘기는 소주 첫 잔 마실 때 장식품으로만 하고, 본격 마음에 담은 얘기들이 다 연애담이다. 재미없었다. 대학 시절에 지리산 빨치산에 관한 글 쓴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친구가 캐디랑 최근 연애담 얘기하는데, 돌아비리.. 그 후로 친구들 별로 안 만났다. 

적당히 맞춰주면서 살아도 되지 않나.. 그럴 거면 그냥 죽어버리고 만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남들 몰려가는데 피하고, 다들 한다는 거 피하고.. 그러다 보니, 그런 주변부적이고 춥고 음습한 곳이 내 삶이 되었다. 그래도 이런 삶도 나름 괜찮다. 스포트라이트는 없지만, 그 대신 경쟁도 별로 없다. 순위싸움 싫어하고 경쟁 싫어하는 내 성격에는 딱 맞는다.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사느냐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몇 권 더 내면 내 이름으로 낸 책이 50권 채워진다. 소극적으로 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는 꿈이 없냐? 그딴 거 안 키운다. 그냥 하루하루 재밌으면 된다. 재미 없는 날은? 다음 날 재밌으면 된다. 

MB 시절 후반부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증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비주류 감성에 증오도 내려놓았다. 증오를 내려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아날로그 사랑법'이 그 시절에 나온 책이다. 그냥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고, 한 때 열 마리도 넘는 고양이들 밥 주면서 지내다 보니까 좀 삶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그 후에 태어났다. 

눈 오는 날, 잠시 눈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50권째 책은, 큰 욕심 버리고 "꿈꾸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정도의 제목으로 에세이집으로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러고 있으면 선배들이 막 화를 냈다. 넌 도대체 꿈이 뭐냐? 그딴 거 없어요, 되는 대로 살아요. 그럼 유학은 왜 갔어? 도피유학요.. 

십만 명 아니 백만 명이 맞다고 해도, "아니요", 그렇게 말하는 삶을 살기는 했다. 요즘은 뭔가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쓰지마라, 생기는 거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절반이 넘는다. 얼마 전에 총리랑 밥을 먹었다. 정부 기피인물이라고 막 웃었다.. 저, 원래 이렇게 살았어요. 결국 이번 정부에서도 기피인물이 되기는 했다. 좋아서 된 건 아니다. 정부의 수소경제 몰빵만 아니었으면, 그래도 좀 좋은 덕담이나 하면서 지낼 수도 있었을텐데. 그냥, 생겨먹은 게 그런가보다 한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이다.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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