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하면 책은 돈 주고 사서 볼려고 하는 편인데, 송구하게도 최성각의 책은 한 번도 돈 주고 사서 보지 못했다. 매 번 책이 나올 때마다 보내주시는 바람에,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하여간 매주 미처 읽을 수 없을만큼 몇 박스씩 책이 나에게 배달되어 오고, 또 나도 부지런히 책을 사대고 있는 편이라서, 최근에 우리 집에 온 책이 벌써 마루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가급적이면 짧게라도 읽어보고 싶기는 한데, 두꺼운 두 권짜리 케인즈 평전처럼,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책들이 좀 있다.

 

하여간 이번 여름은 앉아서 책을 보는 시간이 좀 늘어나서, 하루에 2~3권 정도는 보는 것 같다. 대부분의 책들이 무거운 책들이고, 일부는 골치아픈 논쟁을 담고 있는 원서들이다.

 

살면서 하루에 두 권의 책을 읽지 않는 날은 없도록 하겠다고 옛날에 결심한 적이 있기는 한데, 늘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많이 읽는 날은 꽤 많이 읽은 날도 있으니까, 평균을 내보면 지난 20년 동안 하루에 두 권씩은 읽었던 것 같다. 그래도 책으로 치면, 편식하는 편이다.

 

수필이라는 쟝르를 좋아하고, 특히 시인들이 내는 산문집은 꽤 좋아하는 편이다. 기형도의 산문집은 그의 시로 들어가는 입구와 비슷하다.

 

그래도 요즘은 수필집을 자주 읽지는 못했다. 뭔가 트렌드라는 게 있는지, 최근이 수필집은 몇 권 읽을려고 하다가 토 나올 뻔 해서.

 

최성각의 산문집은 '달려라 냇물아'와 '날아라 새들아', 두 권 모두 재미있다. 두 권을 이어서 읽으면, 약간 연작 소설이나 대하 소설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산골에서의 생활 정착기의 흐름이라서, 거위와 뱀 그리고 개구리 같은 것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풍의 단상들이 썩 재미있다.

 

아직 읽지는 못했는데, 바로 이 거위들을 모티브로 하는 소설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생태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잔뜩 움추려들고, 또 엄청나게 뻣뻣해지면서 경건 모드로 들어가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최성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밝고 명랑한 톤으로 생태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고, 흔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민간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나이를 먹어서도 변하지 않는, 고등학교 시절에 만났던 껄렁껄렁한 친구가, 그 모습 그대로 30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이 될까에 관한 질문 정도?

 

내년에 지금 쓰는 책들이 다 끝나면, 무겁지 않은 수필집을 한 번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수필집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보는 와중에 읽었던 최성각의 산문집은 상당히 재밌으면서 독특한 풍취 같은 것을 느끼게 하여주었다.

 

후반 부에 나와있는 '생태적 위기와 새로운 글쓰기'는 정말 오랫만에 읽은 문학평론이었는데, 통쾌함을 느꼈다.

 

내가 최근의 한국 소설 몇 권을 읽으려다가 토 나와서 포기한 바로 그 심정을 최성각이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야!

 

최성각이 열어가고 있는 '생태적 글쓰기'는 어쩌면 한국에서 글쟁이가 되거나, 자신만의 문체를 가지고 싶어서 고민하는 대학생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생들도 읽을 수 있도록 충분히 쉽고, 충분히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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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고양이는 암컷인데, 이제 한 살이 되었을까? 하여간 길 잃은 고양이를 한 마리 동물병원에서 분양받아서 데리고 왔는데, 이제는 곧 컸다.

 

그리고 이 고양이 주변에서 얼쩡얼쩡거리는 아주 못생긴 고양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못 생긴 고양이가 한 마리가 있다. 하여간 이 못 생긴 고양이와 우리 집 고양이는 상당히 친한지, 모기장을 사이에 두고 곧잘 심오한 소리들을 낸다.

 

이게 그냥 발정기인줄 알았는데, 최근에야 이게 고양이들의 걸 토크라는 걸 알았다.

 

못생겼다고 나한테 구박받던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세 마리를 얼마 전에 낳아서 우리 집 마당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새끼를 낳고 나서 이제는 엄마 고양이가 된 이 못생긴 고양이와 우리 집 고양이가, 하루에 한 시간씩 한참을 떠들어댄다.

 

이건 발정기 소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걸 토크인 셈인데, 무슨 얘기들을 저렇게 하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어쨌든 고양이 새끼들은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게 또 있을까 싶게 귀엽다.

 

그래도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온 것들이라서, 얘들한테도 밥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겨우내 우리 집 마당은 동네 고양이들의 각축장이고, 며칠에 한 번씩 우리 집 마당을 차지하기 위해서 동네 길고양이들이 혈투를 벌이던 곳이기는 한데...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한테는 영역을 양보하는 모양인지, 한동안 못생겼다고 구박하던 고양이가 이제는 어느덧 엄마가 되어서 세 고양이를 거느리고 먹고 살겠다고 바둥거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아직 우리집 고양이는 중성화 수술을 안 시켰는데, 어쨌든 새끼를 한 번쯤 낳을 수 있게 해주고 싶기는 한데, 여전히 집은 어수선하고, 나도 이것저것 쓰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가끔 신화에 보면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영웅들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람이 새와 노래를 했던 니벨룽겐의 반지의 주인공 지그프리트.

 

고양이들의 걸 토크는,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아직 성묘가 제대로 안된 처녀 고양이와 이제 막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고양이, 이 둘은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루에 한 시간씩 나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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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100℃>는 일단 재밌는 만화이다.

 

경적을 사측에서 떼어낸 택시의 운전기사가 경적을 누르는 장면에서, 나도 별 수 없이 울었다. 워낙 울음이 헤프기는 하지만...

 

얘기는 일단은 앙상하다. 그러나 만약 87년을 현장에서 경험한 사람이 이 만화를 만들었다면, 얘기가 풍부한 게 아니라 떼부장처럼 살집만 두툼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87년 얘기를 하는데, 누구도 넣어야 하고, 누구도 넣어야 하고, 이렇게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그런 두툼함을 포기한 대신, 얘기의 선은 얇아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담백한 얘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치밀하지는 않다.

 

읽으면서 문득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연상했는데, 고리끼의 어머니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일어나는데, 그 앞에 얘기들을 치밀하게 많이 깔아놓는다. 그런 것과 비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막심 고리끼와 비교하면 전개가 치밀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막심 고리끼이고, 이건 최규석이다. 최규석을 어머니를 내세울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87년의 주역들을 20년 후 갑자기 우리에게 다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최규석의 그림풍은 스케치를 곁들인 리얼리즘풍이다. 이런 그림을 가지고도 풍성한 상상을 곁들일 수 있는 것은, 아마 최규석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최규석의 <100℃>는 스토리 라인이나 전개과정 혹은 그림풍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년부터 한국에도 프로 문학이 다시 복귀할 것이라는 가설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첫 테입을 끊은 것이 바로 이 <100℃>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배경은 먼 옛날이 아닌, 바로 20년 전, 명박 2년차, 이제는 너무도 먼 곳의 시간으로 느껴지는, 그 박제화된 얘기들을 감동적으로 꺼집어낸 최규석, 그가 <100℃>와 함께 한국의 프로 문학의 맨 앞에 서게 된 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의미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명박은, 이제 한국 현대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한 프로문학을 다시 호명하고, 그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준 셈이다.

 

이제 다시 시작된 한국의 프로 문학, 그 상이 얼마나 풍성해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상에 첫 번째 음식을 차려년 사람은 단연 최규석이다.

 

그야말로, 명박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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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은 다리가 세 개뿐인 엔젤이라는 이름의 재규어와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다. '쾅'하고 방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엔젤은 절뚝거리면서 사무실 구석으로 자리를 피한다. 나무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지어놓은 엔젤의 우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샤론이 쳐다볼 때마다 엔젤은 마치 배를 긁어달라고 아양을 떠는 강아지처럼 옆으로 뒹글면서 사지를 쭉 뻗는다. 그럴 때면 샤론은 두 공간을 분리하는 철망 위로 닭고리를 한 조각씩 던져준다. 재규어는 '척'하는 소리를 내며 고기를 받아먹는다. 사무실을 찾아온 사람들이 엔젤을 쓰다듬어 주어도 되냐고 물으면 샤론은 고개를 젓는다.

 

   "절대 재규어를 쓰다듬지 마세요, 손을 먹이로 줄 생각이 아니라면요."

 

언젠가 샤론이 내게 한 말이다. (주홍 마코 앵무새의 마지막 비상, pp.16-17)

______

 

위의 구절은 내가 올 상반기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상상력 넘치고 위트 넘치는 문장들이다. 다리가 하나 잘려서 세 개의 다리로 살아가는 재규어를 보는 사람마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생기나 보다. 나도 우리 집 고양이를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동물원 원장은, 손을 먹이로 줄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로 쓰다듬지 말라고 한다.

 

Oh, shit!  이건 재규어란 말이야.

 

이 구절이 <주홍 마코 앵무새의 마지막 비상>이라는 책의 추천사를 쓰게 만든 결정적인 문장이었다. 마침 그 주에, 내 수업을 듣는 어떤 학생이, 여주에 나타난 늙은 호랑이라는 주제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호랑이, 고양이, 이런 단어들을 마을 만들기와 연결시키고 있을 때, 어떤 책 하나가 재규어에 대한 얘기를 같은 맥락에서 던지고 있었다.

 

추천사로 치면, 생각나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의 원고와 <주홍 마코 앵무새의 마지막 비상>이라는 책의 원고, 전부 전산 원고로 받았는데, 두 개의 책 모두 엄청 안 팔리게 생겨보였었다.

 

어쨌든 안 팔리게 생긴 원고들의 추천사 같은 것을 부탁받을 때에 상당히 고민을 하게 된다. 물론 잘 팔리게 생긴 책의 추천사를 부탁받을 때에는, 아, 네, 제가 너무 바빠서요... 잘 팔릴 책에는 추천사가 필요없다. 그리고 나도 생각보다 바쁘다.

 

물론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앞 대가리만 보고서 추천사를 쓰는 사람들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난 아직 그럴 공력은 안되어서, 꼼꼼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체를 다 읽는 편이다. 게중에는 정말 재미없는 책도 있고, 또 도저히 나는 추천하지 못하겠다는 책도 있다. 다행히 '못 하겠다'라고 말하기 전에 원고를 읽으면 좋은데, 내가 늘 게을러서 마지막 순간에 책을 읽고, 추천사를 쓰는 편이라서, 상대방을 본의가 아니게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쨌든 내가 추천사를 쓸 때, 갖는 느낌은 팔릴 것 같은 책, 아닌 것 같은 책, 이렇게 나눈다. 그리고 안 팔릴 것 같은 책 - 그러나 좋은 책 - 에 더 정성을 들려서 추천사를 쓴다.

 

<주홍 마코 앵무새의 마지막 비상>은, 아마도 안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이런 느낌은 잘 안 맞는다. (아마 나는 마케팅에는 잼뱅인가보다.)

 

주홍 마코 앵무새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일종의 4대강 살리기를 막아나선 사람들의 눈물나는 스토리이고,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30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읽다 말고 산책을 하면서 겨우겨우 끝까지 다 읽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도 우리는 살릴 수 없을까? 마코 앵무새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데자뷰', 그야말로 팔도강산이라고 불렸던 우리의 국토 생태도 결국 명박 대마왕 앞에서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그런 느낌이 들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예술을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대를 읽는 것처럼, <주홍 마코 앵무새의 마지막 비상>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

 

다음 학기에 생태인류학 수업을 하는데, 보조 교재들을 고민하다가, 이게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자연을 지키는가, 그리고 그 자연을 지키는 와중에 어떤 일을 만나게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 사실주의적으로 고민하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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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에서 있던 시절에는 영화를 참 많이 보았다. 구로자와의 영화나 베르히만의 영화를 본 것도 파리에서 있던 영화 페스티발에서였다. 원래 공부 좀 합네하는 식자들이 문화적 취향은 높은데, 파리에서 가장 싸게 할 수 있던 문화 향수는 결국 영화 밖에 없었다.

 

가끔 연극 공부하는 사람들 통해서 터무니없이 값싼 연극표를 구하면 토스토프에스키의 연극들을 보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일년에 몇 번 벌어지지 않는 일이고. 우연히 기회가 되어서 르와르 강변에서 벌어진 무용 페스티발에 참가해서 정말 원없이 무용을 보기도 했지만, 그건 몇 년에 한 번 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간략하게... 영화 말고는 할 수 있는 문화 행사가 없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그래서 그 몇 년 동안 정말 죽도록 영화를 보았다. 대체적으로 1주일에 두 번 정도 극장에 간 것 같고, 가끔 영화 공부하는 사람들 집에 가서 귀한 영화들을 밤새도록 보기도 하였다.

 

거기에 노스탈지아가 있었다... 한국 영화가 아니더라도, 홍콩 영화가 어쩌다 샹젤리제에서 개봉하는 날에는 도서관에 있던, 그야말로 '학도여, 학도여, 청년 학도여'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서 그런 걸 보았다. 첩혈쌍웅을 비롯해서, 천녀유혼 시리즈들, 샹젤리에 어지에선가 봤던 영화들이다.

 

북한 영화 페스티발도 있었다. 홍길동을 거기서 봤는데, 북한 배우가 최재성과 똑 닮았다.

 

그렇게 몇 년간 영화를 보고, 결국... 프랑스 영화에 물리고, 예술 영화에 물렸다.

 

난 이제는 B급 영화들만 보고, 좀비 영화, 흡혈귀 영화, 갱 영화, 이런 B급 영화들을 중심으로 본다.

 

나도 몰랐는데, 내가 B급 감성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시간을 들이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새벽에서 황혼까지> 혹은 시큼털털한 좀비 영화, 이런 게 내 감성에 잘 맞는다.

 

전쟁영화는 좋아하지는 않는데, 시대 읽기에 대한 공부 삼아 본다.

 

2.

그러다 보니 늘 미안한 감정이 있다.

 

수 년째 환경영화제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내 스타일 아닌데, 엄청 재밌다고 얘기해야 하는 그 상황에 몰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기는 하다. 물론 환경영화제에 나오는 영화들이나 그런 분위기의 영화들 중에서도 재밌는 것들이 있지만, 어째 선뜻 손이 안 간다.

 

난 여전히 <오스틴 파워>의 세계에 살고, <짝패> 아니면 <다찌마와 리>의 과장스러운 세계에 살고, <자토이치>의 코믹 속에 산다.

 

올해 여성영화제에는 어찌어찌해서 폐막식에 초대를 받았는데, 마침 좀 옮기기 어려운 사정이 생겨버렸다.

 

환경영화, 여성영화, 이런 영화들을 잘 안 보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미안한 감정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황윤 감독의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여러 번을 봤었는데, 사정상 한 번도 전편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가 없었다. 결국 감독이 절대로 다른 데서 상영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DVD를 빌려주었다. 한참 가지고 있다가 노무현 자살한 날, 혼자 앉아서 틀어봤다.

 

혼자 앉아서 신나게 울었다. 황윤 감독이 꼭 좋은 시설에서 음향 좋게 해놓고 집중해서 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 말이 옳기는 하다. 이걸 보고도 눈물이 안 나면... 이게 사람이냐, 그럴 듯 싶다.

 

다큐멘타리는 수많은 우연이 만든 필연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그 영화가 딱 그랬다.

 

어쨌든 연대로 돌아간 다음에 잠시 상영하게 되는 영화들이나, 혹은 실험적으로 만들어지는 작은 콘서트 같은 데 갈 기회가 아주 많아졌다. 그러나 잘 못 간다.

 

그래서 준비한 사람들에게 늘 미안함을 느끼기는 한다.

 

그러나 최소한 영화만큼은 의무감으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책은, 재미있는데 읽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읽으면 도움이 되니까, 싫거나 지겨운 데도 참으면서 억지로 읽는 것이 책이다. 재밌어서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부럽다. 책은 재미없다. 게다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책은 더더욱 재미없다. 그리고 고전들은, 도저히 맥락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더욱 재미없다. 그래도 참고 읽는다. 그것이 나에게는 책이다.

 

번역되는 순서로 책을 읽지는 못한다. 대개는 번역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번역될 가능성이 없는 책들을 많이 읽는데, 이런 책들은 구하기도 쉽지가 않다. 게다가 재미는 더럽게 없고, 읽은 사람도 없으므로 같이 얘기를 하기도 쉽지 않고, 또... 한국에서 유행할 것 같아보이지도 않는 책들, 이걸 왜 읽나 생각하면서도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참고 읽는다.

 

그러나 영화를 텍스트로 삼고, 책 읽듯이 하고 싶지는 않다. 최소한 영화만큼은, 나에게 즐거움의 영역으로 남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정성일은 영화를 더 잘 즐기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영화를 더 잘 즐기기 위해서, 책을 읽거나 음반을 들을 때와 달리, 의무감 없이 영화를 보고 싶다.

 

3.

 

어쨌든 나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는 것 같다. 벌써 수 년째, 한 달에 몇 장씩은 사던 LP나 CD의 자리를 DVD가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용돈이 넉넉한 편은 아니다. 책 몇 권, CD 몇 장 사던 자리에서, 이제는 DVD 몇 장 그리고 돈 남으면 책, 이렇게 용돈의 배치 순서가 바뀌었다.

 

(요즘은 DVD가 이제 거의 나오지 않아서, 슬프기는 하다.)

 

얼마 전에 다큐멘타리를 좀 찍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필요한 돈 정도는 대주겠다는 얘기인데... 아, 불행히도 나의 감성은 명랑, 코믹 버전이다.

 

나도 가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실제로 지금 문제가 된 한예종 같은 데에 입학해서 진지하게 공부를 해볼까 하는 시도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룹 시절의 현대에 과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월급 받고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보였다.

 

PD 시험을 다시 볼까, 영화를 배울 수 있는 학교에 다시 들어가볼까, 아니면 정말로 한문공부 하면서 한국학 공부를 해볼까,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 다 접고 결국 정부기관에 약간 좋은 조건으로 옮기게 된 건, 그게 현실이다! 이런 걸 결국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열심히는 했지만, 나는 결국 좌파였고, 차분차분하게 지내면 장관은 몰라도 청장 정도는 되지 않겠느냐는 공무원들의 위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몇 년간을 알콜 중독으로 지내고,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은 황망해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사직서를 내고 떠나고 말았다.

 

그 몇 년간 나락 끝으로 향하는 머나먼 여행을 한 기억이다.

 

여행, 어쩌면 삶은 끊임없는 여행인지도 모른다. 머무름도, 다음 번 여행을 위한 기다림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맥락없이 던져진 노마드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행은 좋아한다. 순례자라는 무거운 단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삶 자체가 그냥 잠시 머물러있다가 가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을 시킨다. 별 것 아닌 것에서도, 하다못해 식사 하면서의 예절과 작은 지식에 대해서도 경쟁을 시킨다.

 

그런 데에서도 매번 이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필연코 불행해진다. 아니면 결국 위에 구멍이 생기던지...

 

4.

영화 <카메모 식당>은, 내게는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다.

 

보통의 영화는 특정 주제나 특정 소제 혹은 어떤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나에게 영화는 무엇일까?

 

좋은 영화이다. 외로움, 만남, 머무름, 그런 것들과 함께 자기 안의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면서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서열이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머무름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세상, 잠시 잊고, 지나온 시간에 대해서 회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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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니체를 불어로 읽었다. 물론... 일부는 불어 공부 삼아서 읽은 것이고, 몇 권은 사 놓고 들쳐보다가 다 못 읽은 것도 많다.

 

아마 내 독서 역사에서 어른이 된 후 가장 재밌게, 그리고 가장 충격적으로 혹은 가장 몰두해서 읽었던 책을 꼽으라면, 니체의 Aurore, 서광이라는 책을 꼽아야 할 것 같다. 프랑스에 가서 불어 공부하다가 아마 처음으로 제대로 읽었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90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참 열심히 읽고 충격도 많이 받았다.

 

왜 이 서광이라는 책을 읽었나... 이유는, 니체칸에 꼽혀있던 책 중에서 가장 쌌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얇았다.

 

그리고 그 시절부터 언젠가 꼭 한 번 봐야지라고 생각하고 아직도 못 읽은 책... gai savoir, 우리 말로는 아마 '즐거운 지식'이라고 번역되었나?

 

gaite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는데, 아마 게떼 정도 발음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게이라는 말이 나는 20대 때부터 그렇게 좋았다. 이유는 없다. 게이, 게떼 등으로 활용되는 그 이미지가 그렇게 좋았고, 내가 생각하는 명랑이라는 단어는 한 편으로는 이 게이라는 말과 연동되어 있다. 기계적인 이미지를 조금은 가지고 있는 유머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그러나 Aurore라는 책은, 아주 우울한 책이다. 바울 서신에 대한 체계에 대해서 아주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니체 얘기가 계속해서 펼쳐진다. 얼마나 우리가 속고 살아가는가... 맥락만 가지고 오면, 지금 명박 시대의 우리 얘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클라이막스를 지나 한풀 꺾이는 듯 싶다. 이 시대가 오기는 올 것 같다고 몇 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 시기가 오니까 아직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모르던 시절, 그 때 읽은 책들이 다시 기억나기도 하고, 잘 생각하보면 막상 이 시기에 뭘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때는 나도,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뭔가 읽는 것 자체가 좋아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의 열망이나 열정 같은 것들을, aurore나 gai savoir 같은 단어를 접하면서 다시 생각해냈다.

 

뜻도 잘 모르면서 aurore를 읽던 시기, 꼭 이런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가 간절했다.

 

(그러나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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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독서감상문 2009. 5. 17. 03:00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고 감상문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리 봐도 가엾은 사나이라서 도대체 요즘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살펴보고 싶어서 책을 들기는 했는데, 어지간해서 책이 진도가 안 나간다. (아직 다 못 읽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는 하는데, 조선일보 식의 쌩까는 건 그렇게 좋은 자세가 아닌 것 같아서, 어쨌든 비판을 하더라도 읽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읽기는 하는데, 우와, 전혀 진도가 안 나간다.

 

잠깐 이 불쌍한 사내를 위해서 살짝 눈물을 흘렸다.

 

다음 달이 되면, 나도 약간 시간적 여유가 나서, 좀 꼼꼼히 읽어볼 수 있을 시간이 날 것 같다.

 

(참고로, 김규항의 예수전은 몇 시간 안 걸려서 다 읽었다. 그는 크리스탈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이다. 이와 비교하면, 유시민은 진흙탕 같다. 너무 어려운 시간을 보내서 그런 것일까? 그의 글에는 함정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읽히지가 않는다.)

 

하여간 다 읽고 할 얘기지만... 유시민, 안됐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한 때는 민주주의의 맨 앞에 섰던 사나이다.

 

그도 언젠가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는데, 도통 페이지가 나가지가 않는다. 책이, 온통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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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에 관해서 내가 직접 언급하는 일은 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침례를 받은 교인이었던 적이 있었다. 교회 다니기를 그만둔 것은, 내 주변의 교회쟁이들이 나의 삶을 너무 피폐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면서 아주 괴로워졌고, 교회를 그만두면서 나는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가끔 나는 대인기피증의 증상으로 괴로워하기는 하는데, 이 대인기피증을 나에게 심어준 사람들이 바로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교회를 다니던 시절, 나는 늘 자살의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살다보면 자신을 지키는 지혜가 조금은 생기는 법, 난 교회쟁이들을 시작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끊었다.

 

교회에 대해서 누군가 물어보거나, 기독교에 대해서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답변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정색을 하고 더 물어보면...

 

일요일날 쉬어야 하는데, 교회까지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안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위를 받고 나서, 신학대학원 같은 데에 다시 가서 공부를 좀 더 해볼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제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래도 종교 현상에 대해서 종종 관심을 갖기는 한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불교에 관심을 갖고, 선불교의 역사 같은 데 대해서 좀 돌아다보면서, 불교와 경제학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좀 있기도 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불교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칼럼도 연재를 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접었다.

 

한국 불교, 기독교가 황당한 것만큼 불교도 그 안이 복잡하고 황당했다.

 

코란 공부를 좀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코란을 공부해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하여간 종교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생각하기로 한지, 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갔던 교회가 바로 소망교회였다. 명박 장로 시절의 바로 그 교회였다.

 

나한테도 강력한 트라우마가 남은 악몽과 같은 기억들이 몇 가지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보았던 소망교회의 내부는, 아마 지옥을 보았다는 느낌이 맞을 것 같다.

 

탄자니아의 아루샤에 갔다가 르완다 국제 재판소를 들렀던 적이 있었다. 직접 르완다에 갔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것 중에서는 지옥의 느낌에 가장 비슷하게 경험한 것이 르완다 사태였다. 그러나 정말로 내 마음 속에 지옥으로 남은 것은 소망교회 시절이 기억이다. 그 악몽들을 떨쳐내는 데 몇 년이 걸렸다.

 

음... 더 무서운 곳이 있기는 했다. 횃불선교회의 예배에 참가해본 적이 있었는데, 여기는 정말 무서웠다.

 

요즘도 가끔 악몽을 꿀 때면, 그 시절의 기억들이 꿈에서 떠오르면, 땀이 범벅이 되어서 깨어나고는 한다.

 

2.

가끔은 예수가 얘기한 것이 그런 게 아니었고, 지금의 '예수귀신'들에 대해서 뭔가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런 건 나보다는 더 똑똑하고 강직한 사람들이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니,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김규항이 아마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그가 예수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는 꽤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어떤 종류의 내용일지, 무슨 얘기를 중심으로 끌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하여간 김규항의 <예수전>은 꽤 오래 전에 내가 생각하던 것들을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보통 해방신학 계열이나 아니면 저항의 의미로 기독교를 생각한 많은 사람들은 정본으로 간주되는 마태복음이 아니라,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얘기를 구성하고, 여기에 누가복음을 보조로 해석하게 된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면, 히브리 전통에 희랍 전통을 가지고 온 바울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어쨌든 불어공부 한다고, 처음 유학가서 집었던 책들이 니체 책들이라서, 나도 그런 점에서는 니체의 시각을 상당히 공유하는 편이다.

 

('어딕션'이라는 영화에 보면, 니체가 그렇게 갑자기 깨달은 것은 그가 흡혈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흔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든다"라는 구절에서 마태복음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살짝 끼워진다. 전혀 뜻이 다르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이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를 재해석한 것이다. 익숙한 얘기이기는 하다.

 

그래도 요즘 같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공화국에 사는 지금, 김규항의 예수전은 시의적절하기도 하고, 또 용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권불십년이라고 했다. 소망교회의 천국도, 벌써 쇠락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세상이라는 것은 묘해서, 절정에 달한 것 같은 힘도, 또 다른 기운에 의해서 균형을 잡게 마련인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3.

김규항의 <예수전>이라는 책은, 어딘지 모르게 빌헬름 딜타이를 연상하게 하고, 역시 해석학이라는 생각 속으로 다시 우리를 인도해준다.

 

텍스트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원전의 텍스트 혹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징체계를 사용하면서도, 사실은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독해자의 목소리와 그 속에 숨어있는 장치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이 책은 아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일종의 해석학 연습풀이집과 비슷하다.

 

그것이 공동체의 저작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마가라는 저자가 있고, 그뒤에 윤색된 부분이 있고, 그러한 텍스트가 지시하는 예수라는 한 상장이 있다.

 

한편으로는 마가를 재구성하면서 예수사건을 재해석하는 김규항이라는 진짜 저자가 있다. 책은 전형적인 세 개의 레이어를 가지고 있는 구조이다.

 

김규항이 마가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예수 사건의 진실은 또 다른 면에서 스테레오 타입화되어 있는 가난한 자들의 예수이고, 처형된 어느 정치 지도자의 사건에 관한 종합적 실체에 대한 재구성이다.

 

어떤 점에서는 익숙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지금 여기' 즉 장로 대통령의 권세의 시대라는 콘텍스트 즉 아주 특별한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것이 나처럼 예수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신자의 목소리로 나왔다는 점에서 중첩점 맥락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상상해보자. 명박이 소망 교회의 장로 출신이 아니라, 조계종의 어느 한 열성 신도 출신이었다면?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김규항의 <예수전>이 불온한 책이 되는 셈이다. 동일한 예수 현상을 해석하면서, 지금 소위 강남의 대형교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이 책은 사실상 한국의 권력의 한 축에 대해서 균열을 내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김규항이 사회주의자이든, 아니든,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불온서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읽는 재미도 꽤 있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썼다면 마몬에 대한 얘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을 것 같고, 교회 경영학에 나온 황당스런 문구와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에 좀 더 많은 해석을 더했을 것 같지만... 어쨌든 교회 얘기야, 김규항이 오죽 잘 알겠나.

 

어쨌든 책 내에서는 교리에 관한 얘기와 현실에 관한 얘기가 긴장을 하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저자로서의 김규항의 목소리가 더 들어가도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건 저자의 몫이고, 예수 사건을 새로운 상상의 매개체로 갑자기 2009년이라는 공간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의도가 이런 형식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4.

어쨌든 3개의 레이어를 가진 텍스트지만, 저자의 최근 생각 혹은 기본 입장 같은 것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현실의 동구 사회주의와 최근의 신좌파의 흐름 그리고 젠더 문제들에 대해서 김규항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고래가 그랬어"를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이런저런 수다들을 부지런히 떨고 있다. 그 수다가 상당히 재밌다.

 

나는 김규항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수다꾼 기질은 다분해보인다. 예수 얘기를 하면서도 부지런히 자기 얘기를 하는데, 최근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30대, 40대 여성들의 이야기하는 법, 일종의 나선형식 소통 구조와 상당히 비슷해보이기도 해서, 신기했다.

 

어쩌면 그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그 스스로도 예수의 분신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꽤 여러 번 생각하지 않앆을까? 어쨌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예수는 꽤나 수다쟁이이고, 얘기들을 잘 만들어내는 그런 여성성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너무 내가 코카서스인 모델을 한 예수 얼굴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게 상상하는 것일까?

 

5.

시간이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교회 다니던 시절,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기억들도 이제 몇 년이 지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천연덕스럽게 지낼 수 있게 되다니 말이다.

 

지금의 명박 현상을 만든 것이 꼭 보수계 교회들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악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한 가운데 그런 신학적 현상들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똥은 똥 눈 사람이 치우는 게 맞기는 한 것 같다. 하여간 이 번 똥은 김규항이 자기가 치우겠다고 나선 것 같다. 예수전이 그 첫 번째 일인 것 같다.

 

교회의 위기가 한국 사회의 위기를 불러 일으킨 지금의 상황에서, 김규항의 <예수전>은 그 흐름의 맨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나는 교회쟁이와 말 섞는 것도 무섭다. 내가 지금도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것은,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어느 근본주의자가 섞여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나의 마음의 평화가 좋고, 내가 즐기는 명랑이 좋고, 괜히 교회쟁이와 만나서 이 불안한 평화를 깨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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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은 이제 어느 덧 10달이 가까와진다. 고양 우는 소리는 좀 특이하다. 다른 고양이를 만나지 못해서 그럴까? 고양이 우는 소리도 일종의 언어라고 한다면, 우리 집 고양은 '어버버' 밖에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고양 발톱 깍아준지 몇 주 된 것 같은데, 어제는 손님들 온 동안에 잠깐 고양이 앉고 있다가 손가락을 꽤 깊게 할켜놓았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아내의 손에 상처를 만들어놓았다.

 

열달 된 고양이, 이제 집에는 완전히 적응한 듯하고, 길고양이 시절의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 극복한 듯 싶지만... 이제는 민원 폭주다.

 

폭력 고양이, 각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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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의 묘

영화 이야기 2009. 4. 25. 04:33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다카하타 이사오는 여전히 미스테리에 가득한 인물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빨간머리 앤의 감독이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콤비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것,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두 개의 축 중에 한 명이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더 좌파라는 지적이 종종 있는데,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은 잘 모른다.

 

그의 에니메이션 중에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보고는 하는, 그야말로 '내 인생의 에니메이션 탑 파이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울적할 때에는 이토 준지의 공포 콜렉션을 주로 본다. 오랫동안 내 감성에 제일 잘 맞는 사람은, 여전히 이토 준지이다.)

 

88년에 나온 에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를 본지는 몇 주 안된다.

 

(요즘 내가 하도 깝깝해하고 있으니까, 아내가 하자센터에서 영화 몇 개를 빌려다주었는데, 그 중에 끼어있었다.)

 

일본 에니메이션 중에는 반전을 메시지로 하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때때로 과하게, 때때로 허황되게 그런 정서들이 그려지는 것 같다. 가장 허황되게 반전을 그린 것은 실사영화로 나왔던 <캐산> 정도로 기억된다.

 

<반딧불의 묘>는 그야마로 극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남매가 전쟁 한 가운데에서 굶어죽어가는 현실을 그려냈는데, 다카하타 이사오는 이 에니메이션이야말로 영화가 할 수 없는, 에니메이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섯살짜리 애의 연기가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나중에 이 원작은 다시 TV 시리즈로도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는데, 일본의 TV 시리즈는, 뭐 구해서 볼 가능성이 거의 없다.)

 

'드로푸스'라는 모티브, 정확히는 '드로푸스 통'이라는 모티브가 한 가운데 들어가 있는데, 드라마 <서울 1945>에도 드로푸스가 모티브로 등장한다. (전후 관계로 보아, 에니메이션이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어쨌든 내가 본 영화나 에니메이션 중에서 이렇게 사실적으로 영양실조로 굶어죽어가는 것을 주 축으로 하고 있는 얘기가 있나 싶게, 얘기는 슬프고 장면들은 아름답다.

 

몇 달 전에 야스쿠니 신사에 간 적이 있는데, 몇 시간에 걸쳐 박물관까지 꼼꼼하게 돌아보았고, 일부분이지만  문제가 된다는 바로 그 홍보영 영화도 보았었다. 마지막 장면은 놀이터에서 대화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여주고 있었고, 배경 음악은 비트가 강한 힙합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할아버지들만 공유하고 있는 야스쿠니의 정신을 젊은 층에게도 널리 알리기 위한 장치들을 배치한 거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는데, 만약 한쪽 끝에 야스쿠니 신사의 박물관에서 틀어주는 홍보영 영화가 있다면, 또 다른 한 쪽 편에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이해하는 두 개의 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여간 <반딧불의 묘>가 나에게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영화 자체의 요소라기 보다는 영화 바깥 쪽의 얘기들이다.

 

다음 주부터는 그동안 모아놨던 자료들과 학생들의 글을 모아서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는, 20대 당사자 운동에 대한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책 작업을 시작한다. 원래는 지난 2월에 하려고 했던 것인데, 연재와 강연, 그리고 얘기치 않았던 방중 프로그램에 치여서 이렇게 몇 달 밀린 셈이다.

 

이번 주까지는 생태경제학 시리즈 1, 2권을 어떻게든 1차 마무리하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이 다음 작업이 바로 이 책인 셈이다.

 

아마 부제가 이렇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실제로 이 책의 부제로 내가 달고 싶은 것은,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한 때 송강호가 했던 대사이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이 대사가 이 순간에는 딱 적합하다 싶다는 생각을 몇 번 했었는데, "밥을 먹지 못하면"이라는 생각의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시퀀스가 딱 머리 속에는 <반딧불의 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만큼 에니메이션은 강렬하다. 더 무서운 것은, 이 남매의 얘기가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야말로 경제 위기 속에서 별다른 안전판 없이 개별적으로 세상에 내밀린 사람들, 밥은 먹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조직론에 관한 분석을 할 때, 내가 자주 쓰는 분석틀 중의 하나가 균질성과 이질성이라는 개념인데 - 원래는 경제 주체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에서 따온 것이다 - , 명박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 역시 이러한 균질성의 문제로 종종 해석한다. 늙탱이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세상을 보니, 도대체 이 밖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 턱이 있나.

 

그래도 너희들은 밥은 먹지 않느냐? 주로 지금의 20대들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이기는 한데, 이 말이 정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약간의 극단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전쟁, 구조, 그리고 진짜로 개별적 굶주림 같은 몇 개의 키워드들이 반딧불이 번쩍거리는 환상적 장면들 속으로 묘하게 연결이 된다.

 

(90년대 후반, 삼성에서 반딧불을 그룹 차원에서 이미지로 민 적이 있었다. 약간 어이가 없으면서도 잘 해보라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반딧불 얘기하던 사람들은 삼성 내에서 지금쯤은 어디에들 있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반딧불이 돌아올 수 있는 생태계를 위해서 삼성이 생태계 보호에 앞장서겠다는 얘기였는데, 10년도 안된 지금,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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