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쓰는 법?



둘째는 태어날 때 많이 아팠고, 작년에 많이 아팠다. 폐렴으로 몇 번을 입원했다. 요즘은 아이 보는 게 제일 큰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나머지 일을 한다. 안 남으면? 애들 어린이집 가고, 오고 그게 제일 큰 일이다. 나머지는 그 때 그 때 상황 봐서 한다.


 


첫 책이 <아픈 아이들의 세대>였다. 인생이란, 거기서 거기다.


 



아팠던 둘째랑 요즘 아주 많이 놀아준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잘 때도 나한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젠 제법 살도 올랐다. 한동안 백분위 체중표로 하위 5%였다. 1년 넘게 죽여라고 먹였더니 이제 중간 정도 간다. 시간 나는 대로 놀이터 같은 데 데리고 나가서 뛰어놀게 한다. 이젠 제법 잘 뛴다. 올 겨울만 잘 보내면, 이제 한시름 놓아도 좋을 것 같다. 지난 가을에도 폐렴기가 있었고, 올 봄에도 있었다. 체중이 좀 느니까 아픈 것은 마찬가지만 그래도 자기 힘으로 좀 버티는 것 같다.


 


1.


저자로 책을 쓴 게 이제 10년이 넘는다. <88만원 세대> 때부터 해도 10년이다. 그 동안에 엄청 잘 판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과학이나 경제 분야에서는 가장 오래 버틴 축에는 드는 것 같다. 중간에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기는 했는데, 오래 못 버티는 경우가 많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버틴 게 아니라, 다른 할 게 별로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러다 보니까 가끔 책 쓰는 법에 관한 책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때마다 손사레를 친다. 내가 무슨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에 남을만한 그런 기발한 책들을 늘 쓰는 것도 아니다.


 


대학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처음에 파리 8대학에 원서를 냈고, 그 다음에 파리 10대학 시험을 봤다. 이 시험은 죽을 뻔하다가 겨우 붙었다. 그 시험에서 꼴지가 아니라는 사실만 내가 안다. 3달 준비하고 붙었으니까, 붙고 나서 너무 감격스러웠다. 등록하고 바로 서울에 가서 입학 때까지 놀다 왔다. 갔다 오고 나니까 8대학 합격통지서가 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10대학에 갔다. 8대학은 시험은 따로 안 보고 논문 계획서만 가지고 평가했다. 그 때 날 합격시켜준 양반이, 프랑스에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미셀 보였다. 정작은 자기 책보다는 '논문 쓰는 법'이라는 책으로 아주 유명해진 사람이다. 대학원, 박사과정 때 논문 쓰면서 누구나 그 책을 한 번쯤 본다. 각주 다는 법 등 기능적인 일들을 설명해놓은 책이다.


 


우여곡절 끝에 박사 과정은 아주 젊은 부교수랑 같이 하게 되었다. 외부에는 아주 강성이고 근본주의자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 양반이 돈을 벌게 된 것은, 우리 식으로 치면 회계사 시험 인문용 참고서였다.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 사상사 전공한 사람이지만, 그도 자식을 낳고 버틸 때까지 회계사 분야에서 강사도 좀 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걸 정리한 수험서 책이 빅히트를 쳤다.


 


나를 가르친 사람들이, 소소하고도 별 거 아닌 얘기로 잘 팔리는 책을 쓴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람들의 전공서는, 돌아버릴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실험주의적 국가>라는 책은, 진짜로 실험적이었다. 너무 어려워서 형광펜을 몇 개를 동원해가면서 읽었다.


 


실용적인 책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혹은 잘 읽히는 책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거부감이 없었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들도 극단적인 실용서들을 쓰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걸로 돈을 좀 벌어서, 딴 데 손 벌리지 않고 자기 연구를 계속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것 치고는, 내가 엄청나게 실용적인 책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2.


책을 쓰는 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내가 유별나거나 특출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로서 오래 버티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다. 이건 미리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성격이 아주 더러워서 생긴 일이다. 남들 다 한다고 해도, 싫다면 안해아주 성격 더럽다.


 


내가 한 것은, 특출나거나 특별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모르는데, 내가 책을 많이 내던 시절에는 사재기도 좀 있었고, 지금 보다는 마케팅이 많았다. 알게 모르게, 자기 책 사재기를 부탁하는 저자들도 좀 있다고 들었다. 그런 건 안했다. <88만원 세대> 때에는 작은 출판사이기도 했지만, 첫 책을 내는 출판사였다. 뭔가 하고 싶어도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할 돈도 없었다.


 


그냥 남들 하는 기본 정도, 어떤 때에는 그 기본도 못했다. 그냥 내놓고, '내깔려둔다', 그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강연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는 다를 수도 있다. 강연도 거의 안 했다. 책 나올 때 출판사에서 부탁하는 몇 건 정도나머지는 시민단체가 하는 행사나 도서관 행사, 혹은 내가 신세진 사람들에게 오는 부탁. 대학에서 강연요청이 오면 여건 닿으면 할려고 한다. 그 정도다. 이런 강연은, 대부분 돈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시민단체 특히 지방에서는 이렇게 사람들 모으면서 회원조직이나 활동조직들을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주 시간 안 맞는 경우 아니면 가려고 한다.


 


강연에서 돈을 버는 방법이 따로 있기는 하다. 이것도 시장이라고 한다면, 대기업 사원연수나 비슷비슷한 경제단체들 모임, 이런 건 돈이 된다. 직업으로 쳐도 이 시장은 한 번 뚫고 들어가면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물론 많은 돈이라고 해봐야 몇 억원대지,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건 안 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얘기 실력도 늘고, 따로 준비할 것도 없는 편안한 강연이다. 그래도이건 내가 싫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책으로도 먹고 살아? 넉넉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면 세 끼 밥은 입에 들어간다. 강연하면 더 돈 많이 벌지 않아?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그냥 취직하는 게 낫다. 나중에는 몰라도, 아직은 오라는 데가 좀 있다.


 


보람을 포기하고 생기는 돈은, 그렇게 달지 않다. 명분을 포기하고 생기는 실익은, 편안하지 않다.


 


3.


가만히 있으면 누가 알아줘? 책을 내놓고 가장 많이 듣는 얘기다. 좀 돌아다니면서 알리라는. 물론 나도 그런 걸 아주 안 하지는 않지만, 내가 먼저 뭘 하자고 제안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실용적인 이유다. 아주 기발한 거 아니면, 해봤지 별 소용없다. 괜히 힘만 들고, 모양만 빠진다. 그러다보니, 그냥 원칙주의로 사는 게 제일 낫다.


 


좋은 책은 팔리고, 아니면, 좋은 책이 아니다.


 


아주 간단한 원칙만 정하고, 그 정해진 원칙을 어지간해서는 지키는 것, 그게 오래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원칙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는? 그 땐 비겁하게 변명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 원칙을 깨는데 익숙해지면, 나중에 존재가 지워진다. 왜 출발했는지, 그 생각 자체가 사라진다.


 


그냥 가만히 있고,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것, 그게 최선의 전략이다. , 이 정도면 전략도 아니라 무대책인데, 그것이 사실은 가장 오래 가는 기본 전략이다. 가만히 있으면 '양서'로 도서관 사서들이 인지를 하고, 도서관에서 좀 사준다. 그거 가지고 돼? 그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버킷 리스트'라는 용어를 사람들이 쓴다. 나는 '버킷 리스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것 같다. 하고 싶은 것, 없다. 되고 싶은 것, 없다. 그 대신 아주 빼곡하게, 하면 안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산다. 그리고 대개는 지킨다.


 


최근에 내가 하지 않을 것에 두 가지가 추가로 들어갔다. 방송 진행자와 고정, 그리고 예능 방송.


 


이유는? 그냥 애 보면서 차분히 앉아서 생각하는 삶이 너무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불필요한 욕망이 자꾸 생긴다. 화려함을 구하고 살아본 적이 없는데, 속성상, 자꾸 화려함을 구하게 된다. 예능도 아주 안했던 건 아니다. 단기성으로는 한 적이 몇 번 있고, 생방송도 오래 했었다. 하다하다, 아침 방송도 했던 적이 있다.


 


그냥 쭈그리고 앉아서 책 보고, 사람들하고 토론하고, 글 쓰고, 이게 더 생산적이다.


 


4.


다른 저자나 작가들을 만나면 다들 하는 얘기가, 책 시장의 어려움과 시대에 맞지 않는 책의 단점에 관한 것들이다. 아러 아러, 진짜로 그런 얘기가 목까지 나온다. 틀린 야기도 아니고, 이상한 얘기도 아니다. 그러나 책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에서 사회적인 뭔가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매체 중에서, 책이 가장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음주 용어로 하면, '장타자'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예전에는 유명한 장타자였는데, 요즘은 극단적인 단타자로 바뀌었다. 애들 키워봐…)


 


방송으로 치면, 일일방송이 있고, 주간방송이 있다. 이 템포는 진짜로 숨 넘어간다. 모든 것들은 12시간 단위 혹은 24시간 단위로 움직인다.


 


회사는 보통은 월간 단위로 움직인다. 제일 중요한 것이 월간 실적이고, 월간 단위의 회의가 중요한 의사결정체가 된다.


 


공무원들은 보통 주간단위로 움직인다. 별 실적이라는 게 없지만, 주간 회의에서 중요한 것들이 결정된다.


 


국회는? 정치권은 이틀 단위로 움직인다. 보통은 월수금 오전에 최고의원 회의가 있다. 많은 사이클은 그 최고의원 회의에 맞추어진다. 이틀 지난 얘기는, 벌써 과거형이다.


 


주기가 짧아지면 더 다이나믹해질까? 남들 다 아는 걸 자기만 모르는 독특한 문화가 생겨난다. 뭔가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축적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문도 24시간 단위로 움직이지만, 가끔은 기획기사 같은 것을 한다. 길게 보면 한 달 단위 정도 된다. 언론이 가장 길게 볼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이다. 그것보다 뒤의 얘기를 하면, "그 때 가서 얘기합시다", 이런 얘기를 듣게 된다.


 


MB나 박근혜가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것 중의 하나가 TV 다큐가 있다. 길면 두 달, 보통은 한 달에서 한 달 반 주기로 움직인다. 가끔은 6개월에서 1년씩 가는 장기편성이 있기는 한데, 이건 그야말로 특별편성, 해외 장기취재로 4부작, 6부작 같은 것을 할 때의 일이다. 보통의 PD나 촬영감독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책은 짧으면 2, 길면 3~4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사회에 관한 얘기를 하는 매체로는 장타자, 아니 최장타자 정도가 된다. 2년 전에, 2년 후에 필요한 얘기를 생각해서 그 때 움직인다. 2년이 지나도 이 문제는 안 바뀌어! 그럴 때 책 준비가 시작된다.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사람들이 책을 내는 것 아니겠는가?


 


보통의 경우, 방송이나 신문은 다람쥐의 덫에 걸린다. 뭔가 많이 한 것 같은데, 사실은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다. 최장의 호흡은 책이 가지고 있다 (물론 책의 단점은,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니까 호흡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줄여가면서 최소한의 지출만.)


 


책을 쓰는 것은, 선경지명의 힘에 있지 않고, 버티는 힘에 있다. 누가나 가끔씩은 선경지명의 순간이 온다. 전혀 안 오는 사람은, 아마도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찰라의 순간을 가지고 실제로 책을 준비하고 쓰고, 그리고 누군가 알아봐주는 시간까지 가는 것, 버티는 힘이 사실은 책을 쓰는 기술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책도 기술의 영역이 조금 있는데, 이건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게 된다.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버티는 힘, 이건 진짜로 초장에 포기하는 사람과 달인의 영역에 가는 사람,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뉘어지는 것 같다.


 


이거 문제다, 생각하고 2~3년을 버티고, 다시 또 2~3년을 버티는 것, 그게 책을 쓰는 노하우의 거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왜 그 지랄을 해? 세상이 지금보다는 나아지기를 위해서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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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얼굴 쳐다보는 거 사실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블로그 대표 사진은 바꾼지 얼마 안되는데, 사실 별 생각 없이 파일 크기 맞는 걸로, 그냥 잡히는 대로 걸었다. 거의 방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러다 자꾸 내 얼굴 보니까 우울해질려고 한다. 그냥 얼마 전에 큰 아이 읽어주느라고 읽은 동화책 표지를. 별 의미는 없지만, 내 얼굴 보고 있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바꾸는 김에, 페이스북 사진도. 몇 달 전 제주도 갔다오면서 찍은 아이들 사진인데, 그냥 오늘 강화도 가서 아무 생각없이 찍었던 사진으로. 역시 별 의미 없다.


1년 좀 넘게, 진짜로 돈이 부족해서 쩔쩔 맸었다. 몸부림을 쳤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진짜 몸부림을 치면서 살았는데, 이제 그 시기도 거의 끝나간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했다. 아무 것도 안 사고. 그리고 일 때문에 정말 필요한 경우 아니면, 아무도 안 만났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부림을 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50대 에세이집 준비를 하면서, 부제로 '절대 자유는 절대 겸손에서', 이런 말을 생각했다. 뭐, 꼭 그 부제를 쓰겠다는 건 아니다. 별 이유 없이, 그런 제목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남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 일도 아니고.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어깨에 힘 빼고,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요즘 청년들에게 어떤 어감으로 느껴질 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자유'라는 표현이 좋다. 헤겔 용어에서는 '절대'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반대말은? 아마도 '악' 혹은 '악무한' 정도가 될 것 같다. bad infiny... 여기에 댓구해서 절대라는 말이 사용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불교적이기도 하다. 요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얼마 전에 읽은 능엄경 얘기와 비슷하기도 하다 (말년의 세종이 능엄경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 같고, 그래서 새로만든 한글로 최초로 번역한 책이 능엄경이기도 하다.)


이제 50이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책임져야 할 것도 많고, 기타 등등. 마음이 무거웠다.


근데 절대 자유라는 말을 생각한 다음부터,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하던대로, 돈 조금 더 벌고, 애들 조금 더 잘 키우고, 에 또 에 또, 약간의 허세를 가지고, 그리고도 좀 넉넉하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어어, 그리고 또 조금은 착하게, 에 또 그리하여...


요런 게 다 개수작이다.


자기 두 다리로 자기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질 수 있는 책임의 전부다. 그 외의 책임은, 사실 아무도 못 진다.


절대 자유, 그 정도 삶이면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을 문득.


그러면 진짜 <월든>처럼 그렇게 고독한 사색의 길을?


그런 건 아니고, 카메라를 다시 집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한동안 늘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가 여의도 가면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닌데, 워낙 검색대를 많이 통과해야 하니까 가방도 안 가지고 다니고, 그냥 몸만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 여름에 차도 없앴다. 이래저래, 카메라를 내려놓고. 또 마침 센서 청소도 해야 하는데, 이래저래 귀찮아져서 그냥 내려놓게 되었다.


당장 카메라를 바꾸거나 그럴 건 아니고, 내려놓았던 카메라를 다시 집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뭐, 그렇게 좋은 카메라는 아니지만, 내 능력으로는 그 정도도 감지덕지.


요즘 나오는 카메라 스펙을 보니까, 어마무시, 입이 딱 (안 갖고 싶다면 거짓말.)


원래 인생에서 최고 남는 것은, 얻어 걸리는 것이다. 마치 뭔가 엄청난 준비를 하고 기획을 하면서 세세하게 계획한 것 같지만, 그런 건 대부분 사후적으로 갖다 붙이는 얘기들이고, 진짜로 의미 있는 것은 얻어걸리는 것.


근데, 이 얻어걸리는 것도 무조건 적인 것은 아니고, 약간의 조건들이 필요한 것 같다. 뭘 좀 해야, 하다보니까 얻어걸리기도.


그 얻어걸리는 일이 자주 벌어지게 하는 것, 그것을 자유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롭지 않으면, 얻어걸리는 건 없다. 준비한 것만 꾸역꾸역, 진짜로 몸부림이 몸부림을 다시 낳는다. 힘만 들고, 억지로 억지로.


그리고 그 얻어걸리는 확률을 좀 더 높이기 위해서 더 많이 전제조건을 떼고, 뮤턴트가 등장하기 편한 상황을 최대로 하는 것, 그것을 '절대 자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 좋은 점은?


늘상 보던 것을 조금은 더 신경 써서 보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다 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딴 생각이 들게 된다.


그냥 눈으로 잘 보면서 생각하면 안돼? 그건 천재들이 하는 거고, 나는 절대로 천재 아니다. 기계의 도움도 좀 받고, 장비의 도움도 좀 받는 스타일이다. 왜냐? 난 평범하니까.


카메라를 통해서 보고, 사진을 통해서 보면 현장에서 있던 느낌과는 다른 각도, 다른 형태의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자꾸 하다보면 카메라 없이도 그런 경지?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기는 좀 어렵고.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만드는 일을 좀 더 하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블로그든 페이스북이든, 눈이 가게 되고, 생각을 고정하게 되는 사진들을 치워버렸다. 아주 약간의 느낌만 남고 담백한 것. 그래야 눈이 자유로와지고, 생각도 자유로와질 것 같은, 그런 느낌적 느낌.


열심히 한다고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참 잔인하다.


그렇지만 좀 맘 편하게 생각하면 가끔 얻어걸리는 게 있다. 그래서 살만하다.


이런 점에서 세상이 공평하지는 않다. 몸부림을 치면서 살려고 해도, 결국 개수작으로 종료되는 잔인함이 있다.


그렇지만 가끔은 얻어걸리는 게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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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작업할 연출 처음 만나는 날이다.

빈 손으로 만나기가 밍숭맹숭해서 cd 한 장.

별 거는 아닌데,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할 때 주로 집어드는 음반.

중2 때, 태어나서 두 번째로 산 lp였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들은 lp가 되었다.

내가 소년이 될까 말까하던 시절의 감성.

다행히 전세계 어디가나 대부분 판다.

비 많이 내리는 오늘 같은 날 더욱 땡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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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작업을 준비하며

 


(여섯 살 큰 애 생일 선물로 접는 자전거를 사줬다. 동네에 언덕길이 많아서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아파트촌에 있는 처가댁으로 자전거를. 모닝에 이런 자전거를 실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큰 애는 앞자리로 가고. 아내와 내가 동시에 탈 수가 없다는 부작용이. 그렇다고 고 자전거 샀다고 차부터 바꾸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1.

살다 보면 많은 우연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나는 68년에 태어났다. 꼭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럽을 뒤덮었던 68혁명에 대해서 좀 더 가깝거나 친근하게 느꼈던 것 같다. 나이를 먹고 파리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68혁명의 팜플렛이 처음 뿌려진 건물이 F동이었는데, 나는 G동에서 공부를 했다. 왠지 중요한 일을 하고 같다는, 그런 어렴풋한 느낌이 있었다. 그저 우연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내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는 68혁명의 영향이 좀 더 많기는 한 것 같다.

 

2.

이것도 아주 우연한 일이다. 20대는 내내 군사정권이었고, 30대는 DJ 정권과 함께 시작하였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었다. 그 때 엄청나게 즐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후에 펼쳐질 시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았던 것 같다.

 

마흔이 되었을 때, MB 정권이 들어왔다. 진짜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세상이 너무 추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MB 정권의 마지막 해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평생 늘 보면서 지낼 것 같은 친구 이재영이 떠났다. 그리고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게 40대가 지나갔다. 만약 아이들 둘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냥 지워질 것 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9년이 지나갔다.

 

이 얘기를 20대들에게 했다.

 

"선생님, 저는 20대가 지워졌어요."

 

하긴 그렇다. 공교롭게 그런 열 살 터울로, 20대가 혹은 30대가 통으로 보수 정권 시절에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40대를 지내는 편이 20대를 날려먹는 것보다 나을까? 그야말로 그냥 우연일 뿐이다. 그렇지만 누가 대통령이냐, 어떤 정권이냐에 따라서 개개인의 삶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나라들이 일부 있다. 프랑스가 그런 경우인데, 한국은 좀 더 그런 것 같다. 좋든 싫든, 개인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혀 영향을 안 받는 사람도 있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변화에 민감한 편이고, 심하게 많이 영향을 받았다.

 

3.

여론조사표를 자주 보고 많이 보는 편이다. 물론 그걸 다 맞다고 생각하거나 기계적으로 여론 조사에 맞춰서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연령별 혹은 지역별 편차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주 보는 편이기는 하다. 여론 조사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등장하는 사회경제 집단이 자영업자와 농민, 가정주부 그리고 50대 이상의 노령층이다.

 

한 때 가정주부가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조사에 집계되는지, 너무 궁금한 적이 있었다. '40대 여성'에 대한 연구주제가 그 때 나왔었다. 흔히 전업주부로 잡히는 사회경제적 집단이 보수적으로 사유한다고 하면 그 사유가 보수적으로 전환되는 나이가 있을 것이라는 게 기본 가설이다. 40대에 가정주부들은 어떠한 변화를 겪는가, 아니 한국의 40대 여성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건 정말로 내가 궁금했다. 정말로 내가 궁금했다. 생각해본 적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궁금해졌다.

 

실제로 연구 설계도 일부 했다. 더 진전시키지 못한 것은, 그 때쯤 3살 된 둘째 애가 폐렴으로 연달아 입원을 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연구 정도가 아니라 하던 일도 다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라그렇게 40대 여성에 대한 연구는 내려놓게 되었다.

 

, 그럼 50대는? 내가 50살이 되었을 때, 춧불 집회는 더 큰 클라이막스로 가기 위해서 잠시 숨고르는 중이다. 그렇게 한 겨울,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왔다. 아직도 박근혜는 대통령이었고, 우리 모두 초조하게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리고 정말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조기 대선이 열렸다. 그리고 그 선거에서 더 이상 50대가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예전에 50대에서 보였던 투표 영상은 60대 이상으로 올라갔다.

 

물론 아직도 많은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50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집단의 의견을 갖는다. 대통령 지지율을 비롯해서 정치적 의미가 강한 여론 조사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여전히 50대는 보수적이다. 특히 갤럽에서 주로 하는 문화 취향 조사에서는 변화가 없다. 50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안동역과 같은 트로트와 노사연이다. 나는 좀 다를까? 트로트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정도지, 이제는 어느덧 20대가 듣는 노래와 내가 듣는 노래가 많이 달라졌다.

 

이제 내가 50이 되었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나라고 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 마찬가지다.

 

나는 워낙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거의 동료로 지냈던 사람들이 나보다 열 살 많은 경우가 많다. 이제는 환갑이 되었거나 환갑을 기다리는 그들이 가끔 내 모습을 보면 놀란다. 나도 흰머리 나고, 적당히 배 나오고. 그리고 나도 또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놀라는 일이 생길 것이다.

 

4.

이런저런 이유로 50대 에세이집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좀 된다. 물론 처음 마음을 먹었을 때에는 이 시기가 이렇게 격동의 시기가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내용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고, 이제 슬슬 써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은, 무슨 얘기를 큰 줄기로 삼을 것인가, 그야말로 모지방에 관한 얘기.

 

어차피 내가 살아가는 삶과 일상 그리고 내 생각에 관한 것들이라서, 제목이 뭐가 되든, 기둥이 뭐가 되든, 기본적인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써놓은 것도 일부 있고,

 

먼저 생각한 것은 '경차 타면 멋있을 나이', 요런 스타일의 제목이다.

 

경차 탄 건 몇 년 되지만, 경차만 탄 건 1년 정도 된다. 내 차를 없앤지 1년 정도 된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차가 없는 건 아니고, 아내 차를 얻어 타고 다닌다. 아이들 아침에 어린이집 데려다 줄 때 주로 타고, 지방에 가야 할 일 있을 때에도 탄다.

 

50대가 경차 탄다고 해서 엄청난 일은 아니다. 그냥 살다 보면 그런 때도 있고, 이런저런 경험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래도 좀 느껴지는 게 없지는 않았다.

 

몇 번 아내가, 그냥 벤츠 타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 태어나기 전에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넉넉했다. 워낙 내가 쓰는 돈이 없어서. 별 필요를 못 느끼기도 했고, 실제로 계산을 해보니까 너무 돈이 많이 들어갔다. 시트로엥은 진짜로 살려고 한 적도 있었다. 현대 간부들과 밥 먹다가 그 얘기 했더니, 그냥 벤츠나 아우디 사는 게 나중에 편할 거라고

 

이젠 다 지난 일이다.

 

하여간 이렇게 경차 가지고 얘기들을 모으는 종류가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보수적이지 않은 50대의 탄생', 이런 얘기들로 기둥을 세우는 방법.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정직하게 맞서는 방식이다. 어쨌든 지금 그리고 앞으로 수 년간 한국의 변화를 발생하는 가장 큰 변수는 50대의 정치적 성향이 바뀌는 것이다. 물론 정확히는 50대의 성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50대의 구성비가 바뀌는 것이다. 이게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지, 그걸 지금 알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가능한, 큰 변화가 발생하고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쓰는 게 에세이집이라서, 경차든 보수든, 어느 쪽이든 축만 세우면 거기에 맞춰서 작업하면 된다. 그래도 선뜻 결정을 못하는 것은

 

미감상으로는 '경차 타면 멋진', 이런 게 더 내 미감에 잘 맞는다. 보수와 보수적이지 않은 것, 정직한 제목일지는 몰라도, 내 미감에는 잘 안 맞는다. 왠지 텁텁하고, 어둡고, 어쩐지 트로트 <안동역>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이런 제목의 장점은 명확하다. 에둘러가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중간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들어가니까, 맞든 틀리든, 바로 핵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건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경차와 보수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아직 마음을 못 먹고 있다.

 

경차든, 보수적이지 않은 50대이든, 내 삶의 특징에서 파생되어서 나오는 속성들이기는 하다. 어느 쪽이든, 내 모습이다. 하여간 어느 쪽이든, 1~2주 내에 선택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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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찬가지다. 힘 세다고 힘 과시하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무섭게 내리는 비는, 잠시 피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바닥부터 변화를 만들고, 새롭게 구상하는 집단, 그게 진짜 무서운 것이다. 70년대 재야, 80년대 학생운동, 90년대 시민단체 그리고 2000년대 뉴라이트, 무서웠다. 힘은 별 거 없었지만, 새로운 생각들과 구상이 그 속에서 맹아처럼 싹트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 사회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권력에서 힘이 완성되지 않는 사회라서 그렇다. 절치부심하고 뉴라이트 만들면서 집권한 세력이 10년만에 만든 세상은, 너무 허당이었다. 같은 질문이 지금의 집권 세력에게도 던져질 것 같다. 5년 후, 10년 후, 그 미래를 위해서 지금 생각을 해야 한다. 한국은 70년대 이후, 대체로 그러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예외는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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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그들이 없는 언론 - 춘래불사춘

 

1.

좋은 다큐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는 비교적 쉬울 것 같다. 그렇지만 재밌는 다큐란 무엇일까? 여기에 답하기는 정말 어렵다. 지난 주에 프랑스에서 만든 발레 공연에 관한 다큐를 보았다. 엄청나게 멋진 연습 장면이 가득하기는 한데, 재미가 없어서 참고 보기가 어려웠다. 4팀의 공연준비를 병렬형으로 보여주는데, 100%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스토리 이해 자체가 힘든 구조다. 좋은 다큐를 본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재밌는 다큐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몇 명의 발레 전공자들의 삶이 비춰 보이는 재미가 아니었으면 끝까지 참고 보기 어려웠다.

 

YTN MBC의 해직기자들 얘기를 담은 다큐 <7 - 그들이 없는 언론>은 좋은 다큐와 재밌는 다큐라는 질문을 동시에 하게 만든다.

 

2.

7년의 개봉 스크린수는 105, 누적관객수는 16,999명이다. 일반적으로 다큐는 극장 개봉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리고 관객수 만 명을 넘겼느냐 안 넘겼느냐, 그런 기준으로 분류한다. 물론 가끔 이런 기준에 전혀 맞지 않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다큐가 등장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사회적 흐름과 갑자기 생겨난 열풍, 이런 외부적 변수가 너무 커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고려하기는 쉽지 않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인사이드잡> 5,000명 약간 넘겼다. 그리고 해방 이후 언론에서 가장 많은 영화평을 받은 작품이라는 <경계도시2>가 만 명이 약간 안 된다. 이 정도가 어느 정도 성공한 다큐로 분류된다.

 

<7- 그들이 없는 언론>, 극장용 다큐를 기준으로 치면 성공한 기준은 넘긴 영화다. 애게, 만 칠천명? 만 명을 목표로 가는 게 한국의 다큐이기도 하고, 사회과학 서적이기도 하다. 새로운 얘기, 새로운 변화를 전통적 방식으로 기획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소박하지만 대개의 경우 '넘사벽'으로 작동하는 것이 만 명의 벽이다. 만 명을 넘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경제 다큐를 비롯한 많은 다큐들이 당장 출발할 것이다. 지금보다 최소한 10배는 많은 다큐와 책들이 준비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두텁다. 만 명은 커녕, 극장에 제대로 걸리기도 어렵다는 현실성 앞에서 수많은 기획들이 출발도 해보기 전에 좌초한다. 소박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 소박에 소박, 그 극한에 간 최소한의 수치가 만 명이다.

 

3.

<7 - 그들이 없는 언론>을 보기 위해서 나는 2,500원을 지불하였다. 그것도 고만고만한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주말 저녁을 보내기 위해서 고심고심하다가 결국 선택한 것이다. 나도 그렇다. 선뜻 극장에 가지 못했고, 소장용 최신 영화를 거침없이 사면서도 2,500원을 내기 위해서 엄청나게 망설였다.

 

별 생각, 별 기대 없이 보았다. 그리고 6년만인지, 7년만인지, 영화에 대한 감상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재밌게 보는 영화는 많고, 감동하는 영화도 적지 않지만,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몸을 움직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다. 글을 써보고 싶다, 딱 고만큼.

 

4.

7년에는 아는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종종 나온다. 이름만 들었지 잘 모르는 기자들도 있었다. 해직 기간에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대목이 정서적으로는 클라이맥스 부분이라고 느껴졌다. 그 정도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 같다.

 

최승호 CP는 개인적으로 엄청 존경하는 사람이다. 다른 일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나도 몸이 무거워서 꿈쩍도 못한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영화는 초반을 지나면 급격하게 감정을 에스컬레이팅 시키면서 밀고 나간다.

 

가장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연은 YTN 사장 사연이다. MB 특보로 사장 임명되자마자 거침없이 기자들을 짤랐이 아니고, 그래도 그 사람은 나름 최선을 다했고, 대화도 좀 되는 사람이었다고 노종면이 회상하는 장면두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MB 특보가 밀린 자리에 올라간 내부 승진자, 사단은 그 단계에서 벌어진다.

 

학습효과인지, 처음부터 내부 승진자를 꺼내든 MBC의 김재철 사장, 가장 희극적 캐릭터이며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유일한 간부 캐릭이다. 일제 때 조선인 순사가 어땠을까, 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5.

다큐를 다 보고 나서 내 삶에도 몇 장이 스쳐 지나갔다.

 

kbs 파업 때 출연자로서는 아마 내가 거의 유일하게 단상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았던 것 같다. 이제 다시는 kbs에 나오지 못할 거라는 것은 알았다. 2년 전인가, 신년 특집 생방에서 마지막 순간에 나오지 말라고 해서, 그러세요, 뭐 그런 적이 잠시 있었다. 전혀 못 나간 것 까지는 아니고

 

ytn 파업 때는 따로 부탁이 없었는데, mbc 파업 때에는 이준익 감독도 나갔고, 나도 나갔다. 짧은 인터뷰 컷 말고는, mbc는 그 후에 나간 적이 없는 것 같다.

 

방송국에서 파업할 때, 지지발언을 해달라거나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온다. 나는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연락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 그래도 내가 삶을 막 살지는 않았구나…'

 

만약 방송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대가가 가혹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그 시절, kbs 뉴스에 나간 적이 있었다. 이래저래, cp는 러시아로 갔나, 하여간 그 때 관여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제작 현장과는 좀 먼 곳으로 발령이 났다고 몇 년 후에 얼핏 건네 들었다. 그런 비슷한 일이 몇 번 있고 나서는, 나도 무서워서 방송국에 못 갔다. 잠깐 나가서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닌 거 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 볼 이유가 있나 싶었다. 4대강 얘기를 대놓고 하면, 정말로 '피의 보복'이 오던 시절이다.

 

방송국 기자들만 7년 동안 당한 것은 아니다.

 

출연진들은 그래도 좀 낫다. 방송 만들어서 납품 하는 제작사들의 형편은 더 어마무시하다. 그리고 그런 제작사와 일하는 작가와 피디 등 제작진들, 겁나는 보복들을 받았다. 그렇다고 섭섭한 걸 얘기하면, 자기만이 아니라 동료들이 모두 어마무시한 피해를 받기 때문에 그냥 냉가슴들을 알았다.  

 

문화계에는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방송국은 좁은 사회다. 블랙리스트,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냥 약간의 사장 등 경영진의 호불호,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다큐 7년은 그냥 해직당한 몇몇 기자들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야만의 시대, 바로 그 야만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가듯 묘사되었을 뿐이다.

 

6.

춘래불사춘, 다큐 7년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봄이 왔어도 봄이 온 것 같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론이 제대로 서는! 꿈인데, 어쩌면 한국에서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명은 결국 복직을 하기는 하겠지만, 그런다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이치가, 고생한 사람과 빛을 보는 사람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해직기자를 비롯한 방송 장악의 역사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레 기자들과 경향신문 기자들과 최근에 통화하거나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많이 외로워하고, 새로운 것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꺾인 것 같았다. 그들도 정권 교체를 오랫동안 목마르게 기다렸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행복과 영광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영화 <인사이더>는 많은 여운을 남긴 영화였다. 방송 고발과 지루한 소송전이 끝나고, 결국 '식스티 미닛'의 수완 좋은 기자 알 파치노와 담배 회사 내에서도 양심을 지킨 과학자 러셀 크로우는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했던 일을 결국 내려놓게 된다. 싸움이 끝나서 이기면 원래대로? 세상의 이치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큰 싸움이 끝나고 나면, 결국에는 상처가 남게 된다.

 

봄이 왔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봄이 오지 않는다. 언론이 그렇고 방송이 그럴 것 같다. 춘래불사춘, 다큐 <7 . 그들이 없는 언론>을 보고 나서 이 단어 하나가 마음 속 깊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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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삼국지를 내 방식으로 써보는 게 오래된 로망이었다. 사실 요즘 별 할 일도 없다. 당장 몇 달은 약속한 일 하느라 잠시 정신 없을 거지만, 그거 지나고 나면 판판히, 남는 게 시간이라...

아내가 반대한다. 예전에도 삼국지 한 번 써볼려고 했는데, 그 때는 이준익 감독이 반대했다. 중국식 시각이 아니라 한국식 시각을 담아보라는데, 뭐... 불가능한 주문이다. 그나마 이민족의 시각을 적극 담으려고 했던 게 장정일 삼국지였다. 그래서 장정일 삼국지가 나름 개성 만빵 삼국지가 되기는 했다.

아내는, 정서적으로 내가 삼국지 보다는 초한지를 훨씬 좋아하니까, 삼국지 쓸 거면 차라리 초한지를...

한신도 겁나 좋아하고, 번쾌 얘기 나올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실제로 그렇기는 하다. 삼국지에서 내가 유일하게 눈물 흘리는 장면은 강유가 죽을 때... 그 때만 눈물이 나온다.

그렇지만 번쾌는 상상만 해도...

한국에서 아무도 관심없을 초한지부터 먼저 쓰라는 아내의 말을 내 식으로 해석해 보면...

돈 번다는 핑계로 육아 도망갈 개수작 부리지 말고, 당분간 얌전히 처박혀서 아이나 볼 것. 끙. (난 그런 의도는 아니라, 이 긴긴 세월을 뭐하고 지낼 것인가, 그런 건설적인 고민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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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에 대해서 근본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글이다. 가끔 우리가 어디서 출발했는가,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해 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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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함께, 세상읽기]사회 속 경제, 경제 속 사회
오창민
기사 게재일 : 2017-05-29 06:00:00

 최근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후 청와대 일자리수석실에도 사회적경제비서관이 배치되는 등 정부 차원에서도 서민경제, 지역 경제 안정을 위한 사회적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원래 사회적경제라는 개념은 19세기 말에 시장경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 수단이었던 협동조합(cooperative)과 같은 결사체를 일컫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적경제는 공동체를 꾸리고, 호혜와 연대의 원리로 약탈적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적인 것’을 지켜내고자 한 것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 농협과 수협 등이 조직되었지만, 이는 유럽의 협동조합과는 달리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큰 차이가 있다. 2000년에 생산적 복지의 형태로 자활기업이 등장했고, 본격적으로 민간 영역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역동성을 끌어내기 위해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에 따른 사회적기업,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른 협동조합 등 각종 사회적경제 관련 법, 제도, 정책이 시행되었다.

 한국의 사회적경제는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확장되었으며, 국가 차원에서 구성원들의 집합적인 이익 추구, 분배의 형평성 강화, 민주적 의사 결정, 공동체성의 복원과 같은 ‘사회적 목적’과 재화와 서비스 생산·유통, 자본 축적, 이윤 추구와 같은 ‘경제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구도 속에서 양적 성장을 밟아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자리 창출 및 고용 증대 등 성장 패러다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보다 사람과 노동이 우선시 되는 사회적경제의 본래 취지와 목적이 희석되고, 형식화 되면서 사회적경제가 기존 경제체제의 보완재나 심지어 종속물로 전락할 우려도 든다.

 국가가 돌봄, 사회서비스 등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복지영역을 민간영역으로 전가하고, 사회적·공익적 활동영역에 대한 질 낮은 보상을 감행하려든다면 사회적경제는 주류경제의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 없는 사회적경제의 ‘사회적 가치’ 창출은 허울뿐이다. ‘사회 속 경제’를 지향할 것인가 ‘경제 속 사회’에 머무를 것인가에 대한 답은 경제력에 대한 사회의 지배력 회복에 달려 있다. 이는 경제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건강한 공동체 경제를 만들어가려는 가치와 의지의 문제이다.

오창민 <경제문화공동체 더함 대표>


http://www.gjdream.com/v2/news/view.html?news_type=201&uid=48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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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한참 열심히 할 때는 방문객이 많았다. 수 천명이 상주했고, 복닥복닥했었다.

트위터는 박원순 시장 선거나왔을 때 시작했다. 하다 보니까 팔로워가 20만 약간 안 된다. 엄청 할 때도 있었다.

둘째 태어나고 모든 일은 정지. 기저귀 갈고, 밥 하다 보면 아무 것도 하기가 어렵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에서 가족 동반으로 사람들 모아놓고 식사했다. 정세균과 나름 긴 시간, 거의 매일 만나면서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동료들과 헤어지면서 해단식을 못했다.

나는 둘째 입원하면서 집밖에 나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세균은 국회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같이 일했던 또 다른 한 명이 윤호중이고, 나와 정세균이 떠난 다음, 그는 정책위 의장이 되었다.

50명 정도가 같이 모여 있었는데, 뿔뿔이 흩어지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해단식을 어제 했다. 이제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게 되었다. 몇 년만에 갖게 되는 이 홀가분함이란!

이제 아이들 돌보는 것 말고는 공식적으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블로그는 좀 살려보려고 한다. 심각한 거 쓸 생각은 별로 없고, 책 읽는 거, 영화 보는 거, 기타 등등 간간히 메모용으로.

하루에 한 두 번, 짧은 단상은 트위터 통하고, 친구들하고 수다 떨 때에는 페북, 그 정도로 하면 어떨까 싶다.

카톡, 밴드, 이런 거 일절 안 했다. 또 그런 거 안 하는 게 내 트레이트 마크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지난 주부터 밴드를 하게 되었다. 동료들도 집단이 되다보니까 행정 처리를 밴드에서 하기로...

앞으로 1년간, 내가 결심한 건 딱 하나다. 수영장 자주 가면서 기초 체력을 다지기... 그거는 진짜로 하려고 한다. 1년이 되기 전까지는,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루틴을 만들고, 루틴대로 따라하기...

그 다음은? 모른다. 7년간 같이 일한 동료가 아직 신용불량자이고, 주민등록증도 말소된 상태다. 한 명은 빚은 다 갚게 되었는데, 아직 신용불량 빚을 못 갚았다. 아마 1년 정도 지나면 그 빚은 다 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1년이 지난다.

그 다음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 때까지는 페북에서 친구들하고 수다 떨면서 노닥노닥.

대학교 4학년 때 잔디밭에서 친구들하고 노닥노닥거린 이후, 친구들하고 진탕 노는 것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았다. 이젠 좀 놀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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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두환 시절의 경제 지표는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패턴을 보여준다.

토건율은 내려가고, 물가인상률도 내려가고, 그 상태에서 경제성장률도 높고, 종합주가지수 상승률도 환상적이다. 이런 모습은 딱 한 번 나왔다. 그 이후에는 토건율이 기이하게 높아질 때마다 대형 경제위기들이 닥쳤다.

지표로 보면, mb 때가 최악일까 싶었는데, 박근혜가 이걸 뛰어넘었다. 근혜 시절은 해방 직후 혹은 한국전에 버금갈 정도로 지표들이 어글리...

문재인 시절, 경제 지표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길게 보면 1년, 짧게 보면 6개월은 일단은 좋을 것 같다. 그 뒤에는? 그야말로 경제로 보는 성적표다.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는 장기 호황은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장기 호황 국면으로 가면 전두환 7년 동안 봤던 아름다운 패턴이 나올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3년 후쯤에는 다시 심각한 경제 위기가 올 가능성도...

아직은 너무 많은 것이 열려져 있는 시기다. 한국 경제에서 전두환 때 봤던 그 아름다운 경제 패턴을 한 번 더 보고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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