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의 꽃, 이재영을 보내며...

[추도사]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 12일 별세

12.12.14 16:07l최종 업데이트 12.12.14 16:07l
오랫동안 진보정당에 헌신해온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이 오랜 암투병 끝에 지난 1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그와 가깝게 지냈던 우석훈 박사(<88만원 세대> 저자)가 추도사를 보내왔다. [편집자말]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
ⓒ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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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이 떠났다. 국졸 이재영이 떠났다.
이재영이 떠났다. 진보정치의 꽃, 이재영이 떠났다.
이재영이 떠났다. 이상한 인민노련의 앨리스, 이재영이 떠났다.
이재영이 떠났다. 우리들의 대부, 이재영이 떠났다.
이재영이 떠났다. 어린 아기들 둘 남기고 아빠 이재영이 떠났다.
이재영이 떠났다. 부유세를 만든 그 이재영, 진보정치의 영원한 정책위원장,
그가 떠났다.

'부유세'를 세상에 꺼내놓은 사람

나한테 언제든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식구 같이 지내는 사람이 둘이 있다. 한 명이 환경운동연합의 이상훈이고, 또 다른 한 명이 인민노련 출신, 진보신당의 정책위원장을 하다가 암으로 쓰러진 이재영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재영과 지낸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참 서로 참견을 많이 하고, 콩내라 감내라, 이것저것, 정말로 별 시덥지 않은 것까지 서로 참견하면서 지냈다. 하다못해 만년필 종류까지 서로 권하고, 그걸 안 사면 삐지기도 하면서.

지난 10년을 지내면서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은 단연 2004년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이루었던 바로 그 총선이었을 것 같다. 부유세라는 이름의 세금을 정리하고 세상에 꺼내놓은 사람이 바로 당시 정책국장이던 이재영이었다. 나도 그에게 얼떨결에 끌려가서 환경 공약 조금 정리한다고 하다가 결국 경제정책 전체를 총괄하게 되었다. 완전고용제가 겁도 없이 우리가 세상에 꺼내놓았던 공약이다. 당시에는 '반핵'이라는 용어를 썼었는데, 진짜로 해보자, 그런 의미로 '탈핵'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도 그 총선이었다.

총선 이후, 이재영은 자신이 만든 당에서 축출되었고, 결국 <레디앙>이라는 매체 기자로 신분을 전환하게 된다. 나는 이재영이 명예롭게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결국 <88만원 세대>를 레디앙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그 책이 레디앙에서 나오게 된 이유가, 바로 이재영이 그곳에서 월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이재영에게 다시 당에 복귀하고, 자신은 부위원장 정도 맡겠다고 하는 걸, 굳이 정책위원장으로 정면에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던 사람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그 때 그가 받은 스트레스는 상상 초월이었다. 당에 복귀하고 6개월만에 원형탈모증이 시작되었는데, 그게 암의 시작인 줄, 우리는 너무 몰랐다. 40대 중반, 이제는 암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는 걸, 그런 걸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 한국 좌파의 삶 아니었던가?

지난 5월 암투병 중에 봄나들이에 나선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 가족.
ⓒ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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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지는 법이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인민노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정말로 '인민'들의 조직으로 생각하지만, 그 때의 인은 인천에서 나온 이름이다. 한국 좌파의 전설적 지하조직, 인민노련 시절부터 언제나 진보정당의 상근자였던 이재영, 그는 언제나 밝고, 언제나 낄낄낄 웃으며, 우리 재밌는 거 하고 놀자, 그러던 사람이었다.

살면서 나도 똑똑한 사람을 참 많이 보았다. 그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을 꼽자면, 단연 이재영이다. 그리고 마음이 넓어 정말로 많은 사람을 품고 있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그 두 가지 특징을 다 가지고 있던 사람, 그를 떠나보내면서 정말로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는 듯싶다. 그러나 살아서 그가 늘 밝고 명랑했던 것처럼, 그를 우울한 모드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 그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싶다.

독자들에게 내가 하는 사인 중에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그게 이재영의 말이다. 우리는 한때 주머니에 너무너무 돈이 없었고, 술은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이재영의 계좌에 얄팍한 돈이지만 소주 한 잔을 마실만한 원고료가 입금되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우린, 지는 법이 없지! 그걸 입에 달고 살던 사나이가 이렇게 떠난다는 게 믿겨지지 않지만, 이게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진보정치의 꽃, 진보정치의 대부, 이재영을 보내며, 너무 슬픔이 많은 한국 좌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이제 우리끼리 지나치게 상처주고, 끝까지 물어뜯는 일은 그만하자고. 우린 나눌 돈도 없고, 나눌 영광도 없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고, 또 누가 이렇게 암으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사랑하고, 서로 좀 보듬어주자고.

이재영이 떠난 지금, 서로 싸우고 토라져있으면, 이제 그만 화해하라고 중재해줄 사람이 더는 없다. 인민노련에서 시작된 이재영의 얘기를 오랫동안 자서전으로 만들까 준비하고 있던 나로서는,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이재영이 떠나고 나니 황망하기 그지없다. 우리들의 꿈, 그게 무슨 꿈이든, 그게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서 이재영의 스토리가 결국 해피엔딩이 되게 만드는 것, 그게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래야 이재영이 하늘에서라도, 봐, 나는 지는 법이 없다니까, 그럴 수 있다.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이 걸어온 길

- 1986년~1989년 : 서울, 성남, 안산 등지에서 공장 노동자 조직 활동
- 1989년~1990년 : '사회주의자 그룹' 대외협력 활동
- 1991년 :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포항 지부 교육선전 담당
- 1992년 : 민중당 경기도당 정책국장, 백기완 선본 경기남부 집행위원장
- 1995년~1996년 : 진보정당추진위, 진보정치연합 정책국장
- 1997년~1999년 : 국민승리21 정책국장
- 2000년~2006년 : 민주노동당 정책실장
- 2006년~2010년 : 레디앙 미디어 기획위원
- 2010년~2011년 :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출처 : <레디앙>

덧붙이는 글 |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의 장례식장은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7호에 마련됐고, 15일 오전 8시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진행한다. 장지는 용미리 수목장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성순(해피스토리 대표)씨와 딸 하람(5세), 아들 한슬(3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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