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올드하다
예전에 유학 시절에 선생한테 들은 얘기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는 생각이 들면, 유일하게 새로운 것은 자신이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는 그 생각이라는 것. 유사 이래 아무도 새로운 것을 못했는데, 자신은 새로운 것을 했다, 그 생각만이 독창적이라는 것이다. 하긴 그렇다. 모든 요소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움은 그 요소들의 조합을 바꾸는 것 외에는 없다. 아니 있을지라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는 좋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순환론적이다. 지나간 유행이 다시 돌아오면서 첨단이 되고. 이런 것들을 철학사적 운동이라고 부른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 그것은 모든 창작자와 이론가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어디선가 본 것이거나 누군가 말해준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얘기는 신화적 원형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원형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얘기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뭔가에 암시를 받지 않고, 어디선가 보지 않은 것들을 스스로 생각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카프카가 그랬고, 샤넬이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 결국 교육을 받고 책을 손에 쥐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읽을 때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는 방식 그리고 혹시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미 생각하지 않았을까, 검토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주 나중에 배우게 된다. 내가 새로 생각한 것은 없다, 혹은 아직은 그런 것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새로운 요소를 만든다는 생각은 포기했다. 내 능력과 내 실력으로, 그런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 예를 들면 조지 루카스처럼 아직도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의 새로운 조합이다. 조합만큼은, 경우의 수만큼 다양하고, 무한대에 가깝다. 같은 얘기를 다르게 하거나, 같은 요소를 다른 셋팅 안에 집어넣거나… 그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새로운 조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익숙해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그것을 나와 영화사의 동료들은 ‘올드하다’라고 부른다. 이것은 스타일의 문제이고, 미학의 문제일 수도 있다. 얘기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혹은 얘기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올드하다’, 그게 우리가 늘 부딪히는 문제이다.
그 얘기는 재밌어, 그렇지만 너무 올드한 거 아냐?
아 놔, 미치겠네, 어쩌란 말이냐!
그러다보면, 결국 그로테스크한 조합들을 집어들게 된다. 기괴하고 괴팍스러운 것. 그러나 그것도 한 두번만 반복하면 금방 올드한 것이 된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는 연애에 관한 것은 질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공공연하게 연애를 주제로 삼는 얘기들은 그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었다. 그 시절, 시나리오 지망생들이 만들어오는 얘기는 열에 아홉은 연애 얘기였다. 요즘 시나리오 공모전에 나오는 시나리오에 연애 얘기는 거의 없다. 이제는 열에 아홉은 기괴한 살인 아니면 SF. 실제로 영화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보기 어렵지만, 시나리오 작가로 새로 데뷔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얘기에서 좀비 얘기는 이제 너무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렸다. 골프장의 좀비, 논두렁의 좀비, 각양각색의 좀비들이 나온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한국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좀비 얘기지만, 얘기 그 자체로는 너무 올드한 것이 되어버렸다. 당장 나만 해도, 또 좀비 얘기야, 그렇게 신경질부터 낼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드라마, 영화, 소설, 동화, 다들 새로운 얘기를 찾아 헤맨다. 새로운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올드해 보이지 않게, 과연 이 얘기가 2013년에도 혹은 2014년에도 새로운 것으로 보일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의 작업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를 한다… 그것은 너무 올드하다.
나도 거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바보 삼촌을 모티브로 동화책을 구상 중인데, 기왕 하는 거면 루이스 세풀베다 보다는 잘 하고 싶다… 마음이야 그렇지만, 무슨 수로 세풀베다보다 잘 할 수가 있겠는가. 의인화된 고양이 얘기로는 전세계 갑이 바로 세풀베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풀베다를 모방하거나 심지어 카피하지만, 그걸 뛰어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말할 것이다.
그것은 올드하다.
새롭지는 않아도, 올드하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리고 그걸 다 뛰어넘어 진짜로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 그건 너무 이상해서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얘기가 되어버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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