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청년들에게 바침
대선이 끝난 지 나흘째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보려고 하지만, 저도 아직 눈물이 괜히 납니다. 어제는 운전하다가 크리스마스 캐롤인 ‘펠리스 나비다’가 라디오에서 나와서 따라 불렀습니다. 거의 조건반사 같은 거겠죠. 그러다 문득, 크리스마스라서 기분 좋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거 이후 한 번도 안 울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군요. 며칠 동안 담담하게, 앞으로는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그렇게 다른 생각들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인지라, 눈물이 나더군요.
87년 대선, 저는 그 때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노태우가 당선되고,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다가 펑펑 울던 순간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 사이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 정치적인 이유로 울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는데, 여전히 눈물이 나더군요.
박근혜와 함께 살아야 할 5년, 앞으로의 변화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시간이 될 것 같고, 복지는 천천히 진행될 것이고, 언론 자유 등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많은 자유가 제약되겠지요. 대통령이 뭐라 하지 않아도, 밑의 사람들이 과잉 충성으로 스스로의 입을 조심하는 검열의 시대가 오겠지요.
전두환 시절에 우리끼리 농담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입 조심, 말 조심, 보약보다 낫다.”
막걸리 마시면서 아침이슬 불렀다고 잡혀가고, 학교 정문 앞에서 가방을 열어서 불순한 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경들과 잔디밭에 같이 앉아서 밥을 먹던 시절, 그 시절도 버텼는데, 지금부터 5년을 못 버틸까,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실감이 줄어들지는 않더군요.
이번 대선에서 한국 청년들이 보여준 움직임은 저에게는 감동이었습니다. 지난 7~8년간, 한국의 청년들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연구하던 저로서는, 사실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움직임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번 대선에서 20대와 30대가 보여준 그 모습은 저의 예상보다 컸습니다. 감동적이었고, 몇 번이나 현장에서 청년들을 보면서 박수를 쳤는지 모릅니다.
불행히도 이번 대선은 졌습니다. 그리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의 실패는 민주당의 실패이고, 민주 후보의 실패이고, 그를 지원하고 지지했던 저 같은 선거 지도부의 실패입니다. 민주당이나 저나, 아니면 전문가나 원로들은 졌을지 몰라도, 한국의 청년들은 이번 대선에서 진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해서 투표했고, 그래서 이제 어느 누구도 한국의 청년들을 우습게 생각하거나 무시하기 어려운 사회적 위상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승리한 것이고, 이제 사회적 주체로서, 집단적 주체로서 자신의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바리케이드나 짱돌보다 더 묵직한, 집단적 투표를 이번에 한 것입니다. 축하 받아 마땅하고, 인정 받아 마땅하고, 또한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삶은 계속되어 나갑니다. 그 속에서, 이기는 순간도 있고, 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국 청년은 이번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비록 결과적으로 우리가 졌지만, 여러분들은 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가슴 아프겠지만, 그 가슴 아픔 자체도 승리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래서 질래야 질 수 없는 상황,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패배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혹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가슴이 살아 뛰고, 피가 혈관을 뛰는 순간, 그 첫 잉태의 먹먹함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같이 무엇인가 했는데, 그게 성공하지 못한 순간의 아픔, 그게 진정한 승리를 기뻐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됩니다.
한국의 청년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비록 50대의 90% 투표에 밀려 지금 우리는 같이 패배를 곰씹고 있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88만원 세대’의 후속작으로 ‘150만원 세대’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대선에서 졌지만, 여러분들의 삶을 ‘150만원 세대’로 만드는 일은 계속 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대선 한 번으로 바뀌지 않고, 대선에서 지더라도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어쩌면 대선에서 이기는 것은, 작은 승리일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청년 한 명 한 명의 삶이 바뀌고, 경제적 운명이 바뀌고, 그 속에 행복이 깃드는 것, 그게 진짜 승리이고, 큰 승리입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투표장에 갔던 것 아닌가요?
오늘, 저는 눈물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뭔가 해보고, 그 첫 투표에서 패배를 맞본 한국의 청년들에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로 위로가 될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거라도 해야겠더군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내일부터는 눈물을 거두고, 바로 옆에 있는 동료와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냅시다. 우리가 서로 위로하기 시작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의 미래가 새롭게 시작될 것 같습니다. 이젠, 그만 웁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2012년 12월 23일 우석훈 (공교롭게도 6년 전 바로 이 날이 ‘88만원 세대’의 첫 페이지를 썼던 날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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