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날들

 

바보 삼촌이라고 부르는 아들 고양이는, 좀 덜떨어진, 그래서 약지 못한 고양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작년 장마, 마당에서 태어난 세 마리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결국 내가 아침, 저녁으로 고양이들 수발을 들게 만든 바로 그 녀석이다. 장마 내내 마루 앞에서 울어대던 세 마리 고양이 중, 가을을 맞은 것은 이 녀석 밖에 없었다.

 

녀석과 추운 겨울을 같이 보내면서, 매일 같이 지난 밤을 무사히 보냈는지, 그야말로 조석으로 문안하듯이 살폈던 녀석이다. 새로운 아기 고양이들이 태어난 다음에, 바보 삼촌이라는 별명을 얻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로 내 자식만큼 귀여워하면서 지낸다.

 

지난 주부터 녀석에게 시련의 시간이 왔다. 늘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라서,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가는 고양이가 몇 마리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회색 줄 가진 녀석이 얼마 전부터 종종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정말로 가끔이나 보게 되는 아빠 고양이까지 치면 7~8마리는 되는 듯싶다. 그 중에 지금 아기들의 아빠인 검둥이와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물론 당연히 나는 바보 삼촌편을 들지만, 이건 엄연히 자기들 세계의 일이라, 내가 딱히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밤이나 새벽이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나가 보고 가끔 빗자루 같은 걸 들어서 위협도 해보지만, 워낙 빨라서소용 없다.

 

토요일부터 바보 삼촌이 보이지가 않기 시작했는데,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안 가던 광이나 주차장 지하까지 뒤져봤는데, 없다

 

녀석은 우리 집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내가 주던 밥을 먹고, 마당 한구석에서 엎어져 자는 것만 해봤기 때문에, 자기 부모들하고는 또 다르게, 집 밖에서는 살 수가 없다. 이사 갈 때에도 데리고 갈 수밖에 없는 게, 녀석에게는 야생의 생활이라는 게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이 있던 자리에는 검둥이가 대신 앉아있고, 아직 바이러스 감염이 다 낫지 않은 엄마 고양이 먹으라고 챙겨주던 특식까지 녀석이 벌렁벌렁 먹고 자빠졌으니, 이거야 원. 워낙 날래서, 하루 종일 붙잡고 있을 것 아니면, 나도 수 없다.

 

그 동안 정동영의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이 있었고, 박원순 시장에게 보낸 조그만 보고서를 놓고 회의 일정이 잡혀서 이래저래 회의 조율하고 있었다. 아직 초고는 못잡았지만, 곽노현 교육감을 위한 조그만 보고서 하나를 준비하는 중이고, 새 책도 나왔다. 이래저래 정신 없이 며칠 지나면서, 정말로 마음 한 구석에 무거움이 많았다.

 

녀석에게는 그야말로 삶이 걸린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전에도 녀석이 검둥이의 도전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대개는 아빠 고양이가 끼어들어서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정말로 아직 어리던 바보 삼촌이 검둥이에게 쫓겨서 죽기살기로 도망가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엄마 고양이가 갑자기 담장에서 뛰어내려오면서 검둥이를 크게 한 번 쳤다. 그러나 바보 삼촌도 이제는 다 컸고, 매번 그렇게 엄마가 도와주지는 않는다.

 

팻 로스라는 말이 있었다. 키우던 동물을 떠나 보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인데,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더냐? 야생 고양이들을 돌보다 보면,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더 자주, 더 많은 고양이를 떠나 보내게 된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녀석들이 있다.

 

지난 달에만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떠나 보냈다. 한 마리는 너무너무 예뻐서, 정말로 녀석이 고양이별로 떠나고 난 다음에 꿈에 나왔다. 또 다른 한 마리는, 그 전날까지도 분명히 잘 뛰어다녔는데, 그 다음 날 마당 한 구석에서 뻣뻣하게 굳어있던 시체로 만나게 되었다. 내 손 안에서 죽어가던 고양이, 죽었던 고양이, 그런 기억들이 많다. 그 때마다 크든 작든, 슬픔을 만나게 된다.

 

시련

 

삶은 시련의 연속이기도 하다. 아무리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해도, 시련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을 어쩔 수는 없다. 그건 고양이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을 거야!

 

이게 무슨 캔디 주제가냐. 그러나 나는 눈물이 원래 많다. 특히 혼자 있을 때나, 영화를 볼 때나, 눈물을 아주 많이 흘린다.

 

결국 오후에 나가면서 평소에 고양이 밥을 주지 놓지 않던 뒤뜰에도 먹이를 놓았다. 검둥이 힘에 밀려서 앞마당은 못 오더라도, 뒤편 한 구석에서라도 바보 삼촌이 혹시 근처에 오면 밥 먹으라고.

 

꼽사리 녹음 끝내고 밤에 들어오는데, 바보 삼촌이 마당 한 구석에서 아기 고양이들과 놀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세어보는데, 네 마리, 다 있다바보 삼촌 등에서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놀고 있다가 나를 보고 후닥닥 도망갔다.

 

느낌 없는 멍한 표정, 분명 바보 삼촌!

 

명박 시대를 지내면서 삶에 기쁨을 느낄 일이 이런 것 밖에 없나, 그런 한심한 생각이 잠깐 들기도 하지만, 정말로 반갑고 고마웠다. 녀석은 이제 겨우 한 살, 삶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다. 바보 삼촌이 세상의 즐거움과 환희를 조금은 더 맛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다.

 

비 오는 새벽, 우산 들고 다시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러 나가는 것은, 먹이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녀석들의 영토 싸움이 더 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멋지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강한 것만이 숭상 받는 시대, 나는 바보 삼촌에게 밥 주러 나간다. 우리는 너무 오래, 강한 것만을 숭상하면서 살아왔다. 그건 좀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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