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이 아닌 선택
퇴행(regress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나이를 뒤로 먹는다는 말로 표현할까? 하여간 무엇인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을 만났을 때, 이런 퇴행을 겪게 될 수 있다.
총선은 아마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렇다. 견디기 힘들었고, 미래에 대한 예상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총선의 결과를 보고 제일 먼저 한 게, 대선 때까지 술을 끊기로 한 것이다. 맨 정신에 이 일들을 보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맨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이 일들을 겪는 건 더 싫었다.
어떤 사람들은 ‘멘붕’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을 제일 적극적으로 쓴 사람은 김용민이었다.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좋든 싫든, 나 역시 그와 가장 가까이에서 그가 겪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나쁜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는다. 이정희에서 이석기에 이르기까지, 진짜 기막힌 타이밍이다. 누가 그렇게 일부러 시간을 맞춘다고 해도 쉽지 않을 정도로…
그냥 버티고 갈 때까지 갈 거라는 예상이야 누구나 할 수 있던 거였고, 역시 또 일은 그냥 그렇게 갔고,
금융 위기에 대해서 ‘퍼펙트 스톰’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거야말로 퍼펙트 스톰 아닌가 싶다.
솔직히,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아무 말도 안하고 싶고, 아무도 안 만나고 싶고, 다 귀찮다… 이게 솔직한 심경이다.
뭐라도 분석을 하고, 데이터표라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뭐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니, 여기까지야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그때부터는 퇴행이다.
그 선이 애매하기는 한데, 멘붕을 거쳐 원상태 혹은 다른 또 어떤 상태로 진화하는 방식이 있고, 그냥 퇴행으로 가는 방식이 또 하나 있을 법 싶다.
이게 참 애매하다. ‘승화(sublimation)’라고 부르는 것과 퇴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경계가 있을까? 이런 답답함을 예술과 같은 창작이나 창조적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승화라고 부르는데, 그것과 퇴행 사이의 경계가 좀 애매하기는 하다.
하긴, 이 모든 것들의 기준이 되는 궁극의 답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그 궁극의 답은…
42라고 했다.
42? 알 게 뭐냐. 영문 소설명의 글자수를 다 더하면 42개가 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런 건 아닌 듯싶고.
어쨌든 현실에서 도망쳐 회피하고 싶은 일탈의 경계선이 어딘가, 그런 질문이 문득 들었다.
이 모든 게 김제남 손에 달려있다는데, 이거야 참.
김제남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예 사람을 몰라야지, 너무 뻔하게 아는 김제남의 손에 달려 있다니, 그 사실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혹시 핸펀에 김제남 총장 전화번호가 있나, 검색해봤더니, 이런 된장… 김종남 총장 전번이 나온다. 김제남, 김종남, 아, 내가 이런 ㄱㅈㄴ, 요런 이름의 머리글자를 가지신 분들과 같이 일을 했었구나… 요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일탈인가 싶다.
하여간 기막힌 타이밍으로, 모든 일은 기똥차게 꼬였다. 이젠 멘붕을 넘엉서, 일탈의 경계가 어딘가, 그런 걸 고민할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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