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남은 책들은 10년 이상 뒤로 밀려온 책들이다. 젠더 경제학을 써야 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건, 2002년의 일이다. 저자로 데뷔하기도 전의 일이다. 그게 다른 일정에 밀리고 밀려서,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왔다.
인권 경제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 윤석열 시대가 아니었다면, 인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없었을 것 같다. 2년 전, 인권연대에서 갑자기 강연 부탁이 왔었다. 아마 이래저래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나한테까지도 연락이 왔었을 것 같다. 좀 준비를 해서, ‘인권과 경제’라는 제목으로 공개 강연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손 대는 거, 나도 제대로 좀 쟁점들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때는 윤석열 정부의 인권 침해에 대한 얘기들을 주로 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둘째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병원에 입원했다. 뭘 새로운 걸 준비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공개 강연은 어려워졌고, 그때 생각한 애기를 나중에 책으로 따로 준비하기로 했다.
몇 년째 헤매던 농업과 경제 여기에 인권까지 엮어서 ‘최소한’ 시리즈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인간적으로, 이 정도는 알자 혹은 이 정도는 하자, 그런 의미였다. 청소년용으로는 괜찮은 제목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막상 농업 경제학 가지고 “최소한의 농업”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니,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최선을 다 해도 뭔가 할까 말까인데, 최소한이라는 입장으로는 그렇게 높은 타점을 노리기가 어려웠다. 논리가 꼬인다고나 할까.. 농업 경제학은 한 번은 썼다가 도저히 팔 자신이 없어서, 출간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 시도는, 절반 정도 가다가, 이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중간에 접었다. 그리고는 결국 맨 마지막 순서로.
10대용 경제는 처음부터 ‘최소한’을 접고, 밸런스 개념을 중심으로 잡았다. 악전고투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초고는 끝냈고, 지금은 출판사로 넘어가 있다. 인권 경제로 넘어오면서, 다시 한 번 ‘최소한’을 살려볼 얄팍한 생각을 헸었다. 지금에야말로, 최대한의 인권’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권’에 대해서 얘기해볼 때라고 생각했다. 몇 달 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마 도서관 책이 망하지 않았으면, 나를 믿고 인권 경제학은 <최소한의 인권>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도서관 책이 망하면서, 내 느낌과 감각을 더는 믿지는 못하게 되었다. 뭘 잘못 생각했을까? 더 밀어붙일 수 있었는데, 중간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톤을 낮추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며칠을 이렇게 머리만 쥐어뜯고 있었다. 확실히 나는 절박함이 없다. 그게 내 패인이다.
처음에 책 쓸 때는, 당연히 나도 내주는 데가 없었다. 나도 출판사 문을 두드리고, 부탁하고, 기다리고, 거절당하고, 다시 부탁하고.. 그런 몇 년을 보냈다. 그때보다 지금이 출간 환경이 더 안 좋다. “만약 딱 한 권을 낼 수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최소한의 인권>을 버리고, 인권 관련된 책들을 몇 권 더 읽으면서,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그렇게 정리를 한 제목이 <인권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가>다. 돌려갈 필요 없이, 하고 싶고, 검토하고 싶은 애기들을, 중학생 1학년 아들에게 얘기했던 얘기들을 차분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제목이 좀 길기는 한데, 그냥 솔직하고, 정직한 제목이다. 그리고 원초적이기도 하다. 보통은 이런 메시지를 2차 가공해서, 좀 더 감각적이고, 명료한 개념어로 바꾸려는 작업을 하는데.. 인권은 워낙 인기가 없는 분야라서, 그런 방식이 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권은 사회적으로 안다 모른다의 영역은 아니다. 모두가 안다고 생각한다. 하다 못해 도둑이나 강도, 심지어 살인범도 경찰한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인권을 얘기한다. 대체적으로는 아는데, 자기한테 별 도움이 안 되거나, 혹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들에게 인권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 그런 게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다. 이런 고민에 따른, 정직하고 1차적인 제목을 선택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인권 관련된 책 중에서 이런 황당한 제목을 단 책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이런 제목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경제학자라서 그렇다. 그리고 생각보다, 인권에 관심 있는 경제학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한국에서, 인권은 독재의 반댓말이 아니다. 한동안 한국은, 그리고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인권은 독재의 반댓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인권의 역사는 그보다는 더 깊고, 뜻은 더 풍부하다.
일단 생각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