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에세이, 작업을 시작하며
1.
시간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내 삶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는 온통 뒤죽박죽이다. 너무 빠른 것과 너무 늦은 것, 그런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몇 개의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는 있는데, 별 의미는 없다. 하여간 20대 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유학 시절에는 77학번들과 공부를 같이 했다. 그 사람들이 오랫동안 동료였다. 국내에서는 82학번들이 데뷔하던 시절에 같이 데뷔했다. 집도 엄청 빨리 샀다. 결혼하고 9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
친구 자식들이 대학을 갔거나 가려고 할 때, 우리 집 아이들은 4살, 6살, 그러다 보니
아이들 친구 때문에 만나는 부모들은 이제 한참 젊은 부모들이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거나,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이와 시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예민해진다. 원래 예민했던 게 아니라, 그렇게 된 것 같다. 나이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생기다 보니 '88만원 세대' 같은 책을 쓰게 된 것도 아주 우연한 일은 아니다. 소피스트의 시대에 "흐르는 물에는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대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처음 들은 말인데, 친구들은 그 말을 다
잊어버렸지만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내가 들어간 그 물은, 다시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나도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 시간의 문턱을 넘으며, 매번 기뻐하고, 좌절하고, 놀라움을 겪는다. 그리고
금방 잊어버린다. 지나간 것은, 그런 것이다.
2.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아주 가끔은, 정말로 간절히 원한 적이 있기는 하다. 첫사랑 때 한 번, 성신여대 교수임용 파이널 총장면접에서 떨어질
때, 그리고 아마 한 두 번 정도 더, 간절히 원한 순간이
있기는 했다. 내가 그 시절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더더욱 나는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
소망하면 이루어진다, 그런 건 믿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믿지 않고, 정서적으로도 믿지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를 언젠가 내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너무 창피하지만 않을 정도로,
진짜로 면피만 하면서 살아간다. 누가 봐도 창피하고, 내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그런 짓은 하지 말자, 그 정도로 대충 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50이 되는 순간,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할 일도 없었으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두 아이를 조금씩은
돌봐야 했고, 돈도 조금씩은 벌어서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해야 했다. 들째는
게속 아팠다. 아이를 아주 열심히 봤고, 일은 아주 조금만
했다. 그래도 돼?
아주 더운 여름 날, 차를 치웠다.
10만 조금 넘은 차인데, 수동이라 팔 데도 없을 것 같고, 폐차할까 생각 중이었다. 마침 동료가 힘들어하길래, 그냥 줘버렸다. 차가 없으면, 생활이
조금 더 단촐해지고, 돈도 조금 덜 쓰게 된다. 그 정도
조정은 했다.
내 삶의 대부분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였다. 초등학교 때 미래 희망을 쓰라고 해서, 외교관이라고 썼다. 별 거 아니다. 내 짝 아버지의 직업이었을 뿐이다. 한 번도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전문 외교협상관 일을 했다. 가끔 초등학교 때 써냈던 친구
아버지 직업이 생각나기는 했다. 그 집에 미니카가 엄청나게 많았다. 살면서
남을 부러워하는 게 별로 없었는데, 마루의 서재 하나를 가득 채운 그 미니카들은 좀 부러웠다. 촌놈이, 정말 미니카라는 걸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이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으면 큰 일 날 것처럼 주변
사람들은 펄펄 뛴다. 그렇지만 난 원래 그렇게 살았다. 되는
대로, 그 때 그 때 형편 맞춰가면서 살았다. 그래도 한
평생 사는데 아무 문제 없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 사회가 어떻게 가야 하고,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개돼지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문화부 공무원이 우리
아이들을 개돼지라고 불렀다. 물어보니까 이래저래 한 다리 건너면 직접 알 수 있는 관계고, 나와도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고 한다. 진짜로 만나서 그 말이 복잡한
총체성을 물어보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개돼지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20대,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 있었다. 우리가 권력자들이 민중을 개돼지라고 부르는 그 시대를 만든 것 아닌가? 나한테 개돼지라고 그러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자식들도 개돼지 취급받는
사회를 그들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해야 할 말이 생겼다. 민중을 개돼지라고 부른 그
공무원도, 한 때는 다 우리들의 친구 같은 존재였고, 같은
건물에서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지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10년, 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한 때 조선이라고 불렸던 나라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내면적 전환점 사이에 서 있다.
3.
내가 마흔이 되었을 때, MB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40대는 지나가버렸다. 나에게 아직도 젊음의 흔적이 남아있던 시절, 그 나이는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다 봉쇄되어 있었다.
50대의 힘은 2012년
대선 때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하였다. 투표율 82%, 어마무시한
수치가 나왔다. 병원에 있는 사람, 등대와 같이 어쩔 수
없는 노동조건을 가진 사람들, 해외에 단기 체류 중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 빼면 다 한 것이다. 많은 기관과 연구자들이 50대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지금 국토부 장관인 김현미가 그 때 만든 연구소가 시니어 연구소다. 그도 한 때 청년 문제가 최고 중요하다고 하던 사람인데, 그 대선
이후 시니어 연구로 방향을 살짝 틀었다. 사람이 바뀐 건 아니지만, 방향이
약간 바뀌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제 내가
50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정권이 바뀌었다. 보수의 핵심 축이던 50대, 이제 50대도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변해있을 것이다. 촛불집회로 임시로 열린 대선이 끝나는 날, 나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할만큼 했다.
기뻤을까? 솔직히 기쁘지는 않았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갈 길은 멀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생각하면, 암담하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기로 했다. 더 이상 시대가 던져준 의무감 때문에 내 삶을 살지는 않으려고 한다.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할만큼 했다. 아마 대통령 문재인도 더는 나에게 뭘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럴
일도 없고. 그가 당대표 되기 이전부터, 아니 지난 대선
후보 시절부터, 몇 년간 진짜로 도울 만큼 도왔다. 이젠
나도 나의 두 아이와 아내를 돕고 싶다.
새 시대, 그냥 조용히 나는 내 삶을 살기로 했다. '우리', '시대', '역사', 이런 어려운 말은 더는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세 끼
밥이 입에 들어올까, 그런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이 땅에
태어난 다른 사람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으면 된다. 그 날이 올까? 왔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정도, 그렇게 살까 한다.
4.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아주 친했던 친구를 얼마 전 만났다. 큰 대기업에 상무가 되어 있었다. 많이 친했던 친구다. 50대라는 나이가 그런 나이다. 살아남아서 한 두 번 더 올라갈
기회가 있거나, 이제는 자기가 일하던 곳에서 돌아서야 하는 선택이 기다리는 나이다. 큰 선거 때 투표하는 것, 그리고 약간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는 것, 그것은 개인의 삶에서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20년을
더 살지, 30년을 더 살지 모른다. 30년이 되면, 거의 확실하게 운전은 할 수 없는 나이가 된다. (그때쯤이면 자율운행차가
일반화될까?)
좋든 싫든, 뭔가 선택을 해야 하는 나이가 50대이기도 하다. 하다 보니까, 나는
그 선택을 35세에 했다. 공기업 부장도 어느 정도 연수가
차서, 슬슬 승진을 준비하기 시작해야 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팀장도
해먹을 만큼 해먹고, 그 윗자리로 가라는 압력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 조금 더 작은 조직으로 옮겨서 팀장말고 본부장하라는 얘기인데, 그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사직서를 내고, 남들이 요즘 엄청나게 들어가고 싶어하는 바로
그 평생 직장을 나왔다.
일본에서는 '드롭 아웃'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는 그냥 학자로서의 자유를 가지고 싶어서 그만둔 것일 뿐이다. 엄청난 이유가 있거나, 위대한 결심(!)이 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왠지 더 재밌는 길이 있을 것 같아서…
그 후로도 몇 번의 큰 선택을 더 했다. 그 선택을 개인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 게 50대다.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정교수가 아니라면, 대부분
50대에 뭔가 선택을 하게 된다. 사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래도 아쉽다고 난리다. 지금의
20대는 그런 선택을 아주 일부만이 할 수 있게 된다.
뭔가 같이 생각해보고, 고민해볼 얘기가 있을 것 같다. 친구들 만나면, 몇 명 빼고는 대부분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다. 친한 70대 노친네들이 좀 있다. 남은 삶을 고민하는 건 맞는데, 같이 만나면 점심 메뉴를 뭘 할까가
제일 큰 걱정이다. 지금의 50대는, 선택 받은 70대만큼 풍요롭지는 못할 것이다. 풍요의 시대는 한국에서 이미 끝났다. 그리고 그 풍요의 뒷 끝은
더 심해질 것이다.
5.
50대의 얘기는 과거에 대한 얘기 아니면 미래에 대한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시절의 영광에 대한 과거 혹은 남루했던 청춘과 같은 과거의 얘기는 재미없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얘기는, 서로 시간 낭비다. 안철수의 미래에 대한 얘기가 공허한 것은, 자기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지금 여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전환기다. 짧게는 10년간의 황당했던 순간, 좀 넓게 보면 전두환에서 유신까지 올라가는
종 기괴한 관행과 습관, 그런 것들에서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오는 그런 순간이다. 그런 게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뉴라이트들의 말이 맞다면, 한국은 일본에게 배워서 자본주의를 시작했다. 원래 한국 모델은 일본이다. 그리고 일본이 모델로 했던 독일이나
네덜란드 모습들이 우리 안에 숨어 있다. 박정희가 따라했던 프랑스 모델도 유신의 흔적 속에 깊게 남아있다. 그리고는 미국 모델이다. 워낙 미국 식민지처럼 수 십년을 살았고, 모국과의 관계로 1등 국민과 2등
국민이 나누어지는 것 같은 식민지 모델로 작동했으니 말이다. 이제 한국의 기업들은 식민지 모델에서는
좀 벗어났지만, 대학은 이제 완전히 식민지 모델이다. 그리고
가끔 스웨덴 같은 북구 모델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촛불집회 이후, 우리는 우리가 교과서다. 프랑스 혁명과 촛불집회는 다르다. 그래서 걸어가는 길도 상당히 다를
것이다. 이제는 모델도 없다. 우리가 걸어가는 대로 그게
그냥 교과서가, 우리가 하는 대로 그대로 모델이다. 이런
전환기는 80년에도 없었고, 98년에도 없었고, 2003년에는 더더욱 없었다.
별로 즐겁지도 않은 옛날 얘기를 과거적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재미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미래에 대해서 서로 시간 쪼개가며 얘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애들한테 동화책 한 권 더
읽어주는 게 훨씬 더 가치 있다.
하나마나한 얘기는, 이제 재미없다.
지금 내가 사는 삶, 지금 우리가 겪는 일들, 그런
게 조금이라도 더 살갑고, 약간이라도 더 재미있다.
그 얘기를, 경차를 가지고 시작해보려고 한다. 차 살거냐 말거냐? 산다면 무슨 차를 살 거냐? 경차 가지고도 충분히 철학과 미학을 얘기할 수 있고, 인생관과 윤리를
얘기할 수 있고, 경제 얘기를 할 수 있다. 골프나 당구
혹은 바둑 가지고 하는 얘기보다는 훨씬 살갑다. 그런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