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모르지../농업 경제학'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19.11.09 10대 극우파.. 1
  2. 2019.04.20 올해 첫 텃밭..
  3. 2019.02.09 선행학습과 경시대회.. 2
  4. 2019.01.30 10대가 불행한 나라.. 4
  5. 2018.12.16 정크푸드 세대 첫 디자인 6
  6. 2018.12.16 10대에 대한 고민..
  7. 2018.11.24 민주파와 통일파 그리고 농업
  8. 2018.11.22 농업경제학의 50가지 질문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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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에서 마련해주는 텃밭에 오늘 처음 모종을 심었다. 큰 애는 이제 몇 번 해봐서 능숙하게 잘 한다. 둘째는 작년에는 흙만지 싫다고 안 했다. 올해 처음 심는 걸 해봤다.

농사가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처음 생각해본 것은 2001년쯤의 일이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장애인 교육하는 특수교사들과 알게 되었다. 장애인 분리 교육이 아니라 통합 교육에 대해서 생각이 처음 정리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하여간 일반 학교에 다니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뭘 하면 좋을까, 총리실에서는 그즈음 7차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한참이었다. 그러다 얘기가 나온 게 농업교육이었다. 그 때만 해도 어린이들이 다룰 수 있는 작은 농기구 같은 게 거의 없었다. 독일에 갈 때마다 모종삽 셋트 같은 것들, 정말 예뻐서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은 그런 것들을 사다 주었다.

그게 학위논문 같은 게 아니라 - 그래봐야 정책 현장이지만 - 현실에서 농업을 내가 처음 접한 순간이다.

주로 아내가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텃밭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10년 정도 된다. 애들 아파서 그야말로 던져놓고, 자라거나 말거나 한 때도 있지만, 하여간 그것도 10년 가까이 된다.

큰 애는 어린이집 알림장에 농사를 잘 짓는다고 적혀 온다. 별 거는 아닌데, 흙만지는 것을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늘 하는 것도 아니니까, 가끔 뭘 심거나 손을 보는 걸 큰 놀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농업경제학을 무조건 연내 출간할 생각이다. 미뤄도 너무 미뤘다. 게임중독에 빠진 아들이 중3 올라갈 때 아빠가 편지를 쓰기 시작해서, 1년간 쓰게 되는 것이 설정이다. 어려서부터 텃밭을 해봤다는 사실만 빼면, 대체적으로 내가 만나게 되는 일상의 얘기를 그대로 하려고 한다.

이렇게 방향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제이미 올리버에게서 왔다. 불량 청소년 얘기에서 시작된 제이미 올리버의 신화는 결국 영국의 중학교 급식체계 자체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여왕으로부터 작위도 받았다.

그즈음 영국의 패션 위크가 헤매다가 엄청나게 영향력이 커졌다. 내가 처음 패션 시장 공부하던 20년 전에는 밀라노가 중요했지, 영국 패션위크는 쳐주지도 않았다. 지금은 파리 패션위크와 함께 양대 패션으로 다룰 정도로 커졌고, 밀라노는 예전에 제쳤다.

최근의 요리와 식품 그리고 농업에 관해서는 영국이 스위스만큼이나 중요한 텍스트다. 만약 처음에 계획한 대로 10년 전에 농업경제학 책을 썼으면, 스위스가 기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제이미 올리버를 축으로 하는, 영국이다.

농업을 교육으로 본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농업 다루던 시절에 마지막으로 제시하던 건데.

안타까운 얘기지만, 이 얘기가 흐르고 흘러서 충청도까지 갔고, 이걸 전격적으로 받은 사람은 안희정이다. 약간의 인물 배경 같은 것들이 좀 있기는 한데, 하여간 가장 적극적으로 농업을 교육 프로그램으로 생각한 사람이 안희정 지사였던 것은 맞다. 이래저래 길이 엇갈려서.. 결국 농업 얘기로 안희정과 차 한 잔 마시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책으로 보면, 안희정이 잘 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만 한 것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농업교육에 관해서는, 하여간 그가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맞다.

그런 얘기가 제이미 올리버 얘기와 만나서, 작년부터 올해 사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자라서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정리해나가는 농업 경제학이 되어간다.

남자들에게 내가 농업과 관련해서 해주고 싶은 얘기는 딱 하나다. 자기 먹고 싶은 것은 자기가 해먹자..

먹는 걸로 아내와 다툴 일이 거의 없는 게, 뭔가 맛있다고 같이 얘기한 게 있으면..

검색해서 맛집에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시장 봐서 그걸 해서 먹는다. 그게 더 빠르다.

그렇게 살면 편하다. 집에서 내가 해먹는 게 제일 맛있고, 그게 힘드니까 식당에 가서 먹는다.

불편한 점도 생겼다. 우리 집 애들은 절대로 식당에 안 갈려고 한다. 가끔 식당에 한 번 가려면..

"그럼 내가 오늘 좀 양보하지, 아빠 사정이 그렇다니."

큰 애가 잘난 척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게 남자들의 일생에 중요한 시대가 오는 중이다. 결혼하거나 말거나, 그것과 상관 없이.

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쓰는 농업경제학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게 가능할 수 있는 사회.. 작은 농업 교육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남자들, 특히 약간 운동권 그리고 상당히 엘리트, 그런 사람들이 이걸 못 배웠다. 그래서 그들이 지성을 모아서 만들어낸 말이 "핸드폰 팔아서 쌀 사먹으면 된다." 정말로 내 친구들이 그런 말 할 때.. 판사도 그런 말 하고, 검사도 그런 말 했다, 진짜로. 에라이, 못 배운 것들아..

우리 아버지는 나를 육사 보내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타협점으로 공사가 결론이 되었다. 나도 비행기를 좋아했고, 비행기 조정을 하고 싶었다. 아마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불행한 역사가 없었다면, 나는 공군 근처에서 뭘 하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 같다. 5.18을 보고, 광주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에라이, 군바리들아!

전환점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똑똑한 남자애가 집안에 있으면 어떻게든 육사를 보내야 한다는 시기에서, 막 서울대 법대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농업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 음식에 대한 기초 지식, 이런 게 필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남자가 똑똑하면 무조건 법대.. 밥은 엄마가 해주고, 너는 공무만 열심히.

그렇게 귀공자들이 되어갔다. 그리고 엄마가 아내로 대체되고, 그렇게 고상하게 어른이 되어서, 결국 자연의 이치와 생태의 순환성 같은 것은 시민단체의 거지같이 일상사는 것들이나 떼법으로 외치는..

그들이 그렇게 승진 열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시기에, 나는 어슬렁거리고 다니면서 텃밭이나 살피고, 전국의 유기농이나 급식운동한다는 농민들 만나고 다녔다.

학교급식이 사회적 의제로 뜬 건 그 다음이다. 초기 급식 운동 아이디어를 형성시킨 몇 사람이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 모든 것을 모아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몇 통을 써보려고 한다. 그게 내가 쓰는 농업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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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다.

예전에 수학경시대회라는 게 있었다. 학교에서 문과, 이과 한 명씩 대회에 나갔다. 절차상, 대회에 나갈 사람은 그냥 학교에서 시험 봐서 뽑았다. 3년 내내 이 대회에 나갔었다. 수학을 늘 1등했던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 선발대회에서만은 문제를 잘 풀었다.

고3 때, 수학 선생님이 나를 아주 얄밉게 생각했다. 맨날 팽팽 놀다가, 경시대회 때만 되면 시험을 잘 보는.. "니가 안 되기를 바랬다." 대놓고 뭐라고 그랬다.

그 대회에 같이 나가던 이과 쪽 친구가 있었다. 최근에는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인생의 절친 정도 된다. 공부를 기깔나게 잘 했다. 서울대 물리학과 가서, 그렇게 박사도 되었다. 그런데 사는 게 좀 버거웠나 보다. 다시 학교 가서 한의사 되어서 한약방 냈다. 공부가 다가 아니다..

하여간 그렇게 3년간 수학 경시대회를 나갔는데.. 이게 기억에 남는 건, 그 때 나왔던 문제가 너무너무 어려워서 그렇다. 그런 경시 대회와는 좀 다른 게 백일장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백일장 나간 이후로, 이것도 고3까지 매회 대회에 나갔다. 6학년 때 전국 대회에서 장원을 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반항의 시대라서, 학교에서 대회를 내보내 주지를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다시 나가게 되었다. 상은 탈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었다. 고3 때인가, 논술대회 같은 데에서 상 탄 게 아마 마지막 상이었던 것 같다.

백일장은 놀러가는 날이다. 대충 후다닥 쓰고 놀았다. 정성 들여 쓴다고 상 타는 것도 아니다. 내 기억으로는, 순전히 그 날의 운이다. 제일 큰 상 탈 때, 김포 어딘가에 있는 학교에서 시합을 했던 기억이다. 방학 때였는데, 책상 서랍 안에 누군가 두고 간 삼양라면이 있었다. 이게 왠 떡이냐, 요즘 식으로 하면 뿌셔뿌셔, 생라면 먹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서랍 속에서 라면 뽀셔 먹으면서 쓰는 둥 마는 둥.. 쓰는 거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납북된, 한 번도 보지 못한 큰외삼촌과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고2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얘기를 썼다. 사실 라면 먹느라 쓰는 데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게 아마 내가 탄 백일장 상 중에서는 제일 큰 상이었던 것 같다.

수학 경시대회는 좀 달랐다. 우와.. 한 문제도 제대로 못 풀겠다. 이게, 무슨 미분이나 적분 아니면 확률이나 통계 같은 게 나와서 어려운 게 아니다. 기하학 문제들이 특히 어려웠는데, 더럽게 꼬아놓고, 합쳐놓아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면 절대로 해가 나오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동경대 본고사 문제, 그런 데서 가지고 온 거 아니겠냐.. 진짜로 듣도보도 못한 어려운 문제였다. 몇 문제 못 풀었다.

그 시절에 전국이 같이 보던 평가시험 같은 게 있었다. 수학은 다 맞거나, 하나 틀리거나 그랬다. 수학 점수만으로는 전국 20등 밑으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던..

그래도 거의 풀기가 어려운.. 어렵다기 보다는 더러운 문제였다. 수학 실력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문제를 풀고, 입상도 하는 거야?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만 그냥 대회에 나갔지, 상 타는 학교들은 미리 훈련도 좀 하고 그런다고..

우와.. 사실 약간 충격 받았다. 그래서 기하학 공부를 따로 좀 했다. 물론 그래도 경시대회에서 성적이 올라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때 기하학을 좀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서, 나중에 대학 가서 엄청난 도움을 받기는 했다. 경제학과 수학 정도야.. 문과쟁이 수학이 더 거기서 거기지, 뭐..

요즘 대학이 이런 대회에 나가서 수상한 걸로 평가가 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다. 그런 대회용 문제 푸는 게, 사실 진정한 의미의 '실력'과는 별 상관도 없다. 그리고 그걸 무슨 사교육에서 처리하는 것도 더 이상하다.

아마 요즘처럼 대회 나가고 그런 게 대학에 반영된다고 했으면, 나 같은 경우는 대회 근처에도 못 가봤을 것 같다. 수학을 공부하는 것과 시합용 문제 푸는 게 좀 다르다. 기하학 증명 아무리 잘 이해해도, 더럽게 꼬아놓은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그건,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풀려면, 표준 해를 먼저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희한한 기하학 문제 몇 개 푼다고 해도, 선형대수 앞에 서면 말짱 다 꽝이다. 집합론, 토폴로지 등 그 뒤에 나오는 과정들은 기본이 그야말로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등학교까지 죽어라고 푼 문제들, 대학 가면 아무 쓸 데도 없다.

된장. 대학교 가서 들었던 첫 번째 경제학 수업이 나중에 국토부 장관한 서승환 선생 수업이었다. 그 때 편미분을 처음 보았다. 환장하겠네, 저건 또 뭐여? 웅성웅성.

학생들이 헤매니까 딱 편미분 정의 3줄 써주고, 이제 알았죠? 그냥 진도 나갔다. 그 양반 수업 참 까칠하게 하는. 경제학이 뭐고, 뭐하는 데 쓰고.. 이번 학기 수업은.. 이딴 거 없다. 시작하자마자 변수 몇 개 정의하고, 바로 문제 풀기 시작하던. (그 땐 몰랐는데, 운동권 될 얘들이, 경제는 뭐고, 국가는 뭐고, 정의는 뭐고, 이딴 말 하지 못하도록 많은 수업이 그냥 문제부터 풀고 시작하던..)

선행학습이 의미가 있게 대학입시가 설계되는 것,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워두면 그래도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시합용 문제풀이, 일생에 아무 도움 안 된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내 주변에 인생의 깊은 나락에서 어떻게든 나오려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줌마들이 세상 살기, 진짜 너무 힘들구나.. 그것도 순수학문을 할수록 더욱 더. 이거 더럽네, 진짜.. 그 중 두 명이 수학박사다. 둘 다 수학 겁나게 잘 한다. 물경, 미국의 엄청 좋은 학교에서 수학 박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게 아무 도움 안 된다. 아줌마면..

고등학교 때에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걸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삶이 설계될 수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필요하다면, 경시대회를 싹 다 없애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인생에 도움을 주나? 아무 도움 안 준다.

삶이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책도 좀 보고, 영화도 좀 보고, 여행도 좀 다니고, 단체활동도 좀 하고. 그런 게 가능하도록 고등학생의 삶이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삶을 놓고 교육과정이나 평가과정이 디자인되어야지, 하던 게 습관이라고 그냥 하는 거, 21세기적이지 않다.

(다음 주에 조희연 선생이랑 식사하기로 약속이 잡혔다. 뭔 얘기를 해줘야 하나, 잠시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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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무리했더니, 아침에 열도 오르고, 목도 부어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감기 걸리는 일은 일생에 몇 번 없을 정도로. 감기만은 없다. 결혼하고는 감기 걸린 적이 없었다. 감기겠구나 싶었다.

아내가 출근하면서 애들 어린이집 데리고 갔다. 죽어라고 잤더니, 몸은 좀 괜찮다. 아내가 끊어준 동사무소에서 하는 헬스장 오늘 첫 날인데.. 코를 풀었더니 피가 나온다.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이게.. 회사 다닐 때에는 주말에 푹 쉬고 나갔는데, 애들 보면 주말이 더 고비다. 주말에 완전 무리하고, 새로운 주가 시작하면 누적되고 더 누적되고.

오늘은 간담회가 하나 있고, 내일은 장애인개발원에서 하는 팟캐 녹음이 있다. 모래는 용민이랑 하는 kbs 라디오가 있고. 김기식 선배가 나온댄다. 그리고 저녁 때 tbs에서 하는 북소리 녹화가 있다.

꼭 해야 하는 거 아니면 거의 다 튕기는 중인데도, 일정이 개판이다. 꼭 챙겨야 하는 선배들이 있는데, 어제 전화 걸어보니까 삐진 것 같다. 된장.. 미안하기는 한데, 영감들은 잘 삐진다. 삐진 이유는 충분히 알겠는데, 내 코가 석자라서 이것저것 챙길 형편이 아니다.

그 동안 살면서 여기저기 챙기는 일들을 주로 내가 했었다. 뭔가 만드는 사람들은, 잘 삐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요즘은 나도 그런 거 잘 못한다. 내가 죽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삐질 사람이 덜 삐지는 건 아니다.

올해에 추가로 들어온 연구가 10대 연구다. 한국의 10대, 이게 눈물 나는 현상이다.

지나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얼마나 행복한 10대를 보냈는지.. 공부도 아주 잠깐만 하고, 진짜로 신나게 놀면서 지냈다. 중학교 때는 사진반 한다고, 사진 찍으러 여기저기 공식적으로 놀러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그냥 놀았다. 서울대 법대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의대는 첨부터 노 땡큐. 그냥 암 생각 없이 놀았다. 소설은 많이 봤다. 전집으로 나온 한국 소설 그리고 소위 명작 소설, 다 본다는 마음으로 봤는데..

그래서 10대에 대한 생각을 회상해보면, 마음 속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 진짜 남들 평생 놀만한 분량을 그 시절에 원없이 놀았다. 그리고도.. 그 후에도 계속 놀았다. 어쩌면 전세계 박사 기준으로, 내가 가장 많이 놀면서, 되면되면 그렇게 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학 시절에는 음악한다고 놀고, 운동한다고 놀고. 유학가서는 여기가 바로 파리야, 영화보고 책 읽고, 그리고 놀고.

내가 10대 때 놀았던 얘기 들으면, 다들 깜짝 놀랄 정도로. 원래는 그렇게까지 놀 생각은 아니었는데, 공부 좀 하자고 도서관에서 도서관에서 모여서 놀고.. 이상호 기자가 학교도 다른데, 그렇게 같이 모여서 놀던 멤버 중의 하나.

사회과학 저자가, 요즘은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바닷가 파도 한 가운데 혼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뒤의 호화 방갈로에서 편안하게 바베큐 먹는 사람들이, 쟤는 혼자서 왜 저린디야, 그러고 있는 듯 싶은.

그래도 그 삶이, 보람은 있다. 내가 나를 돌아다봐도, 나는 내 시절을 개돼지처럼 살지는 않았다.. 그냥 처묵 말고는 생각도 안 하는 간부급들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10대들이 삶은 역설적으로 공평하다.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주 소수의, 건물주의 아들은 행복할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권위주의적이고 양아틱하지 않은 건물주를 아직 별로 본 적이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간단히 정의하면, '행복한 10대'를 만드는 데에 실패한 나라다. 국제 기준으로 따지면, 아동 학대가 청소년 학대로 이어지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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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 대한 연구가 사회과학으로서 한국에 돌아온 내가 처음 해보고 싶었던 연구였다. , 기회가 잘 오지는 않았는데, 나름 혼자서 이것저것 관찰만 했다. 그 때 봤던 10대들이 20대가 되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88만원 세대가 되었다.

 

그와는 별도로, 농업경제학이라는 책이 진짜 데뷔 초창기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밀려서 지금까지. 순서로는 아픈 아이들의 세대가 데뷔작이 되었지만, 사실 먼저 쓴 것은 음식국부론이었다. 농업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집회하는 얘기와 농업 관련된 얘기들이 대거 짤린. 그 때는 내가 힘이 없었다. 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나중에 csa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이건 책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김희진하고 농업경제학 책 계약을 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이건 적당한 시기에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올해 여름 고베에 갔다왔다. 그 유명한 고베 생협과 csa를 연결시켜주는 총본진 그리고 마침 바로 그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 여기였구나, 전세계적인 그 흐름의 출발지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오래 보지는 못하고, 그야말로 느낌만 보고 왔다.

 

이 두 개의 엇갈린 길이 2019년 나의 작업에서 딱 만나게 되었다. 농업경제학은 원래는 여성들과 아줌마들의 얘기처럼 하는 게 처음 생각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게 중3을 축으로 하는 남학생들. 그래서 본격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누구에게 이 얘기를 해줄 것인가, 크게 한 번 급선회를 했다..

 

영국 중산층의 식습관과 도시 연구, 이런 것들이 선행연구였다. 그리고 결국 제이미 올리버가 등장했다. 그래서 바꾼 게, 중학생들의 교과목.. 불량 청소년들에 대한 구호사업처럼 시작한 제이미 올리버의 일이 결국 공교육 전체로 퍼져나간, 그런 사회적 개혁 과정 같은 게 되었다. 그걸로 훈장도 타고, 세계적 스타가 되고..

 

그렇게 제일 시급한 것 그러나 역시 변화를 위해서 장기적인 것, 그걸 농업경제학에 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이미 올리버가 했던 일을 왜 우리는 못해?

 

10대에 대한 연구는 보통 인류학에서 많이 하고, 사회학에서도 한다. 그런 연구가 기반이 되어서 많은 청소년 관련 정책이 생겨나고 돈이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좀 어렵다.

 

현장에서 보면 주로 정부의 돈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 다문화 관련 연구 그리고 젠더 연구, 이런 쪽인 것 같다. 10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별 거 없다. 그 빈 공간을 그냥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사교육이 채운다.

 

내년에는 농업과 젠더, 두 축으로 책을 쓸 거다. 이게 딱 만나는 지점도 사실 중3 남학생들이다. 여기가 분기점이다. 3 남학생들이 여성혐오가 가장 강하다. 막상 만나보면 말도 안 통할 정도다. 너는 남자인데, 왜 여자 응원해? 이런, 얘들 왜 이래.. 이런 변화를 최소한 6~7년 전부터는 목격한 것 같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좀 다를까? 내가 본 바로는 별로 다르지 않다. 뭐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88만원 세대를 쓸 때 한국인의 최대 분기점이 대학입학과 대학졸업, 그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2006, 사실 그 때는 그게 맞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좀 아닌 것 같다.

 

국제중 등 분기점을 초등학교로 내리려는 명박네들의 가열찬 시도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대체적으로 중3에서 지금은 그 분기점이 갈리는 것 같다.

 

3이면 대충 안다. 자기가 특목고를 가게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그냥 살아가게 될지.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감을 잡는 것 같다. 가끔 동료나 친구들의 고등학교 딸하고 식사를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대부분 특목고 그것도 기숙학교에 다닌다. 엄청 부자집도 아니지만, 그렇다. 그렇다면 일반고는? 일부러 찾아봐야 만나게 된다.

 

자기가 특목고를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중3 남학생들이 자신이 잘 대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애정을 충분히 받게 될까? 그 속에서 다양한 경로로 혐오가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파편적으로 많이 지적된 얘기지만, 이걸 농업 얘기를 통해서 재구성을 해보려고 하는 게 이번 작업의 목표다. 임시로 정크푸드 세대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군대 얘기다. 한동안 군대의 급식 개선과 관련해서 글도 많이 썼지만 조언도 많이 주었다. 군대 급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도 해보지 못한 장애를 만났다. 급식의 질은 더 좋아지는데, 점점 더 군인들이 급식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다. 그냥 매점에서 사먹는 게 훨씬 더 맛있다는.. 어쩌지, 어쩌지, 발만 동동.

 

이게 시작된 게 군대 이전의 일이다.

 

여러가지 의미로 한국 사회의 변곡점이 중3 남학생에게서 걸린다. 게임만 하는 10대와 로얄젤리 먹고 여왕벌로 사육되는 것 같은 로얄코스 사이의 길이 거기서 갈린다. 그게 굳건할수록, 망조든 사회인데, 뭐 차곡차곡 한국은 그 망조든 사회로 가고 있다. 이제 몇 년 후면 우리 애들들도 거기로 들어가게 된다.

 

뒤에서 5등 딱 이 또래에 들에 관한 개념들을 몇 번 만들고 글도 쓴 적이 있기는 하다. 반응은 영 시원챦았다. 그래서 그냥 정크푸드 세대로 가려고 한다. 내 데뷔작이 아픈 아이들의 세대였다. 미세먼지 문제를 그 때 처음 다루었다. 그 때 내가 보았던 그 아이들이 이제 자라서 딱 정크푸드 세대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큰 흐름으로 보면 오히려 ‘88만원 세대가 방계 작업이었고.

 

하여간 이렇게 기본 가닥을 잡았다.

 

정크푸드 먹어도 된다. 그러나 정크푸드만 먹는 걸 슬픈 일이고, 정크푸드만 맛있다고 하는 것은 진짜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한국 청소년들이 걸어가는 길이다. 쯧쯧쯧, 그렇게 할 일은 아니다.

 

이게 21세기 버전의 격차 사회에 대한 얘기고, 계급사회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난 원래 바닥부터 박박 기는 스타일의 작업을 더 좋아하고 그게 더 익숙하다. 박사과정 때 내가 속했던 연구소가 파리 10대학의 경제인류학 연구소였다. 맑스계열 연구를 하기는 하는데, 위에서 밑으로 내리는 스타일보다는 좀 박박기로, 현실적인 연구를 하려는 학풍이 좀 있었다. 그게 DNA처럼 내 몸에 남았다.

 

인터뷰도 하고, 현장도 돌아다니고, 핑계 대고 외국도 좀.

 

3이나 고1 자녀 있으신 분들, 사례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빼곡빼곡, 사례들로 채우는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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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솔직하게 나의 고민을 말해보자면, 지금의 30대, 그들이 20대가 되었을 때, 난 그들을 조금은 이해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한 그대로 그 시절을 묘사했고, 그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되었다. 사전 연구로, 난 그들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20대, 사실 잘 모르겠다. 변화가 너무 빠르다. 억지로 내가 아는 틀에 우겨넣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그래서 내 출발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10대 연구로 돌아갈 생각이다. 진짜 무명 시절, 그 시절의 10대를 열심히 봤었다.

그냥 그 시절처럼, 내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 다시 10대 연구를. 다음 주에는 전주 완산고에 강연을 간다. 머리 박고, 다시 밑바닥부터, 지금의 10대 연구를 다시 할 생각이다. 그 접점이, 농업이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나는 지금의 20대는 정말 모르겠다. 억지로 알려고 해봐야 될 것 같지도 않다. 이제 나는 50대.. 아직 10년은 남았다. 다시 시작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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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환경, 에너지, 이런 데가 책에서는 정말 인기없는 동네다. 그래도 경제사상사 보다 인기가 없지는 않다. 석사는 국제경제학으로 받았는데, 대학원 졸업하자마자 사업 분석하는 회사에서 팀장 제안을 받았었다. 6개월짜리 짧은 과정만 하나 더 들으면 국제 선물시장 거래인 자격이 나오는 게 졸업 옵션이었던. 나중에 그 석사 전공으로 wto에서 제안이 오기도. 그걸 다 내려놓고 사상사 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생태경제학에 대한 사상적 기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상사를 평생하고 싶었는데, 내 때에도 벌써 그게 쉽지가 않던 시대. 대학원 졸업 이후로 늘 춥고 배고프고, 한데 밥 먹으면서 살았다. 무관심, 이런 건 몸에 붙이고 사는 유니폼처럼 익숙하다.

좌파 내에서도 노동자 문제가 상대적으로 주류였다. 그 좋은 머리로 사상사나 생태 같은 거 하냐고, 이죽거리는 비웃음을 들으면서 20대를 지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짜 주류는, 통일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사람들. 통일파 1진, 노동파 2진, 그리고 나면 여성 문제가 조금 더 앞 줄이고, 나는 말진 중의 말진. 그래도 너니까 발표 기회를 준다고, 네 고맙고맙. 누구한테나 머리 숙이고, 고맙다고 말하고, 그런 게 입에 붙었다.

30대 이후는 시민단체와 함께 했다. 여기는 민주파가 또 절대 본진. '생태 파시즘'이라는 이죽거림과 함께 30대를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내 길을 걸었다. 인생의 목표, 그런 건 모르겠고, 돈은 밥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된다는 빈곤형 톤 앤 매너가 몸에 붙었다.

이제 50.. 드디어 농업 문제를 다루어도 되는 순간이 되었다. 나중에 먹고 사는데 큰 문제 없을 때 하겠다고 뒤로 뒤로 미루어둔 주제다. 이제 먹고 사는데 큰 문제 없고, 삶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왔다.

페북에서도 농업 주제는 썰렁하고 별 관심 없다. 만약 좀 더 스포트라이트 받고, 화려한 삶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도 관심없고 미래에도 관심 없는 이런 주제를 집어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괜찮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보람있게 하는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대기업에서도 맨 앞에 서 봤고, 정부 내에서도 맨 앞에 서 봤다. 총리 주재 회의를 운영하는 일이 내가 했던 일이다. 경총회장이나 상공회의소 회장도 다 불렀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어둡고, 다크했다. 정신적으로도 행복하지 않았었다. 내 논리는 모르겠는데, 내 몸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이 더 좋다. 몇 배 좋다.

민주파들이 농업에 한 가장 큰 명언은 "핸드폰 팔아서 쌀 사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통일파들이 농업에 대해서 한 가장 큰 명언은 '통일 농업', 결국은 식량부족인 북한에 쌀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는가, 이런 방안을 찾아달라고 했다. 민중파들이 농업에 대해서 한 가장 큰 명언은 "우리 전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 꼭 앞 말을 그렇게 붙였다. '우리전농파'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gmo 개발하고 팔아먹을 생각만 했다. 그 길이 막히니까 농림부 공무원들이 아주 우울해했다. 시대에 뒤쳐지는 것 같다고 한탄을..

민주당 농업 정책은 새만금에 걸려 있다. 이번 정권의 근원적 아픔은 새만금과 광주, 여기에 있다. 그나마 그래도 민주당이 하고 싶은 거라도 있기는 하다. 한국당은 진짜로 농민표 말고는 아무 관심이.

내가 정리하고 싶은 관점은, 국토생태라는 눈으로 보면 농업이 이렇게 보이더라.. 그 얘기다. 건설교통부 시절에 신문에 '국토부'라고 이름을 바꾸면 좋겠다고 신문에 썼었다. 결국 다음 정권에 국토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국토생태에 대한 생각은 탑재되지 않았다.

민주파라고 하고 농업은 하거나 말거나, 아주 지겹다. 얼마나 농업이 하기 싫었는지, 농업이라는 말을 농촌이라는 말로 다 바꿔버렸다. 1차 산업인 농업이 농촌 개발 혹은 농촌 정비인 3차 산업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주 지랄들을 했다. 지금은 뭐가 좀 바뀌었나? 바뀌긴.. 90퍼센트 이상의 민주파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핸드폰 팔아 쌀 사먹으면 된다"는 정서가 존재하는 것 같다.

옥수수 사료로 살찌운 한우 특뿔, 이런 거 맛있다고 먹는 게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 입이 꼬진 것이다. 원래 인류는 그렇게 먹는 거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한국인은 특히 더 그렇다. 그게 다 자본 아니 국제 농업자본이 단기간에 길들여서 만들어낸 인공의 맛이다. 아니, 자본의 맛이다.

 

근본에 관한 얘기는 상업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그게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맛만 있으면 돼지."

 

요렇게 말하는 사람, 진짜 소주병으로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니가 개, 돼지냐? 고양이 키워 보니까, 우와, 더럽게 까다롭네. 고양이만도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어려운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민주파의 권력 투쟁, 통일파의 더 근본적인 권력투쟁, 이런 속에 묻혀버린 농업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 2008년 11월, 첫눈 온 날, 우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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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정훈과 여의도에 있던 포장마차에서 밤늦게 소주 잔을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주 시장이던 신정훈이 막 초선의원이던 시절이었다. 지난 총선의 농업 공약의 마지막 조율을 그와 하게 되었다. 그의 동료였던 이재수와 민주당 정책위 농업담당, 그렇게 마지막 테이블 위에서 소위 넣고 빼기를 하였다. 아무도 농업에 관심이 없었는데, 내가 직권으로 테이블을 열었다. 그 때 나는 민주당 정책공약단 부단장이었다. 단장은 광주 시장 된 김용섭이었고.

 

그게 내가 신정훈과 이재수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신정훈은 신정부 들어가서 농업비서관이 되었다. 이재수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춘천 시장이 되었다. 지난 총선이 농업에 관한 문제에서 내가 공식적으로 관여한 마지막 순간이다. 이제 아마도 더는 내가 농업 문제에 관여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2003년부터니까, 농업연구모임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농업 관련된 문제에 관여허게 된지 15년 정도 지난 것 같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책 파트너로 잠시 논의를 같이 했던 박창길 박사는 농촌경제연구원장이 되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이었다. 많은 것을 같이 한 윤석원 교수는 결국 은퇴하고, 귀농하여 진짜 농사군이 되었다. 한 때 등 대고 지옥의 불길을 같이 걸어가던 사이인 송기호 변호사는 아직도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이 둘 돌보는 아빠가 되었다.

 

애초의 경제 대장정 시리즈의 10 번째 책이 농업경제학이었다. 나는 대장정을 끝까지 마무리하지는 못했고, 문화 경제학 이후로 시리즈를 세워놓았다. 그렇게 뒤로 밀린 농업경제학을 이제는 마무리하려고 한다.

 

2.

아마 순서대로 하면 38번째 책이 될 것 같다. 37번은 당인리다. 39번은 아직 유동적이다. 39, 40번의 순서가 바뀔지도 모른다.

 

형식은 아빠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하려고 한다. 농업을 공부한 아빠가 별 생각없이 고 1이 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원래 이 형식으로 책을 한 권 준비해둔 게 있는데, 그건 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딸은 태어나지 않았고, 망했으요..

 

편지 사이의 에피소드를 통한 바깥 얘기도 어느 정도는 만들어볼 생각인데, 꼭 그런 형식에 얽매일 생각은 없다. 우리 큰 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보여줄 편지를 쓴다는 마음으로.. 당연히 1, 2년 사이에 변하게 될 정책은 그냥 실루엣만. 기본에 해당하는 얘기를 고1이 알아먹을 수 있을 수준으로 쉽고 간략하게.

 

시간 나는 대로 편지 한 통씩. 편지를 잘 쓰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편지를 많이 쓴 것은 사실이다. 정말 많이 썼다.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을 편지로 쓰는,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나만큼 편지 많이 쓰는 사람으로는 조한혜정 교수 정도 생각난다. 이 양반도 정말 편지 많이 쓴다. 10년 넘게 중요한 일들은 거의 다 서로 편지로 오고 갔던.

 

3.

이 작업은 좀 더 개방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대략 50장의 편지를 쓰면 책 작업은 끝난다. 아직은 좀 생소한 푸드플랜에 편지 한 통, 농업혁명이라고 했던 화학농의 도입에 편지 한 통, 새마을운동의 21세기적 해석에 편지 한 통, ‘핸드폰 팔아 쌀 사 먹으면 된다고 했던 경제관료들 얘기로 편지 한 통,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이다.

 

결국 작업은 50개의 주제를 추리는 일과, 편지를 잘 쓰는 일, 이렇게 두 단계로 구성될 것이다. 작업이 성공하면, 50개의 편지를 읽은 후에 농업경제학 교과서 한 권을 숙독한 효과가 나올 수 있도록. 편지의 형식상 표, 공식, 그래프, 이런 건 안 들어간다. 아들에게 편지 쓰면서 그래프 그리는 똘아이가 있을까 싶다.

 

하여 1차 작업은 50개의 주제를 고르고, 그 안에서 스토리가 발생할 수 있도록 스토리 보드를 만드는 일.

 

제일 큰 관건은, 내가 알거나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이 시기에 필요한 얘기로 주제를 업데이트하는 일이다.

 

하여..

 

주제 50개를 고르는 일은 좀 더 공개적으로 블로그를 통해서.

 

꼭 선정되지 않더라도 뭔가 생각에 도움이 되신 분들은, 출간되면 책에 짧은 편지라도 적은 편지본으로 후사 (비밀댓글로 주소, 전번, 연락처 남겨주셔야 나중에 발송 가능합니다..)

 

출판사는 반비, 에디터는 '문화로 먹고 살기' 같이 했던 김희진씨..

 

(호박꽃, 어느 빛 좋은 9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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