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어린이들 방학이 아직 절반 밖에 안 지났다. 하이고. 정신이 혼미하다. 아내는 2월에 지방 출장이 두 번 있고, 다음 달에는 해외 출장이 있다. 여자가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요즘 새삼 지켜보는 중이다. 흔히 유리 천장이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그 구간을 지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런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되었다. 이게 다 자본주의라서 그렇다고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그 시스템이 제법 복잡한 것 같다. 

저녁에 나가는 모임이 있고, 아침에 나가는 모임이 있다. 보통은 저녁 때 나가다가, 좀 높은 위치가 되면 아침에도 나간다. 한 번은 외국 인사를 아침 모임에 강사로 부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가 물어봤다. 너네는 이렇게 사냐? 응. 왜 이러구 사냐? 그러게. 나도 싫은 데 어쩔 수가 없네. 너 미국 와라, 이게 사람 사는 게 아니다. 내가 초청해줄께. 괜찮아. 나도 조금만 하고 말거야. 

애들 보면서 고정적으로 만나는 걸 다 없앴다. 없앴다기 보다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렇다. 감소소모라고 말한다면, 한국은 감정 소모가 아주 많은 스타일의 삶을 살아간다. 물론 외국에도 파티가 있기는 한데, 그건 아주 정형화되어서 특별히 형식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감정 소모라고 하지만, 사실 어른들하고 만나면서 감정을 소비하는 건 어린이들하고 지내는 것에 비하면 좀 덜 피곤한 것 같다. 어른들하고는 적당히 얘기하고, 적당히 숨겨도 별 일 없다. 어린이들은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미래의 삶에 영향을 준다. 참 웃기는 일이기는 한데, 그게 신경이 바짝 서기는 한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선물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만년필 선물을 한다. 이거 고르기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특히 인생 첫 만년필일 가능성이 높다. 너무 고급스럽지 않고, 너무 고풍스럽지 않지만 기술적 완성도도 높은. 그리고도 예쁜. 얼마 전에 고등학교 올라가는 조카에게 만년필을 선물했는데, 역시 고르기가 만만치가 않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막내 이모부가 외국 갔다 오면서 대한항공에서 주는 쉐퍼 만년필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 양반에게 만년필 선물을 두 번 받았다. 중학교 때에는 파카를 받은 적이 있다. 막내 이모는 폐암으로 오래 살지 못하셨다. 그리고 재혼을 하면서 보게 될 일이 별로 없지만, 그렇게 받은 두 자루의 만년필의 기억은 평생을 가게 되었다. 친가에서는 4년제 대학을 내가 처음 들어갔다. 아버지는 고졸, 어머니는 전문대 졸, 그나마 이 양반들이 집안에서는 나름 공부를 한 편인데, 공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만년필이 내 삶을 조금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어린이들 혹은 중고등학생들 만날 일이 있으면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다. 짧은 한 순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작은 우주에서는 아주 큰 사건이 될 수 있다. 감정 소모라는 말을 쓰면, 꼭 먹고 살기 위해서 만나는 것 보다도 더 어린 사람들을 만날 때의 소모량이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젠더 경제학 출간을 내년으로 미룬 이유 중의 하나가, 이건 인터뷰 작업이 좀 필요한데, 지금 같아서는 인터뷰는 개뿔.. 당장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못 만나고 있는데. 사실 인터뷰 작업을 안 하고 있는 건, 차 한 잔 마실 일정을 내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들이 겪게 된 어려움이나 고통을 듣고, 다시 그걸 구조화시켜서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역시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일인데, 사실 엄두가 안 난다. 

40대 여성 직장인의 정신질환에 대한 수치 같은 것을 좀 확인해보려고 하다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상담을 하는 비율이 꽤 된다. 그나마 병원에 가면 좀 낫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숨 크게 쉬고, 마음 크게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간만에 김광석 앨범을 듣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김민기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학교 앞에 재즈 오즈라고 하는 카페가 있었는데, 줄구장창 김민기 LP만 틀었다. 한 번은 수업 너무 들어가기 싫어서 땡땡이치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김민기 노래를 죽어라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 문득 그때가 생각이 났다. 대학교 2학년 때 생각해보면, 나도 참 멀리 왔다는 생각이 문득. 그때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전에는 골프 치고, 저녁에는 술 마시는 내 또래 친구들의 삶과는 나는 아주 먼 곳으로 온 것 같다. 젠더 경제학에서는 여성 경제인과 여성 금융인들에 대한 얘기가 한 파트 들어간다. 살다보니 내가 아는 여성들의 상당수가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직 그런 감정 소모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내년으로 밀게 되었다. 

내년에는 젠더 경제학과 청년 경제학, 그렇게 두 개로 가게 될 것 같다. 청년 얘기는 몇 년 전 어느 대학 학생상담소의 부탁으로 결국 학교 상담실 문을 두드린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눈물 나는 얘기들이 많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기존에 있던 시리즈에 약간의 수정을 했다.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다루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다루는 얘기들은 다들 어렵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대개는 자본주의 문제인데, 그 어두운 곳을 주로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더 행복하려고 하고, 더 편안하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더 명랑하려고 한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 힘든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편안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어려운 얘기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책으로 돈 버는 것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해하는 한 가지는, 할 얘기가 있어서 책을 쓰는 거지, 책을 쓰기 위해서 할 얘기를 찾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 나는 할 얘기가 없어지면 이제 책을 그만 쓸 것 같다. 아직은 못다한 얘기가 좀 남아서 이러고 있다. 

책 쓰는 법에 대한 에세이를 한 번 쓸려고 했었는데, 그건 없앴다. 지금쯤 되면 책을 어떻게 쓰는지 좀 알 것 같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책 쓰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쓴 것도 좀 봤고, 심지어는 동영상 강연도 좀 봤다. 나는 별로 공감은 안 갔다. 나는 저렇게는 못 할 것 같아.. 50권 가까이 썼는데, 책 쓰는 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약속해놓은 게 있어서, 그건 죽음 에세이로 바꿨다. 책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 먹어가는 것,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그런 건 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다. 

이번 정권이 가기 전에 이승만 책을 낼 생각이 아직도 있다. 진작에 하려고 그랬는데, 부산에서 2~3달 조사를 해야 한다. 딱 계획 짜고 있었는데, 바로 코로나 국면이었다. 애들 두고 움직이려면 조금은 더 커야 할 것 같고, 나의 재정상태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안정되어야 한다. 하필이면 부산을 중심으로 잡아서, 애로사항이 많다. 그래도 그런 스케일 있는 얘기들도 좀 해보고 싶기는 하다. 다시 한 번 장기 계획으로 밀어 놓는다. 

한동안 출간 스케쥴이라는 게 거의 없이 그냥그냥 애들하고 버티면서 살았는데, 이제 내년 일정까지는 어느 정도는 정리되는 것 같다. 정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들만 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학교도 그만뒀고, 강연도 안 하고, 방송도 안 한다. 애들 보면서 이런 것까지 하는 건 무리데쓰.. 남들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여력이 안 되어서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 보면 책 인세하고 생활비하고 대충 평균적으로는 딱 맞는 것 같다. 물론 평균이다. 안 맞는 해도 좀 있다. 스피커 살 여유까지는 없다. 20년 가까이 새 스피커나 앰프 없이, 그야말로 책 쓰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장비들로 버틴 게.. 그럴 여유까지는 없어서 그렇다. 환갑까지 몇 년, 이렇게 지내는 데에 아무 문제 없다. 그저 바란다면, 우리 집 어린이들 방학이 빨리 좀 지나갔으면, 그런 소소한 소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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