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휴머니즘이라는 표현은 mb 때 kbs 사람들하고 경제방송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처음 생각했던 개념이다. 물론 나는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동물권은 물론이고 바위와 산 혹은 갯벌의 존재권에 대해서 생각하던 시절이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경제 휴머니즘에 대한 생각을 한 것은, 상황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얘기를 같이 하던 사람들이 mb 시절 결국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kbs 사장에게 단디 찍혀서 방송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냥 흐지부지해졌다. 

오랫동안 경제 휴머니즘은 딱히 손을 보지 않고, 가끔 라디오에서 내가 생각하는 경제에 대해서 설명할 때 잠깐씩만 얘기하고는 했다. 휴머니즘은 올드한 용어다. 21세기에 이 용어가 과연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하도 담을 수 있을지, 그런 걸 잘 모르겠다. 경제와 휴머니즘은 결합시켜볼 수 있는 용어이기는 한데, 말 자체가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다. 

이 올드한 용어를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결정적으로 법원의 50억 무죄 판결을 본 이후다. 800 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버스 운전사의 해고를 합당하다고 했던 법원이 50억 원에 대해서는 뇌물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검사나 판사나, 다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범죄 입증이 안 되었고, 증거는 불충분해서 다르게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할만한 합당한 일인가? 법조계 바깥의 시선으로 보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오세훈이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도관을 녹사평역 지하 4층에 설치하라고 했다. 그리고 공개된 자리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그냥 공권력 동원해서 끌어낸다고 했다. 이유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건 휴머니즘에 반하는 행정이다. 자식과 친지가 죽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야박하게 할 수  있을까? 정치만 있고, 휴머니즘은 없다. 

윤석열 시대에 가장 결여된 것을 하나만 지적하자면 경제 휴머니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이 앞서고, 그 법은 강자들의 법이다. 그걸 정의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 롤즈식 최소 기준으로 보면 윤석열 행정은 많은 경우 정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절차도 약하다. 공론장, 이런 것은 있는 흉내만 내고, 진정한 토론은 없다. 공감은 더더군다나 없다. 

툭하면 ‘빨갱이’라고 그런다. 아주 거친 방식으로 이념이 다시 복귀하는 중이다. 빨갱이라는 말에는 “죽여도 좋다”는 의미가 뒤에 숨어 있다. 세상에 그냥 죽어도 좋은 사람은 없다. 그런 게 휴머니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 구하다 죽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자식이 죽은 부모에게 휴머니즘이라는 생각으로는 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대결을 하고 공격을 하더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있다면, 그 선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인간의 도리 같은 복잡하고 종합적인 건 사실 나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가야 최소한의 경제 휴머니즘일지, 그런 건 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윤석열 시대에 가장 결여된 것은 경제 휴머니즘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좀 더 해보려고 한다. 법이 경제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법이 말하는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아주 거리가 멀다. 각자 자신의 정의를 주장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의 경제 휴머니즘 정도는 공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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