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적으로 일정을 마음 속으로 잡으면 거기 잘 맞췄던 편이다. 몇 년 전부터 일정을 잘 못 맞추기 시작했다. 지난 연말부터는 집중 자체가 잘 안 된다. 연말에는 우리 집 어린이들 방학이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의 방학은 직장인의 휴가와는 다른 것 같다. 휴가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뭐가 많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저 휴가는 늘 짧기만 하고, 끝나갈 때면 아쉽기만 하다. 

어린이들의 방학은 좀 다르다. 열 살, 열두 살, 방학 동안 몸무게도 변하고, 키도 변한다. 심지어는 선호하는 책은 물론, 보던 만화의 종류도 바뀐다. 큰 애는 그렇게나 좋아하던 포켓몬을 끊었다. 끊었다기 보다는 시시해진 건데. 포켓몬 만화만 안 보는 게 아니라, 그 동안 모았던 포켓몬 카드를 앨범째 동생에게 주었다. 달라고 했더니 “그래”, 그리고 그냥 줬다. 그만큼 다른 것이 더 재밌어진 거. 몇 년째 하던 레고 대신 며칠 전부터 건담 조립을 시작했다. 직장인에게는 며칠 사이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스트레스 덜 받는 방학 때 어린이들은 부쩍 키가 큰다. 그리고 키가 크는 만큼 취향도 변하고, 관심도 변한다. 

처음에 애들 키우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들이 “애 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런 얘기를 종종 했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애를 본다”는 걸 정말로 지켜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이 적지 않았다. 똥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고 한세상 떠나는 남자들이 꽤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린이가 되면서 기저귀가 필요 없게 될 때 얼마나 일상에 큰 변화가 오는지, 그 기쁨을 알려주고 싶은데, 알아 처먹는 할아버지들이 별로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아버지가 똥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셨다. 

어린이들 방학 때면 내가 죽어난다. 이제는 기저귀 가는 나이도 아니지만, 집에 있다 나갔다, 하루 종일 둘이 서로 다른 스케쥴로 왔다갔다 하고, 그런 데 맞추다 보면 한두 시간 여유가 나도 뭔가 하기가 어렵다. 그냥 문득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손톱이 길면 자판을 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손톱을 깎는다. 그리고 다시 손톱이 자란다. 그리고 다시 손톱을 깎는다. 그리고 다시 손톱 깎아야 하는 순간이 왔는데, 컴퓨터에 작업하던 페이지가 거의 그대로인 걸 보면.. 후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좌절, 절망, 그런 생각들이 지나가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음이 슬퍼지면, 하루하루가 더 슬퍼진다. 이럴 때면 ‘명랑’이라는 단어가 좀 도움을 준다. 삶은 이기고 지는 게 다가 아니다. 얼마나 재밌게 살고,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는지, 그런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기고 또 이기면 즐거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삶은 과정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곳이라는 건 없다. 삶에 무슨 목표가 있겠느냐? 

그냥 과정을 즐기려고 한다. 물론 어린이들의 방학을 즐기기는 어렵지만, 한없이 일정이 늘어지는 것과, 그때마다 나머지 일정을 조정하게 되는 과정, 그런 매일매일의 좌절도 그냥 즐기려고 한다. 

예전에는 이럴 때 카페에 노트북 가서 써보기도 하고, 어딘가 지방 같은 데 가서 마무리하고 온 적이 있기도 하다.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 책들이 대부분 망했다. 그래서 좋으나 싫으나, 그냥 어린이들하고 줄구장창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그냥 한다. 매일매일 인상 쓰면서 살 수는 없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서 또 웃고 지나간다. 

어저께 저출생에 관한 책 제목을 정했다.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 이 생각을 한 건 좀 되는데, 이걸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그 책을 누가 보겠냐, 그런 딜레마에 당연히 빠지게 된다. 논리적인 충돌이고, 이럴 때에 아이러니라는 표현을 쓰면 좋을 것 같다. 그냥 담담하게, 가장 정직한 제목을 쓰기로 결국 마음을 먹었다. 아마 10년 전이면 이런 제목을 못 잡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가능하다는 생각이 문득. 

과정이 즐겁기 위해서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이런 걸 좀 배웠다. 한 자락 깔고 기교를 부리거나, 멋을 내는 게, 그게 결국에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로 즐겁다고 하는 게, 진짜로 즐거울 리가 있겠느냐?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더 간단한 원칙을 가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나중에 엉켜서 결국 하나마나한 생각의 연속일 뿐, 결코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가급적이면 즐겁게 그리고 정직하게. 이제 50대 중반, 내가 삶을 대하는 원칙은 이제 아주 단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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