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재 유감

잠시 생각을 2023. 1. 29. 21:26

김부겸 인터뷰를 보다가 잠시 그가 고문을 맡은 사의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 진보라고 불렀던 운동권 일부의 부패와 낮은 도덕감이 청년들이 말하는 ‘공정’ 논의의 격발제가 되었다. 그게 과연 개선되었을까? 정권은 날려먹었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 때 민주당의 중추를 형성했던 운동권 엘리트들이 얼마나 세상의 흐름과 먼 곳에 있나, 사의재라는 단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의재, 솔직히 나도 사의재 뜻이 뭔지 잘 몰랐다. 아주 예전에 그런 걸 읽은 기억은 있지만, 잊어버린지 오래인 단어다. 그냥 언뜻 떠오른 게, 연말이면 교수신문에서 나오는 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다. 10년 전에는 그런 게 나오면, 뭔가 정권에 대한 비판이라서 사람들이 좀 재밌게 생각한 것 같다. 요즘은 그게 무슨 뜻인지, 학생들은 별로 관심 없어 하는 것 같다. 관심 없는 정도가 아니라 재수 없어 한다. 시대가 변한 거다. 몇 년 전에 어떤 학생이 나한테 거기에 의견을 냈느냐고 물어봤다. 솔직히 매번 연말이면 연락이 오기는 하는데, 나는 그런 어려운 단어는 잘 몰라서 한 번도 의견을 낸 적은 없다. 그 얘기 그대로 했더니 “그러시냐”, 그렇게 넘어갔다. 등에 땀이 흘렀다. 만약 냈다고 했으면 “재수 없는 인사”로 그 학생의 인명 DB에 등록될 판이다. 

지금 20대~30대는 사자성어와 한문투에 대해서 “모른다”가 아니라 적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영어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관대한데, 한자어에 대해서는 아주 싫어한다. 나도 꼭 필요할 때 아니면 가급적 사자성어를 잘 안 쓰려고 한다. 그게 효율적이라도 워낙 젊은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나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 꼭 내가 너보다 많이 알아, 그렇게 일부러 보일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가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싫다고 하는데 일부러 그걸 쓸 필요는 없다. 

사의재라는 단어가 제목이 된 건 이중으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뜻이 아무리 좋아도 아는 사람 거의 없는 한자를 제목으로 쓰는 건, 40대 이하의 한국 대중들하고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정서적으로 싫다는데, 굳이 그런 걸 대중적 활동을 하면서 쓸 필요가 있나? 무슨무슨 어벤저스, 차라리 그랬다면 그냥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사의재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로 드러나게 된다. 한국에서 그걸 알아먹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모르면 배워”, 이런 강압감이 정서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를 왜 단체 이름으로 쓰나? 운동권 엘리트 티 내고 싶은 거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싶다. 

결국 사의재로 결정된 것도 문제지만, 그 과정이 아마도 더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부에 없었을 것 같다. 있었다면 그런 이름으로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너무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너무 높은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어서 그런 건지, 하여간 이제 대중과는 문화적으로 너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폐쇄적 공통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어도 그렇지만, 뜻은 더 나쁘다.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태도”, 듣기만 해도 재수 없다고 생각할 의미다. 정약용 선생은 이걸 자기가 떠난 후에 원래의 집주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자기가 그렇다는 게 아니다. 자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걸 자기 이름으로 딱 붙이면, 정말로 재수 없어진다. 다른 사람에게 칭하는 걸 자신에게 칭하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제목도 이상하지만, 뜻은 더 이상하다. 

도대체 이 시대의 사람들하고 대화할 생각이 있는 집단인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고상한 얘기를 하려는 집단인지, 제목만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지난 정권에서 이제는 나이 먹은 운동권 엘리트들이 부패했다고 많은 청년들이 느끼면서 정권이 날아간 것 아닌가? 상징의 세계에서 이 엘리트들이 정서적으로 그 패배에서 한 발도 걸어 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사의재’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생각이 났다. 

시대는 변했고, 또 변하고 있다. ‘사의재’ 같은 단체 제목을 쓰다가는 한 방에 훅 간다. 청년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 훅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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