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는 것은 어지간히 정신줄이 굵지 않으면 힘들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예전에 소설가 성석재가 그런 얘기를 헸다고 한다. 아버지 얘기하고, 고향 얘기하면 이제 그 작가는 거의 끝난 거라고. 할 얘기가 더는 없다는 거. 쥐어짜고 쥐어짜다 보면, 더는 할 얘기가 없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책이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책 한 권 낼 때의 부담감이 나도 커졌다. 출판사에 손해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는 나도 출판사에게 손해가 가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러다보니까 책 낼 때의 부담감이 지수적으로 상승했다. 작년에는 책을 못냈다. 좌파 에세이가 작년초에 나오기는 했는데, 재작년에 마무리한 책이라서 작년에는 책이 없다. 책 판매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면 작년에도 몇 권 냈었을텐데, 다 올해로 넘겼다. 

그래도 나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꾸역꾸역, 애들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소득이 계속 있었다. 애들 태어난 후에 책 내는 속도가 확 떨어져서, 아직은 할 얘기가 없지는 않다. 제 때 책을 못 내서 계약해놓고 소화하지 못한 게 더 많다. 아직은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만나지는 않았다. 다음 정권 때에는 모르겠지만, 윤석열이 저렇게 아무 거나 막 던지는 동안에는 좀 더 고전적인 얘기들을 할 게 있을 것 같다. 밀린 것들도 좀 많고. 

책을 쓰면서, 특히 마흔이 넘어간 뒤로는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게 사실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명랑'이 삶의 기조라서, 우리 집 어린이들과 늘 웃으려고 하고, 혼 내는 건 정말 가끔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잔소리도 조금만. 

말이 나온 김에. 다 큰 자식들에게 "우리 아이"라고 하는 표현은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 자식은 자기 소유물이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집단적으로 쌓여서 어른들 보고도 '아이'라고 한다.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된 이후로는 '어린이'라고 꼭 불러준다. 집에서 애들 크게 부를 때도 "어린이들, 모여보세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 키우기 전에는 자주 보는 사람들이 나에게도 많았다. 이래저래 꽤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지냈는데, 이제는 정말 최소한의 사람만, 그것도 가끔 보면서 지낸다. 예전에는 '온갖 문제 상담소 소장'이라고 그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정태인 선배의 사망 이후로 누군가 만나는 일을 대폭 줄였다. 지난 20년간 그와 거의 비슷한 사이클로 살았다. 박순성 교수와 간만에 밥 한 번 먹으려고 한 자리에 막 박사 논문으로 정신 없던 정태인이 같이 왔다. 점심 자리였는데, 술 좀 더 마시자고 했는데, 나는 애들 봐야 한다고 낮술까지는 못하고 술패들을 남겨놓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게 그와 마셨던 마지막 술이었다. 쓰러지기 몇 주 전인가, 한국은행 피플들과 같이 저녁 약속이 있었다. 정태인은 오후에 낮잠 자고 약속을 까먹었다고 한다.. 아쉽기는 하지만, 조만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연구실에서 쓰러졌다. 

나와 비슷한 사이클로 살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친구는 벌써 죽었고, 정태인도 환갑 넘자마자 죽었다. 아무래도 체질이 거의 비슷할 막내 동생은 작년에 크게 두 번 병원 신세를 졌고, 두 번째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진짜로 요단강 건너다가 겨우겨우 돌아왔다. 

지사의 시대는 한국에서 벌써 끝났다. 더 이상 비분강개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거나, 급살을 했거나. 참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역시 명랑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중압감들 속에서 아직 남은 얘기들을 풀어낸다고 너무 폼 잡지는 않으려고 한다. 되는 데까지 하다가 안 되면 그만이라고, 좀 가볍게 생각하려고 한다. 

가끔은 만년필도 바꾸고, 쓰던 스피커도 좀 바꾼다. 만나는 사람을 바꾸거나 주변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 그렇게 그렇게 쌓이려고만 하는 부담감이나 압력을 좀 낮춘다. 

IMF 끝나고 "부자 되세요" 마케팅이 한참 유행할 때, 들레쥬의 노마디즘이 한국에 잘 못 들어와서 노트북과 여행 마케팅에 접목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노트북들도 노마디즘을 내걸고, 어딘가 싸돌아다닐려면 이런 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랬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렇게 카드를 팔았고. "낭만 가득한 여행", 그런 광고도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마디즘은 커녕, 한국 사회에는 아파트가 주인 행세하는 시절이 되었다. 억지로 노마디즘을 대입하면, 전세 주고 전세 가고, 그렇게 한 채 두 채 늘려나가는 정도. 

혼자서 여행을 떠나봤는데, "낭만 가득"이 아니라 "남만" 가득했다. 재미 하나도 없었다. 이래저래 혼자 해외 출장 가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진짜 재미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는 건 영국 리즈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때였는데.. 그건 이미 지난 세기의 일이다. 

재미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돈 버는 일이 제일 재밌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딱하다. 대놓고 돈 버는 게 유일하게 재밌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짜로 돈도 많이 벌었다. 벌써 이혼했다. 지금도 돈 버는 게 제일 재밌는지 모르겠다. 

책을 계속해서 쓰는 건, 고래심줄 같은 정신력만으로는 어렵다. 대쪽도 부러지고, 심줄도 끊어진다. 인간은 강철이 아니다. 누군가 도울 수 있으면 계속 돕고, 미력이나마 힘이 될 일은 하고. 그리고 돌아서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도 까먹으면 정신 건강에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그게 즐겁고 보람있으면 정말 다행이다. 누군가 고맙다고 말하는 건, 행여나 기대하지 말고. 그런 사람은 고래희, 예전부터 아주 드물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건, 즐겁지도 않고, 사실 재미도 없다. 난 좀 그렇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1051721011?fbclid=IwAR29aNkyT6VW6LBUnqXEGxdYjpjBiqtiJxRvE0Cdj5JqQFlQyUqk-GTU7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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