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영부영 하기 직전

1.
“어영부영 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버나드 쇼의 에피타프, 묘비병으로 유명한 말이다. 그의 소설 <피그말리온>은 세계적으로 빅히트를 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의 원작이다. 이 영화의 오디션에서 오드리 햅번과 쥴리 앤드류스가 맞붙었다. 결국 오드리 햅번을 배역을 따갔고, 절치부심 쥴리 앤드류스는 결국 뮤지컬 <매리 포핀스(1964년)>의 주연이 되었다. 그 성공에 힘입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1969년)>의 주인공이 되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여배우로 남게 된다. 세기의 대결인데, 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은 버나드 쇼를 노벨문학상을 탄 문호 혹은 영화인으로 안다.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름을 들으면, 아 그거, 그렇게 할 영화로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945년)>이 있다. 대부분 이름만 알 비비안 리가 이 흑백 영화의 바로 그 클레오파트라다. 물론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버나드 쇼의 이름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 그 묘지명만 남게 되었다. 버나드 쇼를 알든 모르든, “어영부영 하다 이 꼴 난다”, 그 얘기를 다 들어봤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아우라 넘치는 버나드 쇼는 경제학자로도 유명한데, 몇 권의 경제학 대중서도 썼고, 심지어 여전히 세계적 명문대학으로 이름을 떨치는 런던정치경제대학원의 설립장이기도 하다. 학부 시절, 나는 이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좀 알아봤는데, 등록금이 너무 비싸서 초반에 바로 꼬리 내리고 등록금이 없는 파리로 방향을 틀었던 적이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살펴봐야 할 국제적 빨갱이를 생각해보면 역시 버나드 쇼 아니겠나 싶다.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바꿔보자는 흐름을 영국에서 만들었는데, 그 맨 앞에 버나드 쇼가 있었다. 혁명의 시대에 혁명 아닌 방식으로 사회를 바꿔보자는 얘기를 했으니까 살아있을 때 욕도 ‘디지게’ 먹었다. 그렇지만 동구가 붕괴한 이후, 그래도 좀 기억할 만한 좌파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시선이 버나드 쇼에 맺히게 된다. 버나드 쇼, 참 별의별 말도 많이 했고, 책도 많이 썼다. 그렇지만 그는 친절하게도 ‘어영부영’이라는 간단 명료한 단어로 그의 삶을 정리했다. 노벨문학상을 탄 버나드 쇼의 삶이 어영부영이면, 나의 삶은? 

다행인 것은 아직 나는 어영부영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남아있다는 점 아닐까 싶다. 이럴 때에는 신이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공평하고 평등하다. 수많은 사람이 평등을 외쳤지만, 진짜로 평등한 것은 신 앞에서 그리고 죽음 앞에서 그 정도 아닐까 싶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세상 피곤하게 하는 신의 위대함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우리 개개인이 삶도 다 하나의 우주이고, 다 위대한 존재들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평등을 얘기하고,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평등을 외쳤지만, 우리가 아직까지도 평등을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은 신 덕분 아니겠는가? 그리하야 오늘도 어영부영 살아가는 나의 인생을 위하여, 잠시 하느님께 기도, 할레루야, 아멘! 

2. 
나는 평생을, 아니 대학에 들어간 얼마 이후로는 좌파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살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우파는 뭔가 열심히 하고 이루어야 하고 성취해야 하는 삶이지만, 좌파는 대충 개기고, 아닌 거 아니라고 말하고 살아도 되는 삶이라고 살았다. 나는 아무 사명감이나 성취 의식 없이 살아도 되는 좌파의 삶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버나드 쇼의 어영부영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대충대충’ 살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인생에서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던 것은 딱 두 번인 것 같다. 유학 가서 대학원 석사 과정 입학 시험에 붙고 나서 졸업할 때까지 1년, 문재인 당대표 시절에 그를 도왔던 2년간, 그 시절에는 잠시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간, 대충대충 살았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진보라고 불렀다. 참 열심히들 살았다. 그들에 비하면 난 대충대충 산 정도가 아니라, 막 산 것에 가깝다. 차관급 자리와 공기업 사장 얘기가 나왔을 때 “싫어요” 했다. 주변에서 욕 정말 많이 먹었다. 아비로서 제대로 월급을 받아서 아내와 자식들을 편하게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너무 자기 편한 생각만 한다고 별의별 욕을 다 먹었고, 이기주의적이라는 얘기까지도 들었다. 자식들에게 편안한 삶을 주지 않는 ‘나쁜 아빠’라는 얘기도 들었다. 난 그냥 네네, 하면서 애들이나 봤다. 내 삶에 대해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세 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걱정되지 않는 삶”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인류가 세 끼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리 고개가 없어지고, 밥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것이 50년 될까말까 한다. 내가 넉넉하게 살지는 않아도,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은 우리 식구들이 세 끼 밥 먹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나도 안 하고 산다. 

몇 년 전부터 나에게 현실적으로 든 고민은 ‘진보 경제학자’라고 붙은 나의 타이틀에 관한 것이다. 내가 특별하게 부탁을 하든 혹은 하지 않든, 언론을 비롯해서 많은 곳에서는 나에게 ‘진보 경제학자’라는 타이틀을 쓴다. 그때마다 불편하다. 솔직히 나는 진보가 뭔지 잘 모르겠다. 경제학에서는 좌파 경제학이 존재하고, 주류(orthodoxe)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주류(heterodoxe)라는 표현을 쓴다. 좌파이고, 비주류 혹은 정치경제학 같은 용어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진보 경제학이라는 말은 배워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프로그레시브라는 말은 ‘프로그레시브 락’에서 처음 들었다. 무디 블루스, 킹 크림슨, 에머슨 레이크 앤드 파머, 이런 밴드들은 안다. 사이키델릭 락도 좋아하고 우드스탁 페스티벌도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프로그레시브 경제학? 이건 정말로 뭔지 모르겠다. 

어영부영 살다가 나는 한국의 한 쪽 구텅이에서 찌그러져서 살다가 적당히 나이 처먹고 뒤진 ‘어느 진보 경제학자’로 누군가 묘비명에 새길 것 같다. ‘대충 살다가 꺼진’ 혹은 ‘게으름에 발광하다 뒤진’, 이런 묘비명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묘비병이다. 아니 더 심한 욕으로 도배를 해도 나는 기꺼이 감수할 것 같다. 제일 좋은 것은, 그딴 묘비병 같은 것은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보 경제학자’라고 묘비명이 선다면, 죽어서도 내내 목구멍이 이질물 들어온 것처럼 따꼼따꼼할 것 같다. 

어영부영,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기 전에 ‘나는 좌파다’라는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전우치>에 젊어서 무당이었던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한다. 

“맨날 도 닦으면 뭘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황진이와의 연애로 유명했던 화담이 영화 속에서는 정의파 도사 중의 한 명이었는데, 그는 원래 요괴였다. 자기 팔에서 떨어진 녹색 피를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요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기 안에 흐르던 요괴의 피를 눈으로 보고 화담은 흑화해서 진짜 요괴가 된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닐지 말라도,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대사가 너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게 꼭 내 얘기 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좌파라고 얘기하면 요괴 취급 받는다. 그게 꼭 무섭다기 보다는 귀찮아서, 그냥 ‘진보 경제학자’라고 타이틀이 뜨면, 그냥 대충 “아, 네네” 하면서 넘어갔다. 내가 엄청나게 강력한 이념적 선호를 가지고 있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 프로야구에서 어느 팀을 응원할 것인 것, 여기 무슨 이념이 필요하겠냐? 그냥 자기 태어난 고향 아니면 약간의 사회생활에서의 인연, 그 정도로 응원한 팀을 정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 것과 비슷한 연유로 사람들은 우파가 되고, 보수가 되고, 진보가 되고, 가끔은 좌파가 된다. 노동자가 좌파가 되는 시기, 그런 시기는 한국에는 온 적도 없고, 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자기 편한 대로 정치적 성향 혹은 사상적 성향을 고르게 된다. 진보/보수, 좌파/우파, 이 네 개의 선택지 가운데에서 하나를 고르게 된다. 이것저것 다 귀찮으면 ‘중도’라고 해도 좋고, 조금 더 적극적인 성격이라면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을 골라도 된다. 한국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전통적으로는 진보 30%, 보수 30%, 그리고 40% 정도가 이 양 쪽에 속하지 않은 중도라고 답을 한다. 사회학 공부하는 친구가 한국에서 좌파는 10% 미만으로 잡힌다고 얘기해준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10명 중 한 명이 조금 안 되는 비율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10% 미만에 속하는 좌파들은 평소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간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우리 역사가 좀 뒤틀렸다. 그리고 그렇게 뒤틀린 것이 21세기가 들어서도 제대로 펴지지가 않았다. 뭔가 좀 이상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혹시라도 누군가 소개팅에 나서서 “저는 좌파입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고 생각해보자. 이건 소개팅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조인성급으로 잘 생기지 않았다면 이건 최악이다. 그렇다고 좌파라고 미리 말하지 않고, 나중에 데이트하면서 알게 되었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다. 한국에서 좌파는 그런 존재다. 나중에 소개해준 사람이 뭐라고 크게 한 마디 듣기 딱 좋다. 좌파인 게 무슨 죄라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불편해 한다. 

나는 이미 50대 중반이다. 지금까지는 참고 살았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시간이 억울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30대 초반 총리실 근무를 마지막으로, 공직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진보’ 경제학자로는 원래 일하던 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지만, ‘좌파’ 경제학자’로는 공직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보수 계열 신문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거 아니더라도 나는 나의 여생에서 공직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글을 쓰고 분석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 시간을 그냥 폼 잡고 “나는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중이다”, 이런 되지도 않는 얘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냥 어영부영, 남은 인생을 대충 살아도 되지만, 누군가는 “나는 좌파다”라고 공식적으로 얘기하고, 좌파들이 사회 속에서 움직일 공간을 좀 만드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좌파는 ‘잠재적 요괴’ 같은 것이고, 재혼임을 알리지 않고 소개팅에 총각 행사하며 나온 돌싱남 같은 존재다. 싫은 게 아니라 혐오스럽다는, 일종의 혐오의 대상이다. 나는 그렇게 한 평생을 별의별 욕을 다 뒤집어쓰면서 살았다. 지금 와서 그게 어떤 거였고,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런 얘기를 다시 하지는 않을 정도로 나도 나이를 처먹었다. 

그렇지만 비록 소수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좌파는 끊임없이 새로 탄생하고, 또 탄생할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뭔가 다르게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진보’이고 민주당 당원인 것만은 아니다. 그 다른 사람들 중에는 정의당 당원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녹색당 당원도 있을 것이고, 그런 거 귀찮아서 아무 공식적 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파 인사들이 꼭 국민의 힘 당원이 되지 않더라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좌파를 사상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꼭 무슨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생활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꼭 뭘 해야 사상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좌파도 살아가고 있고, 똑같이 사회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나도 더 나이 먹기 전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라는 소수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강남 좌파’라는 표현이 있는데, 조국을 비롯해서 대표적인 강남 좌파들은 어지간히 나와 동료였거나 친구인 사람들이다. 표현은 ‘좌파’지만, 그 사람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좌파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 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부른다. 법무부 장관을 한 조국 선배도 진보라고 불렀고, 중소기업벤처부 초대 장관을 했던 홍종학 선배도 진보다. 다들 친한 사람들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진보가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다. 강남 좌파라는 말을 맨 처음 만든 사람은 이제는 보수 쪽 평론가가 된 공희준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강남 진보’가 맞을 것 같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한국에서 죄 지은 사람은 좌파고, 세련되고 넉넉하고 힘 쓰는 사람들은 진보라고 부른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이상하고도 분열증적인 분류법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듯하다. 유럽의 좌파는 집권을 했고, 부패했고, 그래서 정권을 잃었다. 

한국의 좌파들은 뭐 해본 것도 없고, 누려본 것도 없이 자신의 얼굴과 생각을 숨기면서 살아왔다. 그리고도 맨날 욕 먹을 때에는 ‘좌파’들이 욕 먹는다. 친북좌파, 원래는 친북 + 좌파라는 의미인데, 말만 그렇게 하고 북한이란 친한 좌파라는 의미로 다들 통용한다. 나는 북한하고 안 친하다. 그 정도면 그래도 양반이다. 나중에는 ‘종북 좌파’라는 말도 쓴다. 졸지에 평양의 지시 받는 사람으로 몰린다. 강남 좌파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강남에서 종로로 이사를 왔더니, 강준만 선생이 강남이라는 물리적 지역을 떠나서 한국에서 먹고 살만한 좌파는 다 강남 좌파라고 한다. 욕 받이도 이런 욕받이가 없다. 더한 것은 ‘진보좌파’라는 표현이다. 진보면 진보고, 좌파면 좌파지, 진보 + 좌파라는 의미라고 하지만, 현실은 좌파 중에서 진보 쪽에 와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니 그럼 보수적 좌파도 있나? 그냥 온갖 싫은 것, 더러운 것, 가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모두 ‘좌파’에 걸어 놓고 있는 것이 21세기 한국의 모습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국의 좌파는 그 실체가 불분명하고, 도대체 이 나라에 왜 좌파가 존재할 수 있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도 말하기가 어렵다. 족보도 없고, 조직도 없다. 내가 좌파지만, 나를 좌파하라고 한 사람도 없고, 내가 지금까지 속했던 시민단체나 학회나 혹은 정당에서 나에게 좌파하라고 그런 곳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좌파가 좋았고, 내 양심에 의해서 나를 ‘좌파’라고 소개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좌파라는 존재에게 한국 사회는 요괴와 같은 악령스러운 이미지를 투사하면서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음험하면서도 아주 강력한 집단이 있는 것처럼 처리했다. 좀 이상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좌파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 이상하거나 손해를 감수하고 기꺼이 살아갈 ‘개똘아이’임에 분명하다. 내가 바로 그 개똘아이다. 개똘아이일지언정, 어영부영 살면서 결국 죽어서 ‘진보적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딱 그만큼 얘기할 힘이 나에게 남아 있는 것 같다. 

3. 이상한, 아주 이상한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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