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멸종위기종, 좌파, 그러나 보호종은 아닌! 

20세기 들어와 많은 나라에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20대 우파들의 더 많이 등장하고, 그 중의 일부는 극우파로 자리를 잡았다. 유럽의회의 제1당은 이미 극우파 정당이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 흐름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나의 진보 친구들은 한국의 20대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없기는! 

“한국의 20대가 집단적으로 새누리당을 찍을 리가 없다니까!” 

서울 시장 오세훈 보궐과 함께 많은 20대들이 기꺼이 새누리당이 당명을 바꾼 국민의 힘에 표를 던졌다. 다를 리가 없다. 한국의 진보들이 이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주의 작동 방식에 언젠가 만나게 될 ‘성장의 한계’를 만나면서 생겨나게 된 자연스러운 사회적 흐름이다. 조국이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졌을 것이고, 1980년대 맹활약했던 586 권력이 아니더라도 이 일은 생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빠르게 변화할 필요는 없잖아? 한국의 변화는 늘 그렇게 빠르다. 오죽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현상이 ‘다이나믹 코리아’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좌파가 30대 혹은 20대에서도 등장할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극적인 반전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20대에서 점차적으로 보수가 우세할 것이고, 그 중에 더욱 강렬한 마초 스타일의 극우파들이 분화되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진보가 소수 그룹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는? 보통은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그리고 학계와 문화계에서 좌파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다 좁은 구멍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에서 좌파는 소수자다. 스스로 드러내기 어렵고, 감추고, 숨기면서 살아간다. 지금 환경부 장관인 한정애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노조위원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사회적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다. 한국노총의 대외협력을 맡았고, 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전형적으로 노조를 대표하는 정치인이고, 무주공산의 환경부 장관이 되었다. 한정애는 좌파일까? 유럽식 기준으로는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만, 한정애는 아마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 같다. 그녀는 그냥 진보다. 만약 그녀가 좌파의 정체성을 가졌고, 그렇게 행동했다면 환경부 장관은 커녕, 비례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녀를 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진보나, 좌파나,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한국에서는 엄연한 현실이다. 집권 후, 진보는 부패가 문제지만, 좌파는 자뻑 할 기회는 많아도, 부패할 기회가 아예 없다. 뭘 처먹을 게 게 있어야 부패 비슷한 거라도 하지, 현실은 삶은 쉬리가 산다는 청정 1급수, 아주 맑고 맑은 물에서 혼자 도도하게 살게 된다. 

정서적으로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한 20대들을 몇 명 아는데, 대부분 이준석에게 투표했다. “문재인 너무 싫고, 조국 싫다”, 그들이 나에게 해준 짧은 이유다. 그리고 “페미니즘 너무 싫다”, 그런 얘기도 곁들였다. 일제 때 총독부에서 하는 일에 거부하는 것이 나라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점점 더 그런 20대들이 늘어날 것 같다. 

한국에서 좌파는 이제 멸종위기종이다. 20대 좌파는 점점 더 보기 힘들 것이다. 혹시라도 등장해도 그 또래 집단에서 무시당하거나 괴롭힘 당하면서 생각을 바꾸거나 말수를 줄이게 될 것이다. 정의당의 류호정이 너무 재수없다고 하는 사람이 좌파일리는 없지 않은가? 68혁명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신좌파는 문화, 환경 그리고 여성이 세 가지 축이었다. 마초주의에 가까운 구좌파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 류호정을 너무 싫어하는 사람들은 진보에 속할 수는 있어도 좌파에 속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멸종위기종은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멸종이 뻔해도 뭔가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한국의 좌파는 50대가 가장 많지만, 점점 줄어들어 20대에서는 매우 희소하고, 10대에서는 멸종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게 보호종으로 지정될 가능성은 없다. 멸종해가는 동물에 대해서 사람들이 연민을 느끼지만, 냉정하게 한국에서 좌파는 ‘혐오재’다. 국민의 힘은 민주당을 좌파라고 몰아붙이기 이해서 혐오를 극대화하고, 민주당 결선투표가 없는 한국 현실에서 표가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더 악착같이 괴롭힌다. 객관적으로 보면 20대 좌파는 멸종될 가능성이 높다. 이건 논리적 추론이다. 아쉬지만, 그렇게 시대가 가는 것을 어쩌겠는가? 

전형적인 신좌파로 생각할 수 있는 이길보라 감독의 책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우연하게 읽었다. 다큐 감독이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CODA(Children of Deaf Adult) 그리고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탈학교’ 출신, 마초 자본주의의 상업적 주류들이 싫어할 코드는 고루고루 갖춘 사람이다. 그녀가 주류 사회 아니, 장애 앞에 서 있는 멀쩡한 사람들 앞에서 부딪힌 얘기들을 읽으면서 이 책이 내 인생을 바꿀 책이라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었다.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내가 어렵다는 생각만 했지, 20대 혹은30대에 어떤 이유로든 한국에 등장한 좌파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갈지 생각을 별로 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좌파에 대한 얘기들은 전부 노스탈지아에 가득 찬 옛날 얘기들이고,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영웅에 관한 이야이들이 대부분이다. 안물안궁,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궁금한 사람도 없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옛날의 영광을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혼은 커녕 연애도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이 시대에 청춘들이 보수에 투표하든, 우파가 되든, 극우파가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자본주의가 후반부에 도달하면 이런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우리가 몰랐던 것인가? 

그렇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구석텅이, 후미진 곳, 별로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시대와 불화하고 구조와 충돌하며 젊은 좌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누구와 얘기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 것 같지도 않고, 떼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살 인생도 아니다. 그런 거 할 줄도 모르고, 별로 할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 좌파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유럽의 좌파들이 주로 투표하는 사회당이나 사민주의 정당이 생겨날 것 같지 않고, 좌파들이 집권하는 시대는 아마도 내가 살아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노회찬과 긴 기간 친구처럼 지냈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걸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마음 속의 꿈을 펼쳐 놓기에 그는 너무 일찍 떠나버렸다. 

그렇지만 좌파는 ‘진보’라는 불분명한 상대적 개념과 달리,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력과 미학을 지금까지 제공하였다. 문학에서 연극, 영화 그리고 패션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좌파는 지금까지 상상력의 원천이고, 시대가 부패하는 것을 막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진보할까? 진보의 개념 자체가 불분명한 데다가, 고도 성장이 어려워진 시점에 이를 제어하기 위한 적절한 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였다. 진보는 적당한 경제 성장률 속에서만 작동하기에 좋은데, 성장률이 내려가면서 한국 사회는 성과는 나지 않으면서 점점 더 경쟁만 많아지는 형태로 갈 것이다. 그래서 20대는 전 세대보다 가난하지만 더욱 보수적으로, 지금 10대는 그보다 더 가난하지만 더더욱 보수로 갈 확률이 높다. 그리고 수많은 보통의 남자들은 여자들만 욕하면서 젠더가 열어낸 극우파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퇴행적이지만, 그걸 퇴행적이라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시대가 앞으로 10년간 펼쳐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멸종 위기종 같은 좌파들은 한국 사회에서 계속해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리고 고통받을 것이다. 내가 이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편안하게 입을 수 있고, 적당히 숨을 수 있는 ‘진보’라는 강력한 갑옷을 벗고, ‘좌파’라는 새로운 붉은 셔츠를 입는 것은 내가 한국의 20대, 30대 좌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큰 의미는 없지만, “내 마음은 이래요”, 그렇게 말하는 것 이상은 아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다. 

지난 부산 시장 보궐 선거 때, 미래당의 손상우 후보가 가덕도 신공항 반대를 걸고 출마하였다. 나는 그를 지지하였다. 한국의 보수들은 부산에 공항이 필요하다고 외쳤고, 한국의 진보들은 더욱 가열차게 “그걸 당장 하자”고 외쳤다. 줌으로 전국의 활동가들과 관련된 토론회를 하면서, 진보도 보수도 아닌 환경주의자와 청년들이 모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좌파는 한국 사회에서 무슨 얘기를 할까? 상징적이지만, “난 공항 반댈세”,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한국에서 좌파들이 사라지면 은밀한 토건과 음습한 거래에서 진보와 보수가 대동단결하는 지점이 너무 많아진다. 

“나는 좌파다”, 이 좌파 에세이집은 나의 41번째 책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누구와 남은 생을 지낼 것인지를 얘기하는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 나는 좌파로 살았고, 앞으로도 좌파로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은 큰 의미는 없고, 그냥 밥이나 먹고 산 인생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부패할 기회가 없었고, 청탁할 기회가 없어서, “너네 그렇게 양아치처럼 살면 안 된다”고 힘 있는 진보 친구들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할 정도의 삶은 산 것 같다. 

언젠가 내 또래의 한국 좌파들이 힘을 모아서, 청년 좌파들에게 국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생겼다. 한국의 좌파, 우리는 소수고, 그 중에서도 극소수다. 그냥 살아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렇게 얘기했다. 물론 단결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한국 상황에서 하면 “한국의 좌파들이여, 연대하라”, 이런 문장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면 큰 일 난다. 소수파의 연대 전략은 언제나 유효할 것 같지만, 지금 같은 절대 열세 상태에서는 연대해도 큰 힘 나지 않는다. 그걸 한 번 더 틀어서 얘기하면 “한국의 좌파들이여, 웃겨라!”, 이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는 정말로 왕에게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그의 연극을 본 왕이 웃어서 살아났다고 한다. 

다행히도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모두 근엄주의, 어깨 힘 빡이다. 소수파의 전략은 웃기는 길이 최고다. 물론 살기에 힘든 사람들을 웃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웃기려고 시도를 해야 어쩌다 한 번이라도 웃길 수 있다. 심각한 얼굴로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다 단두대로 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의 좌파가 멸종하지 않을 유인한 전략은 웃기기, 이것 아닐까 한다. 물론 엄청나게 잘 생기면 좀 낫겠지만, 그건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1등만 기억하는 개 좃 같은 나라”가 20년 가까이 진행되다 보니까, 정말로 1등들의 나라가 되었다. 어쩌다 등장하는 한국의 청년 좌파들에게, 하늘이 그들에게 남들을 조금이라도 더 웃길 수 있는 재능을 주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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