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능기부라는 말이 싫다. 누굴 돕고, 서로 힘을 모으고, 거의 평생을 그러고 살았다. 그래도 재능기부라는 말은 싫다.

1. 뭐, 약간의 편견이 있기는 하다. 재능기부로 예술활동하는 사람이 거룩하고 숭고한 일 하는 거 본 적이 있는데.. 인턴급 학생들이나 초년 예술가들, 모두 재능기부라고 나한테 자랑을 했다. 이 얼마나 거룩한 뜻이냐. 그런가보다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된장.. bmw 최신형을 뙇. 에라이, 인턴들 월급이나 제대로 주셨으면.

2. 기부라는 말은 좀 더 근본적으로 검토해 볼 말인데.. 좋은 의미의 기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막연한 형태의 기부로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국제간 기부가 만드는 구조악들에 대해서, '세상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라는 무지막지한 스테디 셀러가 그 중의 일부, 식량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고. 나도 기부를 하고, 점점 그 돈을 늘려나갈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기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그 모순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정부랑 결합한 기관들의 사업비 등, 정말 내용을 알면 기부하기 좀 그런 경우도 많고.

3. 그리고 재능이라는 말에는 완전히 돌아버린다. 이중의 딜레마다. 재능이 실제로 있는 사람에게도 당신의 재능이? 아뇨, 전 재능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통 제 정신이다. 아, 제가 가진 탤런트가 좀 있어서요.. 기능이라는 말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재능이라는 말에 선뜻 수긍할 사람이 있을까 싶다. 예를 들어, 샤넬에게 그 말을 한다고 해보자. 자신이 용기 있고, 열심히 산다고는 생각하는 것 같은데, 누군가 샤넬에게, 당신이 가진 그 디자인 재능을 좀. 아마 샤넬은 빡 돌아서 쥐고 있던 실패라도 날리지 않을까? 이래저래 샤넬도 약점이 많고, 그것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한 사람으로 안다. 재능이라고 할 때 그걸 세상도 받아들이고 본인도 수긍한 것은, 유엔을 통해서 아동 보호 활동에 나선 오드리 햅번 정도가 아닐까 싶은. 햅번, 당신의 아름다움이 재능이십니다.. 뭐, 할머니가 다 된 저를 그렇게 봐주시니, 고마울 따름.

반대의 경우는, 그냥 노동착취인데, 그것도 당신의 '재능'이라고 해서 그냥 일해라.. 보통 한국의 정부, 특히 지방 정부 같은 곳에서 많이 써먹는 공무원식 수법이다. 에라이..

4. 자신이 가진 능력을 사회를 위해서 쓰는 것,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IT 초창기에 무지막지하게 유능한 디벨로퍼들이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사회 봉사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존경스럽다. 그래도 그걸 재능기부라고, 니가 자발적으로 날 좀 도와라, 그런 얘기는 별로 못 들었다.

5. 시민단체 같은 곳은 돈이 없다. 그래서 도움을 받아도 제대로 사례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고, 후원을 받았다고 하면 된다. in kind contribution, 얼마든지 기쁘게 서로 돕고 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재능기부라는 아주 기분 나쁘게 하는 용어를 턱턱 쓴다.

니가 좋아서 한 거 쟎아?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뉘앙스가 있다. 자발적 후원과 재능기부라는,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이는 곳에 흐르는 장강의 간격은 과연?

6. 재능기부, 받지도 말고, 주지도 않는 게 궁극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다고 해서 사회 운동이 없어지거나 문화적 운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봉사, 후원, 지원, 참여, 얼마든지 같이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무엇보다도 재능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말일 것 같다.

(오늘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몇 달 전에 젊은 후배들 당하는 것 보면서 언젠가 한 번 얘기해야지 생각하다가 오늘 잠깐 생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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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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