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까칠한 사람이 있다. 뭐, 어디 먼데 갈 것도 없이, 내가 그렇다. 내가 입으로 뱉은 말은, 정말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내가 죽일 때까지 지켜지는 약속과 같다. 약속을 어기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속을 어기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 해 최선을 다 한다. 뭐, 가끔 번복하기도 한다. 방법 없을 때 그렇다. 그 대신에 나와 일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돈으로는 안 된다. 돈 때문에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죽으면 죽었지, 돈 때문에 뭘 하지는 않는다. 권력으로도 안 된다. 차라리 목을 쳐, 목을 들이밀면 들이밀지, 힘으로 나에게 협박할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게 낫다. 재미는? 재미는 중요한 기준이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일 재밌는 일 많다. 심지어 애 보는 것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가끔은. 그러면? 명분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한다. 그것도 축적된 명분이 있어야 한다. 명분은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건 쌩양아치들이나 하는 일이고.

정치인들을 많이 안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여러 사람에게 묻는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답이 딱 나왔을 때, 에 또, 아무 거시가 저한테 이럽디다, 이거 하라고. 부드러운 명분이기는 한데, 그 답을 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결국에는 누구한테서는 나온다. 누가 저한테 출마하라고 합디다.. 이런 식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끔 하던 말을 명분으로 삼는 사람도 봤다. 그건 명분은 아니다. 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냥 핑게일 뿐이다.

50이 넘었다. 한동안 실익과 명분을 놓고 고민하던 시절이 내 인생에도 없었다. 전혀 그런 적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몇 년 사이예 벌어진 일만 가지고 생각해보자.

차관급 자리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명분이 없었다.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딱히 재밌어 보이지도 않고. 후배들이 집에 찾아오고, 난리 났었다. 형, 딱 한 번만 눈감고 해라, 좀.. 우리도 좀 살자. 안했다.

지방의 한 공기업 사장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여러가지로 명분이 있었다. 하는 일도 정말 내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이고. 명분과 재미,이런 걸 다 만족시키는 자리였다. 그래도 안 했다. 작은 명분이 있는데, 큰 명분이 없다. 쟤는 튕기기는 하는데, 적당한 거 잡으면 바로 한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었다. 안 했다.

21세기에 명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버마스가 정당성(legitimacy) 얘기하던 독일 70년대가 딱 지금 우리랑 비슷하다. 적당히 살다가, 이제 좀 선진국 비슷하게 될만할 때.. 그 때 제일 중요한 게 명분과 소통이라는 게 버마스 얘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랑 비슷하다.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 명분을 지금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삶을 살기로 오늘 오전에 마음을 먹었다.

더 까칠한 사람이 되겠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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