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경제학의 50개 테마는 정했고, 그걸 실어나를 스토리 보드를 만들었다. 중학교 2학년과 아빠가, 뭔가 순탄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현실적이지는 않고. 그 안에 갈등과 함께 자연의 흐름 속에서 뭔가 해소되는 그런 상황을 설정했다. 안에는 더 많은 대꼬보꼬, 오르락 내리락 할텐데, 어쨌든 전체적인 얘기는 이 안에..
스토리 보드 – 농업 경제학
1. 등교 정지, 사건의 시작 2. 몸을 쓰는 삶 – 생태계와 조화 그리고 균형 3. 땅 고르기 - 20세기, 풍요의 시대 4. 첫 수확 – 감자꽃 5. 장마, 움직이기가 싫다 6. 아빠는 너무 올드해 – 이제 텃밭은 싫어 7. 추수, 가끔 생기는 기적 – 호박 8. 초대 받지는 않았으나 – 농부의 성찬 같은 마음으로
36번째 책은 직장 민주주의였고, 37번째 책은 당인리, 지금 출판사에 가 있다. 38번째 책은 농업경제학, 굉장히 오래된 책이다. '88만원 세대' 디자인할 때 거의 같이 시작했는데, 이래저래 형편이 맞지 않아 지금까지 밀렸다. 처음에는 국민투표로 시작된 스위스 농정이 사실상 결론이었는데, 책이 늦어지면서 이래저래 여기저기 소개하고 되었고, 한 때는 가장 최신 이론으로 통하기도. 그 시기도 지났다. 영국의 defra 소개하던 얘기가, 광우병 집회 때에는 한참 유행하기도 했고. 이것도 지난 얘기다. Csa 소개하던 시기도 있었고. 이건 여전히 살아있는 주제. 노무현 정부, 6헥타르 정책을 막아서면서 농지제도연석회의라는 시민단체 연대회의의 사무국장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아, 진짜 옛날 일이다. 시민단체에 상근 활동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다 옛날의 일이다. 이제는 세상도 많이 변했다. 그리고 농업은 진짜로 더 어려워졌다. 몇 년 전 같으면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을 이렇게 간단하게는 못하는데, 이제는 아무 일도 아니다.
책은 어느 순간인가 세보지 않다가, 작년 가을에 어느 주말, 심심해서 한번 세보기 시작했다. 아마 50권까지는 갈 것 같다. 별 특별한 의미는 없는데, 괜히 50이라는 숫자가 뭔가 딱 떨어지는 것 같은.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다.
한국에서 낼 수 있는 책 중에서, 농업경제학 정도 되면 난이도 특급이다. 농업은 책으로는 어렵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청와대 농업비서관이 막 임명되고, 축하인사차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농업 책 난다고 했더니, 자료 도움은 주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자료 도움 받아봐야 나중에 피차 곤란한 처지가 될 것 같아서, 말이라도 고맙다고 했다. 어차피 최근에 분석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봐야 큰 도움 안 될 것 같다.
농업 경제학 정리하겠다고 책 모으고, 자료 정리하는 거 보면서 아내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이게 난이도 상중상이라서 그렇다. 돌이켜보면,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나, 한심스럽기도 하다. 예전에 청와대에 농업 비서관 자리 만들면서, 이젠 좀 나아질 거라고들 했었다. 나아지기는 개뿔. 아무 것도 안 변했다.
지난 총선에 농업 관련된 공약 정리는 신정훈하고 했다. 둘째 태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박근혜 힘 한참 좋을 때, 신정훈하고 여의도 포장마차에서 몇 번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있었던 사람이 그 시절 한참 자주 만나던 원혜영 그리고 아직 유명해지기 전 진선미 누님, 뭐 그런. 신정훈하고 한동안 농업 얘기 많이 했었다. 그런 그가 청와대 농업 비서관이 되었는데, 된장. 행정관까지 그 라인들, 선거가 너무 바빴다. 사요나라.
농업 한참 할 때 참 수많은 사람들이 파트너로 일하고 떠나고는 했다. 인생이란 게 참 묘하다. 노무현 시절, 6헥타르 정책 비판할 때, 정부측 파트너로 나온 양반이 있다. 한참 논쟁하는 사이였는데, 그러다가 자주 보니까 정이 들었다. 지금 농촌경제연구원 원장이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식품안전기본법 만들면서 같이 작업했던 박상표 수의사. 벌써 떠났다. 또 다른 파트너가 송기호 변호사, 그도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이런 10년 넘는 기간 동안에 보고 경험한 그런 얘기를 하려고 책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실패의 역사가, 지금 와서 뭔 의미가 있겠나.
그래서 책 제목을 '최소한의 농업'이라고 잡았다. 정말 미니넘, 인간적으로 이 정도는 좀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은 얘기만 정리하려고. 대상은 중학교 2학년. 2년에 걸쳐서 어디다 대고 던져야 하나, 분석하고 분석해서 나온 결론이다.
그래도 다음 세대, 잠재력이 가장 높은 사람들에게 얘기를 거는 편이, 어려워도 나을 것 같다. 한국의 분기점은 중학교 2학년이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노무현 시대, 진보 인사들이 하던 말이 "핸드폰 팔아 쌀 사먹으면 된다"였다. 솔직히 외국의 좌파 엘리트 집단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못 본 것 같다. 어렵기는 하지만 중요하기는 하다, 그 정도가 일반적인 입장이다. 문재인 시대, 뭐가 좀 바뀌었을까? 그래도 그 때는 그런 얘기라도 했다. 뉘기? 뭐라캤나! 아예 관심이 없다.
그야말로 나는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논리적으로는 이런 난이도 높고 험악한 주제는 피해가는 게 답인데, 그렇게 피한 게 15년이 지났다. 나도 더는 피할 데가 없다. 전에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이런 비겁한 변명도 댔었다. 지금은 딱히 이거 안 팔리면 삶이 곤란해지는, 뭐 그런 건 아니다. 잘 되면 좋겠지만, 별 반응 없어도, 한두 번 망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털고 나갈 형편은 된다.
처음 책 쓰기 시작하면서 나 혼자 정한 모토가 "어깨에 힘 빼기"였다. 여기에 '명랑' 하나를 더 더하고, 그 힘으로 10년 넘게 버텼다. 이번 얘기는 그렇게 즐거운 얘기도 아니고, 가벼운 얘기도 아니다. 여기에 최선을 다 해서 유머를 넣으려고 한다. 생태계의 시선이, 보는 각도에 따라서 굉장히 유머러스할 수도 있다. 물론 그래봐야 내가 하는 유머라서 별 거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 해보려고 한다.
내가 살면서 본 가장 큰 유머는 YS가 했다.
"박근혜, 그거 그냥 칠푼이라.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대이."
팔푼이에서 한 푼 뺀 칠푼이, YS식 진심이다. 그가 그 얘기를 할 때, 우리는 뭔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 유머는 진실이었다. 나도 그런 얘기를 해보고 싶다.
아주 치밀하게 정리된 주제는 아니지만, 축산과 어업까지 포함해서 대략적인 50개 정도의 주제를 뽑아보았습니다.
하나당 A4 2장 정도의 편지를 쓰면, 기본적인 책 한 권 분량이 됩니다.
꼭 50개에 맞춰야 하는 건 아니라서, 하다 보면 몇 개가 더 추가될 거고, 자신 없거나 완성도 떨어지는 것들 몇 개 추리면 대충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여기에 편지를 받게 설정 되는 중학교 2학년 아들과의 스토리 보드를 만들면서 순서를 잡게 될 거고, 게임 중독인 아들과 갈등하는 감정선을 설계하계 될 것 같습니다.
30대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게임 중독인 중학생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놓고 마지막까지 생각해봤는데요.
무난하게 해서 무난하게 망하는 것 보다는, 품도 들고 위험도도 높지만, 10대 얘기를 이번에 전면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출판사랑 상의했는데, 출판사 쪽 생각도 같은 것 같구요..
실제 작업에 들어가기 전, 한 달 정도는 더 넣고 빼고 작업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1. 몸을 움직이는 것 2. 자연과 생태 3. 가위 가격 현상 4. 자본주의와 농업 5. 6.25와 농지 제도 6. 근교 농업 7. 감자 8. 6헥타르 정책 9. 식품 안전 10. 종 다양성과 논 생태계 11. 부부 농업과 가족농 12. 소농과 유기농 13. 토마토 14. 커피와 토양 유실 15. 평양성 전투와 서산대사 16. 주식과 동아시아에서의 쌀 17. 멕시코와 GMO 옥수수 18. 스위스의 국민 투표 19. 광우병과 영국 농업 20. 밀밭으로 가득한 지평선 21. 도시락에서 학교급식까지 22. 급식 넘어, 마음의 점 23. 가락 시장과 중앙형 유통 24. 여왕의 부재 지주 사건 25. 농업 기업 26. 미국의 뉴딜과 팜빌 27. 캘리포니아 오렌지 28. 항구에 버려지는 곡물들 29. 아파트형 농업 30. 로봇 농업과 인공지능의 미래 31. 농협 32. 협동과 생협과 연간 계약 33. 시민지원 농업 (CSD) 34. 코를 믿지 마라, 조향의 세게 35. 도시화와 도시화율 36. 김밥, 삼각김밥, 중국산 찐쌀 37. 덴마크왕과 낙농업의 나라 38. 제이미 올리버와 영국의 10대 39. 농업과 농촌의 차이, 토건의 시대 40. 공정 무역 41. 공장식 축산 42. 꽃등심과 달걀 – 탄소 발자국 43. 과일방 44. 지속가능한 어업 45. 연어는 왜? 46. 범고래 이야기 47. 우주 식단은? 48. 바람이 안 분다 49. 빵 굽는 남자 50. 초대받지는 않았으나..
1. 한국에도 계몽의 시대가 있었는가, 가끔 그런 질문을 해보게 된다. 노태우 시절, 금서가 애매하게 풀리던 시절, 사회과학 책에서 백만 부 종종 넘기는 책들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맑스, 레닌, 대충 이름만 달아도 어지간히는 나갔다. 보다보다 못해서 레닌의 부인이었다는 쿠르스카야인가, 하여간 그런 책도 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농담으로, 그 시절 출판사 사장들만 건물 사고 실제로 생긴 변화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회과학 책은 어디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고, 사실상 쟝르가 붕괴한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한 때 한국을 뒤덮던 계몽의 시대는 끝이 난 것 같다. 경로에 대한 해석은 복잡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보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계몽을 하거나 말거나, 변하는 것은 없다. 뭘로 계몽을 할 것이냐도 문제지만, 누가 누구에게 계몽을 하겠느냐? 이건 답 없는 질문이다. 지금 우아하게 '계몽'이라고 이름붙여진 일을 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게 없다. 한 때 한국에도 원로 같은 게 있기는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있는 원로 자체가 없다.
계몽이 성립하려면, 뭔가 더 알거나, 더 깨달았거나, 하다 못해 먼저 했거나, 그런 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용자의 조건 같은 것도 필요하다. 2020년대를 바라보는, 21세기 하고도 물경 1/5이 지나간 지금, 그딴 건 없다. 이건 꼭 우리 편, 남의 편으로 나뉘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런 팬덤 현상이 벌어지기 전에 권위는 이미 사라졌고,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듣는 시대도 사라졌다. 신문과 잡지의 위기가 그런 거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게 되었다. Mb가 집권하기 전에 Kbs가 공신력 1등이던 시절이 있었다. 좋든 싫든, 그 시대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2. 그러면 이 세상이, 아니 이노무 '대한민국'이라고 목 놓아 부르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 "기다리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 그런 낙관론의 대표적인 책이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세계관일 것이다. 기본적인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되었고, 이제 좀 더 '심화학습' 단계로! 뭐, 그 낙관론은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부수어졌고, mb, 근혜를 거치면서 절망의 끝자락으로 달린 것 같다. 그 시기는 탈계몽의 시대라기 보다는 '증오'의 시대였던 것 같다. 우리 모두 증오했다. '쥐박이'를 증오했고, 순실이를 증오했다. 그것도 그냥 증오한 게 아니라, 정성껏 증오했다.
나는 문재인이 뭔가 좀 잘 할 수 있는 시대를 희망했다. 꼭 조국 사태 때문에 뭔가 엄청나게 변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그 증오 위에 우리는 또 다른 증오를 더 했다. 10년 전에는 싫어도 식구들끼리 정치 얘기를 하고, 아빠와 딸과 아들이 등 돌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정치 얘기는 안 한다. 하면 등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막 뭔가 던져버릴 정도로 인식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계몽? 그딴 건 이제 없다.
10대와 20대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탈 코르셋 논쟁은 10대 여성과 30대 여성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나이가 어릴수록, 10대일수록 그 민감도가 특히 높았다. 야,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구나!
조국 사태에서 많은 사람들은 20대들에 주목을 하지만, 진짜로 그 사건이 영향을 주는 것은 10대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끼리' 잘 논의하고, 얘기해보면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딴 시대도 끝났다. 그리고 한국에서 '계몽의 시대'는 정말로 끝이 났다. 한국에서 누가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다.
3. '농업 경제학'은 형식적으로 중학교 2학년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려고 한다. 마음은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내가 할 수 있을지, 최종적으로 마음을 먹지 못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아주 고전적인 관계에서 어떻게 권위적이지 않고, 강요하는 방식의 아닌 지식에 대한 얘기가 가능할 것인가? 이게 아주 어렵다.
그야말로 '지대루 계몽적', 이렇게 되기 딱 좋은 위기다. 이래라, 저래라, 제대로 꼰대처럼 보이기 딱 알맞다. 게다가 주제가 농업이다. 관심도 없을 얘기다. 안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지금 왜 이 이야기 앞에 서 있는가?
학부 시절에 농업에 대해서 별 게 배운 게 없다. 경제사 시간에 이래저래, 조금씩 본 게 다다. 그 때는 경제학과에서 회계원리 배워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한다, 안 한다, 좀 복잡하기는 했는데.. 배워둔 게 나중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농업 같은 얘기,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철학과 청강하고, 사학과 수업 듣고, 남는 학점은 전부 수학에 몰았다. 뭐, 학기 시작만 그랬고, 4학년 1학기 때에도 시험 거부를 주동한 처지라. 중간 고사 이후로는 수업은 커녕, 시험도 맨날 거부였다. 1학년 1학기 때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서 시험 못 봤고. 2학기는 건대 사태로 시험 거부. 그냥 안 본 정도가 아니라, 맨날 주동하는 처지라. 학점은 커녕, 학교 제대로 다닌 학기가 거의 기억에 없다. 그래도 2학년 때부터 틈 나는 대로 대학원 입학 준비를 했더니, 시험만큼은 왠만큼 봤다. 그런 처지에, 농업 공부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해야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나중에 유학 가서 대학원 논문을 국제 자원 중에 쌀시장을 가지고 썼다. 와.. 이 논문 점수가 걔들 표현대로, 환상적으로 나왔다. 대학원 입학 성적이 거의 꼴지 비슷했었는데, 졸업할 때에는 논문 점수 배점이 워낙 커서 좀 점수 떨어지는 과목들 평균점 다 올려주었다. 졸지에 1등으로 졸업하고, 박사 과정도 이 논문 점수 덕분에 1등으로 들어갔다. 편하게 유학하는데, 진짜 1등 개국공신 같은 주제였다. 물론 박사 과정에서 그걸로 계속 논문을 쓰지는 않았다.
하여간 그 때 논문 준비하면서 농업경제학이라는 걸 처음 공부했다. 90년대 초반인데,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아직 냉전이었고.
다시 농업경제학을 공부한 것은 회사를 그만두고 녹색당 만드는 일을 하다가, 이게 농업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농업공부모임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아내와 결정적으로 결혼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고, 내 측근들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농업을 계기로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생각한 것은.. 이건 나의 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금까지 온 것이다.
그 시절에 식품 안전을 놓고 법 같이 준비하던 수의사가 박상표와 송기호다. 송변은 될 듯 말 듯 여전히 잘 버티고 있다. 박상표는 벌써 자살했다. 참, 사는 게 뭔지! 약간 뒤에 FTA 논의로 윤석원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그 시절에는 거의 매주 봤다. 그 때 정부 쪽 전문가로 논쟁하던 양반이, 논쟁하다가 정이 들었는데, 지금은 농촌경제연구원장이다. 노무현 때 6헥타르 정책 놓고, 진짜 지겹도록 논쟁을 했다. 장태평 장관 시절에는 GMO 문제 가지고 장관하고 논쟁을.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한 때 농업 문제로 같이 논의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청와대 농업비서관 아니면 행정관이라도 되었는데, 다들 그 자리를 정거장으로만 썼던 것 같다. 청와대 가면 엄청 뭐 할 것 같더니, 금방 출마할 자리 알아보고들 했다.
그렇게 농업 경제학 공부하면서, 즐거운 일도 많았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많다. '토사구팽'이라는 전화 한 통화를 남기고 더는 보기 어려워진 누님 등등.
둘째 태어나면서 그 시절과 단절하게 되었다. 더는 나도 시민단체의 농업 얘기를 맨 앞에서 발제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농지제도연석회의라는 시민단체가 잠시 있었고, 내가 사무국장을 맡았었다. 강기갑, 단병호, 이런 사람들과 한참 논의하던 시절이.. 농지은행 도입할 거냐, 말 거냐, 그런 거 가지고 엄청 논쟁하던. 다 옛날 일이다.
4.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
어떻게 해야 이 얘기를 계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아직은 실마리를 못 찾았다. 딜레마다. 아내를 목졸라 죽였던 알뛰세의 책을 한참 많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절친이었던 에티엔 발리바르가 "Tais-toi, Althusser!", "입 좀 닥쳐라, 알뛰세!", 그런 책을 쓴 적이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뒤, 진짜 알뛰세 말 많았다.
내가 책을 쓴다고 해서 10대들이 읽을 것 같지도 않고, 읽는다고 해도 뭔 반응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게 지금 나의 딜레마다.
술 한 잔 마시고, "때려쳐!", 딱 이게 제일 좋은 전략이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이게 내 양심의 문제라서 그렇다. 생태에 관한 얘기는, 농업이 빠지면 한 바퀴 돌지를 않는다.
예전에 이상의 산문집을 읽다가 만주로 도망간 자기 여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고3 학력고사 끝나고였는데, 사실 충격 받았다. 그 충격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에고, 아직까지 그 모양으로 살아간다. 자기는 충분히 자유롭게 살았는데, 여동생에게는, 니가 그러면 안 되느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동거는 안 된다, 정신 차려라, 하여간 엄청 빡빡한 내용이었다. 꼰대 꼰대, 왕꼰대의 편지였다.
그런 편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 근데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누가 쓰더라도 이상이 여동생에게 보내는 것처럼 써지게 되어 있다. 지금의 딜레마다. 아직 딱히 해법을 못 찾고 있다.
애들 키우다 보니, 요즘 정말 머리 박고 얌전하게 산다. 30대에는 정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는데, 요즘은 이상한 거 봐도, 내는 잘 모른다, 그냥 처박혀 지낸다.
이제 둘째 초등학교 3학년 올라갈 때가 되면, 나도 50대 중반이다. 나이도 처먹을 만큼 처먹은 셈이고, 뭔 욕심을 부리는 것도 이상할 것 같다.
방송 진행 요청 같은 게 가끔 오는데, 물리적으로도 애 보면서 그렇게 하기는 어렵고.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자꾸 방송하면 숨보가 흐트러져서 뭘 만들기가 어렵다. 일간 방송은 물론이고 주간방송도, 결국에는 생각이 그 단위로 만들어진다. 1년에 한두개, 아니 2년에 한 개라도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뭔가를 만드는 게 내가 하는 일이다. 결국 생각이 아주 길어야 한다.
유행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서 결국 사람들 손에 들어가는 데에는 몇 년 걸린다. 그 때 무슨 유행이 있을지, 뭔 일이 있을지 알 게 뭐냐. 그냥 하고 싶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하는 게 낫다.
농업 경제학 같은 게 대표적으로 그런 일이다. 진짜 인기 없는데, 그나마도 더 인기가 없어진다. 이것저것 따지면 하기 싫어진다. 이 경우는 의미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다. 그래도 좀 특색 있게 하고 싶어서 머리를 쥐어짜고 쥐어짜는데, 딱히 지름길 같은 건 없다.
논리에는 정답이 있지만, 감정에는 정답이 없다. 감정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남들도 힘든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는 힘들다.
처음 내가 책을 쓸 때 비슷하게 하던 사람들이 좀 있었는데, 돌아보니까 이제는 거의 나 혼자 남은 것 같다. 진작 그만두었어야 할 걸, 아직도 못 그만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 딱히 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이승만은 3권짜리로 하기로 했고, 출판사하고도 상의는 끝났다. 1권짜리랑 3권짜리 중에서 고르라고 했더니, 내 얘기 듣고, 이건 무조건 3권짜리로 가야 한다는 것 같다. 그게 맞기는 맞는데, 품이 어마무시하게 든다. 뭐, 그런 걸 무서워한 적은 없다.
기본 작업이 공간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내가 원래 그렇게 작업을 한다. 다음 달에도 경주 한 번, 울산과 포항 3박 4일, 줄구장창 틈만 나는대로 다닐 생각이다. 애들 데리고 다니면, 혼자 다니는 것과 공간을 보는 눈도 좀 바뀌는 것 같다. 애들 한테 친절한 동네, 애들 막 대하는 동네, 아주 간단한 기준 하나가 추가되는 데도. 동네 보이는 눈이 다르다.
제주도는 애들하고 가면 식당 주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안 된다고 하는 집도 많고, 겨우겨우 들어가도 돈은 돈 대로 내고 눈칫밥 먹고 오는 경우도 많다. 오늘 아내가 제주도로 출장을 갔다. 몇 년간 아내가 제주도 가면 애들 다 데리고 따라가고는 했는데, 올해는 안 간다고 했다. 애들 너무 눈치 줘서, 내 돈 쓰면서 가기가 좀 그렇다.
하여간 이승만을 내기로 출판사와 얘기를 마치고 나니까, 삶에 긴장감이 확 높아진다. 어떻게 되겠지..
그래도 먹고 살 걱정 안 하면서 글 쓸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마무시한 행운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큰 돈은 아니지만 최근에 아내 저축이 조금 늘었다. 슬라이트하게 쁠라스.
뭐, 플라스라고 해도 카메라 같이 사야할 것을 뒤로 미루면서 버티는 거라서 별 의미는 없는 일이지만.. 그거 가지고 불평할 처지는 아닌 것 같고.
농업경제학은 여전히 고민이다. 무난하게 갈지, 아니면 게임중독인 10대 소년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좀 괴팍하게 갈지.. 아직도 마음이 잘 잡히지 않아서 첫 줄 시작을 못하고 있다. 그냥 며칠째 노는 중.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요즘 10대는, 나도 무섭다. 10대 관찰을 90년대 후반부터 했는데, 지금처럼 무서운 10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다.
종교 경제학 하려고 할 때, 결국 접은 건 무서워서는 아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도 귀찮게 해서, 진짜 귀찮아서 치워버렸다.
10년 후, 지금 10대가 20대가 되면 어떤 사회가 펼쳐질까? 다 업보다. 교육이, 교육이 아니다.
그래도 그냥 처음에 마음 먹은대로 직진할까, 우회로를 찾을까, 별 하는 것도 없이 마음 복잡한 밤이다.
10대의 보수화라는 표현이 있는데, 현실은 10대 극우파의 탄생이다. 20대 남성의 여혐 문제에 대해서 최근에 관심을 갖지만, 그들의 여혐이 시작된 것은 보통 중2, 중3인 경우가 많다. 20대가 되면 완성형 여혐이다. 그 성향은 안 바뀐다. 20대 극우파도 마찬가지다. 20대 극우파, 완성형이다. 그 시작은 10대..
구청에서 마련해주는 텃밭에 오늘 처음 모종을 심었다. 큰 애는 이제 몇 번 해봐서 능숙하게 잘 한다. 둘째는 작년에는 흙만지 싫다고 안 했다. 올해 처음 심는 걸 해봤다.
농사가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처음 생각해본 것은 2001년쯤의 일이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장애인 교육하는 특수교사들과 알게 되었다. 장애인 분리 교육이 아니라 통합 교육에 대해서 생각이 처음 정리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하여간 일반 학교에 다니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뭘 하면 좋을까, 총리실에서는 그즈음 7차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한참이었다. 그러다 얘기가 나온 게 농업교육이었다. 그 때만 해도 어린이들이 다룰 수 있는 작은 농기구 같은 게 거의 없었다. 독일에 갈 때마다 모종삽 셋트 같은 것들, 정말 예뻐서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은 그런 것들을 사다 주었다.
그게 학위논문 같은 게 아니라 - 그래봐야 정책 현장이지만 - 현실에서 농업을 내가 처음 접한 순간이다.
주로 아내가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텃밭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10년 정도 된다. 애들 아파서 그야말로 던져놓고, 자라거나 말거나 한 때도 있지만, 하여간 그것도 10년 가까이 된다.
큰 애는 어린이집 알림장에 농사를 잘 짓는다고 적혀 온다. 별 거는 아닌데, 흙만지는 것을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늘 하는 것도 아니니까, 가끔 뭘 심거나 손을 보는 걸 큰 놀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농업경제학을 무조건 연내 출간할 생각이다. 미뤄도 너무 미뤘다. 게임중독에 빠진 아들이 중3 올라갈 때 아빠가 편지를 쓰기 시작해서, 1년간 쓰게 되는 것이 설정이다. 어려서부터 텃밭을 해봤다는 사실만 빼면, 대체적으로 내가 만나게 되는 일상의 얘기를 그대로 하려고 한다.
이렇게 방향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제이미 올리버에게서 왔다. 불량 청소년 얘기에서 시작된 제이미 올리버의 신화는 결국 영국의 중학교 급식체계 자체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여왕으로부터 작위도 받았다.
그즈음 영국의 패션 위크가 헤매다가 엄청나게 영향력이 커졌다. 내가 처음 패션 시장 공부하던 20년 전에는 밀라노가 중요했지, 영국 패션위크는 쳐주지도 않았다. 지금은 파리 패션위크와 함께 양대 패션으로 다룰 정도로 커졌고, 밀라노는 예전에 제쳤다.
최근의 요리와 식품 그리고 농업에 관해서는 영국이 스위스만큼이나 중요한 텍스트다. 만약 처음에 계획한 대로 10년 전에 농업경제학 책을 썼으면, 스위스가 기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제이미 올리버를 축으로 하는, 영국이다.
농업을 교육으로 본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농업 다루던 시절에 마지막으로 제시하던 건데.
안타까운 얘기지만, 이 얘기가 흐르고 흘러서 충청도까지 갔고, 이걸 전격적으로 받은 사람은 안희정이다. 약간의 인물 배경 같은 것들이 좀 있기는 한데, 하여간 가장 적극적으로 농업을 교육 프로그램으로 생각한 사람이 안희정 지사였던 것은 맞다. 이래저래 길이 엇갈려서.. 결국 농업 얘기로 안희정과 차 한 잔 마시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책으로 보면, 안희정이 잘 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만 한 것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농업교육에 관해서는, 하여간 그가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맞다.
그런 얘기가 제이미 올리버 얘기와 만나서, 작년부터 올해 사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자라서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정리해나가는 농업 경제학이 되어간다.
남자들에게 내가 농업과 관련해서 해주고 싶은 얘기는 딱 하나다. 자기 먹고 싶은 것은 자기가 해먹자..
먹는 걸로 아내와 다툴 일이 거의 없는 게, 뭔가 맛있다고 같이 얘기한 게 있으면..
검색해서 맛집에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시장 봐서 그걸 해서 먹는다. 그게 더 빠르다.
그렇게 살면 편하다. 집에서 내가 해먹는 게 제일 맛있고, 그게 힘드니까 식당에 가서 먹는다.
불편한 점도 생겼다. 우리 집 애들은 절대로 식당에 안 갈려고 한다. 가끔 식당에 한 번 가려면..
"그럼 내가 오늘 좀 양보하지, 아빠 사정이 그렇다니."
큰 애가 잘난 척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게 남자들의 일생에 중요한 시대가 오는 중이다. 결혼하거나 말거나, 그것과 상관 없이.
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쓰는 농업경제학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게 가능할 수 있는 사회.. 작은 농업 교육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남자들, 특히 약간 운동권 그리고 상당히 엘리트, 그런 사람들이 이걸 못 배웠다. 그래서 그들이 지성을 모아서 만들어낸 말이 "핸드폰 팔아서 쌀 사먹으면 된다." 정말로 내 친구들이 그런 말 할 때.. 판사도 그런 말 하고, 검사도 그런 말 했다, 진짜로. 에라이, 못 배운 것들아..
우리 아버지는 나를 육사 보내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타협점으로 공사가 결론이 되었다. 나도 비행기를 좋아했고, 비행기 조정을 하고 싶었다. 아마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불행한 역사가 없었다면, 나는 공군 근처에서 뭘 하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 같다. 5.18을 보고, 광주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에라이, 군바리들아!
전환점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똑똑한 남자애가 집안에 있으면 어떻게든 육사를 보내야 한다는 시기에서, 막 서울대 법대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농업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 음식에 대한 기초 지식, 이런 게 필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남자가 똑똑하면 무조건 법대.. 밥은 엄마가 해주고, 너는 공무만 열심히.
그렇게 귀공자들이 되어갔다. 그리고 엄마가 아내로 대체되고, 그렇게 고상하게 어른이 되어서, 결국 자연의 이치와 생태의 순환성 같은 것은 시민단체의 거지같이 일상사는 것들이나 떼법으로 외치는..
그들이 그렇게 승진 열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시기에, 나는 어슬렁거리고 다니면서 텃밭이나 살피고, 전국의 유기농이나 급식운동한다는 농민들 만나고 다녔다.
학교급식이 사회적 의제로 뜬 건 그 다음이다. 초기 급식 운동 아이디어를 형성시킨 몇 사람이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 모든 것을 모아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몇 통을 써보려고 한다. 그게 내가 쓰는 농업경제학이다.
예전에 수학경시대회라는 게 있었다. 학교에서 문과, 이과 한 명씩 대회에 나갔다. 절차상, 대회에 나갈 사람은 그냥 학교에서 시험 봐서 뽑았다. 3년 내내 이 대회에 나갔었다. 수학을 늘 1등했던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 선발대회에서만은 문제를 잘 풀었다.
고3 때, 수학 선생님이 나를 아주 얄밉게 생각했다. 맨날 팽팽 놀다가, 경시대회 때만 되면 시험을 잘 보는.. "니가 안 되기를 바랬다." 대놓고 뭐라고 그랬다.
그 대회에 같이 나가던 이과 쪽 친구가 있었다. 최근에는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인생의 절친 정도 된다. 공부를 기깔나게 잘 했다. 서울대 물리학과 가서, 그렇게 박사도 되었다. 그런데 사는 게 좀 버거웠나 보다. 다시 학교 가서 한의사 되어서 한약방 냈다. 공부가 다가 아니다..
하여간 그렇게 3년간 수학 경시대회를 나갔는데.. 이게 기억에 남는 건, 그 때 나왔던 문제가 너무너무 어려워서 그렇다. 그런 경시 대회와는 좀 다른 게 백일장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백일장 나간 이후로, 이것도 고3까지 매회 대회에 나갔다. 6학년 때 전국 대회에서 장원을 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반항의 시대라서, 학교에서 대회를 내보내 주지를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다시 나가게 되었다. 상은 탈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었다. 고3 때인가, 논술대회 같은 데에서 상 탄 게 아마 마지막 상이었던 것 같다.
백일장은 놀러가는 날이다. 대충 후다닥 쓰고 놀았다. 정성 들여 쓴다고 상 타는 것도 아니다. 내 기억으로는, 순전히 그 날의 운이다. 제일 큰 상 탈 때, 김포 어딘가에 있는 학교에서 시합을 했던 기억이다. 방학 때였는데, 책상 서랍 안에 누군가 두고 간 삼양라면이 있었다. 이게 왠 떡이냐, 요즘 식으로 하면 뿌셔뿌셔, 생라면 먹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서랍 속에서 라면 뽀셔 먹으면서 쓰는 둥 마는 둥.. 쓰는 거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납북된, 한 번도 보지 못한 큰외삼촌과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고2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얘기를 썼다. 사실 라면 먹느라 쓰는 데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게 아마 내가 탄 백일장 상 중에서는 제일 큰 상이었던 것 같다.
수학 경시대회는 좀 달랐다. 우와.. 한 문제도 제대로 못 풀겠다. 이게, 무슨 미분이나 적분 아니면 확률이나 통계 같은 게 나와서 어려운 게 아니다. 기하학 문제들이 특히 어려웠는데, 더럽게 꼬아놓고, 합쳐놓아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면 절대로 해가 나오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동경대 본고사 문제, 그런 데서 가지고 온 거 아니겠냐.. 진짜로 듣도보도 못한 어려운 문제였다. 몇 문제 못 풀었다.
그 시절에 전국이 같이 보던 평가시험 같은 게 있었다. 수학은 다 맞거나, 하나 틀리거나 그랬다. 수학 점수만으로는 전국 20등 밑으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던..
그래도 거의 풀기가 어려운.. 어렵다기 보다는 더러운 문제였다. 수학 실력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문제를 풀고, 입상도 하는 거야?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만 그냥 대회에 나갔지, 상 타는 학교들은 미리 훈련도 좀 하고 그런다고..
우와.. 사실 약간 충격 받았다. 그래서 기하학 공부를 따로 좀 했다. 물론 그래도 경시대회에서 성적이 올라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때 기하학을 좀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서, 나중에 대학 가서 엄청난 도움을 받기는 했다. 경제학과 수학 정도야.. 문과쟁이 수학이 더 거기서 거기지, 뭐..
요즘 대학이 이런 대회에 나가서 수상한 걸로 평가가 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다. 그런 대회용 문제 푸는 게, 사실 진정한 의미의 '실력'과는 별 상관도 없다. 그리고 그걸 무슨 사교육에서 처리하는 것도 더 이상하다.
아마 요즘처럼 대회 나가고 그런 게 대학에 반영된다고 했으면, 나 같은 경우는 대회 근처에도 못 가봤을 것 같다. 수학을 공부하는 것과 시합용 문제 푸는 게 좀 다르다. 기하학 증명 아무리 잘 이해해도, 더럽게 꼬아놓은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그건,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풀려면, 표준 해를 먼저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희한한 기하학 문제 몇 개 푼다고 해도, 선형대수 앞에 서면 말짱 다 꽝이다. 집합론, 토폴로지 등 그 뒤에 나오는 과정들은 기본이 그야말로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등학교까지 죽어라고 푼 문제들, 대학 가면 아무 쓸 데도 없다.
된장. 대학교 가서 들었던 첫 번째 경제학 수업이 나중에 국토부 장관한 서승환 선생 수업이었다. 그 때 편미분을 처음 보았다. 환장하겠네, 저건 또 뭐여? 웅성웅성.
학생들이 헤매니까 딱 편미분 정의 3줄 써주고, 이제 알았죠? 그냥 진도 나갔다. 그 양반 수업 참 까칠하게 하는. 경제학이 뭐고, 뭐하는 데 쓰고.. 이번 학기 수업은.. 이딴 거 없다. 시작하자마자 변수 몇 개 정의하고, 바로 문제 풀기 시작하던. (그 땐 몰랐는데, 운동권 될 얘들이, 경제는 뭐고, 국가는 뭐고, 정의는 뭐고, 이딴 말 하지 못하도록 많은 수업이 그냥 문제부터 풀고 시작하던..)
선행학습이 의미가 있게 대학입시가 설계되는 것,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워두면 그래도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시합용 문제풀이, 일생에 아무 도움 안 된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내 주변에 인생의 깊은 나락에서 어떻게든 나오려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줌마들이 세상 살기, 진짜 너무 힘들구나.. 그것도 순수학문을 할수록 더욱 더. 이거 더럽네, 진짜.. 그 중 두 명이 수학박사다. 둘 다 수학 겁나게 잘 한다. 물경, 미국의 엄청 좋은 학교에서 수학 박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게 아무 도움 안 된다. 아줌마면..
고등학교 때에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걸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삶이 설계될 수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필요하다면, 경시대회를 싹 다 없애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인생에 도움을 주나? 아무 도움 안 준다.
삶이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책도 좀 보고, 영화도 좀 보고, 여행도 좀 다니고, 단체활동도 좀 하고. 그런 게 가능하도록 고등학생의 삶이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삶을 놓고 교육과정이나 평가과정이 디자인되어야지, 하던 게 습관이라고 그냥 하는 거, 21세기적이지 않다.
(다음 주에 조희연 선생이랑 식사하기로 약속이 잡혔다. 뭔 얘기를 해줘야 하나, 잠시 생각해봤다..)
어제 무리했더니, 아침에 열도 오르고, 목도 부어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감기 걸리는 일은 일생에 몇 번 없을 정도로. 감기만은 없다. 결혼하고는 감기 걸린 적이 없었다. 감기겠구나 싶었다.
아내가 출근하면서 애들 어린이집 데리고 갔다. 죽어라고 잤더니, 몸은 좀 괜찮다. 아내가 끊어준 동사무소에서 하는 헬스장 오늘 첫 날인데.. 코를 풀었더니 피가 나온다.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이게.. 회사 다닐 때에는 주말에 푹 쉬고 나갔는데, 애들 보면 주말이 더 고비다. 주말에 완전 무리하고, 새로운 주가 시작하면 누적되고 더 누적되고.
오늘은 간담회가 하나 있고, 내일은 장애인개발원에서 하는 팟캐 녹음이 있다. 모래는 용민이랑 하는 kbs 라디오가 있고. 김기식 선배가 나온댄다. 그리고 저녁 때 tbs에서 하는 북소리 녹화가 있다.
꼭 해야 하는 거 아니면 거의 다 튕기는 중인데도, 일정이 개판이다. 꼭 챙겨야 하는 선배들이 있는데, 어제 전화 걸어보니까 삐진 것 같다. 된장.. 미안하기는 한데, 영감들은 잘 삐진다. 삐진 이유는 충분히 알겠는데, 내 코가 석자라서 이것저것 챙길 형편이 아니다.
그 동안 살면서 여기저기 챙기는 일들을 주로 내가 했었다. 뭔가 만드는 사람들은, 잘 삐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요즘은 나도 그런 거 잘 못한다. 내가 죽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삐질 사람이 덜 삐지는 건 아니다.
올해에 추가로 들어온 연구가 10대 연구다. 한국의 10대, 이게 눈물 나는 현상이다.
지나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얼마나 행복한 10대를 보냈는지.. 공부도 아주 잠깐만 하고, 진짜로 신나게 놀면서 지냈다. 중학교 때는 사진반 한다고, 사진 찍으러 여기저기 공식적으로 놀러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그냥 놀았다. 서울대 법대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의대는 첨부터 노 땡큐. 그냥 암 생각 없이 놀았다. 소설은 많이 봤다. 전집으로 나온 한국 소설 그리고 소위 명작 소설, 다 본다는 마음으로 봤는데..
그래서 10대에 대한 생각을 회상해보면, 마음 속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 진짜 남들 평생 놀만한 분량을 그 시절에 원없이 놀았다. 그리고도.. 그 후에도 계속 놀았다. 어쩌면 전세계 박사 기준으로, 내가 가장 많이 놀면서, 되면되면 그렇게 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학 시절에는 음악한다고 놀고, 운동한다고 놀고. 유학가서는 여기가 바로 파리야, 영화보고 책 읽고, 그리고 놀고.
내가 10대 때 놀았던 얘기 들으면, 다들 깜짝 놀랄 정도로. 원래는 그렇게까지 놀 생각은 아니었는데, 공부 좀 하자고 도서관에서 도서관에서 모여서 놀고.. 이상호 기자가 학교도 다른데, 그렇게 같이 모여서 놀던 멤버 중의 하나.
사회과학 저자가, 요즘은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바닷가 파도 한 가운데 혼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뒤의 호화 방갈로에서 편안하게 바베큐 먹는 사람들이, 쟤는 혼자서 왜 저린디야, 그러고 있는 듯 싶은.
그래도 그 삶이, 보람은 있다. 내가 나를 돌아다봐도, 나는 내 시절을 개돼지처럼 살지는 않았다.. 그냥 처묵 말고는 생각도 안 하는 간부급들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10대들이 삶은 역설적으로 공평하다.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주 소수의, 건물주의 아들은 행복할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권위주의적이고 양아틱하지 않은 건물주를 아직 별로 본 적이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간단히 정의하면, '행복한 10대'를 만드는 데에 실패한 나라다. 국제 기준으로 따지면, 아동 학대가 청소년 학대로 이어지는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