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경제학은 중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책이다. 3월 중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매주 한 통씩 쓰게 되는데, 방학 때 좀 줄이고 하면 대략 40개 내외의 편지가 될 것 같다. 여기에 8장보다 좀 줄여서 장 구조를 갖추게 되고, 장마다 시작하는 글 하나씩 들어가니까, 이래저래 50개 미만의 절로 만들어지는 책 구조를 갖게 된다.

첫 번째 편지를 막 끝내고, 내가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88만원 세대' 쓰면서, 십만 부는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는 몇 배 더 팔렸다. 그 보다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책 사정은 그 때보다 훨씬 나쁘지만, 그 때도 사회과학 상황이 좋다고 하던 때는 아니었다. 요즘 농업에 대한 관심이 정말 바닥이지만, 그 시절, 20대나 세대에 관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아예 없었다. 물론 결과는 내봐야 아는 거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갖게 되는 느낌 같은 게 있다.

책이라는 게 그렇다. 매번 최선을 다하지만, '케미'를 만드는 것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게 뭔지 실체도 불분명하다. 역사적으로 그런 게 성공한 대표적인 책이라면 나는 '빨간 머리 앤'을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캐나다 어느 한 변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한 여성이 쓴 글이 그렇게 세계적인 히트를 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내가 이 얘기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된 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 반지의 제왕의 상징들을 찾아보다가 북구 신화와는 또 다른 계열의 기괴한 상징들에 대해서 찾아보게 되면서였다. 마침 그 시절, 마법 학교 호그와트에서 벌어진 해리포트도 세계적인 히트를 치던 중이었다. 이런 얘기들을 따라가다보니까 나도 아일랜드 환상이 가득한 몽고매리 여사의 얘기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프랑스 사람에게 아일랜드 등 소위 켈트 상징은 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빨간 머리, 대놓고 켈트족의 환상을 거론하는 얘기인데, 어린 시절 앤의 얘기는 이런 켈트풍 상징으로 가득하다. 런던과는 좀 경계감이 있는 상징인데, 프랑스로 대표되는 또 다른 대륙에서는 "엄머, 이건 내 얘기야", 그렇게 먹어주고 들어간. 여기에 스코틀랜드의 소위 '네오스토이시즘', 신금욕파가 가졌던 매우 별란 서구 근대사의 사상적 전통을 만나게 된다.

요즘 욕 더럽게 많이 먹는 꿀벌의 우화의 맨더빌이나 공리주의의 벤담, 이 사람들이 매우 독특하다. 이 사람들하고 사상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게 멘더빌-아담 스미스, 벤담- 존 스튜어트 밀, 그렇게 나온다. 동시대 사람들이고, 다들 정말 친했다. 거기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왔고, 존 스튜어트 밀에게서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 그리고 참정권에 대한 주장이 나온다. 19세기에 여성에 대해서 교육을 해야한다는 가장 적극적인 얘기들을 스코트랜드의 전통이라고들 한다. 신금욕주의의 또 다른 정신적 다리이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관심 갖는 사람은 잘 없다.

이런 게 '빨간 머리 앤'에 다 모여있다. 비슷한 흐름의 또 다른 축으로는 당연히 '오만과 편견'인데, 지독할 정도로 지적인 스노비즘을 추구한 런던의 전통과, 뭔가 이교도적이면서도 환상적 그리고 어디선가 엘프가 튀어나올 것 같은 낭만의 전통에 서 있는 '빨간 머리 앤'이 기묘하게 대척점을 이룬다.

뒤에 성공한 얘기의 성공사례를 분석하는 것만큼 허탈한 얘기도 없지만, 나는 켈트 전통과 스코틀랜드의 근대철학의 흐름 같은 게 만든 환상적 공간, 그런 게 빨간 머리 앤을 뒷받침하는 철학적 배경이라고 보았다.

처음 책을 쓰면서 내가 제일 많이 참고한 것은 움베르트 에코와 '빨간 머리 앤'이었다. 그리고 보조적으로 프랑크 허버트와 아이작 아시모프를 보았고. 앤 얘기의 4권은 편지와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수많은 로맨스 코미디가 만들어지지만, 앤의 얘기는 캐나다에서 본 세상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켈트적 상징과 환상 그리고 여성들만이 갖게 된 복잡한 의식 그런 게 일종의 케미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세익스피어의 골 때리게 웃긴, 그렇지만 런던 중심의 서사와는 좀 결이 다른 게 만들어진 거 아닌가 싶다.

농업경제학 첫 번째 편지를 마치고, 낭만의 시대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블랙유머를 다루는 법에 대한 생각이 좀 들었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다. 뭔가 좀 더 아는 게 많다고, 그 실패가 가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으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험악하고 힘들게 살 필요까지 있나 싶다. 그 주변부적 의식이 켈트 전통에 있고, 몽고메리 여사에게 있었던 것 같다.

첫 편지를 쓰고 나서 나도 알았다. 내가 속세적 관점의 인생으로서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을. 그걸 내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두 번째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영화 대사 하나를 고르자면..

대부 2편에 마이클의 둘째 형인 프레도가 엄마 장래식에서 했던 대사다.

"I'm smarter than you."

망설이던 마이클이 결국 이 말 한 마디로 형을 죽이게 된다. 그 가족을 끝까지 따라다니는 동족 살해의 비극을 잉태시킨 한 마디이다. 한국 남자, 아니 한국의 엘리트 남성들이 가장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한 마디가 이게 아닐까 싶다. "난 너보다 똑똑해."

이 얘기로 한국을 가장 처절하게 읽은 사람이 강준만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수없는, I'm smarter than you들.

이 충동을 내려놓기는 어렵다. 망한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해도, 그래도 사실은 내가 쟤보다 더 똑똑해, 이런 바보 같은 전통 속에서 살아간다.

이제 나는, 그런 생각도 좀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몽고매리 여사가 앤의 첫 권을 마무리하는 여정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그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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