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어린이들 방학이 아직 절반 밖에 안 지났다. 하이고. 정신이 혼미하다. 아내는 2월에 지방 출장이 두 번 있고, 다음 달에는 해외 출장이 있다. 여자가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요즘 새삼 지켜보는 중이다. 흔히 유리 천장이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그 구간을 지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런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되었다. 이게 다 자본주의라서 그렇다고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그 시스템이 제법 복잡한 것 같다. 

저녁에 나가는 모임이 있고, 아침에 나가는 모임이 있다. 보통은 저녁 때 나가다가, 좀 높은 위치가 되면 아침에도 나간다. 한 번은 외국 인사를 아침 모임에 강사로 부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가 물어봤다. 너네는 이렇게 사냐? 응. 왜 이러구 사냐? 그러게. 나도 싫은 데 어쩔 수가 없네. 너 미국 와라, 이게 사람 사는 게 아니다. 내가 초청해줄께. 괜찮아. 나도 조금만 하고 말거야. 

애들 보면서 고정적으로 만나는 걸 다 없앴다. 없앴다기 보다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렇다. 감소소모라고 말한다면, 한국은 감정 소모가 아주 많은 스타일의 삶을 살아간다. 물론 외국에도 파티가 있기는 한데, 그건 아주 정형화되어서 특별히 형식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감정 소모라고 하지만, 사실 어른들하고 만나면서 감정을 소비하는 건 어린이들하고 지내는 것에 비하면 좀 덜 피곤한 것 같다. 어른들하고는 적당히 얘기하고, 적당히 숨겨도 별 일 없다. 어린이들은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미래의 삶에 영향을 준다. 참 웃기는 일이기는 한데, 그게 신경이 바짝 서기는 한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선물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만년필 선물을 한다. 이거 고르기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특히 인생 첫 만년필일 가능성이 높다. 너무 고급스럽지 않고, 너무 고풍스럽지 않지만 기술적 완성도도 높은. 그리고도 예쁜. 얼마 전에 고등학교 올라가는 조카에게 만년필을 선물했는데, 역시 고르기가 만만치가 않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막내 이모부가 외국 갔다 오면서 대한항공에서 주는 쉐퍼 만년필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 양반에게 만년필 선물을 두 번 받았다. 중학교 때에는 파카를 받은 적이 있다. 막내 이모는 폐암으로 오래 살지 못하셨다. 그리고 재혼을 하면서 보게 될 일이 별로 없지만, 그렇게 받은 두 자루의 만년필의 기억은 평생을 가게 되었다. 친가에서는 4년제 대학을 내가 처음 들어갔다. 아버지는 고졸, 어머니는 전문대 졸, 그나마 이 양반들이 집안에서는 나름 공부를 한 편인데, 공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만년필이 내 삶을 조금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어린이들 혹은 중고등학생들 만날 일이 있으면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다. 짧은 한 순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작은 우주에서는 아주 큰 사건이 될 수 있다. 감정 소모라는 말을 쓰면, 꼭 먹고 살기 위해서 만나는 것 보다도 더 어린 사람들을 만날 때의 소모량이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젠더 경제학 출간을 내년으로 미룬 이유 중의 하나가, 이건 인터뷰 작업이 좀 필요한데, 지금 같아서는 인터뷰는 개뿔.. 당장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못 만나고 있는데. 사실 인터뷰 작업을 안 하고 있는 건, 차 한 잔 마실 일정을 내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들이 겪게 된 어려움이나 고통을 듣고, 다시 그걸 구조화시켜서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역시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일인데, 사실 엄두가 안 난다. 

40대 여성 직장인의 정신질환에 대한 수치 같은 것을 좀 확인해보려고 하다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상담을 하는 비율이 꽤 된다. 그나마 병원에 가면 좀 낫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숨 크게 쉬고, 마음 크게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간만에 김광석 앨범을 듣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김민기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학교 앞에 재즈 오즈라고 하는 카페가 있었는데, 줄구장창 김민기 LP만 틀었다. 한 번은 수업 너무 들어가기 싫어서 땡땡이치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김민기 노래를 죽어라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 문득 그때가 생각이 났다. 대학교 2학년 때 생각해보면, 나도 참 멀리 왔다는 생각이 문득. 그때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전에는 골프 치고, 저녁에는 술 마시는 내 또래 친구들의 삶과는 나는 아주 먼 곳으로 온 것 같다. 젠더 경제학에서는 여성 경제인과 여성 금융인들에 대한 얘기가 한 파트 들어간다. 살다보니 내가 아는 여성들의 상당수가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직 그런 감정 소모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내년으로 밀게 되었다. 

내년에는 젠더 경제학과 청년 경제학, 그렇게 두 개로 가게 될 것 같다. 청년 얘기는 몇 년 전 어느 대학 학생상담소의 부탁으로 결국 학교 상담실 문을 두드린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눈물 나는 얘기들이 많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기존에 있던 시리즈에 약간의 수정을 했다.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다루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다루는 얘기들은 다들 어렵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대개는 자본주의 문제인데, 그 어두운 곳을 주로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더 행복하려고 하고, 더 편안하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더 명랑하려고 한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 힘든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편안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어려운 얘기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책으로 돈 버는 것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해하는 한 가지는, 할 얘기가 있어서 책을 쓰는 거지, 책을 쓰기 위해서 할 얘기를 찾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 나는 할 얘기가 없어지면 이제 책을 그만 쓸 것 같다. 아직은 못다한 얘기가 좀 남아서 이러고 있다. 

책 쓰는 법에 대한 에세이를 한 번 쓸려고 했었는데, 그건 없앴다. 지금쯤 되면 책을 어떻게 쓰는지 좀 알 것 같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책 쓰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쓴 것도 좀 봤고, 심지어는 동영상 강연도 좀 봤다. 나는 별로 공감은 안 갔다. 나는 저렇게는 못 할 것 같아.. 50권 가까이 썼는데, 책 쓰는 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약속해놓은 게 있어서, 그건 죽음 에세이로 바꿨다. 책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 먹어가는 것,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그런 건 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다. 

이번 정권이 가기 전에 이승만 책을 낼 생각이 아직도 있다. 진작에 하려고 그랬는데, 부산에서 2~3달 조사를 해야 한다. 딱 계획 짜고 있었는데, 바로 코로나 국면이었다. 애들 두고 움직이려면 조금은 더 커야 할 것 같고, 나의 재정상태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안정되어야 한다. 하필이면 부산을 중심으로 잡아서, 애로사항이 많다. 그래도 그런 스케일 있는 얘기들도 좀 해보고 싶기는 하다. 다시 한 번 장기 계획으로 밀어 놓는다. 

한동안 출간 스케쥴이라는 게 거의 없이 그냥그냥 애들하고 버티면서 살았는데, 이제 내년 일정까지는 어느 정도는 정리되는 것 같다. 정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들만 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학교도 그만뒀고, 강연도 안 하고, 방송도 안 한다. 애들 보면서 이런 것까지 하는 건 무리데쓰.. 남들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여력이 안 되어서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 보면 책 인세하고 생활비하고 대충 평균적으로는 딱 맞는 것 같다. 물론 평균이다. 안 맞는 해도 좀 있다. 스피커 살 여유까지는 없다. 20년 가까이 새 스피커나 앰프 없이, 그야말로 책 쓰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장비들로 버틴 게.. 그럴 여유까지는 없어서 그렇다. 환갑까지 몇 년, 이렇게 지내는 데에 아무 문제 없다. 그저 바란다면, 우리 집 어린이들 방학이 빨리 좀 지나갔으면, 그런 소소한 소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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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재 유감

잠시 생각을 2023. 1. 29. 21:26

김부겸 인터뷰를 보다가 잠시 그가 고문을 맡은 사의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 진보라고 불렀던 운동권 일부의 부패와 낮은 도덕감이 청년들이 말하는 ‘공정’ 논의의 격발제가 되었다. 그게 과연 개선되었을까? 정권은 날려먹었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 때 민주당의 중추를 형성했던 운동권 엘리트들이 얼마나 세상의 흐름과 먼 곳에 있나, 사의재라는 단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의재, 솔직히 나도 사의재 뜻이 뭔지 잘 몰랐다. 아주 예전에 그런 걸 읽은 기억은 있지만, 잊어버린지 오래인 단어다. 그냥 언뜻 떠오른 게, 연말이면 교수신문에서 나오는 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다. 10년 전에는 그런 게 나오면, 뭔가 정권에 대한 비판이라서 사람들이 좀 재밌게 생각한 것 같다. 요즘은 그게 무슨 뜻인지, 학생들은 별로 관심 없어 하는 것 같다. 관심 없는 정도가 아니라 재수 없어 한다. 시대가 변한 거다. 몇 년 전에 어떤 학생이 나한테 거기에 의견을 냈느냐고 물어봤다. 솔직히 매번 연말이면 연락이 오기는 하는데, 나는 그런 어려운 단어는 잘 몰라서 한 번도 의견을 낸 적은 없다. 그 얘기 그대로 했더니 “그러시냐”, 그렇게 넘어갔다. 등에 땀이 흘렀다. 만약 냈다고 했으면 “재수 없는 인사”로 그 학생의 인명 DB에 등록될 판이다. 

지금 20대~30대는 사자성어와 한문투에 대해서 “모른다”가 아니라 적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영어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관대한데, 한자어에 대해서는 아주 싫어한다. 나도 꼭 필요할 때 아니면 가급적 사자성어를 잘 안 쓰려고 한다. 그게 효율적이라도 워낙 젊은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나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 꼭 내가 너보다 많이 알아, 그렇게 일부러 보일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가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싫다고 하는데 일부러 그걸 쓸 필요는 없다. 

사의재라는 단어가 제목이 된 건 이중으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뜻이 아무리 좋아도 아는 사람 거의 없는 한자를 제목으로 쓰는 건, 40대 이하의 한국 대중들하고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정서적으로 싫다는데, 굳이 그런 걸 대중적 활동을 하면서 쓸 필요가 있나? 무슨무슨 어벤저스, 차라리 그랬다면 그냥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사의재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로 드러나게 된다. 한국에서 그걸 알아먹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모르면 배워”, 이런 강압감이 정서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를 왜 단체 이름으로 쓰나? 운동권 엘리트 티 내고 싶은 거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싶다. 

결국 사의재로 결정된 것도 문제지만, 그 과정이 아마도 더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부에 없었을 것 같다. 있었다면 그런 이름으로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너무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너무 높은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어서 그런 건지, 하여간 이제 대중과는 문화적으로 너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폐쇄적 공통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어도 그렇지만, 뜻은 더 나쁘다.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태도”, 듣기만 해도 재수 없다고 생각할 의미다. 정약용 선생은 이걸 자기가 떠난 후에 원래의 집주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자기가 그렇다는 게 아니다. 자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걸 자기 이름으로 딱 붙이면, 정말로 재수 없어진다. 다른 사람에게 칭하는 걸 자신에게 칭하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제목도 이상하지만, 뜻은 더 이상하다. 

도대체 이 시대의 사람들하고 대화할 생각이 있는 집단인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고상한 얘기를 하려는 집단인지, 제목만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지난 정권에서 이제는 나이 먹은 운동권 엘리트들이 부패했다고 많은 청년들이 느끼면서 정권이 날아간 것 아닌가? 상징의 세계에서 이 엘리트들이 정서적으로 그 패배에서 한 발도 걸어 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사의재’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생각이 났다. 

시대는 변했고, 또 변하고 있다. ‘사의재’ 같은 단체 제목을 쓰다가는 한 방에 훅 간다. 청년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 훅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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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때문에 난리다. 우리 집도 가스 요금이 10만 원 정도 더 나오는 것 같다. 전기 요금도 좀 늘어서, 소위 수도광열비가 늘어난 것은 맞다. 애들 있는 집이라서 그렇다고 난방을 줄이기도 어렵다. 몇 달 전에 둘째가 천식으로 입원을 해서,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 완전 망한다. 

국민의힘이 전 정권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지금 정권에서 그 부담을 안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제일 이상하기는 하다. 이 정도까지 대충 설명하고 넘어갈 줄은 몰랐다. 가스 요금을 덜 올려서 적자가 늘어난 것은 맞지만, 그게 전기랑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다. 해명은 좀 성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사실 이번 겨울에 도시가스와 관련해서 가장 큰 위기는 가격 문제가 아니라 물량 확보 자체였다. 러시아 전쟁 한참 위기로 고조되던 순간에는 가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겨울을 날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느냐, 그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야말로 국제적 입도선매, 미리 가스 안 사뒀다고 완전 줄경을 칠 판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난방비 어떻게 할 거냐가 먼저는 아니고, 그나마 가스라도 제대로 나오는 게 잘 한 거다, 그게 1차적인 논평이 되는 게 맞을 것 같다. 꼭 전쟁 아니더라도 가스는 늘 수급이 문제였다. 영국을 비롯해서 유럽에서는 겨울에 가스 공급이 중단된 전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슈퍼에서 그냥 사오면 되는 물건과 달리 국가 계약이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는 가스 같은 천연 자원은 없으면 그냥 없는 거다. 비싼 건 다음 문제다. 

이번 겨울은 가스 물량 확보가 1차 관건인 경우라서, 공급 중단이나 순환 공급 같은 거 없이 가스 난방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잘 했다고 하는 게 맞지 않겠나 싶다. 사실 가을에는 애들 때문에 전기 난로를 좀 사야하나,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보일러가 워낙 잘 돌아서 우리 집에는 이제는 전기 난로 등 보조 열기구가 없다. 전에 세검정에 살 때에는 난방이 부실해서 프로판 난로가 두 개나 있었다. 

가을에 전기 난로를 알아보니까 다른 요금이 올라간 것에 비해서 전기요금이 안 올라가서 중고 전기 난로가 완전 인기였다. 사면 뭘 사야하나, 몇 개나 사야 하나, 그런 고민을 했었다. 대충 올겨울 나는 데 부족하지 않은 가스 물량 확보가 되었다고 해서, 전기 난로를 안 샀다. 사실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비상용으로 보조 난방을 갖춰두는 게 맞기는 하는데, 둘 데도 마땅치 않고, 결국 안 샀다. 

가스요금이 폭등이라서 문제는 문제인데, 추세적으로 난방비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에 대한 에너지 바우처를 조금 더 올리는 게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15만 원 정도 하다가 18만 원 정도로 올린 걸로 알고 있다. 물론 단기 대책이다. 한시적으로 이걸 확 높이는 정도는 합의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장기적으로는 흔히 에너지 리모델링이라고 하는 주택 단열사업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 길게 보면 지금 대책으로 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요소가 여러 가지 있다. 아파트들은 베란다 확장하면서 단열이 아주 어려워졌다. 여기에 중문을 달면 난방과 냉방에 모두 도움이 된다. 미국의 2층짜리 단독 주택에 중문이 아주 많아진 것은 거기도 광열비 부담이 되니까 리모델링을 한 번씩 한 거다. 당연한 얘기지만, 단열이 좋아지면 난방 효율도 좋아진다. 

좀 더 어려운 것은 저소득층 주거지 등 건물 자체를 리모델링하는 것인데, 여기는 애로사항이 아주 많다. 하자고 하면 못할 것은 없는데, 건교부랑 산업부 그리고 복지부로 업무가 나뉘어서 어려운 문제를 풀기가 좀 어렵다. 에너지 리모델링에 대한 인허가 자체가 아주 어렵고, 오래된 건물은 도면 자체가 없다. 그렇다고 못할 건 아닌데, 인허가가 너무 힘들어서 민간은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한다. 특별법 같은 것을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에너지 리모델링을 하기는 해야 한다. 이게 어려우니까 건물을 구축과 신축으로 나누어서, 신축에 대해서만 접근하고 있는 게 현재 실정이다. 

횡재세 애기는 좀 뜬굼 없다. 물론 나도 횡재세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광열비용에 대한 구조적 해법이 되지는 않는다. 그건 사회 정의 등 좀 다른 차원의 논의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걸 목적세로 바꾸어서 그걸로 저소득층 에너지 비용에 환원하겠다, 한국의 조세 메커니즘메카니 실현하기 아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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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왔습니다. 저의 올해 소망은 아주 소박합니다. 아내가 올해는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게 올해 소망의 전부입니다. 작년에는 아내가 응급실에 갔었는데, 올해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정도입니다. 큰 애 임신 중에도 천식으로 아내는 며칠 입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애들 아픈 거야, 해마다 아프니까 올해도 그 정도 선에서 아플 거 같구요. 

저는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별 다른 목표는 없습니다. 그냥 정해진 일들을 정해진 속도대로, 물론 그 속도로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렇게 그냥 하는 평범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욕심 같은 거 털어낸 것도 벌써 몇 년 되는 것 같습니다.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올해도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많이 가졌는데, 더 가지고 싶어서 발버둥치지 않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올해도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는 문명에 대한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든 문명을 좀 돌아보는 한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차분한 설날을 맞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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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간 일정을 뒤늦게 잡았다. 뒤로 미룰 걸 좀 미루고, 순서도 재배치했다. 

1. 제일 먼저 나올 책은 출산율과 노동 시장의 변화에 대한 책이다. 저출산과 저출생을 구분한다면, 저출생에 관한 얘기일 것이다. <솔로 계급의 경제학>에서 연결되는 책이다. 올해 나올 책 중에서는 가장 이론이 많이 나오고, 가장 혁신적인 책이다. 제목이 마땅치가 않다. 제일 땡기는 제목은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 이건데, 좀 길다. 

2. 고심 끝에 도서관 경제학을 상반기에 먼저 하고, 젠더 경제학은 다시 내년으로 넘겼다. 개인 일정도 좀 그렇고, 저출산 책에서 연결되는 내용들이 좀 있어서, 아예 거리를 확 떼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도서관 책도 몇 년째 밀리고 밀렸는데, 오세훈을 비롯한 보수 아저씨들이 도서관 닫느라고 한참 열내고 있을 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원래는 ‘책에 대한 책’ 정도의 가제로 책에 대한 가벼운 글들을 모아서 에세이집을 하나 할 생각이 있었다. 그걸 없애고, 책에 대한 얘기들도 다 도서관 책에 몰아넣기로 했다. 중간에 여유가 되면 펜실베니아에 갔다 올 생각은 있는데, 그럴 형편이 될지는 모르겠다. 맨 처음 구상을 할 때, 책 앞머리는 펜실베니아에서 써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내 형편이 쪼그라 붙어서,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3. 이것저것 다 내년으로 넘기고 여름부터는 죽음과 늙어감에 대한 얘기들을 모아서 간만에 에세이 한 권 내기로 하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제 한참 치매가 진행 중인 어머니 모시고 살아가는 내 애기이기도 하지만, 늙어가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내 생각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원래는 작년에 해보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귀찮아서 그냥 시간만 끌고 있던 주제다. 정태인 선배의 죽음이 꽤 영향을 미쳤다. “형도 이제 환갑이네요.” 쓰러지기 직전에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다. 그때는 나나 정태인 선배나, 그렇게 인생이 덧없이 지나갈 줄 몰랐을 때였다. 

장례식에 우리 집 어린이들 다 데리고 갔었다. 우리 집 어린이들은 집에서 장례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례식이 아주 익숙했다. 삶이란 그렇게 덧없는 것. 이재영 죽을 때는 벌써 10년 전이다. 안 되었다는 슬픔만 많았지, 내 일일 것이라는 생각은 많이 안 들었다. 환갑 넘자마자 정태인 선배 쓰러지면서, 나도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살았는데, 나라고 무슨 고래 힘줄처럼 강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일부러 한 건 아닌데, 살다보니까 자살에 대한 연구도 꽤 하게 되었고, 우울증 등 정신건강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자문을 벌써 3년째 하는 중이다. 얼마 전에 자살특위 위원장을 해달라고 해서, 나에게는 과분하다고 물린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르다고 하지만, 안락사에 대한 얘기도 좀 하고 싶다. 죽을 날 기다리면서 그냥 앓다고 죽는 건 좀 그렇다. 지금도 연명치료에 대한 서약이 제도로 있다. 이거 신청하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안 받아도 된다.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어렵지만, 나에 대한 얘기들은 할 수 있고, 이제 나도 그런 나이가 된 것 같다. 

좌파 에세이 쓰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많이 털어낸 것 같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런 얘기 없이 좀 어정쩡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좌파 에세이에서 그런 사회적 짐을 많이 덜었다. 이제는 좀 편안하게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얘기인가, 아닌가, 이제 그런 생각만 하기로 했다. 내가 편안해야 읽는 사람도 편안할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편안해야 더 어려운 얘기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박찬일의 노포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게 많다. 잠깐 성공할 수 있고, 잠시 큰 돈을 벌 수 있지만, 오래 가서 50년 넘게 망하지 않은 가게는 그렇게 화려한 데는 아니다. 박찬일의 예전 책도 좀 봤는데, 확실히 노포 얘기를 다루면서 박찬일의 스타일도 좀 변했다. 

내가 다루는 애기는 쉬운 얘기도 아니고, 그렇게 인기 있을 얘기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얘기를 편안하게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아니다. 트렌드와 한 발 떨어져서 가는 게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별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변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박찬일 책을 읽기 이전에 나는 그런 생각을 잘 못했던 것 같다. 올해 쓸 책들은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좀 편안해질 수 있는 데 신경을 좀 쓰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 잘 못 했다. 나도 좀 배운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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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다시보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대사는.. 

왜선 마지막 돌격 전에 기다리지 못하던 원균이 "저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적들이 코 앞인데. 부장은 뭐하는가, 어서 포를 쏴라!", 이렇게 말한다. 원균으로 인하여 학익진이 무너질 상황이다. 

이때 옆에 있던 부장이 명대사를 말한다. 

"그게, 포탄이 떨어져서." 

그후로도 이순신은 한참 더 지나서, 왜선이 100보를 넘고, 50보를 넘어 월선거리가 된 후에 선회 명령을 내리고. 다시 한참이 더 지나서 코앞까지 온 다음에야 발포 명령을 내린다. 그게 한산대첩이다. 

역시 영화 <한산> 최후의 명대사는 원균 옆에 있던 부장이 했던 "그게, 포탄이 떨어져서", 그렇게 엉깠던 거 아닌가 싶다. 

만약 어느 이름 모를 부장님이 우리 시대를 구한다면, 그가 "그게, 포탄이 떨어져서"라고 말하는 순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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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다 봤다. 

설 전 마지막 일요일이라서, 어머님 모시고 아버지 봉안당에 갔다왔다. 바로 밑의 동생도 한 번은 갔다와야 할 것 같아서, 카니발 빌렸다. 가끔 카니발 렌트하는 일이 생기는데, 매번 버튼이 조금씩 바뀌고, 기능이 추가된다. 가끔 운전하는 처지에서는 조금 피곤함이 느껴지는. 모닝 타다가 카니발 타니까, 차가 왜 이리 잘 나가는지. 모닝 운전하면 풀 악셀을 종종 밟고, 언덕에서도 엑셀 꾹꾹 밟는 습관이 생긴다. 차가 작으면 덜 힘들 것 같지만, 다리는 더 힘들다. 그 습관으로 카니발 운전했더니, 된장, 차가 날라다닌다. 카니발이 이렇게 순발력 좋고 잘 나가던 차였나? 이런, 이건 휘발유 차였다.. 

아침부터 운전만 하고 들어왔지만, 박찬일 책의 잔상이 남아서 마지 읽었다. 어딘지 모르게, 움베르트 에코의 문제 느낌이 들었다. 재밌는 에피소드들이기는 한데, 시칠리 얘기에 문제가 묻어간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초창기 시절의 박찬일은 글을 이렇게 썼구나, 그런 느낌. 

시칠리는 그야말로 영화 <대부>에서나 봤지, 자세하게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는 밀라노에만 1주일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계속 회의에만 붙잡혀 있어서, 밀라노라고 해도 숙소와 회의장 말고는 가본 데가 거의 없다. 밥도 거의 회의장 근처에서 대충대충 먹었고. 

글은 재밌는데, 너무 재밌게 쓰려고 했다는 느낌이 좀 들었다. 좋은 소재를 가지고 있는 기자가 쓴 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스타일의 글들은 매주 신문을 펴면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3일 사이에 연거푸 박찬일 책 세 권을 읽고나서 보니 <내가 노포에서 배운 것들>은 매우 정직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초창기에 쓰던 글 스타일과 노포 책 사이에는 꽤 큰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아마 시칠리에서 처음 출발하던 시절의 얘기를 회상하는 박찬일과 10년에 걸친 노포 취재를 마친 박찬일 사이에도 좀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단은 박찬일 독서는 이걸로 잠시 마무리를 하고, 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 며칠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잠시 행복했다. 나도 데뷔하던 시절의 생각이 나기도 하고, 살아온 순간들에 대한 반성, 아니 꽤 많은 반성을 했다. 

세 권을 읽고 짧은 느낌을 적자면.. 

박찬일의 노포책 이후로 나의 삶도 바뀔 것 같다. 사실 모든 책이 삶을 바꾸기는 한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게 없다면, 평론가의 눈으로 독서를 하느라, 정말 중요한 얘기들은 놓친 셈이 된다. 독서가와 평론가는 다른 사람이다. 평을 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 아니겠나 싶다. 

책으로 내가 크게 바뀐 걸 곰곰이 되짚어보니까, 중학교 때 세익스피어 책, 대학원 때 허쉬만 책 그리고 50대 중반이 되어서 읽은 박찬일의 노포 책, 그런 것 같다. 허쉬만은 학위 받고 정말 허쉬만이 있는 연구소로 포닥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나이 많아서 이미 새로운 사람은 안 받는다고 하고, 그 다음으로 추천을 받았는데.. 그 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미국에 포닥가려고 했던 게 아니라 허쉬만에게서 뭔가 더 배우고 싶은 거라서. 그냥 짐 싸서 한국에 돌아왔다. 

박찬일은.. 

내가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최초의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 인생도 조금은 바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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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다 읽었다. 

책을 재밌게 읽은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읽는 책들은 더럽게 재미 없는 책들이다. 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가 그나마 좀 재밌게 읽은 책인데, 뒷부분에 짧게 쓴 자신의 자서전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아, 크루그먼이 이렇게 살았구나, 그래서 좀 재미가 있었던. 

내가 보는 책들은 전화번호부만한 게 많고, 재미 대가리 없다. 어렵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읽는다. 

박찬일의 책은, 그냥 읽은 거다. 그냥 읽으면 재밌을 수도 있는데, 나도 읽어야 할 책들이 워낙 밀려 있어서 그냥 읽기가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책을 즐겨서 읽는 스타일은 아니다. 솔직히 책 안 보고 싶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꾹 참고 읽는 편이다. 정말 더럽게 책 안 읽고 싶다. 다시 태어나면 책 안 봐도 되는 직업을 가졌으면 한다. 

박찬일의 책은 나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의 책이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맛있는 거 따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맛있다고 하는 집, 안 간다. 욕심이 생겨나는 게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절대로 줄 서는 집도 안 가고, 소문난 맛집은 일부러 피해서 간다. 

내가 뭔가 맛있게 하려는 건, 일단은 그렇게 안 하면 우리 집 어린이들이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맛에 대한 책인데, 사실 가본 데가 별로 없다. 줄 서는 냉면집 절대 안 가고, 냉면 먹고 싶으면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운 데 간다. 청진옥은 누가 가자고 하면 가기는 가는데, 사실 내 입맛에는 좀 별로다. 좀 더 매워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미슐랭 별 달린 집은 거의 안 간다. 너무 비싸다. 예약하기도 쉽지 않다. 가끔씩 그런 데서 약속이 생겨서 가기는 하는데, 너무 비싼 거 얻어먹은 거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다보니까 미슐랭 나온 집이라고 tv에서 얘기하면, 일단 채널부터 돌리고 본다. 

비슷한 이유로, 포도주도 일부러 비싼 거 안 마신다. 제일 좋아하던 건 생떼밀리옹인데, 이건 내가 먹기에는 너무 비싸고. 예전에 선물할 때 주로 썼다. 선물만 하고, 정작 나는 20년째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코뜨뒤론느, 이게 내 입맛에는 그런대로 맛있는데, 이것도 한국에서는 생각보다 비싸다. 그리고 거의 없다. 그렇지만 너무 맛없는 포도주는 피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먹을 수 있는 포도주가 몇 종류 없다. 

어지간한 사람들이 평생 마실 포도주보다 더 많은 양을 20대에 이미 다 마셔버렸다. 그냥 적당한 가격에 왠만한 맛이면 그냥 마신다. 자고 일어나면 다 똑같다.. 비싸든 안 비싸든, 머리 아픈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일의 책을 한 방에 다 읽은 건, 재밌어서 그렇다. 원래는 앞에 조금만 읽고, 하던 일 마저 할려고 그랬는데, 한 방에 다 읽어버렸다. 몇 권 더 사서 읽으려다가, 워워.. 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게 책을 많이 읽으면, 책 쓴 사람의 성격이나 그런 게 어지간해서는 조금은 보인다. 거기에 나온 정보가 필요해서 읽는 거지, 인격적으로는 영 아니다 싶은 사람들이 많다. 유명 저자가 되면, 움베르트 에코 정도 되는 사람 아니면 재수가 없어지나보다. 재수 없는데, 그냥 참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 사람의 정보나 지식이 나에게는 꼭 필요하니까. 

책을 읽으면서 저자를 존경하게 되는 건 매우 드문 경험이다. 그 사람의 지식은 필요해도,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그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쓴 사람을 직접 알면.. 아이고, 존경하기 쉽지 않다. 

음식 책도 사실 꽤 많이 읽었다. 읽다가 집어던진 적이 있다. 뭐, 이런 양아치가 다 있나.. (딱 그 사람이 스캔들이 생겼을 때, 안타깝다는 생각은 했다.) 

박찬일의 노포 얘기를 보면서, 꼭 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돼지국밥 별로 안 좋아한다. 원래도 안 좋아했는데, 몇 달 동안 맛없는 돼지국밥을 매주 먹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아주 학을 떼었다. 내 인생에 돼지국밥은 다시는 없는 걸로.. 

돼지국밥 얘기가 맨 앞에 나왔다. 글이 재미가 없었으면,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추어탕도 좀 그랬다. 추어탕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박찬일이 맛있다고 하는 스타일의 추어탕에는 구미가 전혀 안 갔다. 

입맛이야 뭐 사람마다 다 다른 거니까. 

대구탕이라고 해서 예전에 한참 웃었던 대구의 육계장은 좀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대구에서 그 대구탕을 맛있게 먹은 적은 없고, 울산의 현대자동차 인근에서 쇠고기 국밥인가, 그런 이름의 국밥을 아주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굵은 고기가 뭉텅이로 나오는, 책에 나오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냉면집에 잘 안 가는 건, 그렇게 유명한 냉면집에 가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별로 없는 데다다.. 누군가 같이 가면, 어휴 지겨워, 뭔 설명이 그렇게 긴지. 맛 별로라니까.. 그래도 여름에 냉면집에 가는 건, 콩국수집이 잘 없어서 그렇다. 그리고 콩국수는 짜장면 맛있는 집에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면이 유명 콩국수집하고 급이 다르다. 콩국은 콩국수 전문점이 잘 낼지 모르지만, 면은 역시 짜장면집이.. 내 입맛은 그렇다. 우동도 냉우동을 최고로 친다. 얼음에 담그면 우동 면발이 좀 약해도, 엄청 맛있어진다. 라면도 마찬가지다. 냉라면, 신주꾸에서 먹었던 그 맛이 아직도 입에 선한.. 

책이 거의 끝나갈 때쯤 장충동 족발집 얘기가 나온다. 거긴 맛있지. 시간강사 시절, 동국대에서 여러 학기 수업을 했었다. 틈틈이 먹었다. 

나랑 입맛이랑 취향이랑 별로 안 맞아도 책을 빨려들듯이 재밌게 읽은 건, 그가 하는 얘기가 맞기 때문이다. 문화의 일종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도 일종의 민중사라는 것. 

더 중요한 건, 참 욕심 없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런 게 글 속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서.. 이런 사람들이 좀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글은 꾸밈없고 단백한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유 없이 멋부리는 글을 아주 싫어한다. 그런 면에서 박찬일은 거의 교과서다. 멋부리는 문체는 한 때 '보그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그에서 많이 썼고, 패션지에 아주 많다. 그래도 그건 아름다움을 다루는 일이라서 그런가보다 한다. 

박찬일의 문체는 '노포'를 닮았다. 그래서 그의 글만 보고 있어도 왠지 그 가게 어느 한 쪽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포는 그렇게 화려한 곳이 아니다. 나무꾼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에 식당이 생기고, 그렇게 생겨난 곳들. 거기에 삶이 있는 거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진국'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 

박찬일의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나 자신을 좀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겉멋 같은 게 아직 빠지지 않은 게 있나, 의미 없는 허세가 남은 게 있을까. 

박찬일의 책은 심신수양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잔뜩 오염된 삶을 살면서, 왠지 불안해하고, 주변에서 '멘토' 같은 거 찾는. 노포들이 성장하고 살아남는 길은 그 진국 같은 것이다. 귀찮은 거 하고, 싫어도 버티고, 더 편한 거 알아도 피하고.. 물론 어렵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게 진국 아닌가 싶다. 

글은 박찬일처럼 써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었다. 조만간 그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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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책에 대한 단상 2023. 1. 10. 10:08

작업실을 따로 안 만든 제일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책 인세라는 게 뻔해서, 구조적으로 옆으로 새는 돈들을 줄여야 장기적으로 편안해진다. 나라고 사고 싶은 게 없지는 않은데, 아직 그럴 형편이 아니다. 20년 넘은 앰프와 스피커를 아직도 껴안고 있는 건, 그게 더 좋아서가 아니라 그럴 형편이 아니라서 그렇다. 비싼 만년필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럴 때면 그냥 새 잉크를 사서 기분 전환을 하고 만다. 잉크가 아무리 비싸봐야. 

이제 작업실을 만들기를 포기한 것은 애들 봐야하는 상황에서, 작업실이나 이런 거 생각할 처지가 아니라서 그렇다. 아무리 집 가까운 데 구한다고 하더라도, 왔다갔다, 번거롭다. 둘째는 버스는 타는데, 차 많이 다니는 길을 가기에는 아직은 좀 무리다. 

책 마무리할 때면 나도 집중해서 긴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다. 전에는 카페에 가서 써보기도 하고, 지방에 며칠 가서 마무리하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책이 공교롭게도 다 망했다. 꼭 그래서 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망하는 게 확실한 길을 일부러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려서 엄청난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자료를 두기 위해서 방대한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책도 많이 버렸고, 이제는 수없이 책을 사고, 또 그만큼 뭉텅이로 버리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현실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여전히 매주 몇권씩은 책을 산다. 그나마 책이 있으면 상당히 해피한 경우다. 

아침에 둘째는 학교에서 하는 주산 교실에 갔다. 가는 건 아내가 출근하면서 데리고 갔고, 10시 반에 데리고 와야 한다. 시간이 잠시 나는데, 나도 사람이라.. 짧게 짧게 남는 시간에 집중이 쉽지 않다. 목요일에는 둘째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 그 와중에 회의 나와달라는 넘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메일에 자동으로 "집필 중"이라고 답 메일이 가도록 하고, 전화 치운 사람들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 집 어린이들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고. 

어린이들 방학 때에는 늘 이렇게 고롭다. 이게 작업실을 구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아니, 삶에는 해결이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아직 오지 않은 다음 문제를 기다리면서 잠시 마음의 평온을 누리는 것일 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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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하요, 제목이 길기도 하다, 하여간 이런 영화 봤다. 순전히 얼마 전부터 집중적으로 듣던 엔리오 모리코네 음악 때문에 봤다. 어렸을 때 tv에서 죽어라고 해주던 거라서 여기저기 끊어서 보기는 했는데, 전편을 다 본 건 처음이다. 

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엑소시스트 2>를 몇 년 전에 봤다. 음악이 기똥찼다. ‘리건의 테마’만으로도 충분히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메뚜기라는 모티브를 사실 이 영화에서 얻었다. 결국 쓸 데게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것도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다. 사실 엑소시스트는 3편을 먼저 봤는데, 너무너무 재밌었다. 20대에 3편을 보고, 30대에 1편을 보고, 50대에 2편을 보았다. <엑소시스트> 3편은 그렇게 내 인생 영화가 되었다. 파리에서 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 이것도 제목 더럽게 기네 – 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사이의 공통점은 사소하게, 음악이 둘 다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점.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대표적인 마초 영화. 하나는 멋지게 총 쏘고 뒤돌아서 사라지는 마초, 다른 하나는 그 마초들이 삶 뒤의 어둡고 쓸쓸하고 혹은 추접한 면을 드러낸. 

음악이 너무 궁금해서 결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봤는데, ‘쓸 데 없이 고스펙’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아니 여자가 기차 역에서 내려 누군가를 찾는 이 장면에서 이 음악이 쓰였단 말이야? 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사람들이 얕잡아 봤지만, 그 마카로니에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있었다. <역마차>에서 <하이눈>까지, 정통 서부영화에서 사용된 음악들을 전부 오징어 만들어버렸던. 50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서부영화는 이제 사라지고 아무도 기억 못하는 영화가 되었지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그것들보다 더 길게 남은. 요요마가 엔니오 모리코네 시리즈 앨범을 냈다. 어지간한 소프라노나 테너들이 소프트 버전 앨범 내면 엔니오 모리코네 노래 한두 개는 꼭 집어넣게 된다. 

배역이 엄청나게 화려하다. 헨리 폰다. 사실 헨리 폰다 악역으로 나온 건 처음 봤다. 나이 먹은 헨리 폰다의 연기 엄청 좋아했다. 그리고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찰스 브론슨이 나온다. 어린 시절 화장품 광고로만 봤지, 정작 영화에서 본 건 몇 개 없다. 

마초 영화이기는 한데, 처음 보는 여배우를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프로필을 찾아보니까 튀니지 출신이다. 영화에서는 어마무시하게 아우라 넘친다. 결국 한 여인과 그녀 주변을 맴도는 네 남자의 얘기다. 결혼식날 살해당한 남편까지. 

어리버리하게 돈이 많다는 남자한테 속다시피해서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이 죽고 나서, ‘벌떡’, 그야말로 대지에서 주인이 솟아오르듯이 땅의 주인으로 홀로 서는 얘기다. 모티브로만 따지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다. 다만 여성의 출신 계급에서 차이가 날 뿐. 

악인이 둘 나오는데, 둘 다 여성을 중심으로 그 잔인하고 강한 내면 속에 담긴 ‘고달픔’ 같은 것을 보여주는 데, 이게 영화의 잔재미기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래서 마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초들의 마음 속의 아픔과 갈등, 그래 이건 사나이들의 얘기지! 

결국 나쁜 넘들은 다 죽고, 밑도 끝도 없이 강하고 지혜로운 남자로 설정된 찰스 브론슨은 떠난다. 그리고 새로 생긴 기차역 일대에서 타운을 이끌어나갈 여주인으로 남을 여성이 홀로 서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이다. 

여기에 미국 자본주의의 초기 모습이다, 그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풍푸 파이터>에도 처음 미국이 철도 만들던 시절의 얘기가 배경인데, 거기에 있던 노동자들은 중국인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미국인이라는 정도가 차이. 

모티브만 놓고 보면 영화 <실미도>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거기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에 얼핏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막장 마초들이 살아가는 동기처럼 설정되어 있다. 애인이자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여인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을 연결시키는 것은 커피. 중간에 커피 한 잔 끓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자가 불 피우다 실패하고, 다시 남자가 세심하게 불쏘시개를 쌓아서 한 번에 불 피우는 장면 등 몇 분을 커피 끓이는 데에 할애한다. 중간에 여자가 원두를 꺼내는 대신 식칼을 꺼내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장면.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커피 마시면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영화 그것도 서부 영화에서 이렇게 길게 커피 하나로 길게 가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탈리나오! 마카로니가 아니라 이탈리안 커피라고 하는 게 더 맞았을 것 같은. 

영화는 사라지고 커피만 남은 대표적인 영화가 <블랙 호크 다운>이 아닐까 싶다. 전투 중의 짧은 휴식에 원두 갈고 커피 내리는 장면이 아주 길게 그것도 몇 번이나 나온다. ‘커피병’이라는 새로운 군 보직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마초 영화, 커피 영화 외에도 하모니카가 자주 등장하는, 하모니카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 아니었다면 확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선율 자체가 너무 고급졌다. 

21세기, 이런 마초 영화는 다시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부동산 영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알박기’ 영화이기도 하다. 사막 지대에서 증기 기관차가 운행하기에 필요한 물이 있는 곳을 미리 점 찍어 역사 부지 일대의 땅을 샀던 어느 알박기 명인의 비극 그리고 그 땅을 둘러싼 난투극, 얘기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1번가의 기적>에서는 임창정 같은 깡패를 보내 도장 찍으라고 협박하고 괴롭히고 그러는데. 여기는 서부극이라 그냥 총 쏴서 죽이고 만다. 

영화가 예쁘면 그림엽서 보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유사한 느낌인데, 이건 LP판 듣는 느낌이다. 사나이들의 짧은 대사 그리고 귀를 뚫는듯한 짧은 총소리 이어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다음 트랙 노래. 음악 때문에 주기적으로 보고 또 보는 영화는 <매리 포핀스> 정도였는데, 아마 이것도 나이 먹으면서 해마다 한두 번은 계속 볼 것 같다. 영화 음악을 제일 재밌게 드는 방법은 결국 원래 화면과 같이 보는 거 아닌가 싶다. 

음악은 화면에 잘 녹아드는 편은 아니다. 영화 품질에 비하면 몇 배는 될 듯한 고품질의 음악과 가벼운 오케스트라. 다시 50년이 지나면 영화는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음악은 그 뒤에도 남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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