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방송 후기 4. 과잉의료편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유일하게 내 습관 중에서 모범생 비슷해 보이는 것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방송과 관련된 책이 있다면, 어지간하면 읽고 오려고 한다. 책을 읽지 않고 저자와 만나는 것은, 더더군다나 좀 미안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내가 읽는 책이 다 재밌는 것은 아니다. 재미없어도 읽고, 읽기 싫어도 읽는다. 그렇지만 얼마 전부터 고민이 생겼다. 정말 가슴 속에 깊이 남는 책이 별로 없다는 것, 아무래도 나의 감수성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그런 고민 중이다. 정말 깊은 감동이나 아니면 하기 어려운 경험을 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든다.  

 

현직의사 김현정의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그런 심드렁해진 내 마음 한 구석을 치고 가는, 확실한 무엇인가가 있는 책이다. 요즘 한국 책들은 너무 맵시가 좋다. 북 디자이너들이 전문적으로 붙어서 여러 가지를 만지고, 에디터들도 이래저래 손을 많이 본다. 그런 잘 빠진 책들만 보다가 이 책을 처음 잡은 순간, 어 뭐지? 이 학급문고 같은 고풍스러운 디자인은? 게다가 80년대 캔디풍의 일러스트는?

 

발행인, 발간인, 하여간 이런 게 전부 김현정으로 되어 있었다. 이 경우는 단 하나의 경우이다. 원고 출간이 어려워서 본인이 직접 출판사 등록을 하고 펴낸 경우. 그야말로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직 의사로서, 약간은 돌려가며 적어내려간 양심선언? 혹은 주류의 비주류화 선언?

 

그렇게 바짝 긴장을 하면서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잠정적으로 느낀 결론은, 이 책의 저자는 완전히 달통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잘 보호받아 아직도 소녀적 감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

 

이상의 오감도가 인용될 때까지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공산당 선언문 패로디가 툭툭 튀어나오고, 그야말로 장난 아니다. 설마 공산당 선언문 인용구절을 의학, 아니 의학 사회학 분야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이건 방송 끝나고 차 한 잔 마시면서 김학도씨가 내 카메라로 찍은 사진, 잘 나왔다.)

 

그리하여 출연자 대기실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제의 김현정 박사를 만났다. 오 마이 갓! 순도 100% 똘끼, 이거거던! 직관적으로 내가 느낀 건, 앞으로 의학 분야 조금 더 넘어가면 과학적 성찰 분야에 한 몫을 담당할 새로운 저자가 등장했다는 사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니, 기왕 출판사를 만들 때에는 더 출간을 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

 

하여간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저자를 만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김학도씨와 MC 임종윤. 뭐 심각한 얘기하는 실루엣이지만, 별로 그렇게 심각한 얘기는 아니다.)

 

김현정 박사는 글로 느꼈던 인상에 비해서 보다는 실제 방송에서는 미리 그어놓은 선이 많았다. , 조금 더 치고 나가도 될 듯싶은 데서 한 박자 늦추고, 적당히 세울 줄 아는 정도. 나쁘지는 않지만,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언젠가 저 입에서 방언이 터지는 날, 그야말로 신흥 의학 종교의 교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과잉의료 혹은 의료 쇼핑, 언젠가 한 번쯤은 의료계 내부에서도 자상의 목소리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평소에 했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때가 온 셈이다. 의학계 내부에서도 뜻을 같이 한다는 지지 입장이 적지 않게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어쨌든 한국도 조금씩 선진국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백화점 사진. 생방 때 사진을 찍기는 좀 곤란해서, 별 수가 없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보면 기가 막힌 명대사가 나온다.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포기한다.”

 

우린 하면 된다는 70년대의 필승 신화에 너무 오래 사로잡혀 있었고, 뭔가 투입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문득 뒤돌아보니, 세상 일이라는 것은, 특히 생명에 관한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작전과 같은 것이 아니고, 또 전술전략적 거시기 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 그걸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었다.

 

삶에는 포기도 좀 있어야 하고, 완벽은 일부러 피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성숙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은 100%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간만에 철학적 얘기를 같이 할 수 있어, 오늘은 방송 끝나고 나서는 길이 밝았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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