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 새로운 방송을 시작한다
참 해가 좋은 날이었다.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은 겨울, 그 긴 겨울 동안 아무 것도 안 했다. 아기 돌보고, 마당 고양이들 똥 치워주고, 캔 따면 하루가 간다. 선거 이후의 삶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정말로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내가 결심한 것은 딱 하나, 선거에 진 이후의 5년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그냥 사람들과 온 몸으로 견디기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외국으로 가서 또 폼 나는 뭔가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겠다는, 정말 소극적인 의미의 결심이다.
별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맞게 된 한가한 시간들,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했다. 물론 밀린 책 원고 일정 등, 해야 할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와 같이 있으면서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뒤로 미루었다. 삶이란 때때로 그렇게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정처 없이 떠서 그냥 버티기만 하는 시기도 있는 것이다.
봄 햇살이 방을 가득 채우고, 야옹구는 간만에 햇살을 받으며 뿌듯하게 뒹굴고 있다. 내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고양이 몇 마리에게는 행복을 만들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 행복이 완벽한 것이라는 자신도 없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 영원한 것, 그런 게 있겠는가?
케이지 안에서 지난 겨울을 버틴 마당 고양이들도 봄 햇살을 만끽한다. 꽃이 피려면 아직 좀 더 기다려야겠지만, 공기의 흐름은 이제 완연히 봄이다.
봄이 되면 뭔가 방송을 하나 하기 위해서 아는 사람들에게 좀 부탁을 했다. 지상파, 케이블, 종편 등 우여곡절 사연들이 그 와중에 좀 생겨났는데, 최종적으로 SBS 자회사에서 하는 CNBC라는, 그닥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아침 경제방송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외곽에 있는 작은 방송이기는 한데, 그 대신 사람들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기에는 나쁘지 않다. 김학도 등과 같이 진행을 하게 된다. 원래는 밤새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아침에는 아무 것도 안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는 너무 늦게까지 작업을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거, 그냥 하기로 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같이 진행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다. 그야말로 형님들 나이 먹고, 배 나오고, 머리 나가는 거 보다가 정작 내 나이를 먹고 있는 건 잊어버린 듯 싶다.
아들이 15세가 되면 나는 환갑이 된다. 그야말로 늙은 아빠! 아기 보기가 힘에 붙여서 얼마 전부터 다시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밤을 새도 지치는 법이 없던 그 시절은 이제 나에게 다시 오지 않으리라!
봄 햇살이 화사한데, 엄마 고양이가 몸단장을 시작했다. 이제 케이지에서는 꺼내주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길 잃고 중간에 사고 나면 어쩌나, 그런 갈등 속에 있다. 열어주는 대신에, 고양이 모래를 완전히 새 걸로 갈아주고, 케이지도 할 수 있는 한, 바닥 청소를 새로 해주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다정하거나 다감한 사람은 아니다. 투박하고, 무심하고, 별 생각 없는! 전형적인 그런 남성 인텔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약한 버릇을 다 가지고 20대를 보냈다. 그러나 고양이들 앞에서는 그런 게 안 통한다. 그냥 이런 게 사람 사는 거 아닌가 싶다.
겨울을 지나면서, ‘내가 꿈꾸는 나라’라는 시민단체의 공동대표가 되었다. 조국 선생이 물러나면서 나를 대신 밀어 넣은, 그야말로 땜빵 인생이다. 아기 키우면서 엄청나게 뭘 할 수는 없지만, 그냥 자리 지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그런 정도는 할 수 있을 듯싶다. 월요일 오후마다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조그마한 커피 모임이 하나 생겼는데, 내꿈나라와 연결시켜, 그들도 보람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좀 만들어보려고 한다. 방송 시작하면, 별 수 없이 묶여 지내야 하기 때문에, 넘길 건 넘기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정리할 건 정리하고, 그렇게 간단하게나마 매듭을 짓는 중이다. 원래는 봄이 되면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커피 모임을 전국적으로 좀 키워볼 생각도 있었지만, 그렇게 돌아다니기는 좀 어렵게 되었다.
대선 이후 3달간의 휴식 아닌 휴식을 정리하고, 이제 나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꼬질꼬질하지만, 비굴하게 살지는 않을 생각이다. 남루하지만, 추레하지는 않은, 빈티나지만 비겁하지는 않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나와 살아가는 고양이들은 전부 길고양이들이다. 야옹구는 생후 4개월 때 죽어가던 고양이가 나와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배운 것이, 가진 것 없어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삶이다. 그들을 돌보면서, 꼬질꼬질한 삶을 받아들일 용기가 비로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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