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고양이, 그가 만든 세상이 새로운 봄을 맞는다.)
봄이 온다. 드디어 아침 온도가 영상으로 넘어간다. 살면서 이렇게 봄을 살갑게 맞았던 적이 있었던가? 나에게 물어보게 된다. 아니, 처음인 것 같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나와 같이 살던 고양이들 다섯 마리가 하루 밤 사이에 고양이별로 떠나간 적이 있었다. 가을에 태어난 새끼 고양이 모두, 봄에 태어났던 생협 그리고 영화사에서 우리가 천만이라고 불렀던 녀석, 그들이 하루 사이에 떠나갔다.
그러나 고양이들의 죽음 때문에 겨울이 더 길었던 것은 아니다. 겨울이 한참 시작되던 때, 우리는 열심히 대선이라고 하는 사회적 행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졌다. 뭐가 먼저인지, 어쨌든 겨울은 너무도 길었고, 뭔가 판단을 해야하지만 판단할 수 없는 추위가 이어졌다. 우라질! 이 겨울은 걸핏하면 영하 15도롤 내려가면서, 왜 그렇게 춥던지.
마지막으로 바보 삼촌을 이사가는 집에서 잡은 게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데려온 녀석들이 케이지 안에서 얼어죽으면 얼마나 더 허망했겠는가. 정말로 목숨 걸고 고양이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제 봄이 되었다.
엄마 고양이가 편안한 모습으로 햇살을 맡고 있다.
내 마음에 잠시일지라도 평온이 온다.
(유독 몸이 약해 겨울을 날지 걱정되던 강북, 그래도 너무너무 밝게 이 겨울을 지냈다.)
강북과 한 배에서 태어난 생협이 마루 옆의 회양목 나무들 사이에서 발견되었을 때의 안타까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워낙 멀리에서 보니까 암컷인지 수컷인지 잘 알기가 어려운 녀석들, 나는 그의 사체를 두 손에 안고서야 그가 ‘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덩치나, 하는 행동이나, 그가 보여준 표정들이나, 나는 그를 ‘보이’로만 알고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170센치나 넘는 슈퍼모델급 고양이, 그러나 녀석은 첫 영하가 되던 날의 추위를 이기지 못했다.
그 아니 그녀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보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남겨주었다. 당연히 새로 이사갈 집에 같이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초겨울의 첫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나와 살던 녀석들이 너무 당당하게 겨울을 잘 이기는 것을 보다 보니, 개중에는 연약하거나 힘든 녀석들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도 못한 것 아닐까.
봄이 되어 기지개를 펴거나 따스한 봄햇살을 즐기는 고양이들을 보면서 먼저 떠나간 녀석의 생각이 너무너무 많이 든다. 별 일 없었으면 이 봄에 녀석도 이 세 마리 고양이 사이에 끼어서 너스레를 떨고 있었들 싶은.
삶, 그것은 언제나 아쉬움과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바보 삼촌, 날이 좋으니 긴장감을 내려놓고 정말로 편하게 쉰다.)
지난 겨울, 나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고, 아무런 중요한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날이 춥고, 몸이 힘들고, 형편이 어려울 때, 좋은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영하 15도, 깜깜한 밤에 고양이 화장실에서 핸펀으로 비추는 LED 불빛 아래에서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리가 있겠는가? 나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나나 고양이들이나 좀 더 편해지면, 그 때 판단을 해야할 듯 싶어서.
정의, 진실, 미학, 이렇게 길게 생각해봐야 할 개념들이 있다. 그러나 추울 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 봄이다. 지난 겨울을 같이 난 녀석들과 함께, 나도 슬슬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봄, 너무 추웠던 겨울을 지나고 나니, 봄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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