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주의자를 위한 변명
대선 이후, 최고의 명대사는 백낙청 선생 입에서 나왔다.
“다른 건 참겠는데, 약 올라서 못 참겠다.”
약이 오르다, 이 표현은 영어로도 잘 모르겠고, 불어로도 잘 모르겠다. 우리 말 고유의 표현인 것 같은데, 정말 힘들게 살아남은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낸 기막힌 표현 아닌가 싶다. 문득 생각해보니, 백낙청 선생, 이 양반이 원래는 문학도 아니었던가! 그래 문학과 과학의 세계는 길이 다르지만, 문학이 가지고 있는 이 맛갈난 표현은 과학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나는 대선에서 이기든 지든, 일본에 몇 달 가있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기존에 하던 히로시마 연구도 있고, 하여간 핑계를 대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대선 결과가 나온 순간, 꽤 많은 사람과 통화를 했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외국에 가겠다고 하거나, 당분간 칩거하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한 첫 번째 사회적 행위는 일본에 가기로 한 일정을 취소한 것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고통이라도 사람들과 같이 겪어야 할 것 같았다. 하여간 그렇게 고통스럽게 한 달 정도를 지냈다. 편했다면 거짓말이고, 지낼만했다고 해도 거짓말이다. 지내기 힘든 시간을 참고 보냈다.
매일매일 이제 다섯 달 지난 아기를 돌보면서 시간을 보냈고, 아직 이사온 집에 적응하지 못하는 야옹구를 위해서 시간을 보냈고, 겨우겨우 포획해서 마당에 설치한 케이지에 들어와 있는 세 마리 마당 고양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보냈다. 녀석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이 밤을 지내야 할 캣 아후스를 낮 시간에 뭉개놓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케이지 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살펴본다. 생협이라고 불렀던 고양이를 정말로 울면서 시체를 받아주었던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겨울, 요만큼만 잘 버티면 녀석들은 앞으로도 10년을 살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대선 이후 한 달, 나는 눈코 뜰새 없이 보냈다. 100일을 조금 지난 아들, 새로 이사온 집에 아직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네 마리 고양이, 녀석들과 씨름하면서 한 달이 그냥 갔다. 마당 고양이들은 엄청나게 먹어대고, 엄청나게 똥을 싸댄다. 고양이들 똥 치우다 보면 하루가 간다는 말 그대로, 나는 누군가를 돌보면서 한 달을 보냈다.
한 달이 지나고 나니, 아기 안아주느라고 간만에 팔에 근육이 다시 돌아오고, 고양이들 네 마리 돌보다 보니, 뉴스 따위에는 관심도 가지 않느라, 마음만은 편하게 되었다. 과연 이게 편한 건가, 나에게 물어보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 달 동안 내가 시간을 많이 쓴 덕분에, 새로 이사온 마당 고양이들까지, 다들 편안하다. 바보 삼촌은 이전 집에서 가지고 놀던 장갑을 다시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내 주변은 다들 편안하다. 고양이 네 마리와 아기, 아침에 눈 뜨면 하루 종일 돌보아야 하는 이 생명들과 함께, 나는 정신 없이 한 달을 보냈다.
경제학 최대의 애증의 인물이라면 바로 로빈슨 크루소우일 것이다. 전세계 모든 경제학자가 로빈슨 크루우소우의 선택과 함께 경제학을 배운다. 그게 최적이론이고 효용이론이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 있을 때, 그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선택을 내릴 것인가, 그게 19세기에 등장한 멩거, 제본스, 왈라스, 이 세 사람이 제각기 주장한 얘기들을 모아내기 위한 기본 모델이 되었다. 경제적 인간, 그는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우소우처럼 고독하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아니 대화할 수 없는, 그런 인간이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을 한계효용학파라고 부른다. 지금의 경제학 교과서는 이 사람들이 한 얘기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로빈슨 크루우소우처럼 생각하고 행위하도록, 그렇게 경제학은 가르친다. 그래서 근대 경제학이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자본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무인도를 소유하고, 그걸 관리하고 경영하는 사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스로 노동해야 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20세기의 인간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훈련 받는다.
어쨌든 이런 한 달간을 보내고 돌아서니, 갑자기 기회주의자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빡하고 때리고 지나갔다. 영어로는 opportunist, 문자 그대로 opportune이 생기면 그걸 잡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면서 내 자신을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부쩍 든다.
행복? 나는 행복하다, 최근 몇 달. 그 행복이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궁극의 것인가, 그렇게 물으면 복잡해지겠지만, 날 보면서 행복하게 웃는 아기의 얼굴을 하루 종일 보면서 행복하지 않다고 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나만 믿고 이전 집에서 이 집까지 따라온 세 마리 마당 고양이들이 새로운 집에 적응하는 걸 보면서, 가슴 뿌듯한 느낌이 들지 않기도 어렵지 않은가?
이렇게 질문을 해보자. 만약 내가 왜정 시대에 태어났다면, 정말로 목숨을 걸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그렇게 목숨을 내놓았을까, 아니면 좀 하는 척하고, 나름대로는 했다, 그러고 말았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도 왜정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결국은 지금처럼 아기 돌보고, 고양이 돌보고, “나는 할만큼 했다”, 그러지 않았을까, 그게 냉정한 나의 판단이다. 아마 독립군 군자금은 나름대로 댄다고 하기는 했을 것 같지만, 만주 벌판에 총을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그 현장까지는 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지금의 내 성정이라면.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기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그럴 근거가 별로 없다. 왜냐면 난 지금 행복하니까. 그리고 내 평생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시기를 지금 보내고 있으니까. 100일 막 지난 아기와 하루 종일 보내고,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키고, 병원에 데리고 가서 예방접종 맞추고… 그런 행복을 만끽할 기회를 가진 한국의 남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다시 둘째 아이 가질 계획을 아내와 세우고 있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많겠는가?
그러나 잠깐 돌아서면 마음이 허하다. 박근혜 시대, 어떻게 갈 것인가, 이 시대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런 고민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도 고양이들 똥통 비워줘야 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고양이들 똥가루 부숴진 것을 모래 사이로 퍼내고 있는 게, 요즘 내가 사는 삶이다.
기회주의자를 위한 변명, 그건 박근혜 진영으로 간 전향자들을 위한 단어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단어이다. 어쩌겠는가, 지금! 삶이란 왜 이렇게 각박한 것인가! 죽거나 비열하거나 기회주의자이거나, 그 외의 선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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