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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유전학

2013.02.10 01:25 | Posted by 우석훈 retired

사르트르와 유전학

 

아기를 옆에 놓고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는 생각은, 뭐 멋지기는 했는데, 불가능했다. 아기는 은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노트북으로 명렬하게 달려왔고, 노트북에 마우스 대신 달린 터치 패드에 손가락을 바로 올려놓았다. 뭐 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떻게 노는지는 바로 알아차렸다. 하긴, 컴 옆에서 같이 놀자고 자판 위로 올라서는 건 야옹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래서 아기와 함께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게 독서 외에는 별 게 없을 듯싶다. 포기했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계통 없이 읽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시간 보내는 방식으로 읽었다. 아무 것도 안 읽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것을 책에서 기대하는 게 없던 몇 년 간이라서, 혹시라도 뭐라도 건지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그렇게라도 읽는 게 낫기는 하지만, 진짜 성실한 독서는 아니었다. 내가 공부하던 시절에, 지금처럼 책을 읽지는 않았었다.

 

좀 고민을 하다가, 사르트르를 다시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 그렇다고 새삼스래 불어 원전을 다시 구해서 예전처럼 정색을 하고 책을 읽기는 이제 눈이 침침해서 어렵고, 그냥 한국에 나온 책들 중심으로 볼 생각이다. ‘존재와 무같은 것은 예전에 읽었지만, 워낙 건성건성 읽어서 별로 기억나는 것도 없고. 차분하게 다시 보면 이제는 재밌을 것 같다.

 

사르트르가, 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유 없이 좋았다. 결국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 선택의 배경에는 사르트르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동경했던 것 치고는 죽어라고 사르트르를 읽지는 않았다. 프로이드는 아주 열심히 읽었다. 니체는 전작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나름 재밌게 읽었다.

 

실존이라는 용어를 아직도 쓰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Etre etant 같은 개념을 비교하고,  neant은 뭐냐 혹은 neant absoulu는 뭘까, 헤겔에서 아도르노까지, 아주 재밌게 읽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거에 비하면, 정색을 하고 사르트르를 읽지는 않았다는 것을 40대 중반을 넘기면서 문득 느끼게 되었다.

 

철학 사조라는 게, 결국은 돌고 돌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한참 공부를 할 때, 사르트르는 벌써 한 물 갔고, 알뛰세도 한 물 가던 시절이었다. DEA라고 부르는, 우리 말로는 전기 박사라고 번역되는 그런 과정의 졸업 논문에서 알뛰세를 별 큰 생각 없이 한 줄 인용했다가, 논문 심사 때 아주 애먹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그렇게 크게 잘못 쓴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10년 전 유행을 맥락 없이 꺼낸 격이 되었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실존이라는 용어를 나는 지금까지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유는, 그야말로 없다.

 

, 얄팍하게 다음 소설 작업에서 실존이라는 용어를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쓸 생각이 있고, 겸사겸사 다시 한 번 읽어두자, 그런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런 생각을 내가 지금 다시 하게 된 게, 결국은 사르트르 영향 아니겠는가? 까뮈는,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와 함께 또 한 가지 생각을 한 게, 대학에서 청강 형식으로 다시 수업을 듣기로 한 것이다. 이번 학기부터 될지, 다음 학기부터 될지, 유전학 수업을 들으려고 한다. 나에게 사르트르나, 최근의 유전학 이론이나, 사실 마찬가지 의미를 갖는다. 어차피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잘 알려고 하는 것이다. , 특별히 나에게 당장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기 돌보면서 해볼 수 있는 작은 휴식? 아니면 일탈?

 

어쨌든 그냥 수업을 듣자고 하기는 좀 어려운 거라서, 다음 학기에는 대학원 수업을 하나 해주기로 했고, 이번 학기에는 학부생 특강 같은 걸 좀 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생물학과 근처에서 논다. 최고로 좋은 건, 이대 어린이집에 아기를 보낼 수 있게 되는 것. 어차피 한 살 이전에는 불가능하고.

 

어린이집에 아기 맡기고, 도서관에도 좀 가고, 청강도 좀 하고, 그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쮜리히 연방공과 대학에 갔을 때, 제일 놀랐던 게 학교 초입에 있는, 아주 정갈하게 생긴 작은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교직원이나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서면서 아기를 맡길 수 있게 되어있던 것. 통유리로 된 건물이었는데, 밖에서 봐도 정말 잘 만들어졌었다. 내가 보육에 대해서 처음 진지하게 고민했던 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야 이거!

 

요즘 같아서는 하루에 한 시간 컴을 만지기도 어렵다. 게다가 워낙 힘이 좋은 남자아이랑 하루종일 버티다 보면, 밤이 되기 전에 아내랑 나는 떡이 되어서, 도저히 아무 것도 못하겠다, 그런 상태가 된다.

 

목표를 버리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지내보려고 한다.

 

전복을 꿈꾸지 못하는 삶, 그렇게 노예처럼 내 의식을 가두고 싶지는 않다. 가장 강렬하게 전복을 바랬던 사람,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게 사르트르이다. 그리고 지금 전복 따위는 없다, 그런 얘기를 가장 강하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뒷배로 삼는 이론적 배경이 유전학이다. 묘하게, 그렇게 되었다.

 

Comment

  1. 홍길동 2013.02.10 01:44 신고

    사회는 발전하고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했는데 ...부의 분배는 더욱더 불균형해지고 ...
    부모의 소득수준과 학력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질까?
    답을 제가 구지 안드려도 아시죠? 노동이 탄압받고 그리고 패권의 영향에 강하게 노출된 이런 재벌자본국가에서 더군다나 부의 문제에 있어서 남북 분단이 여전히 민중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이런 현실에 청년들에게 경제왜곡진실을 알려주는것도 좋지만 다른국가로 제2의 삶을 살수있게 적극 권유하는것이 386 민주화 세대의 마지막 몫이라 생각합니다.
    진화관점에서 보자면...민주화세력은 사태조차 파악못한 댓가가 너무 큽니다.앞으로 그럴것이구요!!! 기회주의가 득세할것으로 저는 예상합니다. 이런나라에 청년에게 미래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386세대가 또이야기하는것은 자신들의 과거경험을 좌뇌에서 새롭게 각색해서 여러사람또 잡는거라 생각합니다.

    노무현이 꿈꿨던 나라....노무현이 원했던 사람사는 세상....
    그때 더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그분의 이해부족과 무지를 막아주었어야 했습니다.

  2. 미친 거 아니심?

    • 홍길동 2013.02.10 02:23 신고

      제가 정말 미쳤을까요?
      미쳐서 미국 쇠고기 수입고시 반대집회 나가고....
      문재인후보에게 투표 했을까요?
      요즘 방송분위기가 더 심각하게 어떤분위기로 가는지 안다면
      말이죠...

    • 헬렐레 2013.02.12 21:51 신고

      홍길동씨는 미쳤다기 보다는 조울증이 심한데
      울 상태에서 글을 쓴 거 같네요.
      좀 있으면 또 조 상태가 오겠죠.

  3. f1 2013.02.10 09:38 신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4. 2013.02.10 11:12

    비밀댓글입니다

  5. 시공 2013.02.11 05:55 신고

    저는 수학과 혹은 물리학과로 진학할 계획입니다. 과학경제학, 농업경제학.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6. 박은미 2013.02.14 20:45 신고

    우박사님 고맙습니다.
    인사가 늦었지만 요즘도 들으면서 고마운 맘 꼭 전하고 싶었어요.
    고양이 사료 가지고 다니다가 길냥이 만나면 주고 있어요.

  7. 2013.02.14 22:53

    비밀댓글입니다

  8. 우석훈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 커피와 시민 모임에서 '그림으로 어떻게 돈을 벌수 있을까요?'라고 질문드린..
    (장띠엘샤를 꼬시지 못하는 문근영 조차도 어려운...) 창연이에요.

    오늘 아침에,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블로그 들어와서 이 글을 보고 어찌나 반갑던지요!
    얼마전에 '책은 도끼다'라는 책에서 지중해성 철학/사고방식에 대해 흥미가 생겨
    올해는 그리스인 조르바와 이방인, 그리고 섬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좀더 기운이 생기면, 그때는 니체를 입문서부터 차근차근 읽어볼 생각이에요.

    그래서 '실존'이라는 단어에 이토록 반가움을 느낀 것이겠죠!
    매일매일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길 기대하며.
    흐흐 조만간 다시 놀러오겠습니다~

  9. .. 2013.03.22 01:56 신고

    재밌네요. 우석훈님. 저도 뭐 비슷비슷하게 우석훈씨랑 크게보면 좌파로 엮이는 분류겠지만 우석훈님이 주장하는 지역경제니 협동조합이니 사회적 경제니 하는것엔 별로 동의를 안하거든요. 아니 녹색주의 자체엔 좀 동의를 못합니다. 특히 앙드레 고즈식 공상적 분류에. 그렇다고 국유화론자자 칼폴라니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출발점이 비슷하다는건 재미있네요. 저같이 협동조합과 녹색주의를 부정하는 좌파들의 출발점이 장폴 샤르트르였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그냥 샤르트르가 좋았어요. 우박사님처럼 똑똑해서 그가 낸 모든 책을 이해하진 못하지만(대학때 읽은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네요) 제가 느낀 샤르트르에 대한 느낌은 레닌주의처럼 날 옥죄매거나 또는 녹색주의 혹은 알튀세르주의 신좌파처럼 날 멘붕시킬정도로 무책임하게 지들끼리만 엘리트주의거나 이런게 아닌듯해요.
    뭔가 정조가 달라요. 레닌주의와 녹색당류or 진보신당류(알튀세르주의) 신좌파와 다른....
    그게 참 매력이었죠.
    전복은 오히려 네오트로츠키주의자로서 알튀세르나 들뢰즈주의, 또는 녹색당류의 어설픈 공상적 녹색주의자들에게 어울리고 샤르트르에겐 어울리지않는 단어같아요. 샤르트르는 이런 쿨한 시대엔 좀 안어울리는 핫하고 서정적인 인간이거든요.

    전 이미 좌파도 아니고 한국사회의 진보도 믿지않습니다. 최근에 동물다큐에 빠지면서 진화경제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하플러그룹등 유전자 연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결국 저도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존재대신 인간은 어차피 포유류의 진화과정도상에 놓여있는 존재란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다움이 아니라 짐승다움이 인간을 우위에 서게 하는 것 같아요.
    정치판도 그렇잖아요. 누가 더 친노인가 증명하면 그 짐승스러운 면 때문에 대선후보도 되고 참 재밌잖아요.
    전 더이상 사회과학도 이념도 안믿습니다. 진화만 믿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