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
칼럼을 오래 쓰다보니, 사물이 칼럼의 눈으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 민주통합당 하는 거 보면 답답해서, 뭐라도 좀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기도 하지만… 내려놓은 건 내려놓은 거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제 새로운 상황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혼자서 나라 구하는 거 아니라는, 뭐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참으면서 좀 포기하는 데에도 익숙해지려고 한다.
처음 ‘나는 꼽사리다’ 시작할 때, 김어준이 마이크의 매력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큰 마이크를 쥐어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그렇게 실감이 가는 얘기는 아니었다. 방송은 이제 좀 자리를 잡는 듯 싶은데, 어쨌든 김미화 누님의 힘에 기대어, 출발은 성공적인 듯 싶다.
내가 쥐어본 마이크 중에서 제일 큰 건 어떤 것일까?
뉴댈리에서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폐회식 직전에 분과 의장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방송은 아니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거였는데, 총회장 앞의 대형 화면에 내 얼굴 보면서 얘기하는… 좀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영향력은… 없다.
그 회의는 깨진 회의였고, 내가 이끌던 분과는 중반 이후 아예 회의를 열지도 못했다.
더 많은 권한에는 더 많은 책임이 따른다… 유명한 사람이 한 얘기는 아니고, 그냥 영화 ‘스파이더 맨’에 나온 대사였다. 어쨌든, 요즘은 그런 생각을 좀 해본다.
하다보니 트위터의 팔로우 숫자도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과연 거기에서 한 마디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하여간 현실은 그렇다.
그거야 바깥을 향하는 마이크이고.
그렇다면 내 안을 향하는 마이크는 뭐가 있을까? 텍스트의 형태로만 보자면, 만년필로 끄적끄적 거리면서 노트에 쓰는 것들이 가장 많이 영향을 준다. 최초의 발상이나 책의 전체적인 틀 혹은 제목 같은 게 그런 과정에서 나온다. 첫 생각을 던지고 만들어나가는 순간은, 노트 앞에 혼자 앉아있는 순간들인 경우가 많다.
그 다음으로 영향을 많이 주는 것은, 진짜로 임시연습장처럼 쓰는 블로그.
다른 사람들도 블로그를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체로, 여기를 아무도 안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쓴다.
물론 하루에 천명 내외의 사람이 오고 가니, 누구나 보기야 하겠지만… 아무도 안 본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거나, 이것저것 끄적끄적 거려본다.
나는 원래 기똥찬 생각을 한 번에 해내는, 그런 천재형은 절대로 아니고, 시간을 많이 들여서 점근법 같은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편이다. 한 번에 쭉 나오면 좋겠지만, 뭐 그럴 능력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시간을 많이 들여서 ‘착안’을 하는 과정에 꽤 많은 공을 털어 넣는다. 물론 늘 같은 상황에 있으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건 지겨워서 버티지를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여건을 바꾸어보기도 하고, 노트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 만년필은 비싸서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 잉크를 좀 바꾸어 보고.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어떨 때에는 토론을 아주 많이 하고, 어떨 때에는 혼자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노트에서 블로그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아는 사람들과 상의하거나 토론하는 과정이 들어가기도 한다.
어쨌든 여러 사람들의 머리가 모이고, 좋은 의견이든 나쁜 의견이든, 생각이 모이면 최종 결과물이 좋아질 확률이 높다. 물론 그 과정이 늘 부드럽거나 좋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생각을 나누는 편이 훨씬 좋을 듯 싶다. 이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 토론이 많고, 반대의견도 많은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자기가 대단한 걸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꼴불견도 없으니 말이다.
한나라당, 아니 이제는 새누리당, 거기가 왜 이상하냐? 맨날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기들끼리 얘기를 해서 그런 것 아니냐? 민주통합당의 486들이 왜 이상하냐? 여기도 늘 자기들끼리, 있지도 않은 힘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힘에는 큰 힘과 작은 힘이 있는 것 같다. 그건 권력의 문제이다. 분명히 현실에는 위계라는 게 존재하고, 정치적 힘이든 경제적 힘이든, 더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다. 그러나 마이크에도 그런 게 있을까?
진실이든 아니든, 뭔가 찾아가는 길이라고 할 때, 더 큰 게 있고, 더 작은 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가 마지막에 자식이 뿌리려던 홍보 전단을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더 큰 마이크가 있고, 더 작은 마이크가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해내는 순간, 혹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착안하는 순간, 그 순간에 큰 것, 작은 것, 그런 게 있지는 않다.
물론 책과 칼럼은 다르고, 매체나 양식에 따라서 전하고 싶은 얘기나 하고 싶은 얘기 혹은 그 얘기들을 전개하거나 정리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다섯 살짜리가 문득 나에게 건네는 말이나 이명박이 하는 말이나, 어떤 말이 더 클까? 뭔가 배우는 순간이라는 것은, 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라는 논리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새로운 생각이 생겨나거나, 뭔가 해보고 싶은 결정적 순간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게 미약한 것이므로…
물론 나도 모든 사람들이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귀기울여 듣지는 못한다. 그랬다가는… 용량 초과에, 인격 초과인 상황이 올 가능성이 100%일 테니까. 그렇지만 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수 년간 익숙하게 살고 있던 삶의 양식이나 표현 방식을 던져버리고, 마이크를 내려놓을 준비를 하다보니… 과연 큰 마이크가 있고 작은 마이크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못된 사람과 좋은 사람이 REK로 있을까 싶다. 못된 생각을 많이 하면 못된 사람이 되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큰 마이크를 쥐기 위해서 자꾸 못된 생각을 하면, 마이크는 커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스스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 같다. 우파들이 더 큰 힘, 더 큰 권력을 탐하다가 자기 스스로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붕괴하는 게 대충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블로그라는 양식은, 이게 언제까지 문명적으로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참 여러 가지 목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개방적 포맷이다. 요즘 같으면 트위터에 밀려 작은 마이크 같아 보이는…
그러나 뭔가를 생각하거나, 뭔가를 만들어나간다고 할 때,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는 없다.
큰 마이크라고 생각했던 조선일보 맛탱이 가는 거 봐라.
힘을 탐하는 것이 주는 허탈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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