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에 익숙해지기

 

시간강사를 첫 취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현대에서 운영하던 연구소에 들어간 걸 첫 취직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때부터 연구소와 관련된 일 아니면 대학과 관련된 일, 하여간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런 일들을 하면서 살았다.

 

하긴들인 시간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어른이 된 후로는 술만 마시면서 살았다고 해야 하는 게 정확할지도.

 

어쨌든 이번 총선에는 따로 관여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나서, 소속 기관으로 사용하고 있던 2.1 연구소와 관련된 일들을 좀 급하게 정리할 필요가 생겼다. 정치가, 좀 멀리서 보면 화려하고 근사할지는 모르지만,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견디기가 좀 힘들다.

 

아마 사람마다 체질이 좀 다를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화려하면서도 배신이 난무하는 현장이 기질적으로 그렇게 맞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기도 싫은 연구에 이름을 올려놓고 싶지도 않았고, 이젠 시간 강사를 다시 할 열정도 없고, 그럴 체력도 안 된다. 물론 내 나이에 여전히 시간강사 재밌게 잘 하는 양반들이 있기는 한데, 그 정도 힘은 나에게는 없고.

 

그래서 결국 타이거 픽처스라는 영화사에 이름을 걸고, 실제로 출근을 시작했다.

 

, 생기는 건 없지만, 삶이라는 게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 그 힘으로 또 무지막지하게 남아있는 시간이라는 빈 공간을 채우는 것 아닌가? 보람과 돈만으로 그걸 채우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영화사 근무라는 게 시작되었다.

 

두 달 조금 안되었는데, 무엇보다 재미는 있다.

 

타이거 픽처스는 <평양성>의 참패 이후, 2년째 놀고 있는 중이다. 원래 내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가, 처음에 시작해서 어려울 때, 혹은 위기에 빠져 있는 집단그들과 동료로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상황, 이게 내가 제일 선호하는 상황이기는 하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제일 어려운 게, 시나리오라는 형식의 글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글이라면 여러 가지 종류의 글에 나도 꽤 익숙해있는 편이기는 한데, 시나리오가 좀 글 치고는 까다로운 편이다.

 

저녁 때, 간만에 정좌하고 앉아서 <사냥개>라는, 요즘 우리가 총력을 다해서 데뷔를 시키려고 하는, 손상준이라는 젊은 조연출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시나리오 상태로 읽으면서 영화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는 게, 이것도 일종의 반복훈련 같은 거라서 아직 나에게는 그게 제일 힘들다.

 

그래도 계속 보다 보니, 조금 늘기는 한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계속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는 건, 그래도 내가 좀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하여간 어영부영, 두 달이 지나갔다.

 

어쨌든 올해 봄이 되면, 어떤 영화든 촬영이 시작될 것 같고, 상주하지는 못하더라도 현장에도 가볼 생각이다.

 

이제 내 나이도 40대 중반인데, 초짜 입장에서 뭔가 시작하는 게 그렇게 편하지는 않은 나이이다.

 

영화 관련 학과면 학부 1~2학년 때 많이 해봤을 일을 이 나이에 하면서, 그래도 뭔가 익숙지 않던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게 재밌기는 하다.

 

2월말이면, 연재 중인 경향신문 칼럼도 끝이 난다.

 

그걸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해왔던 칼럼 작업도 이제 접으려고 한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시사와 관련된 일은 나꼽살 하나가 남는다.

 

, 이것도 선대인과 호흡을 잘 맞추면서 대체할 사람이 있으면 넘기고 싶기는 하지만아마 돈 안 받고 그만큼 시간을 내고, 게다가 정부 혹은 학계와 관련된 일은 완벽하게 막히는보상은 없고, 고통만 존재하는 이 일을 또 하겠다고 할 경제학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경제 대장정의 길이 아직 좀 남아있다. 어떻게든 이걸 끝내기는 할 생각인데, 기본적으로 나에게는 절대 시간이 부족하다.

 

영화를 직접 만들 날이 내 인생에 올 거라고는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연출을 하지는 않더라도 스탭으로 일하게 되는 순간이 갑자기 오게 되었다.

 

하여간 삶이라는 게, 무슨 계획을 세운다고 꼭 그렇게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조금씩 시나리오라는 글의 형태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경제대장정 시리즈의 9권이 문화경제학이었다. 나는 이 시리즈가 우리 경제의 미래를 바꾸기를 정말로 바랬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시리즈 시작하고 한 번도 이걸 끝내지 못할 거라거나 혹은 의미가 뭐가 있겠나, 그런 회의를 가져본 적이 없다.

 

힘들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거라고 생각을 했고, 당장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12권을 다 만들어내고 나면, 그래도 의미는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솔직히, 내가 무의미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지난 수 년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민주통합당 대표로 한명숙이 되는 걸 보면서

 

정말 아무 일도 하고 싶지가 않다. 글도 쓰기 싫고, 칼럼 같은 것은 더더군다나 쓰기 싫고, 방송 출연, 인터뷰, 다 싫다.

 

강연은, 지금 이 기분으로 정말로 대중들 앞에서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 얘기가 없다. 보나마나, 짜증이나 내고, 화나 내고 있을 것 같아서,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짓는 건

 

나도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서

 

아니나 다를까, 총선 때까지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가면서 버틸 듯하던 외환은행 문제도, 한명숙 대표 취임하고 바로 금융위 통과되어 버렸다.

 

나머지 일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그건 정권이 바뀌어도 더하면 더하지, 덜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글도 쓰고 싶지 않다.

 

그 허탈감의 빈 공간을, 한 번도 이렇게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던 시나리오 검토 등의 일들을 하고, 알게 된지 한 달 조금 넘는 젊은 조연출들의 데뷔를 돕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쥐어짜면서 시간을 보낸다.

 

몇 달째 바깥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이, 해 떨어지기 전에 일찍일찍 집에 들어오는데, 오늘은 투자사와의 저녁 모임에도 가서 자리를 지키고 늦게까지 앉아있었다.

 

세상을 구할 수는 없더라도, 몇 명을 도울 수는 있겠지

 

어떻게 보면 소소한 일일지 몰라도, 또 데뷔를 준비하는 연출자들에게는 생이 걸린 일이기도 하고….

 

그건 또 하나의 우주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람은 있다.

 

경제학을 전공한 것을, 늘 보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취임을 보면서, 노무현 시대에도 느끼지 못했던 무기력감이

 

도대체 지난 10년 동안, 내가 뭘 위해서 살았나, 그런 무기력감과 함께, 내가 지켜오려고 하던 가치가 밑바닥에서부터 붕괴한 느낌이

 

어차피 올해를 마지막으로, 경제학자로 살아온 나의 삶은 접을 생각이었지만, 그 마지막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런 출발점은 보고 싶었다.

 

영화사에 한달 반 정도 출근하면서, 일본 어느 스튜디오에서 선물로 보내준 일본 소주 한 병을 선물로 받아왔다. 한 달반만에, 처음으로 뭐라도 얻어걸린 것

 

돈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어차피 사회과학 책이든, 신문 칼럼이든, 아니면 나꼽살이든, 내가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돈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45살을 살면서, 한 번도 내가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은 해보지도 못했던 것 같다.

 

사명감 비슷한 걸로 살아온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나는 보람이라고 불렀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노무현 때에도, 기다리면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고, 명박 시대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한명숙 대표되는 걸 보면서, 2003년 이후 처음으로, 기다려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12권으로 예정된 농업경제학 등, 경제 대장정 시리즈를 마친다고 해서 도대체 뭐가 좋아질까, 그런 생각을 이 시리즈 시작하고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영화와 관련해서는, 아직 별 계획도 업고, 미리 생각해둔 방향도 없다.

 

어쨌든 영화사에 출근하면서 올해 한 해, 이것저것 눈동냥으로라도 배우고, 촬영 현장에 가고 하다보면,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조금 이해는 하게 될 것 같다.

 

찍어보고 싶은 다큐가 좀 있기는 한데, 아직은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잘 모르겠고.

 

어쨌든 일단은 시나리오에 좀 더 익숙해져보려고 한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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