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랑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경제학자 두 명을 꼽자면, 신의순과 이정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비유를 들자면, 신의순은 나를 돕기만 한 사람이고, 이정전은 내가 돕기만 한 사람이고. 어쨌든 이 두 사람이 나와 이론적 싱크로율이 가장 높다.

 

만약 신의순 선생이 그 때 대선에서 이회창 환경특보가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나도 가끔 돌아보는 질문이다. 어쩌면 나는 적당히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거고, 그냥 특별한 주제로 학위를 한 고만고만한 학자 중의 한 명이라,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나는 판단을 했고, 신의순 선생과 멀어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 시절이 생각나는 것은, 신의순 선생이 마침 그 때 연세대 경제학과의 학과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무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훨씬더 황당한 곳에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없다. 빨갱이라도, 쟤가 하는 말이 맞아, 수업도 챙겨주고, 이것저것 챙겨준 사람은 신의순 선생이었다. 나는 그렇게 한국에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렇다면 이정전은?

 

반대로, 이래저래 나는 그를 돕기만 한 것 같다.

 

문재인 당대표 시절이다. 이준구, 이지순, 이런 경제학계의 원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런 된장..

 

그 때 찾아간 사람이 이정전 교수였다.

 

내가 알았던 가장 최근의 스토리는..

 

이정전, 이준구 테니스를 치다가, 이정전 선생이 쓰러졌다는 거. 그걸 이준구 선생이 정말 눈치 빠르게 조치해서 이정전 선생이 살아날 수 있었다는 거.

 

그 시절, 우리는 야당이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표는 코너에 몰려있었다. 안철수 등, 무지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여간 갔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막 은퇴한 이준구 교수와 이지순 선생이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햐, 할배들.

 

나는 그냥 꾸벅, 도와달라고 했다.

 

이정전 선생이, 내가 갈 거라고, 연통 정도 넣어주신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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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순 선생은 그날, 점심으로 햄버거 같이 먹었다. 그 때 나에게,

 

"아내 얼굴 봐서라도 제발, 헛짓거리 하지 마시게."

 

그런 얘기를 하셨다. 문재인 메시지를 들고 찾아갔는데,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돌아서서, 이준구 선생 방앞까지 안내해주셨다.

 

이준구 선생은..

 

"잘 해요, 우박사가 잘 해야.."

 

하여간 난 메시지는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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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도 난 그 일을 몇 달을 더 했다. 장하성 선생도 고대 경영학과까지 찾아가서 만나고.. 틈 나는 대로 그런 양반들을 찾아다녔다.

 

난 배알도 없냐? 방법 없다. 그 시절에는, 그 일이 내 일이었다.

 

야당 시절, 그냥 도와달라고 찾아다녔다. 연구실 앞에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하고. 쪽지도 남기고, 그러고 다녔다.

 

아마 둘째가 폐렴으로 입원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나는 그뒤로도 꽤 오래 그런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프다..

 

나는 내가 하던 일을 그만해야겠다고 결정을 했다.

 

당대표를 그만 둔 이후의 문재인, 그 뒤로 두 번 만났다. 통화는 몇 번 했지만, 실제로 본 건 두 번이다. 한 번은 양산집에서, 한 번은 마포에서.. 마지막 만났을 때, 캠프는 안 한다고 했다.

 

그 날 식당에서 나오면서, 아마 이 순간이 마지막 보는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었다.

 

곧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안해요", 그렇게 돌아서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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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전의 책 "주적은 불평등이다" 서문을 읽으면서, 이정전과 지낸 시간은 물론이고, 그와 겪은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그러나 내가 그의 책을 정독해서 읽은 게 과연 몇 번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정전 선생이 그의 절친 동료, 이준구나 이지순 선생을 설득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이 한 것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자로서 이정전이 하는 얘기, 나 역시도 성실하게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준구나 이지순, 한국경제학회 학회장인 이지순의 상징과 자리를 탐한다.

 

나도 그런 잡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그들의 친구이자, 여전히 성실하게 글을 쓰는 이정전의 메시지를 너무 가볍게, 어, 늘 하던 그런 얘기.. 이렇게 가벼이 취급한 거 아닌가?

 

개뿔, 내가 알기는 뭐를 알았나.

 

"주적은 불평등이다", 이 책 서문을 읽으면서 지난 몇 년간 나의 개떡 같은 삶을 잠시 돌아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햐..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학자는, 이정전이다.

 

나는 이제야 알겠다. 그걸 모르고 살았다. 내가 까막눈이다..

 

이정전 선생을, 이준구 선생 만나는 소개처 정도로 생각했던 내가, 사람도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참, 잡놈.. 스스로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state of art라는 단어의 의미를 아는 분들께, 이정전 선생의 책을 권해드린다. 당대 최고의 학자가 촛불집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 책이다. it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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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잘못을 기록해둔 책.

 

예나 지금이나, 반성은 참 어려운 일이다. 가끔 나도 <징비록>을 여기저기 뒤적거리기는 한다. 나라는 이미 전쟁 전에 무너졌다는 것이 옳을 정도로, 수비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도성의 성첩과 병사의 수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이게 나라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자신의 맹활약을 쓰는 책들은 엄청나게 많지만, 자신의 반성에 관한 책은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반성일지도.

 

나도 내 삶을 돌아보며, 가끔 꺼내본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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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나라에서 후쿠시마 사태로 불리는 그 사건을 일본에서는 동일본 대지진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도 충격적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나?

 

그런데 이런 사건을 헤쳐나가기 위한 노력에서, 일본이 가진 우리와는 다른 힘을 보고 놀랐다.

 

'동일본 대지진과 핵재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와세다 리포트 시리즈는 관련 지식과 활동을 모아서 문고판으로 낸 보고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대학교에서 번역 출간하였다.

 

우리는 이런 거 할 수 있을까? 못 한다. 학계와 사회는 너무 많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대학은 돈 되는 거 아닌 일과는 정말로 이제 너무 먼 곳에 가버렸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원전파와 태양광파의 전쟁은,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골육상쟁이다. 이거 왜 이런 거냐?

 

이 전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전말을 지켜본 나는, 진짜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다. 눈 뜨고 보고 있기가 민망하다.

 

이 모든 아수라장의 시작은.. 생각지도 못하는 전혀 엉뚱한 인사들 몇 명, 좁게 잡으면 두 명에서 시작되었다. 두 명 다, 내가 웃으면서 만났던 사람들 (진짜 돌겠네..) 한 명 더 있다는데, 이 제 3의 인물은 몇 달간 추적을 했는데, 결국 누구인지 못 밝혀냈다 (나한테는 못 알려준다는 것 같은..)

 

높은 자리 가겠다고 몇 명이 삽질하는 동안,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래서 후쿠시마 사태 이후 대학의 힘을 모두 모아서 와세다 리포트를 내는 일본이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나마 그걸 번역 출간이라도 한 고려대학교가, 한국에서는 어쨌든 대학의 최소한의 기능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라더라도, 대학과 사회, 최소한의 기능은 하고, 미니멀리즘이라도 사회에 결과물을 줘야하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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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을 처음 만난 것은 인사동 뒷골목의 작은 술집이었던 것 같다. 녹색연합의 활동가들과 회원들과 하는 작은 자리였었다. 그리고 내가 하던 수업에 그녀의 다큐와 함께 작은 세미나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녀가 한참 로드킬 무비 작업을 할 때, 그녀에게 자문해주던 사람들이 이래저래 내가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또 나도 그 시절에는 지리산에 자주 가던 때였고 (공지영 작가가 본격적으로 지리산에 오던 것은 그 약간 뒤의 일이다.)

 

무엇을 먹을까, 이건 농업의 질문과 직결되는 얘기다.

 

<음식국부론> 내기 전까지는 나도 사람들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삶에 대한 관심이 안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그게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이라는 막역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든 뭐든, 알고 싶지 않아했다. 그냥 외면하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난 그런 건 절대 보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더 불편해질테니까", 그랬다.

 

알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알고 싶지 않으니까, 너도 절대로 그런 얘기 하지 마라.. (날 고민하게 하면 죽여버리고 싶어, 이런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그 때 알았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흐름이 하나 있다는 것을.

 

황윤은 그 벽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을 것이다. 그 벽은 공고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특히, 잘 균열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황윤에게 늘, 퐈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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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한 현장형 검사가 부장 검사까지 승진하였다. 드문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이 다루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책을 썼다. 책은 겁나게 웃긴다. 그리고 대박이다.

 

<국가의 사기> 원고를 출판사에 막 넘기고 이 책을 읽었다. 한 가지 메시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형사사건으로서의 사기, 기본적으로는 자기 욕심에 자기가 넘어가는 것이다..

 

형사부 검사의 조언이자 결론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배달의 오류', 그런 걸 이미 아는 사람들이 책을 읽고, 정말로 이 얘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이 책은 배달되기 어렵다. 배달의 오류라는 개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읽어두어서 해로울 것 없다. 아는 것 같아도, 우린 사기 사건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전문가의 조언, 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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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조선일보에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뭐, 욕 죽어라고 먹었다. 욕 먹을 줄 알고 시작한 것이기는 한다. 가끔 조선일보 부탁을 받고 기고한 적은 있는데, 이름 걸고 연재한 것은 처음이다.

 

한국에서 책은 거의 죽기 직전이다. 그리고 각 잡고 사회를 들여다보자고 하는 사회과학 책은, 사실 이미 사망이다. 방송을 비롯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연성화의 길을 가는데, 경성 중의 경성인 사회과학은 이미 사망한 상태인 것 같다.

 

박노자의 서평을 조선일보에 실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했다. 서평은 그대로 실렸다. 뒤에서는 모르지만, 사실 아무 일도 안 벌어졌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박노자도 옛날 박노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는 않다. 박노자는 더 웃겨졌고, 더 시치미 떼면서 농담을 곧잘 하게 되었다. 정로환 가지고 암을 고치는 행위.. 진짜, 이제 한국 사람 다 되었다.

 

좌든 우든, 박노자는 제3의 눈으로 혹은 글로벌 스탠다드 좌파의 눈으로 본 한국, 한국인은 누구든 한 번쯤 봐야 하는 텍스트다.

 

그게 개차판 받는 한국, 사실 좀 슬프다. 그러나 슬프다고 그냥 가만히 있기도 좀 그렇다.

 

서문이라도 소개한다. 서문이라도 좀 보면 좋겠다..

 

이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작은 노력이다.

 

 

 

(사진 찾다보니, 노회찬과 찍은 사진을 찾았다. 노회찬이 박노자 보러 노르웨이 간다고 나한테 상의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노르웨이 사람들을 좀 소개시켜 줬었다. 그냥 같이 가자고 하고 따라갈 걸.. 이제 후회 된다.)

 

(그리고 김종철과 함께 찍은 사진도 나왔다. 한 때 내가 가장 사랑하던 후배.. 어쩌면 그는 이재영과 우리 모두의 후배였던 건지도 모른다. 노회찬의 마지막 순간, 그의 보좌관이었다. 이재영, 오재영, 노회찬, 모두 떠난 후의 김종철, 이번 달에 만나기로 했다.. 술이나 한 잔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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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문 읽기 시작한지 여덟 번째다. 신청이 들어왔다. 뭐, 별로 인기 있는 코너도 아닌데, 신청은 당연히 우선 처리.

 

건축에 대해서, 참 만감이 교차한다. 첫 직장이 어쨌든 법적으로는 현대건설이었다. 그냥 의자만 놓고 있던 건 아니고, 현대건설 사람들과 꽤 많은 일을 했다.

 

주변에 건설 관련된 사람들이나 건축사들이 많이 있다. 친한 사람들도 있고,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우도 있다.

 

토건의 시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종종 한다.

 

어쨌든 유현준의 얘기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지금 서울의 모습 아니 넓게, 모든 것이 같아져가는 전국의 모습, 이런 건 아니다.

 

다양성이 너무 떨어진다. 그리고 인간들이 너무 폭력적으로 변한다.

 

건축에서도 그 질문 하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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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문 읽기, 하다 보니 벌써 일곱 개를 했다. 최소한의 품과 시간만을 들인다가 원칙이라면 원칙인데.. 그냥 핸펀으로 녹음하고, 따로 편집은 안 하고, 디코딩만 한다. 엇나간 거 편집하는 시간에, 책을 소개하는 약간의 소개글을 쓴다.

이게 해보니까, 듣는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된다. 면벽 수도하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렇게 묻는 것과 같다.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에 관한 문체와 얘기 풀어나가는 방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짧은 녹음시간이지만, 용량 한계 때문에 시간 체크 등 이것저것 좀 복잡한 일들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도 많이 난다. 그야말로 남이 자신을 소개한 글을 보면서 내 살아온 인생을 다시 한 번 반추해보기도 하는..

삶, 돈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인기가 전부도 아니다.

한동안 나도 맨 앞에 서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는 그런 상황에 오래 있었다. 이제 나도 50이다. 다른 사람을 소개하고,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그런 걸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추상적인 대중, 머리 속에만 있는 그들, 그 속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고.. 이런 현실의 사람 속을 산책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나한테 당당하다. 이 서문 읽기를 내가 계속하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 그런 동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책에 조금이라도 익숙할 수 있는 디딤발을 놓아주고, 뭐라도 좀 소개될 수 있는 칸을 열고. 나도 조금은 공익적 삶을..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은 이제 재미없다. 남들 마음이 편해져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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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가 누구야? 영화 <여배우들>의 바로 그 재수 왕뽕, 보그 기자가 김지수다. 느낌 한 번 지대루다.

 

나는 보그 쪽 보다는 바자 쪽과 좀 일을 했었다. 한번은 진짜 연재 글을 쓸 뻔했었는데, 마침 제일 모직의 브랜드 철수와 관련된 글을 썼다. 고심 끝에.. 광고주 눈치 많이 봐야 하는 곳이라서, 결국 싣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문도 좀 하고, 가끔은 감사 파티 같은 거 할 때 가보기도 하고.

 

피쳐라고 흔히 부르는, 패션지의 인물면을 담당하는 기자들은 팔방미인인 경우가 많다. 글도, 기똥차게 쓴다. 진짜, 지갑 풀고 싶은 마음 들고 싶을 정도로 잘 쓴다. 그런데 패션지의 특성상, 더 상층부로 승진하기가 어렵다. 그들만의 애환이 있다.

 

글.. 국가를 따지지 않고 전세계 잡지에서 글을 제일 잘 쓴다고 생각했던 것은, 프랑스의 권총 등 무기류 잡지들이다. 사진이라고 해봐야 0점 사격한 표적판이 전부인데, 그거 하나 들고도 이걸 왜 사야 하는지 기깔나게 뽑아낸다. 문화 다양성 훈련을 위해서 권총 잡지 3~4종을 6개월 정도 읽었다. 정말 총 사고 싶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 잡지는 요트 등 소위 동력선에 대한 잡지들.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일정 규모의 동력선을 운항하기 위한 라이센스는 꽤 긴 시간을 준비해야 딸 수 있다. 잡지의 글들은 너무너무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실제 서울 해양경찰청에서 운영하는 시설들도 가보았다. 물론 내가 배를 사고, 운행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에는 이미 노안이 너무 심해졌다. 그렇지만 정말 사지는 않더라도 그 라이센스를 관리하는 사람들과 정박장에는 가보고 싶어졌다. 여의도의 서울 해양경찰청을 가 본 다음, 인천의 마리나에도.. 글의 힘만으로 그 잡지들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정말 사고 싶어졌다. 물론 현실은 넘사벽이다.

 

보그의 김지수, 그가 패션지에서 보이지 않게 된 다음,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영화 <여배우들>의 그 기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두 개의 선을 이어주는 것은 윤여정이다.

 

 

 

따져보면 윤여정과 이래저래 좀 가까운 사이다. 90년대에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유명한 연애인과 차 마시고 밥 먹고, 그런 자리를 피한다. 일부러 그런 자리를 많이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일부러 피하는 편이다. 지금도 그렇다. 90년대에는 더 했다.

 

윤여정.. 어쨌든 정말 힘들던 시절, 여배우들에 나온 윤여정의 대사 한 마디 가지고 나도 그 시기를 버텨냈다.

 

"배우 개런티 깎자고 하면 열불이 나다가도, 참 내가 피부가 좀 안 좋지, 그러고 참아."

 

이 한 마디는 안 나가는 사회과학 한 귀퉁이에서 10년 넘게, 별의별 꼴을 다 보면서도 꾹 참게 해준 한 마디였다. 정말로 그 한 마디로 숱한 무시와 불이익들을 꿈 참았다.

 

그리고 먹고 사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어진 이후, 내가 제일 처음 한 게 방송은 이제 안 한다.. 그리고 강연도 최소한으로.

 

아, 윤여정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기는 하다. 부산영화제에서 아내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뙇.. 아내도 윤여정을 엄청 좋아한다. 목 인사만 했다. 그리고 밥 먹으면서 몇 번 더, 그냥 인사만.

 

시간이 흘렀다. 윤여정과 김지수에게는 겹치는 이미자가 좀 있다. 아마 많은 시간이 흘러, 윤여정과 가장 닮은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나는 김지수라고 할 것 같다.

 

참고, 버티고, 그러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이 낡고 삮지 않는..

 

보그를 대표했던 기자, 그건 한국 패션잡지 아니 패션계를 대표한다는 말이다. 보그가 패션만 선도하는 것은 아니다. 마케팅의 언어 자체를 끌고 나간다. 오죽하면 시인 김수영이 다 시로 남겼겠느냐. 한동안 '보그체'라는 말도 유행했었다. 문체도 선도했다.

 

그 한 가운데 김지수가 있었다.

 

인터스텔라 연재 중에, 당연히 윤여정편을 재밌게 읽었고, 송승환의 얘기도 아주 재밌었다.

 

인터뷰 중에는 기념비적인 인터뷰가 하나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한데, 말년에 젊은 여기자가 인터뷰를 했나보다. 꼬깃꼬깃, 깃 넓은 넥타이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아시모프가 한 마디를 했다.

 

"내가 멋지고 감각적인 넥타이를 매고 살았다면, 여러분이 아는 그 아시모프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한 마디가 모든 작가 지망생의 가슴을 불을 당겼다. 당연히 내 가슴에도 불을 당겼다. 아, 천하의 아시모프도 우리처럼 꼬질꼬질하게 하고 다녔겠구나. 20세기를 살았던 작가 중에 누가 감히 아시모프의 반열에 올라갔겠는가? 심지어 그는 영화 판권도 안 판다. 그래서 '아이로봇'으로 영화는 결국 유가족들의 재단의 라이센스를 못 받아서 제목을 못 썼다. <파운데이션>은 영화를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의 가슴을 불을 당긴다. 이걸 한 번..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텍스트는 텍스트로..

 

도발을 하든, 지랄을 하든, 아니면 발광을 하든, 저런 감각적인 문장을 받아내는 게 사실은 인터뷰다. 저 한 마디가 아시모프의 생활관은 물론 문학관을 모두 보여준다. 기교 없이, 복잡한 구조 없이, 그러나 몇 천 년에 걸쳐진 얘기를 담백하게 써내려가는 게 아시모프의 문학이다. 그와 라이벌이라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프랑크 허버트의 다채롭고 이색적이며, 에그조틱한 문장과는 완전히 반대편의 문학.

 

김지수의 인터뷰를 계속 보고 싶다.

 

이번 시즌,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은 한국 텍스트계의 '잇' 아이템, 그야말로 머스트다. 이거 안 보고 인터뷰 얘기하기가 이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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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근의 책은, 아마 한동안 추천사를 쓴 거의 마지막 책일 것 같다. 나도 살기가 힘들어서, 다른 사람 책을 읽고 추천사를 쓸 겨를이 거의 없다.

 

책에 나오는 많은 얘기들은 격론 대상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낙관인가 혹은 혐오인가, 다들 입장이 다르다. 그렇지만 격론은 벌어지지 않는다. 책의 힘이 많이 떨어졌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읽은 책 중에서는 최근의 기술 변화에 대한 구조 전망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 본 책이다. 단점이라면, 서술 방식이 좀 어렵다. 경제학과 교수의 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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