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라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티모시 샬라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를 막 찾아서 볼 정도는 아니다. 그냥 엘 패닝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정말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우디 알렌의 <맨하탄> 생각이 많이 났다. 20대에 본 영화인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영화다. 아직도 많은 장면들이 생각난다. 다른 우디 알렌의 영화들이, 그렇게까지 많은 감명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은 맨타한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몇 년 전에 뉴욕 여행을 계획하기는 했는데, 이래저래 사정이 생겨서, 결국 식구들하고 덴버 여행으로 바뀌면서. 한동안은 뉴욕 갈 일이 없다. 

영화를 절반 정도 봤을 때, 장면과 모티브만 바꾼 <맨하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보고 나서 정보를 찾아보니까, 아 이런, 진짜 우디 알렌 영화였다. 미투 사건이 생기면서, 겨우겨우 개봉하게 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너드식 마초라고나 할까. 우디 알렌 스타일을 얘기하면, 그 정도 될 것 같다. <맨하탄>에서는 여주인공에게 기다림과 같은 좋은 덕목과 차분함 같은 성격을 주었다. 비 오는 뉴욕의 엘르 패닝에게는, 매력적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덕목도 주지 않았다. 돈도 많고,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여자는 빨리 떠나는 것이 좋다.. 그런 걸 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개츠비라는 이름의 남자 주인공에게는 ‘회색’, 뉴욕을 규정하는 그런 매우 독특한 덕목을 하나 선사하였다. 아마 그 회색은 뉴욕이 아니라, 파리도 바뀌어도 상관 없을 것이고, 요즘 같으면 서울로 바뀌던지, 혹은 홍대나 강남으로 바뀌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나이 먹어도 제정신을 못 차린 너드 꼰대의 자기만족형 이상형을 나름대로 그려보려고 한 거 아닌가, 그렇기는 하다. 

그래도 감동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everything happends to me, 티모시 샬라메의 피아노 동영상은 나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게 이 영화에서 나온 건 몰랐다. 그 동영상의 맥락이 뭔지 아는 것만으로도 재즈 애호가에게는 충분히 영화를 볼 이유가 될 것 같기는 하다. 나도 그게 궁금하기는 했는데.. 이제야 그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찰리 파커나 쳇 베이커라는 이름이 순간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라면, 별로 권해줄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농구에서 흔히 얘기하는 그래버티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농구 기본은 1:1이지만, 여러 선수를 자기에게 붙여놓는 능력을 그래버티라고 부른다. 공격하면서 수비수가 여러 명 붙으면, 외곽 등 다른 선수에게 기회가 생긴다. 꼭 자기가 결정적인 뭘 하지 않아도 공격 기여도가 높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남주와 여주 모두 그래버티가 아주 높은 사람들이다. 가정 배경 설정이 그렇게 되어 있고, 실제로 하루 동안 벌어지는 뉴욕에서의 에피소드들이, 이들이 모두 그래버티가 얼마나 높은가, 그런 걸 보여주는데 많은 장면들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버티가 높은 사람들끼리 서로 이끌려 사랑하게 된다면.. 아주 선의로 해석한 우디 알렌의 얘기는, 그딴 게 개소리라는. 너무 잘 나고 매력적인 둘이 무조건 만난다고 행보해지지 않는다는.. 

연애할 여력도 없을 뿐더러, 굳이 그래야 할 필요도 못 느끼는 사람들은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영화이기는 하다. 전투신도 없고, 폭력도 없고, 하다 못해 엄청난 언어 폭력도 없는. 우디 알렌 영화에서 무한 반복되는 잘난 넘들의 찌질한 궁상, 그런 게 반복 되풀이되는데, 이게 딱히 매력적일 이유는 없다. 

그래도 우디 알렌의 영화가 갖는 가치는, 자본주의의 최정점에서 벌어지는 얘기라는 경제학적인 면에서의 메시지다. 그게 <맨하탄>과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공통점이다. 문화 시장의 정점에 있는 어머니의 아들인 남주. 여러 개의 금융을 소유한 아빠의 딸인 여주. 뉴욕은 문화와 금융의 힘으로 움직이는 도시야, 그 직속 후계자들이 나름 진보적이라고 하지만..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라는. 그리고 가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그래도 극단적으로 수다스러운 우디 알렌의 특이점은.. 40편, 50편짜리, 몇 시즌을 이어간 드라마보다 2시간짜리 영화에 대해서 할 얘기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만큼 상징이 많고, 은유가 많고, 논리적인 충돌이 많은. 그의 영화를 꼭 볼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다를 원한다면, 그와 함께 매우 수다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특이점이 존재한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레디애이터 2  (0) 2026.07.20
은하영웅전설  (0) 2026.01.30
[일드] 육왕  (0) 2025.03.05
졸업  (1) 2024.11.03
씰 팀..  (2) 2024.05.26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