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에너지관리공단에 사직서를 내면서 나의 직장 생활은 끝이 났다. 책을 써야겠다고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이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대인기피증이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었고, 뭔가 부탁하는 게 싫어졌다. 누군가를 만나야 되면 술을 마셨다. 사람이 좋아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술을 마시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이미 3급 부장이었는데, 2급 부장 승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본부 같은 게 생기면 본부장이 될 것 같았다. 기후변화협약이 본격화되면서 새로 생긴 보드 한 곳의 선거에 출마해서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이사가 되었다. 위로 올라가면서 보수들의 세계로 더 깊게 들어가게 되었고, 정체성의 충돌도 더 커져갔다. 미국 컨설팅 회사에서 취업 제안이 오기 시작했고, 미국 정부에서도 제안이 왔다. 즐겁게 생각하면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상황인데, 나는 그게 즐겁지 않았다. 사람들도 점점 더 만나기 싫어졌다. 

‘명랑’이라는 모토를 달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좀 더 즐겁고 경쾌하게 살고 싶어졌고, 한국의 좌파들이 가지고 있는 ‘센치멘탈 블루스’로부터 좀 멀어지고 싶어졌다. 웃기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좀 웃기려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세상을 사는 방식이 바뀌기는 하였다. 문득.. 궁상 떠는 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새로운 종류의 독서를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를 아주 많이 봤는데,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하던 대중성 높은 영화들을 많이 봤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문정동 살던 시절의 내 삶이었다. 그 시절에는 훨씬 더 가난해지고, 많은 것이 불안했지만, 근거 없는 낙관 같은 게 있었다. 원래도 돈을 많이 쓰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한 편이다. 그즈음에 아내랑 결혼을 했다. 아내 입장에서는 많이 난감했었을 것이다. 공기업 부장이랑 결혼을 하게 된 건데, 막상 결혼하는 순간에는 나는 습작 중이었다. 그때 아내랑 여행을 많이 다녔고, 영화도 같이 많이 봤다. 

지미 헨드릭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주 듣지는 않았다. 그의 불행한 삶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았지만, 그의 선율 같은 데에서 딱 느낌이 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녹음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그래도 공부하는 느낌으로 DVD를 사서 보았고, 우드스탁 라이브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봤다. 

지미 헨드릭스가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고 “Peace”라고 했던 장면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가 미국 국가인 성조가를 전기 기타로 연주하는, 아주 유명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우드스탁이었다. 피킹에 의한 앰프 파열음이 어마무시했다. 초킹에 의해서 원박은 계속해서 늘어지거나 반복되면서 저주의 느낌이 아주 강렬해졌다. 만약 누군가가 애국가를 가지고 그렇게 변주해서 기타 연주를 했다면 아마 난리가 어마어마하게 났었을 것이다. 이 연주를 여러 번 본 적이 있기는 한데, 지미 헨드릭스 버전으로는 그때 처음 본 것 같다. 이 두 장면이 워낙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때의 강렬한 감정이 이후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쓰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건 평화론은 아니다. 특히나 핵전쟁의 공포와 함께 베트남전 이후로 반전 흐름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던 시기에는 말이다. 

“피스”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가진지 며칠 안 되어서 <미스 에이전트>라는, 산드라 블록이 나온 영화를 보게 되었다. 로맨스 코메디를 그렇게 즐겨 보는 편은 아닌데, 산드라 블록의 전작인 <스피드>가 당시 분석하던 책에 국가안보영화로 분류되어 있어서 봤었다. 워낙 재밌어서 연이어 봤는데,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 중의 하나가 될 줄 몰랐다. 

미스 에이전트는 테러범을 잡기 위해 미스 USA 대회에 어느 FBI 요원이 위장 잠입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코메디답게 크고 작은 유모 코드, 산드라 블록 스타일의 블랙 유머가 많이 나온다. 미인 선발대회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그런 논쟁이 세계적으로 한참이던 시절이다. 여기에 참여한 후보들에게 희망을 물어보면 “세계 평화, 워드 피스”라고 대답하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었던 것 같다. 산드라 블록은 이걸 바보들이 하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 마지막에 “그리고 세계평화”, 그렇게 대답을 한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Miss Congeniality, 일종의 화합상 혹은 우정상 정도 된다. 임무 수행 중에 결선까지 올라갔지만 제대로 심사대 위에 서지 못한 산드라 블록을 위해서 다른 후보자들이 “우리들의 친구”라는 의미로 특별상을 주는 게 영화의 마지막이다. 

미국 미인 선발 대회인 미스 USA 와 세계 평화, 이 두 개념이 언뜻 연결되지 않지만, 폐지 위기에 몰린 대회와 이걸 꼭 주최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명분이 만나는 점이 ‘세계 평화’였다. 세계 대회도 아니고 일종의 지역 대회인 미국 대회에서 세계 평화라고 말하는 건 뭔가 좀 맥락이 맞지가 않는다. 미국이 한다고 하면 그게 바로 세계적인 일인가? 만약 미스 코리아 대회에서 경상도, 서울, 전라도, 이런 데를 대표하는 각 지역 후보들이 나와서 원하는 꿈이 뭐냐고 할 때 “세계평화”라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이상해 보이겠는가? 사실 이상한 건데, 그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후보는 미스 뉴저지인 산드라 블록 밖에 없었다. 

영화에는 <스타트렉>의 스콧 선장인 윌리암 샤트너가 나온다. 피가디에게 선장을 넘겨주고 난 후, 스콧은 미스 USA 사회보고 있었다. 중요한 역할은 아닌데, 괜히 반가웠다. 배트맨의 영원한 집사 알프레드역을 맡았던 마이클 케인이 산드라 블록을 그야말로 환골탈퇴시키는 최상급 코디로 나온다. 그의 연기가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후반부에 후보들의 합동 공연이 나온다. “One in a million” 백만 명 중의 한 명, 그런 가사가 발라드풍으로 나오고 후보들이 여신 복장을 하고 무대 위에서 대충 걸어다니며 점차적으로 라인을 형성한다. 그리고 신디자이저의 강렬한 음이 터져 나오고 후보들의 라인 댄스가 시작된다. 그리고 무대가 폭발한다. 수상자에 대한 테러가 예고된 상황인데, 산드라 블록은 아직 폭발물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했다. 후딱 댄스를 마추고 다시 폭발물을 찾으러 나서야 하는 긴박감 속에서 평범할지도 모르는 퍼포먼스에 작은 반전이 생겼다. 

뮤지컬 등 영화에는 수많은 댄스가 나온다. 춤 자체로 유명해진 거로는 거의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영화지만 비만 오면 계속해서 나오는 우산을 든 탭 댄스 “Singing in the Rain”과 발레리노의 탈출기 “백야” 같은 게 있다. 젊은 시절의 올리비아 뉴튼 존과 존 트라볼타도 엄청난 춤을 추었다. 그렇기는 한데, 영화에서 춤으로 가장 감정적인 변화를 느꼈던 게 <미스 에이전트>에서 나왔던 댄스였다. 아마 내 상황이 그래서 더욱 이 장면이 재밌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나중에 노래를 찾아봤는데, Bosson, 성도 이름도 없이 달랑 이거 하나 나온다. 스웨덴 가수인데, 자기 노래가 미국 회사와 계약을 했다는 건 알았지만, 산드라 블록 영화에 나오는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자기 음악이 영화에 나와서 기뻤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음악이 영화랑 딱 맞을 때 감동이 몇 배로 커지는데, <미스 에이전트>에서는 특별히 더 그렇다. 실제로 이 노래가 미스 스웨덴이었던 전 여자 친구에게 바친 노래였기 때문에 전혀 맥락이 없는 것 아니다. 

히트곡은 사실상 딱 하나인 보손의 “One in a Million”이 내 인생 곡 중의 하나가 된 이유는, 문정동에 살던 시절의 상징 같은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회사는 그만두었고, 아직 저자로 데뷔하기 전에 이전에 내가 했던 독서나 심지어 내가 봤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스타일을 만들려던 시기였다. 아마 1년 전에 봤더라면 이런 로맨스 코메디를 뭐하러 보냐고 그랬을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어떤 스타일로 해야할지, 그런 걸 고민하던 때였다. 아마 이 노래와 후보들의 댄스에서 해답까지는 아니지만, 스타일에서 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무슨 엄청난 무대와 스펙타클만으로 사람이 감동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많은 유머와 약간의 진지함, 그런 게 내가 이 영화에서 배웠던 것이고, 그 절정이 “One in a Million”이라는 노래, 아니 그 노래의 활용에 담겨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많은 유머와 약간의 진지함” 대신에 “아주 많은 진지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유모” 정도로 살아간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와 했던 약속이 있다. 물론 아주 많은 약속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앞으로 벌어들이는 인세는 전부 아내를 준다는 거였다. 아내가 혹시 이혼해도 평생 내가 버는 인세는 자기 달라고 했다. 그것도 한다고 했다. 아내는 내 직불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돈이 들어오면 바로바로 다 빼간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강연 같은 데 가다 보면 봉투에 돈을 넣어서 주는 경우가 있다. 거기서 만 원짜리 한 장 뺀 적이 없이 있는 대로 가져다 주었다. 아내랑 <미스 에이전트> 같이 보던 시절, 가난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게 나의 문정동 시절이다. 그때 아내와 가장 재밌게 보았던 영화 중의 하나가 <미스 에이전트>였고, 아내나 나나 그 댄스 신을 가장 좋아했다. 

2004년경에 영화를 보았고, 책으로 데뷔를 한 것은 2005년의 일이다. 2007년에 <88만원 세대>를 발간했고, 그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인세 수입과 생활비가 평균적으로 비슷했다. 강연은 책 나왔을 때 의례적으로 하는 것 아니면 신세진 지인의 부탁으로 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안 하는, 최소한으로만 했다. 문정동 시절 생각해보면, 돈이 들어온다고 해서 그냥 강연 특히 고액 강연을 찾아다니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기업 강연은 안 했다. 그렇게 돈이 필요하면 그냥 회사 다니고 사는 게 낫지, 뭐하러 책 쓴다고 이 고생을 했나 싶다. 

문정동 시절, 많은 책을 보고 많은 영화를 보았다. 강연할 시간이 있으면 책을 좀 더 보거나, 영화라도 좀 더 봐서 새로운 얘기를 만들거나 스타일을 찾는 게 낫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책을 쓰려고 한 것인지, 돈을 벌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책을 쓴 것은 아니다. 한참 내가 인기가 있던 시절에는 강연 전문회사에서 강연 관리에 대한 제안이 많이 왔었다. 그냥 웃고 말았다. 그렇게 할 거면 그냥 취직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자로서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이상 없으면 그냥 취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2022년, 2년씩 재계약하면서 정년까지 갈 수 있는 성결대 교수를 그만두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애들 키우고, 이런 일들이 겹쳐서 도저히 시간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휴직 같은 게 있으면 1~2년 휴직을 하면 좋겠지만, 계약직 교수한테 그딴 건 없다. 결국 그만두기로 할 때 아내와 보손의 “One in a Million”을 다시 들었다. 굳이 상황을 얘기하지 설명하지 않아도, 아내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문정동 시절을 떠올리는 가장 강한 상징은 지금 와서 보니까 영화 <미스 에이전트>와 <One in a Million>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그걸 환기시켜 준다. 나는 돈을 벌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책을 쓴 것은 아니다. 학자로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을 뿐이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혹은 바그너 같은 음악들이 나를 만들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건 교양 차원에서 혹은 취미 차원에서 들은 것이지, 나를 만든 음악들은 아니다. 학교를 그만두면 생겨나는 가장 큰 변화는 의료보험이 직장 의료보험에서 지역 의료보험으로 바뀌고, 신경 쓰지 않던 국민연금에 대해서 다시 일일이 챙겨야 하는 소소한 일상의 일들이다. 그렇게 다시 문정동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지역 의료보험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One in a Million”을 들었다. 아마 “One in a Million”을 내 인생의 노래라고 할 사람은 전세계에 몇 명 없을 것 같다. 보손이 그럴 것이고 혹시라도 <미스 에이전트>의 음악감독이 그럴 수 있다. 딱 하나 나온 히트곡이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일이 별로 없을텐데, 내 경우에는 사실 그랬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발전의 사외이사가 된 이후로 아주 짧은 전환기를 제외하면 나는 대체로 소속이 있었고, 직장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성결대학교를 그만두면서 형식적으로는 다시 문정동 시절로 돌아간 것과 같다.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무엇이 나를 만들었는지, 다른 건 몰라도 “One in a Million”에 대한 얘기는 꼭 한 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인지, 성결대에서 마지막 수업을 하고 서해안 고속도로 위에서 “One in a Million”을 다시 들었다. 오십대 중반, 긴 시간을 돌아서 다시 문정동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도 가끔 아내와 문정동으로 다시 이사 가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기는 한다. 공교롭게도 아내가 문정동에 있는 회사로 옮기게 되어서, 나는 문정동을 떠나서 이제는 1년에 몇 번 가볼까 말까한 상황이 되었지만, 아내는 오랫동안 예전 우리가 살던 아파트 건너편 어딘가의 회사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아내는 고등학교도 그 인근에서 나와서, 전생에 문정동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무명 시절, 데뷔하기 이전 시절, 무엇을 해야할지, 어떤 스타일로 해야할지 고민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강연과 방송 진행 등 화려한 생활이 눈 앞에 있던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냥 나는 조용히 처박혀서 글을 쓰는 선택을 했다. 그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One in a Million”과 함께 펼쳐지는 미인대회 댄스 신을 보고는 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이기도 하고, 흐름상 기가 막힌 정서적 반전이 만들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나도 저런 유쾌하고 편안한 반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물론 아직도 못 만들었다, 그 정도의 감동은.  

 

https://youtu.be/j336MHEP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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