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둘째가 태권도장에서 송판 한 번에 깼다고 송판 들고 와서 한참을 자랑을 했다. 나는 숨 잘 쉬어서 너무 고맙다고 했는데, 둘째는 뭐가 고맙냐는 반응이다. 지금도 매일 호흡기 치료를 하고 있어서 그냥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 입원해 있던 거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기념으로 2주 후 주말에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에 가서 짜장면도 먹고, 월미도 가서 범퍼카도 타기로 했다. 둘째는 키가 안 되어서 혼자는 못 탔는데, 이젠 얼추 키가 된다. 

가능하면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했는데, 두피의 지루성 피부염이 최근 다시 심해졌다. 원래 그런 거 없었는데, 아버지 병실에서 간호하면서 병이 몇 개 생겼는데, 그 중에 사소한 게 지루성 피부염이다. 병원 다녀서 없어졌는데, 둘째 입원하면서 다시 생겼다. 병원에서도 이건 원인을 모르고, 완치는 어려우니까, 그때그때 다시 치료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한다. 젊은 의사가 너무 웃기고 유쾌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자기 동생도 증상이 나랑 똑같은데, 의사인 형 말 더럽게 안 처먹어서 도저히 나아지지가 않는다고 한다. 그때 의사가 약을 정말 왕창 처방해주면서, 또 증상이 생기면 적당히 조절해서 먹으라고 했었다. 결국 오늘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나는 스트레스 안 받는다고는 하는데, 아주 안 받는 건 아닌 듯 싶다. 

다음 번 책 제목은 “10대들이 살아갈 세상”과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 두 개를 놓고 꽤 고민을 했었다. 부제는 ‘노동 희소 사회’ 정도 된다. 좀 고민을 하다가, 그냥 정직한 제목을 달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나이를 처먹고 나니까, 내가 한국에 대해서 갖게 된 생각이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 것이다. 저출생은 여러 경로로 결국은 모두에게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지만 이걸 진짜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아직 못 봤다. 그게 누구에게 뭐라고 할 문제도 아닌 것 같다. 당장 생겨나는 문제들이 많은데, 이런 답 없는 문제를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결국 아무의 문제도 아닌 게 된다. 

학부 시절 홍성찬 선생의 서양경제사 시간에 들었던 얘기가 하나 생각난다. 로마 시절에 폭군 황제를 젊은 장군들이 물리쳤다. 그런데 그 장군들도 그날 집에 돌아가면 노예들이 몸을 씻겨 주었단다. 독재를 했던 폭군도, 그걸 뒤집어 엎은 장군들도 노예에게 일을 시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스팔타쿠스 반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깔았던 말이다. 그 얘기가 나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똑 같은 얘기는 아니지만, 유사한 얘기가 경제인식론에 나온다. 밤에 가로등 밑에서 동전을 줍던 신사를 길가던 어떤 소년이 도와서 같이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동전이 나오지 않으니까 소년이 여기에서 동전을 잃어버린 게 맞냐고 물어봤다. 신사는 동전을 잃은 곳은 저 쪽이지만, 그래도 가로등 앞에서는 뭐가 보이니까 여기서 찾고 있다고 했다. 그게 경제학의 문제라고 배울 때 너무 재밌었다. 우리는 풀어야 하는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풀 수 있는 수단이 있는 문제만 풀려고 한다. 통계가 있고, 방법론이 정립된 문제를 푸는 게 논문이다. 그렇지 않은 문제는? 어지간히 노벨상급의 의견이 아니면, 이미 잘 정립된 질문 말고는 논문 쓰지도 않고, 써도 받아주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애로우가 그런 뜬굼 없는 얘기들을 하면서 사람들 방향을 한 번에 바꾸는 역할을 했었는데, 애로우 죽고 나서는 그런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와 같다. “칠 수 있는 볼만 치고, 잡을 수 볼만 잡는다..” 경제학이 사실 그렇다. 풀 수 있는 문제만 푼다. 애로우는 박사 논문이 ‘불가능성 정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상징적이다. 

답 없는 질문은 원래 안 던지는 게 답이다. 나도 이제 나이를 처먹을 만큼 처먹었다. 뻔한 질문만 던지면서 남은 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어려운 게 아니라, 아예 답이 없는 질문을 던져도 좋은 나이가 되었다. 

며칠 전에 어떤 정부 연구원에서 신임 경제학자 모집 공고가 나온 걸 우연히 봤다. 아이만 안 아팠으면 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물론 내가 내면 욕 더럽게 처먹을 건데, 그냥 그렇게 출발점 위에 다시 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은 애 봐야 해서, 사실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둘째 등하교 이제 그만 신경 써도 될 나이면, 이젠 내가 힘들어서 그런 건 못 할 것 같다. 

칠 수 있는 공만 치고, 잡을 수 있는 공만 잡아야 할 처지에, 답이 없는 질문들만 찾아가는 내 삶도 참 팍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밋밋한 인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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