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학기 수업계획서가 쓰기 싫어서, 설연휴 마지막날 아내가 처가댁에 애들 데리고 가는 길에 따라 갔다. 오는 길에도 그냥 오지 않고 여기저기 들러서 쇼핑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저녁 때도 애들하고 놀면서 아무 것도 안 했다. 

평일에도 애들하고 뭐 좀 하다가 또 일도 좀 하고 그렇게 산다. 그대신 휴일에도 하루종일 노는 일은 잘 없고, 밀려 있는 걸 조금씩 처리하면서 살아간다. 결혼하고 이렇게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놀았던 거는 처음 본다고 아내가 말한다. 

수업계획서가 쓰기 귀찮다고 해봐야 얼마나 귀찮겠냐. 사실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쓰기가 어려웠던 거다. 그리고 어제, 오늘 지나면서 최종적으로 마음을 먹었다. 

요번 학기에는 간만에 학생들하고 책을 한 권 해볼까 하는 생각이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그렇게 수업 중에 학생들이 쓴 글들을 모아서 낸 책이다. 나름대로 생생한 목소리가 그냥 담길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품은 엄청 많이 들어간다. 학생들하고 돼지갈비 엄청 먹었다. 그리고 민감한 나이라서, 성인들과 작업하듯이 덤성덤성, 그렇게 넘어가면 서로 곤란한 일만 생긴다. 그때는 연세대하고 성공회대 학생들이 같이 작업을 했는데, 학기 끝나고 방학 때 하는 일종의 방중 프로그램 같은 것처럼 해서 정말 품 많이 들어갔다. 그때는 나도 아이들 태어나기 전이라서, 일반인들하고 사회과학 강좌 같은 것도 열고, 학교에서도 매번 목표를 하나씩 정해서 나름대로 하나씩 해보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지난 학기에 몇 명은 이 정도면 같이 책을 해봐도 좋을 정도로 글도 잘 쓰고, 생각도 깊은, 그런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큰 맘 먹고 한 번 시도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걸 막상 하려고 하니까,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일 큰 건 좌파 에세이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면, 그걸로 퉁치자고 하고 출판사에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좌파 에세이는 아직 자기 손익분기점도 간당간당해서, 그 여력으로 다른 책까지 끌고 다닐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들어가는 품은 품이라고 쳐도, 출판사에 어느 정도 기본은 해줘야 한다는 부담이 남는데.. 

그걸 넘기기 위해서는 또 품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야 하고, 한다고 해도 된다는 보장도 없고.. 

이런 연유로, 막판까지 마음을 못 먹고 질척질척거리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잘 될 것 같지 않다는 끈적끈적한 일들을 성공시키는 게, 이게 또 내가 잘 하는 일이다. 

밤에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안 한다고 하고 엎는 것은 몇 분 안 걸리는 일인데, 그게 힘들다고 이제는 어느 정도 시도해봐도 괜찮을 상황에서 먼저 덮는 건, 이건 또 내 스타일 아니다. 후퇴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데, 시작도 못했다고 하면, 이건 또 마음의 상처가 될 것 같다. 아직 그렇게까지 나이를 처먹은 것도 아니고. 

그리하야.. 일단은 하는 걸로 최종적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냥 시간을 때우면서 사는 삶은, 정말로 죽기보다 싫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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