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저녁 먹자마자 수영이고 뭐고, 그냥 골아떨어져서 자고 새벽에 깼다. 대선이 끝나고, 너무 무리했다. 내일 아침에는 강남에서 회의가 있다. 

둘째가 덥다고 계속 옷을 벗고 자더니, 숨쉬는 소리가 안 좋다. 검진키트.. 음성이다. 환절기 때마다 한바탕씩 하고 넘어가는 아이라, 이 시기면 골골 거린다. 아이 확진이면, 회의고 뭐고 일단 다 정지인데.. 이젠 어디서 누가 확진이라도 하나도 안 이상하다. 

습관적으로 적당한 노래를 틀었는데, 모차르트의 엘비라 마디건이 나왔다. 뭐라고 할까. 가슴 깊은 곳에서 편안함이. 손열음의 모차르트 피아노 콘서트를 틀었다. 모차르트 음악이 무슨 갑자기 창작 욕구나 그런 것을 막 터져나오게 하지는 않지만,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마음이 편해지기는 한다. 이 시대와는 상관 없는 음악이기는 하지만, 손열음의 손을 거치면 다시 우리 시대로 소환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마흔살이 되었을 때 mb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근혜 시대.. 돌이켜보면 나의 40대는 그렇게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증오하고,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갔는데, 그 시기에 한 일이 거의 없다. 하고 싶던 거, 원하는 거, 그냥 미루면서 10년을 버텼는데… 

과연 증오가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진정한 자세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거고, 내 삶은 내 삶이고.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논리가 얘기하는 거고, 윤석열 이후에 앞으로 벌어질 얼척 없는 일들을 생각하면, 모차르트 아니라 모차르트 할아버지가 와도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동안 탈계몽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누가 누구에게 뭘 가르친다는 말인가? enlightment라고 하는, 그런 계몽은 21세기에는 사라진지 오래다. 원로라고 하는 것도 사라졌다. 백기완 선생의 죽음이 상징적인 사건일까? 나이 많다고 해서 원로라고 하는 건 이미 옛날 얘기다. 지성이라고 하는 가슴 떨리는 단어가 있었지만, 그런 것도 의미를 잃은지 오래 되는 것 같다. 지성은 이제 ‘셀럽’으로 교체되었고, 셀럽은 지성과는 작동하는 방식이 많이 다르다. 

IMF 이후로 학자라는 말이 전문가라는 용어로 대체되는 시기가 있었다.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전문가주의도 이제는 사라진 것 같다. 전문가라고 해서 권위가 더 생기는 것도 아니다. 

한동안 이외수의 ‘존버’가 유행했다. 버티고 버텨서, 뭘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사보타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국방부의 시계는 그래도 째각째각 돌아간다는 말처럼 한국 자본주의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이윤 극대화 아니 지대 극대화를 위해서 째각째각 돌아간다. 집 들고 ‘존버’, 이 사람들이 결국 다 가져간 거 아닌가 싶다. 

세상에는 문제가 많다. 그런 건 언제나 많을 거고, 그래도 사람들은 또 하루를 살아간다. 헤밍웨위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막막한 바다 위에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삶, 도대체 위안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결과. 그래도 약간의 유머로 또 하루를 살아가는. 삶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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