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에는 애들 데리고 화곡동의 어머니에게 갔다 오려고 한다. 매주 갔었는데, 지난 주에는 일이 너무 많아서 못 갔다. 내일은 일산 친가에도 애들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아내도 뭔가 자기 일을 해야 하는데, 정말 이렇게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너무 긴박한 삶을 살게 된다. 

오늘 점심은 그냥 피자시켜 먹기로 했다. 둘째가 피자 죽어라고 안 먹는다고 했는데, 피자 먹고 싶어하는 큰 애를 위해서 통 크게 양보를 했다. 고구마 클러스터로 시켜주면 먹겠다고. 

어제 저녁에는 정말 오래된 선배들하고 술 한 잔 했다. 그 멤버로 같이 밥 먹은 게, 96년이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선배들이 어마무시하게 많이 도와주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냥 해주고, 괜히 해주고,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좌파 얘기는 나에게 있던 무거운 짐을 덜어낸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받기만 하고 내놓는 것은 없는 삶은 무거운 마음을 만든다. 

오래된 일이지만, UN에 p4로 갈 기회가 생겼었다. p4, p5, 그 주변에서 선택을 한 번 할 수 있었는데.. 결국 un은 안 갔다. 그리고 아내랑 결혼을 했다. 그즈음 친했던 친구들 두 명이 oecd로 갔다. 회의가 있어서 oecd 본부 갔다가 카페테리아에서 딱 만난. 게다가 두 명을 한꺼번에. 그때 봤던 친구 한 명이 지금은 인천대에 있던 옥우석이다. 

21세기는 un과 워드뱅크, oecd 그 근처에서 일하던 시기에 맞았다. 

그 시절에 이걸 내려놓고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그 생각을 진지하게 한 것은 부다페스트였던 것 같다. 일본의 에너지기구인 네도에서 작은 유람선을 빌려서 un 행사를 했다. 다뉴브 강 위의 유람선에서 이렇게 계속 사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화려하고 멋지기는 하지만, 나는 그냥 내 삶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삶은 그때 형성된 것 같다. 어지간하게 화려한 것은 그때 다 해본 것 같다. 그게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지낼 거면, 그래도 사회에 도움이 될 책 몇 권이라도 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황당한 사고 치지 말라고 다 말렸다. 나중에 산업부 차관이 된 오영호 국장이 몇 달만 기다리면, 외국에 자리 만들어서 좀 휴식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오영호가 한 얘기는 대부분 다 들으면서 살았는데, 그 얘기는 안 들었다. 

그만둔다고 하니까,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이 정말 싸늘하게 막 뭐라고 했다. 이 인간, 산업부 국장 시절부터 무지무지 도와줬는데, 햐, 진짜 싸늘했다. 이사장실을 나오면서, 그만두기로 한 게 잘 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 뒤로 녹색당, 민주노동당, 그런 춥고 배고픈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웃다가 가끔은 울고. 노회찬과 일을 한 것은 그 시절이었다. (노회찬 없는 세상은 그 뒤로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un 시절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10대들이 un의  p1, p2 혹은 p3에 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람으로 키우는 게 맞지 않느냐는 생각이 문득. 

un에도 un 룰이 있고, un 분위기가 있고, un이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게 있다. 여혐 남성, un 인터뷰 통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난민에 대한 un의 입장이라는 것은 뻔한 데, 난민에 대해서 여유로운 입장이 아니면 un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건 워드뱅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첨병이라고 하는 워드뱅크에도 그들이 원하는 보편적 인재상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냥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화에 앞장 선 금융자본주의 기구 정도로만 이해되는 imf도 실제로 그런 곳은 아니다. 거기도 기후변화를 고민하고, 빈국의 빈곤 탈출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un은 물론이고 국제 기구가 가진 전반적인 흐름이 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적 미국 중심 사고를 미국인이 아닌 사람이 하면 왕따 된다. 빈곤과 생태 그리고 젠더에 대해서 기본 소양에 가까울 정도로, 기본적인 스탠다드가 있다. 

선진국만 모인다는 oecd는 안 그럴까? oecd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국민으로서 인류 보편의 자세로 요구되는 것들이 있다. 

미국의 공화당 지지하는 젊은 사람들을 좀 알고 지냈던 적이 있다. 그들에게도 자기들끼리의 상식적 룰 같은 게 있고, 그들이 생각하는 도덕과 윤리가 있다. 

아주 오래 전 un 일하던 시절을 요즘 다시 생각해본 건, 그 안에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일하고 협업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 

un이 원하는 인재, 그런 생각을 좀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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