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하게 나는 장래 희망이나 그런 게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없었다.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요 몇 년 전부터 진로교육이라는 틀을 가지고 자꾸 꿈 얘기를 한다. 청소년에 대해서 욕할 때에도 "지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전형적으로 나는 그런 걸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뭘 하고 싶을까? 글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요즘 내가 많은 것을 내려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데, 사실 나는 뭐가 하고 싶고, 뭐가 되고 싶고,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
꿈 좀 없으면 안 돼? 뭘 하고 싶은지, 좀 모르면 안돼?
그 상태로 꾸역꾸역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뭘 하고, 그 다음에 뭘 하고, 이런 생각 자체가 없다.
인생은 계단이 아니다.
어쩌면 난 특출나게 운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이런 안이한 자세로 평생을 살았다. 안이함 만큼은 진짜로 일관된다.
나 정도 책을 읽었으면, “나는 책 읽는 게 제일 좋았다”, 이렇게 얘기할 법도 한데. 나는 지금도 책 읽는 게 싫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 그렇지만 읽지 않으면 밥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지금도 괴로운 걸 참고 읽는다. 이게 원래 내 성격이다.
내가 지킨 철칙 같은 거라면, “거짓말은 안 한다” 정도.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이런 걸 죽기 보다 싫어한다. 물론 거짓말을 아주 안 하지는 않는다. 꼭 해야 할 말이 아니면 입 다무는 것, 일종의 미필적 고의 같은 것이다. 싫어도 싫다는 얘기 잘 안 한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얘기 잘 안 한다. 그냥 참는다.
이런 게 내 성격이다.
2.
가끔 나도 나이 먹으면 뭐할까,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한다. 젊었을 때에는 막연하게 노르망디 해변이나 마르세이유 같은 거친 항구 도시 같은 데에서 노년을 보냈으면 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게 다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을 좋게 만들어 야지, 어디 좋은 데 혹은 맘에 드는 데 가서 살면, 내 인생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다.
유명한 사람들이 돈만 벌면 미국 가서 사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었다. 경험상 좀 지내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나만, 진짜로 ‘미쿡’에 가까워지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떠벌이는 꼴이. 그야말로 “아갈머리를 확 찢어버릴라.”
그렇게 하다가 결국 마음에 간 게, 경제다큐 같은 걸 만들거나 돕거나, 그런 일이다. 뭐, 전혀 돈 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열악하지만, 경쟁 같은 건 없다. 누군가의 밥벌이를 뺏는다고, 야박한 인간이라는 소리 들을 것도 없다. 그러다보니까 다큐 근처에서 지낸 게 그럭저럭 10년 가까이 된다. 기획까지 포함하면, 생각보다 좀 오래 되었다. 내가 tv에 처음 데뷔한 게, 지금은 없어진 ‘환경 스페셜’이었다. 그런 걸 누가 봐? 가을연가 찍었던 촬영감독이 왔다. 다큐가 늘 어려운 데라서, 틈 나는 대로 돕는다고 오는 아주 유명한 촬영감독들이 있다. 나중에 보니까, 진짜 영상 하나는 기깔나게 뽑은.
작년에 실제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로 다큐를 만들려고 했었다. 감독도 있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대충 갖추었는데.. 문제는 도니다. 여기저기 돈 달라고 머리 숙이면서 돌아다니다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충 살았을 지는 몰라도, 한 번만 도와 달라고 머리 숙이면서 살지는 않았다. 이게 된장.. 다 늙어서 이게 뭔 꼴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공무원들이 엄청 뺑뺑이 돌렸다. 얘 만나라, 재한테 부탁해라, 사실은 쟤가 담당이다.. 꾹 참고 머리 숙여야 하는데, 아이고, 이게 못하겠는.
물론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아주 없지는 않다. 뭐가 문제이고, 뭐가 고쳐져야 하는 것이고, 조금은 더 생생하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3.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지나면, 이제 등하교 정도는 자기네끼리 할 수 있다. 이제 4년 남았다. 아마 그 때 혹은 약간 넘으면 내가 쓴 책도 얼추 50권 정도 될 것 같다. 살짝 모자랄 수도 있고. 뭐, 숫자야 중요한 건 아니고.
그 때쯤 되면 나도 본격적으로 경제 다큐 같은 걸 해볼 생각이다. 그게 꿈이라서도 아니고, 소원이라서도 아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이런 걸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 대신, 욕할 사람도 없다. 그런 게 난 딱 좋다. 하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외국에서는 기업이 다큐에 돈을 대는 것을 기부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다. 우리는.. 택도 없다.
사회과학도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건 ‘저예산’으로 버텨볼 여지가 있다. 안 쓰고, 안 먹고.. 경제다큐는 최소한으로 한다고 해도, 돈이 조금은 든다. 그리고 다행히.. 그 정도 돈은 나에게도 있다.
10년 전 처음에 다큐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내 주변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뜻을 같이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주변에 생겨났다. 내가 엄청 선배 대접하라는 스타일이 아니고, 엄청 대접 받아야 한다는 것도 별로 없는.. 꾸역꾸역 꾸려갈 정도는 될 것 같다.
가난하고, 빡빡기고.. 이거, 딱 내 스타일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약간은 동어반복인데, 선진국이 된다는 것과 다큐 특히 경제다큐 같은 것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그렇다고 그게 그냥 되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는 시간과 땀을 바쳐야 한다.
사실 mb 시절만 아니었으면, 벌써 경제 다큐 여러 개 만들었을 것 같다. Mb 정권 초기, 영진위원장이 혹시 다큐 같은 거 할 생각 있으면 지원해준다고 했었다. 그렇게 특별한 생각이 있거나 꼬리표를 단 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mb 돈 받았다가 나중에 무슨 경을 칠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렇게 흘러서 인생이 여기까지 왔다. 나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살다 보니까 나에게도 약간의 로망 같은 게 생겨났다.
경제학자로 살았고, 평생을 계산표와 텍스트만 보고 살았다. 그리고 그 끝은 다큐로 하고 싶다.
물론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싶겠다는 인생은, 생각보다 재미 없다. 뭘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상하게 대충대충 계획 같은 것을 잡고, 거기에 묶여서 사는 인간들 꽤 봤다. 열심히는 사는데, 그 인생이 재미가 없다.
작년 초에 어느 대학교에서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응하지는 않아서,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고, 애 보면서 지금하는 것 건사하기도 힘들다.
정권이 바뀌면 좀 더 깊은 애기들이 사회 곳곳에서 오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된장. 몇 넘만 인생이 바뀌고, 철학에서 다큐까지, 잡지에서 그림책까지, 다 죽겠다고 곡소리다.
이번 정권이 약점은, 깊이와 다양성이 아닐까 싶다. 논의는 더 깊어져야 하고, 다양성은 더 넓어져야 한다. 그게 바로 지식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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