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50대는 요렇게 생긴 차와 함께 시작되었다...)

 

 

1.

50대 에세이 구상을 시작한 것은 2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20대나 30대에게 말을 거는 책들은 꽤 썼다. 그렇지만 내 또래 친구들에게 하는 얘기를 쓴 적은 아직 없다. 50이라는 나이를 맞고 나서, 주변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50대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또래들이 맞게 된 아주 특수한 50대는?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변화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들이 내가 답해보고 싶은 얘기들이다.

 

몇 가지 제목들이 있었는데, 현재로서는 '어영부영 50'가 될 가능성이 제일 많다.

 

부제는 결국 '개수작과의 결별'이 될 것 같다. 이 부제를 집어드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개수작? 과연 나는 그런 위대한 결별을 했을까? 그럼 너는? 그렇게 물어보면 별로 할 말은 없다.

 

뭔가 엄청나게 큰 결심이 있어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50년을 살았다면, 앞으로 평균적으로 지금까지 산 만큼, 50년을 더 살게 될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냥 하던 대로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다.

 

2.

이번 작업에서는 전체 글은 아니더라도, 주요한 글들은 블로그에 올리려고 한다. 어차피 후반에 빈 내용들을 채워넣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까지 전부 공개하기는 어렵다. 게을러서 그렇다.

 

그렇지만 초고 상태에서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넣을 것 뺄 것만이 아니라, 톤이나 내용 같은 것들을 좀 수다스럽게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좀 수다스러워도 좋을 것 같다.

 

블로그에 쓴 글을 책으로 옮기는 것 보다는, 책 초고로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동아리방이나 학회실에서 속닥속닥, 복닥복닥, 원래 우리 또래들은 좀 수다스럽고 말이 많았다. 87년과 시대의 아픔을 만나면서 깊은 얘기는 아예 하지 않거나, 술 마셔야 얘기하는 습관이 들었던 것인지도.

 

3.

과거의 얘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지만, 에세이집 전체의 톤은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안 그러면 뭐하러 골 아프게 이런 글들을 쓸 필요가 있겠나.

 

나도 오지 않은 미래가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얘기하는 4차 산업혁명 어쩌구, 그런 소리는 완전히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삶은 기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건 미래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존나, 열심히 살아. 안 그러면 너 뒤져. 그리고 니 자식도 뒤져.

 

이런 개소리들은 19세기부터 찬란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얘기는 좀 다르다. 좀 더 사회적이고, 좀 더 정치적인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안,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

 

50이 되어서도 원초적인 욕망을 아직 내려놓지 못했거나, 어린 시절의 공포감을 떨구지 못했다면...

 

100년 전만 해도, 이젠 삶을 내려놓고, 손자 보는 재미로 나머지 시간을 버틸 나이다. 의미 없는 것들은 내려놓을 나이도 되었다.

 

4.

하여간 언제까지 쓸지, 언제 나올지, 그런 건 아직 모른다.

 

메모 형식으로 준비한 것들이 좀 있기는 한데, 쓰다 보면 구성과 흐름이 생기기 때문에, 일단 흐름 가는 대로 맡겨놓을 생각이다.

 

하여간 초고는 3월 내에 끝내는 게 목표다. 그렇지만 그건 일단 세워놓은 기계적인 목표고. 중간에 뭔 일이 생기고, 뭔 변덕이 생겨날지, 알게 뭐냐다.

 

한 가지 생각은 있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 볼 생각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얘기를 중간에 세우거나, 멈추거나, 그렇게는 안 할 생각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도 이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혜는 벌써 내려갔고, 명박도 감옥 갈 것 같다. 그럼 세상 좋아질까? 그 다음에 내 삶은?

 

이런 얘기를 나도 고민해보려고 한다. 삶은 늘 그렇게 구질구질하다. 이번에는 구질구질한 얘기를, 가능하면 추접스럽지 않게 끌고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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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이재영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1.

전라북도 군산 바로 옆에 새만금이라고 부르는 바다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있거나 말거나, 그럴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을 배웠고, 내 삶이 형성되었다. 새만금 방조제 위에 활동가들이 올라갔고, 그 위로 물대포를 쏜 날이 있었다. 그 때 삭발하고 농성하다가 물대포를 맞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남인순의 남편이 맨 처음 빠졌다. 그 다음에 빠진 여성 활동가가 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그녀와 결혼하였다. 양 쪽 집에서 다 반대가 심해서, 잠시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조그만 여행용 캐리어 하나 들고 막 집에서 나온 그녀는 그날부터 나와 같이 살았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꼼짝도 못한다. 동거에서 결혼까지 그리고 지금의 삶까지, 내가 결정한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삭발하고 새만금 반대농성하던 그녀는 아름다운 것을 넘어, 진짜로 강하고 잘 나 보였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새만금에 걸었다. 삼보일배 행렬이 서울로 들어올 때, 같이 참여한 유일한 유명인사가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권영길이었다. 얼마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쉽지만, 거기까지. 그 일을 주선한 민주노동당 파트너가 이재영 정책국장이었다. 그 때 처음 만났다.

 

그와 나 사이에 오고 간 메일들은 실수투성이였고, 배꼽을 넘어 사람들 영혼을 쏙 빼놓은 사연들이 많았다. 이재영은 삼보일배를 '일보삼배'라고 썼는데, 그나 나나, 이 소소한 실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메일 그대로 삼보일배 활동가들에게 보냈는데, 난리가 났다.

 

"아니, 삼보일배가 아니라 일보삼배를 해야 권영길이 나온다는 거야?"

 

그들은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세 번 걸어가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도 힘들어 죽겠는데, 민주노동당은 이걸 더 높여서, 한 번 걷고 세 번 절하는 일보삼배를 기대하고 있다... 밤중에 급하게 전화가 왔다.

 

", 진짜로 일보삼배를 해야 하는 거야? 여기 스님들, 신부님들, 다 죽어!"

 

작은 실수 때문에 현장에서는 긴 토론을 했다. 그리고 일보삼배는 어렵겠다고 이쪽에 양해를 구하기로, 진짜 큰 맘 먹고 전화한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착했다. 

 

2.

이재영은 내가 하던 일을 많이 도왔고, 나도 이재영이 하던 일을 많이 돕게 되었다. 일보삼배 건 이후로도, 이재영의 손에 들어가면 실수든 기획이든, 심각한 일들이 왁자지껄한 코믹 에피소드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 몇 년간, 거의 대부분의 일을 이재영과 같이 했다. 여행도 많이 다녔다. 내가 송파구 살던 시절이었는데, 이재영네 집은 바로 옆 동네의 임대주택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당사가 MB가 집권할 때부터 쓰던 바로 그 한나라당 당사였다. 지금은 한나라당 당사가 된 그 건물 사무실 근처에서도 술 마시고, 집 근처에서도 술 마시고, 엄청나게 마셨다.

 

우리는 결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재영도 연애를 시작했다. 결국 둘 다 결혼을 했다. 송파구에 살다가, 강북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서로 얘기를 했다. 그래서 같이 송파구를 떠나서 서로 멀지 않은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이도 낳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했다. 이재영은 딸과 아들을 낳았다. 우리 집은 아이가 늦게 태어났다. 아들 둘을 낳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나 이재영이나, 삶이 거의 하나가 되다시피 했다.

 

나는 이재영의 부탁으로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이 2004년 총선을 준비했다. 그 때부터 몇 년간이 이재영과 그를 후배들이 정말로 꽃처럼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꽃처럼 아름다웠다. 스웨덴의 사민주의를 이상형처럼 생각했다. 나는 스웨덴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정말로 별처럼 빛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스웨덴이 만든 압솔류트 보드카를 사 주는 일 정도였다. 나는 스웨덴에 가 본 적도 없고, 그들만큼 소소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재밌는 개념들을 많이 만들거나 도입했다. 탈핵이라는 말을 그 때 처음 썼다. 그 전까지는 반핵이라는 말을 주로 썼다. 시민단체는 반대만 해도 되지만 실제로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공당에서는 반대만으로 안되고, 그 다음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탈핵이라는 용어를 썼고, 중간 위기 때 버퍼로 사용할 LNG 발전, 그게 내가 만들었던 기본안이었다. 환경성 질환이라는 용어도 그 공약집에서 만들었다. 그 전에는 공해병이라고 불렀는데, 일본 느낌도 많이 나고 환경의 폐해를 너무 좁게 해석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몇 년 후 환경부에서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썼고, 관련된 기구도 만들었다. 미세먼지 문제도 그 때 많이 논의했었다. 그런 이유로, 네 첫 책이 미세먼지에 관한 책이 되었다. 결국 그 얘기를 가지고 저자로 데뷔하게 되었다.

 

내가 새로 이사간 집은 마당이 있는 전세집이었다. 지금만큼 유명해지기 전의 노회찬과 이재영과 그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은 날이 있다. '불판'으로 약간 유명해진 노회찬이 그 날은 고기 굽는 걸 담당했다. 정말 잘 구웠다. 어쩌면 내 삶에서 그 날이 가장 행복하고 화사한 날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스필버그의 영화 <에이아이>에서 소년 로봇 데이빗은 단 하루, 엄마와 하루를 같이 지내는 선택을 한다. 나도 내 생의 단 하루를 고르라면, 그 날을 고를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초창기 시절에 주유소가 보이는 작은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시절 공식적인 상근자는 노회찬과 이재영 둘이었다.

 

3.

2004년 총선에서 딱 노회찬까지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한동안의 평온한 시기가 지난 후, 나중에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가고, 결국 몇 번에 걸친 분당으로 치닫게 되는 바로 그 사건이 시작된다. 이재영은 당 정책국장에서 해임된다. 그는 더 이상 당내 주류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재영 먹여 살리는 일이 당장의 시급한 일이 되었다. 이재영은 레디앙이라는 인터넷 신문의 기자가 되었고, 나는 레디앙에서 책을 냈다. 그렇게 같이 준비한 책이 <88만원 세대>였다. 원래는 좀 더 복잡한 계획이 었었는데, 이재영의 월급이 급하게 되면서 나도 급작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준비하자는 첫 얘기를 이재영과 했는데, 결국 책의 최종 편집도 그가 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책은 정말 잘 팔렸고, 이재영이 레디앙에서 월급 받는 데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는 매 주 여러 인사들을 만나면서 인터뷰 기사를 썼고, 나는 그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계속 책으로 냈다.

 

한동안 이재영은 방이동에서 여의도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그 때는 술 한 번 마시는 게 진짜 거창한 행사였다. 일단 여의도까지 차를 몰고 가서, 왜건형 차 뒷트렁크에 자전거를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서 자전거를 내려놓고, 다시 우리 집에 와서 차를 주차를 한다. 술 먹는 준비 작업까지 최소 두 시간은 걸리지만, 그 불편 정도는 돈이 없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재영은 거의 돈이 없었고, 나도 늘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술은 너무 먹고 싶은데, 둘 다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돈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고. 이재영이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고 은행으로 갔다. 은행에서 나오면서 진짜로 해사하게 밝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말했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지~!"

 

민주노총에서 그가 얼마 전에 했던 강연료 20만원이 막 입금되었다. 석촌호수 근처에서 진짜 재밌게 놀았다. 그 후로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 말이 나와 이재영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되었다. 책에 사인할 때, 이 글귀를 자주 쓴다. 그 시절, 나와 이재영은 지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상상을 싫어했다.

 

그 시절에 이재영과 했던 약속이 있었다. 우리가 아주 나이를 먹으면 무엇을 할까, 그런 얘기를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 정당도 자리를 잡고, 녹색당도 자리를 잡으면, 그 때는 정말 아무 고민 없이 공산당을 만들면 좋겠다는 얘기들을 서로 했었다. 조선 공산당 말고, 그냥 제도화되어서 약간씩 부패도 한 그런 유럽식 공산당, 그런 게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게 그와 했던 거의 유일한 약속이었다. 유럽에서 공산당은 그렇게 참신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는 기득권이기도 하다. 그 정도 정당 하나는 언젠가 한국에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4.

이재영은 공식적으로는 국졸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 검정고시로 나왔다. 대학은 서울대에 입학은 했지만, 운동 하느라고 졸업은 못했다. 최종 학력이 인정되지 않으면 중간 학력도 인정되지 않아서 자신은 국졸이라는 것이 이재영의 주장이었다. 물론 아무도 확인하지 못한 얘기다.

 

원래도 학력, 학벌, 그런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재영과 지내면서, 진짜로 나도 학교, 학벌, 학번, 나이, 이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런 거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어떻게 하면 웃길까, 어떻게 하면 웃을까, 그런 걸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소수파에서도 소수파, 마이너에서도 마이너, 그렇게 살았다. 환경운동은 좌파 내에서도 소수다. 진짜로 명랑한 삶은 이재영에게서 보았다.

 

이재영은 인민노련 출신이다. 말만 그래서 가끔 '인민'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천 지역을 의미한다. 워낙 이재영과 그의 친구들과 같이 다녔더니, 나중에는 나도 인민노련 계열로 분류되었다. 인천에 있던 공돌이 이재영이 울산 지역에 작전을 하기 위해서 처음 경주로 내려간 얘기는 감동적이다. 그 얘기를 가지고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이라는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표지에는 이재영과 노회찬의 얼굴을 넣고, 버스 광고를 꼭 하고 싶었다. 진짜로 노회찬 얼굴이 버스에 달려서 질주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책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비밀조직의 은밀한 사연들을 얘기해줄 사람이 없다.

 

2012년 대선을 며칠 앞두고, 이재영은 죽었다. 암이었다. 그 해 여름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우리 집 큰 애는 아빠의 친구 이재영을 한 번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의 주인공은 너무 일찍 죽었다. 이재영이 죽으면서 나는 공산당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나는 아무에게도 지켜야 할 약속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MB 시대를 버텨내지 못했다.

 

50이라는 나이는 그런 나이다. 정말로 친했던 친구나 지인 한 두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 그게 청춘의 꽃 같은 삶과 다른 점 아닐까? 내 친구들은 참 많이도 죽었다. 민주노동당에 재영이가 두 명이 있었다. 정책을 맡았던 이재영, 조직을 맡았던 오재영, 나는 두 명의 재영이와 다 친했다. 오재영은 다음 주에 술 마시기로 한 전주에 과로로 죽었다. 광우병 싸움으로 유명해진 수의사 박상표는 자살했다. 꽃 같고 아름다웠던 친구들이 50이라는 나이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끼리 이제 보이면, 너무나 친했던 친구나 지인이 한 두 명 죽는 건 술자리 화제거리 축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게 20대나 30대와 우리가 다른 점이다. 이젠 죽음에 좀 더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죽음도 준비해가기 시작한다.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가 진짜로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좋은 놈들은 벌써 다 죽었어."

 

이재영의 죽음과 함께, 내가 누렸던 명랑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한 문장만 가슴에 남았다. 그와 내가 같이 만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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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의 시대를 맞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장 큰 것은, 친구가 죽었다...)

 

앞의 글... http://retired.tistory.com/1931

 

2.

궁상도 끝까지 가면 미학이 된다. 궁상주의 미학, 진짜로 우리는 슬픈 척하고 못난 척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궁상이 통하지 않으면 갑자기 민중을 들이대며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극단적으로 낮은 곳으로 가거나, 극단적으로 높은 곳으로 가는, 그런 게 다 궁상주의 미학의 주요 요소들이었다. 궁상의 꽃은 '센치'였다. 이건 멋있다는 얘기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센치멘탈 블루스라는 표현이 있다. 센티멘탈의 센티를 ''리고 쓰면 안 된다. 그러면 '센치'한 느낌이 안 난다. 가을에는 본격 센치였고, 겨울에는 눈 와서 센치, 봄에는 남들 봄놀이 간다고 센치 그리고 여름에는 더워서 센치, 마이마이에 테이프를 꽂고 센치멘탈 블루스의 세계에서 나올 줄 몰랐다.

 

멋장이를 의미하는 댄디라는 단어는 90년대 중반 정도에 유행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최초로 댄디라는 단어를 달아도 좋은 정치인은 YS였을 것 같다. 하여간 웃겼고, 옷도 잘 입었다. 그리고 잘 생겼다. 해방 이후로 한 방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웃긴 정치인은 아직도 없었을 것 같다. 2012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된다."

 

그 때 우리는 YS가 한 칠푼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원래는 팔푼이라는 말을 썼는데[, 거기에서 1푼 뺀 것이 칠푼이다. 팔푼이만도 못하다는 YS의 말이 무슨 말인지, 진짜로 아무도 몰랐던 것 같다. 순실이 사건이 나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YS의 유머 속에 얼마나 큰 통찰력이 있었던 것인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궁상주의 미학이나 댄디즘 모두 IMF 경제위기 이전의 얘기다. IMF와 함께 궁상주의의 시대도 끝났고, 댄디즘의 시대도 끝났다. 흥청망청할 정도로 풍요를 누리던 한국 경제는 21세기의 문턱을 제대로 넘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의 미학은 길을 잃었다. 궁상도 아름다움의 한 방법이고, 댄디즘도 한 방법이다. 집단과 대중의 미학이 사라진 다음, 아름다움의 시대는 끝이 났고, 마케팅만 남았다. 궁상주의 미학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궁상을 마케팅이 따라왔다. IMF 경제 위기 이후, 마케팅이 아름다움을 지정했고, 사람들은 따라갔다.

 

몸에 맞지 않는 미학,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었다. 생각과 삶 그리고 아름다움이 제각각 놀고, 그것들이 제일기획 같은 기획사 데스크에서 만들어지면서 미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사라졌다. 궁상주의 미학이 멋지지는 않다. 그래도 그것에는 미학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있는데, 한국의 마케팅은 아직 미학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루이 비통에 입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 되어버린 마크 제이콥스의 그런지(grunge) 패션, 아직 우리에게는 너무 먼 곳의 이야기이다. 샤넬이 시대가 여전히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는 박근혜와 함께 난데없는 한복 세계화 바람이 불었다. 사회의 미학은 없고, 자본의 미학은 천박했다. 그러다 보니 시대의 미학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홍준표가 자기 네 당 행사인 '청년 아무 말 대잔치'에 가서 진짜 아무 말을 막하고 왔다.

 

"시골 가서 개량한복 입은 사람은 전부 좌파라고 보면 된다."

 

홍준표가 하고 싶은 말의 느낌은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여당이던 시절에 추진하던 한복 세계화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말이다. MB 때는 한식 세계화를, 박근혜 때는 한복 세계화를 정부에서 세게 밀었다. 홍준표는 자기 편 쪽으로 드리볼하고 들어간 셈인데, 나는 홍준표의 미학은 무엇인가,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름다움, 과연 이 시대의 미학은 무엇일까?

 

3.

30대가 되었을 때, 나는 궁상은 궁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상명하복이 너무너무 싫어지기 시작했고, 엄숙한 것이 견디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센치는 청승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멋이 없던 것이었나, 아니면 21세기에 들어오니까 멋이 없어진 것일까? 청승맞은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원래 감성하고도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만약 그 시절 내 삶이 편안했더라면 그냥 익숙한 감성과 미학을 고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는 일에 내가 만족할 수가 없었다. 지금 돌아 보아도 그 시절의 하루하루는 전부 다 지워버리고 싶다. 그 시절에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해도 힘들고 지겨웠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많은 것들이 아련해지면서 그리워지기 마련인데, 지금도 그립지 않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는 한다. 악몽이다.

 

1년만 더 채우고 일했으면 기술사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시점이었다. 다른 건 아쉬운 게 없는데, 기술사 자격증을 볼 자격을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지금은 한국에너지공단으로 이름을 바꾼 에너지관리공단에 결국 사직서를 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지, 뭘 구체적으로 생각해놓은 것은 없었다. 살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도 내린 결정이 가끔 있다. 그래도 이 때 사직서를 낼 때처럼 아무도 찬성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회사의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내 처지가 그렇게 비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고 싶었다. 왠 만큼 사는 것, 적당히 누리는 것, 그게 아니라 행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행복? 아직도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엄청나게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쨌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3급 부장에서 2급 부장으로, 슬슬 승진이 기다리고 있던 시점에 내가 내린 결정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다. 아주 가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했다. 시민단체와 일했고, 녹색당 만드는 일을 했다. 그리고 친구가 도와달라고 해서, 그 시절의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할 때 같이 했었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물론 폼은 안 나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행복했다. 내가 왜 공부를 했는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좀 알 것 같았다. 내 주변에는 환경운동 등 시민단체와 민중운동 혹은 노동자 정치를 하는 수많은 도시빈민들로 넘쳐났다. 그들과 무엇인가 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혼도 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지만, 나는 건강을 조금 잃었다.

 

그 때 내 삶의 기조가 된 것이 명랑이었다. 명랑하고 싶었고, 명랑한 일만 하고 싶었다. 명랑하게 된 것인지, 명랑을 추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궁상주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 시절에 쓴 글을 모은 책이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아직 30대였다. 궁상주의 미학으로 30대를 시작했지만, 30대를 마칠 때에는 명랑주의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댄디즘 같이 개성과 화려함을 추구할 형편은 못 된다. 그건 잘 생기고, 잘 난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울릴지도 모른다. 남 앞에 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누군가를 이끄는 것도 행복하지 않다. 그냥 나는 20대를 보내면서 내 몸에 꾸질꾸질하게 배어있던 궁상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싶었고, 센치해야 멋져 보일 것 같은 착각을 줄이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명랑은 그 중간에서 찾아낸 타협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민단체와 질 것이 거의 뻔한 싸움에 앞에 서 있을 때,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에 국회의원을 만들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이 명랑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명박이라는 질척질척거리는 시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30대의 미학을 내 삶의 마지막까지 끌고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진지하고 엄숙하고, 훈계조라고 하더라도, 난 혼자서라도 충분히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혼자 놀기는 진짜 잘 하는 일이다. 명박 시대, 불의 혹은 부정, 부패, 그런 단어로 이해하기 참 어려운 시대다. 거대한 늪같이 질척거리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기 전에, 친구가 죽었다. 나의 명랑 시대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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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치멘탈 블루스, 궁상의 시대

 

 

 

1.

몇 미터 앞에서 또래 친구가 죽었을 때의 그 느낌이 그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학교마다 이렇게 저렇게 친구나 동료가 죽었다. 분신도 많았고, 의문사 얘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80년대는 그렇게 시대의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학생운동에서 일찍 나와서 민중운동을 시작했다. 순전히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버스 노동자들 소위 도시 빈민들에게 경제학을 같이 공부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서울민중연합이라는 단체가 막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래 봤자 스무 살인데, 집 나와서 그런 일을 하던 게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뭘 알았겠나? 어쨌든 버스 노동자들을 비롯한 소위 도시 빈민들의 삶을 그 때 보았다. 내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그렇게 생겨났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언제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만히 있기가 좀 어려웠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삶을 살까? 남들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마도 비슷한 일을 했을 것 같다. 너무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친구들끼리는 친하게 지냈을까? 생각이 달라서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고, 분파가 달라서 또 서로 상처내면서 싸웠다. 군인들하고도 싸우고, 친구들끼리도 싸웠다.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서로들 싸웠는지 잘 모르겠다.

 

실연하고 연인을 떠나 보내는 노래, 분노를 더 키워서 언젠가는 이기자는 노래, 노래도 딱 두 종류만 있는 것 같았다. 책도 감당할 수 없게 두껍고, 어려운 책들만 읽었다. <자본론>은 약과에 속했다. 이건 가감승제만 알면 읽을 수 있었다. 문과쟁이에게 수학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재미는 있지만, 즐겁게 하기가 좀 그랬다. 그래도 대학원에 갈 생각도 있고, 기회가 되면 박사까지 진학할 생각이 있었으니까 수학을 틈틈이 공부했다. 경제학과는 수학만 웬만큼 하면 뒤가 너무 어렵지는 않다. 그래도 선형대수나 수리통계학 같은 것은 좀 낫다. 뭘 안다고 헤겔의 <정신현상학> 같은 책들을 그 때 보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틈틈이 본 철학 책들이 대부분 전화번호부 같다. 박사 과정 때 도움이 되기는 했는데, 그 나이에는 진짜 무리였다.

 

연애도 안 했다. 안 하려고 안 한 건 아닌데, 짝사랑이 길어졌다. 이래저래 늘 슬펐다. 해 본 적도 없는 연애인데, 누가 떠났다는 노래를 들으면 진짜로 귀에 짝짝 붙었다. 그리고 그렇게 슬픈 사랑을 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고독한 전사, 이런 게 멋져 보였고, 실연의 아픔을 딛고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어깨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아마 요즘 식으로 정신진단 받으면 다들 우울증 중증 정도 나왔을 것 같다. 즐거우면 안될 것 같고, 웃어도 안될 것 같았다. 다들 골 난 듯한 표정을 했고, 누가 누가 더 힘드나, 이런 걸 가지고 경쟁을 했던 것 같다. 거대한 못난이 게임, 그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위로 같은 건 할 줄 몰랐다. 누가 힘들다고 하면, "내가 더 힘들어", 그렇게 내민 손을 탁 쳐버리는 짓들을 하고는 했다. 누가 힘들다고 하면, 그러니, 정말 힘들겠구나, 그런 말을 하는 걸 배우지를 못했다. 나이 먹어서 꼰대가 될 준비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닐까?

 

덕분에 실연을 노래한 가수들이 돈을 벌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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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50살이 되었다 - 버전 2

 

1.

스무 살, 20이라는 나이는 나에게 강렬했다. 10대 중반이 지나면서 20대가 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20대가 왔을 때, 그 나이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뭘 하는지는 모르고, 그야말로 죽지 않기 위해 살았던 것 같다. 30대는 20대의 연장과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 30대라는 나이를 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청년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40, 마흔이라는 나이를 맞았을 때, 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 완전히 망했다. 박근혜, 아주 이상한 사람이 그 다음 5, 아니 4년을 더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나의 40대는 완전히 지워진 것과 같아졌다. 하는 일도 없고, 하려고 하는 일도 잘 안 되고, 그냥 버티고 지내기도 쉽지 않았다.

 

40대 마저 끝났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을 불사를 듯이 살았던 20이라는 나이로부터는 너무 멀리 왔고, 그렇다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 뭘 해야겠다고 뚜렷하게 생각해둔 것도 없다.

 

독설가로 유명했던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있다고 하는 유명한 말이 생각이 났다.

 

"어영부영 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냥 버나드 쇼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나의 50대는 이렇게 어영부영하는 동안에 갑자기 오게 되었다. 만약 한국을 강타한 거대한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50이 되었는지, 이런 것도 생각해보지 않고 그냥 넘어갔을 것 같다. 그렇지만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공교로운 일이지만 내가 50, 쉰이라는 전혀 준비하지 않은 나이를 맞았을 때 정권이 다시 바뀌었다. 순실이 사건이 터져 나왔고, 촛불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정권이, 크게 한 번 바뀌었다. 이렇게 간절하게 정권이 바뀌는 것을 바랬던 것은 87 12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간절한 마음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진보와 보수라는 잣대만으로 세상이 잘 설명되지도 않고, 또 그런 기준만으로 삶을 살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지는 오래 된다. 그렇지만 사회와 경제를 분석할 때, 어쨌든 많은 여론 조사를 참고하게 된다. 여론조사를 읽는 여러 가지 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직업별 구분이다. 그리고 그걸 보수라고 읽든 혹은 우파라고 읽든, 직업 분류에서 기본적인 축을 형성하는 세 가지 직업군이 있다. 농민, 전업주부 그리고 자영업, 이 세 가지의 직업 분류는 한국에서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기준이 연령별 기준이다. 연령은 보통 50대를 축으로 진보/보수가 바뀐다. 그 위로는 아주 보수적이고, 그 밑으로는 진보적이다. 물론 직업군이든 연령별 기준이든, 평균 개념이라서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던 2012년 대선에서 50대 투표율은 82%였다. 가공할만한 투표율이었다. 그 때 가장 적은 투표율을 기록한 20대 후반은 65.7%였다. 흐름만을 놓고 보면 20대도 덜 투표한 것은 아니다. 3명 중에 2명은 투표를 했으니까, 절반이 할까 말까하던 이전 추세에 비하면 늘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2012년 한국의 50대는, 후덜덜, 무시무시했다. 한 세대가 80% 이상 투표한 것이다. 정말 아픈 사람, 급하게 해외 체류 중인 사람, 이런 긴박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 말고는 거의 다 투표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호카이도나 동경에서 했던 국제 세미나에서 이 얘기를 했더니, 외국의 전문가들이 내가 준비한 자료들을 다시 부탁했다. 82%, 쉽게 보기 어려운 투표율이다. 2012년까지 50대 위와 아래, 한국은 그렇게 나이를 경계로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명실상부, 50대는 한국의 주인이 되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한국의 당정 그리고 여야가 가장 먼저 합의해서 시행한 일은 55세였던 정년을 60세로 올리는 일이었다. 그 때 그 유명한 소위 58년 개띠들이 55세였다. 각 직장에서 정년을 맞은 58년 개띠를 비롯한 50대는 한국을 잠시 움직였다. 한국에서 여당과 여당이 이렇게 금방 합의에 도달한 것은, 정말로 처음 보았다. 정치인은 아무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급행열차처럼 속전속결로 행정기구들이 움직였지만, 58년생들이 혜택을 보지는 못했다. 시행을 위해서 약간의 시기가 필요했고, 민간 회사들까지 기준을 적용하려면 조금은 더 협의가 필요했다. 58년 개띠들이 제도의 수혜를 받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공기업 등 많은 기구의 정년이 더 위로 올라갔다. 그 시절의 50대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아냈다.

 

그리고  다시 5년이 흘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는 한국의 50대가 변했다. 그 사이에 내가 50대가 되었다. 내 친구들도 50대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일방적으로 박근혜를 찍는 50대는 아니다. 전두환이 만든 정당이 민주정의당, 민정당이다. 그 후 민자당 시절을 거치고 다시 천막 당사 이후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바꾸고 또 바꾸고, 이름 좀 익숙해질 때면 바꾸었다. 지금은 자유한국당이라는 이름을 쓴다. 얼마나 이 이름이 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나나, 내 친구들이 전두환이 만든 정당에 투표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대충 살았고, 내 또래의 친구들이라고 그다지 열심히 산 것 같지는 않다. 욕 먹지 않을 정도만 해도 괜찮을 텐데, 그 정도도 못 산 녀석들도 많다. 그렇지만 전두환과 그를 승계한 사람들에게 투표하기는 쉽지 않다. 그건 큰 결심이 필요하다. 워낙 강렬하게 지냈던 순간이 있어서 그렇다. 나와 내 친구들이 공유한 기억은 아주 강력하다.

 

한열이가 쓰러지던 날, 나는 몇 십 미터 뒤에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며칠간, 한열이 아버지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그 시절의 강력한 기억을 잊기는 어렵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있던 친구도 있고, 조금 더 먼 곳 혹은 아주 멀리 떨어진 부산과 광주 같은 곳에 있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로부터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던 6개월 정도의 기간, 한국에 살았던 많은 그 또래의 사람들은 그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런 정도의 강렬한 기억은, 잊혀질 종류의 성질은 아니다. 물론 그 순간을 부정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입장을 바꾸거나,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망각되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다.

 

한열이가 살아 있었으면 지금 50이 되었을 나이다. 그는 떠났고, 나는 살았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엄청난 관계였던 것도 아니다. 위아래 층에 동아리 방이 있던 사이라서, 기타 빌려오고 빌려가고, 그런 선배들 심부름하면서 잠시 마주쳤던 정도다. 그래도 인근 거리에서 같이 생활하던 친구가 몇 십 미터 앞에서 최루탄 파편을 맞고 눈 앞에서 죽던 순간을 잊기는 어렵다. SY44, 그 때 경찰이 썼던 최루탄 발사기의 이름을 잊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도 주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영부영, 그 시절에 한열이와 같은 또래로 그 시대를 보냈던 사람들이 50대가 되었다. 50, 한국 정치에서 연령에 따른 세대 연령이 강력해지면서 핫코너가 되어버린 사회경제적 분류 기준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난공불락 같던 50대가 변했다. 물론 사람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냥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내가 50이 되었고, 내가 한국에서 가장 보수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바로 그 나이 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누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기획하거나 준비한 것도 아니다. 그냥 시간이 흐르다 보니,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변화가 공교롭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엄청난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전두환의 민정당을 계승하는 정당이 대규모로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다시 집권을 하기는 쉽지 않다. , 그럼 다 된 건가? 조금 빠르든 조금 늦든, 세상이 결국에는 좋아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3.

별로 좋아하는 표현도 아니고, 그렇게 선호하는 분류도 아니지만, 어쨌든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 소위 '80학번들'이 지금부터 한국의 주류 집단이 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지금 한국 사회의 설계 구조상, 50대가 사회 대부분의 조직에서 주요한 직책에 있을 것이라는 점은 동어반복적인 얘기다. 크게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다. 정년 되고도 하는 기관장과 같은 일부 자리들이 70대에게까지 개방되지만, 이건 박근혜 시대에 아주 특수하게 열린 공간이다. 대학의 교수만 정년이 65세로 조금 더 늦지, 한국의 많은 기관들은 50대에 올라갈 수 있는 거의 마지막까지 다 올라가고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민간 기업들은 이미 50세 전에 자신의 거취를 선택하도록 종용하는 분위기다. 말이 좋아 선택이지, 이미 그 시점에 자신이 더 올라갈 수 있을지 아닐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된다.

 

좀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한국에서의 삶은 최소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50살에는 변동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 버렸다. 더 위로 올라갈지,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다니던 직장에서 물러나서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는 거의 결정이 끝난 나이다. 물론 더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언제라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확률이 아마 가장 낮은 나이가 50대일 것 같다.

 

우리가 가장 평등한 것은 태어났을 때 아닐까? 처음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 그 때만큼은 우리는 평등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점점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된다. 21세기 한국, 삶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삶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그게 한국적 삶이다. 60이 넘고 은퇴를 하면 우리는 다시 조금 평등해진다. 이제는 몸도 아프고, 기력도 떨어진다. 남은 격차는 그야말로 돈 밖에 남지 않는다. 그 때부터 점점 더 평등해져서 죽음 앞에서 다시 완전히 평등해진다. 물론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남겨진 사람들의 삶이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건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눈 감는 순간, 자신이 평생 쥐고 있던 것들,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평등해지고, 죽고 나면 이제 신 앞에 완전히 평등해진다. 살아서 뭘 좀 열심히 하면 신의 눈에 좀 의미 있어 보일까? 공평하다. 목사와 같은 사제나 스님들이 일반인들 보다 천당에 갈 확률이 높을까? 모를 일이다. 신의 눈 앞에서는 다 부족한 존재들이고, 죄인들 아니겠는가? 거기서 거기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서 평등한 상태로 돌아간다.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산 사람들이 뭔가 하기는 한다. 어떤 사람은 동상이 되고, 어떤 사람은 건물이 된다. 그렇지만 그건 다 산 사람들이 자기들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이미 죽은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2017년 가을, 추석 때에 벌어진 모녀간의 작은 에피소드가 많은 사람을 웃겼었다. 엄마는 제사를 지내는데, 이미 다 큰 딸은 별로 제사 지내는 일을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상을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고 어머니가 말을 했다.

 

"엄마, 조상한테 복 받은 집은 지금 다 공항에 있어. 추석 때 외국 못 가고 제사 지내는 집들은 다 조상 복 없는 집들이야."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집단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제사를 열심히 지내는 것과 소위 조상의 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열심히 제사 지내는 사람들은 여전히 열심히 제사를 지내지만, 진짜로 조상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제사 따위는 지내지 않고 긴 연휴에 외국을 나가게 되는 것 아닌가? 한글날과 개천절 그리고 대체 휴일까지 끼어서 열흘 간의 긴 연휴였다. 꼬박꼬박 제삿밥 얻어 먹으면서 후손들에게는 아무런 복을 주지 않는 조상과, 복은 이미 줬고 제사 같은 건 괜찮으니 해외여행이나 다녀오라고 한 조상, 난데 없이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조상을 놓고 어느 조상이 더 나은 것이냐, 품평회를 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떠난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은 결국은 산 사람들의 일이다.

 

평등하게 태어나서 결국 평등으로 돌아가는 그 한 가운데에서 격차가 가장 큰 시절, 그게 한국의 50대일 것 같다.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가 가장 큰 나이이기도 하고, 앞으로 좋아질 일만 남은 사람과 나빠질 일만 남은 사람들이 같은 나이로 분류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이미 많이 온 사람은 지금까지 온 탄력으로 더 멀리 갈 것이다. 그리고 아직 해놓은 게 거의 없는 사람은, 지금까지 오던 흐름대로, 이제는 더 나빠질 일만 남았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미 덩치가 너무 커져버렸다. 방향을 바꾸기 어렵고, 잘 바뀌지도 않는다. 그리고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를 중심으로 고민을 하기도 쉽지 않다. 식구들이 늘었고, 자신의 존재는 그렇게 큰 의미도 없다. 아이들 생일은 알아도 자기 생일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그게 50대다.

 

4.

나에게 50은 어영부영 왔다. 결혼하고 9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4, 6, 두 아이를 돌보다가 갑자기 50이 와버렸다. 나를 돌아보거나 나에 대한 준비를 할 시간이나 여유는 전혀 없었다. 곤죽이 된 몸으로 그냥 쓰러져 자다 보면 다음 날이 와 있다. 하루하루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하루를 보낸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은 뭉텅이로 지나간다. 일 주일, 한 달, 그런 시간의 구분도 거의 의미가 없다. 50이 될 때까지 살아 남았다면 누구나 50이라는 나이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 식구들과 혹은 직장에서 복닥거리느라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아무 사건도 아니다. 백일, , 이렇게 태어났을 때 기억하게 되는 날짜들이 몇 개 있다. 주민등록증 발급일, 첫 투표일, 성년식, 청년이 되면서 기억할 만한 일이 또 몇 개 있다. 그리고 점점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게 되다가 환갑이 되면 다시 아직도 살아있는 것을 기념하는 날을 갖는다. 50,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무 것도 아닌 나이다. 아직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그 중간에 끼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 그랬다. 한 마디로, 별 것 아닌 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가 50이 되었든 말든, 50세 생일이든 아니든,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아무 사건도 아니다. 심지어 50에는 연애도 드물다. 서로 사랑해서 생일 선물을 하면서 전혀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그런 일도 아주 드물다. 우리의 일상에서 놀랄만한 일은 그렇게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50, 더더군다나 그렇다.

 

그러나 개체로서의 50대의 소소함에도 불구하고 집체로서의 50대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50대는 사회경제적 범주 즉 집체로서 언제나 보수적이었다. 그건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고, 변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50대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위와 그 아래를 살피고, 그 다음에 각 직업별 선호도 같은 것들을 가감하면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선호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보수의 기준점, 그것은 50대였다.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화도 그렇다. 굳이 좌우 혹은 진보나 보수라는 기준이 아니더라도, 문화 분석 등 많은 것의 변곡점이 50대다. 갤럽에서 매년 문화 분야에 대한 조사를 한다. 50대는 몇 년째 <안동역>에서 1위를 고수하는 중이다. 역주행했다. 나는 안동역이라는 노래를 모른다. 내 친구들도 거의 모른다. 50대는 트로트와 노사연을 좋아한다. 20대는 댄스그룹을 좋아한다. 트로트와 댄스, 힙합과 노사연,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흐름은 비가역적일 것이다. 40대로 내려가면서 트로트에 대한 선호가 급격히 떨어지고, 30대 이하에서 트로트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50대에서의 트로트 선호도 빠른 속도로 내려갈 것이다. 트로트의 시대가 한국에서 다시 올 가능성은 없다. 2017년 한국의 10대들이 가장 선호한 가수는 방탄소년단과 레드벨벳이다. 그들이 40대나 50대가 되었을 때 트로트를 집단적으로 선호할 가능성은 제로, 0이다.

 

트로트와 홍준표가 이끌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문화적이고 정서적으로 같은 추이를 따라간다. 트로트로 상징되는 보수의 본진, 그 상징이 태극기로 바뀐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다. 그들은 늙어가고 있고, 연령적으로 확산되지 않으며, 트로트와 함께 주변부화하고 있다. 트로트가 사라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연말에 가요대상을 타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나와 친구들의 50대는 어영부영 왔다. 그렇지만 이 흐름은 지금까지의 한국을 쥐고 흔들었던 보수들이 중심지에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되는 큰 흐름의 첫 신호일 뿐이다. 87년을 기점으로 하면 30년 만에 노태우의 승리가 박근혜와 홍준표의 패배로 나타난 것이다. 한 세대를 보통 30년 기점으로 잡는다. 한 세대 이후, 최소한 정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흐름을 가지게 되었다.

 

시작은 어영부영이지만, 그 효과도 어영부영, 그렇게 잔잔한 것은 아니다. 정권을 넘기는 것은 10년에 한 번 정도는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흐름은 그렇게 10년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러시아 경제학자 콘트라티에프가 얘기한 장기적 흐름 즉 장기 파동은 50년을 주기로 움직인다. 설마 이 흐름은 50년짜리? 지금의 50대가 50년 후에도 살아있을까? 어쨌든 20세기 이후로 경제는 50년이 아니라 30년 주기로 움직인다고들 얘기한다. 30년이든 50년이든, 경제적 흐름에서의 장파동이라면 한국에서 보수의 본진은 그야말로 괘멸적 타격을 받는다. 우째스까! 다행인 것은,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전두환 이후로 한국을 움직인 사람들이 트로트와 같은 상징에 갇혀 소멸의 위기를 겪는 것은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다. 홍준표나 그를 승계한 사람들이 걱정할 문제다. 우리가 해야 할 걱정은 좀 다른 문제다. 몇 년째 한국 50대들이 최고로 선호했던 노래 <안동역>을 사랑하던 그들과 함께 소멸할 것이 아니라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의 50대가 선호하는 노래가 트로트 <안동역>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로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트로트나 김광석이나, 어차피 방탄소년단과 너무너무 먼 곳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20대의 눈으로 볼 때, 그야말로 트로트나 김광석이나, 어차피 거기서 거기다. 아저씨인 것은 마찬가지고, 꼰대인 것도 마찬가지다.

 

5.

10년 전의 50대와 앞으로 올 50대는 정치적 성향도 다르고 문화적 감성도 다를 것이다. 우파 시대에서 좌파 시대로의 전환 혹은 보수 50대에서 진보 50, 엄청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건 그냥 하는 얘기다. 청년들에게 존경 받지 못하는 50, 아니 존경은 고사하고 혐오라도 덜 받는 50, 이건 이제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있는 꿈이다. 그렇다. 그냥 우리는 아재를 뛰어넘어 그냥 개저씨로 늙어갈 확률이 높다. 기다리면 세상은 좋아질까? 먹이 피라미드의 맨 위에 있는 아저씨들이 그냥 잘난 척하면서 뒤로는 자기 것 다 챙기는 사회가 좋아질까? 그럴 리가 있는가?

 

한동안 50대들은 전쟁에서의 맹활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지금은 학생 운동에서의 이력을 내세운다. 맹활약했던 50, 이런 건 바뀐 적이 없다. 프랑스와의 차이라면 일제와 싸웠던 맹활약을 자기가 존경 받아야 하는 이유로 내세우는 50대가 없었던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일제가 일찍 망할 줄 알았나?" 대표적 친일파로 사람들이 분류하는 춘원 이광수가 남긴 말이다. 춘원은 50년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죽었다. 그 친일파들이 빨갱이 잡은 전설을 가지고 평생을 우려 먹으면서 살았다. 그게 이 나라의 전통이 되었다. 50이 되면 자신이 젊었을 때 맹활약한 전설을 우려 먹으면서 힘과 권력을 틀어쥐게 된다. 해방 이후로 이 흐름은 크게 바뀐 게 없다. 전쟁에서 민주화까지, 메뉴만 바뀌었지, 50대가 된 기득권이 사회가 자신들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20대 청년들이 50대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뭔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50대가 바뀐 것일까? 개인으로서의 50, 삶의 방식으로서의 50대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누구나 50대가 되면 기성세대가 되고, 자식 걱정하는 부모가 되고,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소소한 부정 같은 것은 쉽게 눈 감는다. 그리고도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존경 받는다. 그게 한국의 50대가 살아간 방식 아닌가? 한국에서 삶의 방식으로 50대는 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바뀐 건, 20대가 바뀌고 30대가 바뀐 것인지 모른다. 그들의 이런 변화도 너무 당연하다.

 

당신이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이렇게 꼰대 짓이야? 재수없어, 꺼져버려.

 

50대가 존경 받는 시대? 그런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나이 먹었다고 젊은 시절의 전공을 전설처럼 덕지덕지 붙이고 존경을 희구하는 사회가 꼭 좋은 것도 아니다. 어영부영 50대가 왔다고, 남은 50대를 어영부영 살면 개인도 불행해지고, 집단도 불행해진다.

 

386, 우리가 서른이던 시대, 이 사회는 우리를 그렇게 불렀었다. 30, 80년대 학번, 60년대생, 그런 의미다. 이제 우리가 50대 되었다. 30대라는 숫자는 빼고, 86세대라는 말로 부른다. 좁게 보면 먼저 국회로 간 '의장님들' 얘기하는 거고, 넓게 보면 그 시대의 운동권 대학생 정도 된다. 이제 우리가 50이 되었다. 곧 사장들도 될 것이고, 장관도 될 것이고, 기다리면 대통령도 나올 것이다. , 이제부터 세상 좋아질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미워하면서 닮아간다고, 우리 위의 50대가 박정희와 싸웠다면, 우리는 전두환과 싸웠다. 그러면서 우리는 음침해졌고, 숨길 게 많아졌고, 군인을 닮아갔다. 그렇게 전사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다, 그 긴 시기를 지내놓고 보니까, 엘리트 의식에 쩔게 되었고, 하나 같이 마초가 되어버렸다. 남에게 가르치는 것, 그게 몸에 배었다. 이런 된장!

 

우리의 경제적인 자화상은 동창회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사실 동창회에 몇 명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나오는 친구들은, 성공했거나 그래도 먹고 살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힘들고 어려운 친구들은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은 분명히 아니겠지만, 이미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위계가 동창회에 가면 너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가? 다 같이 잘 사는 사회, 나눔과 희망이 있는 사회, 우리들끼리도 그렇게 못한다. 새로운 50대가 이 사회의 주류가 되면 뭐가 바뀔까? 바뀌긴 뭐가 바뀌겠는가? 술자리에서 영웅담의 레파토리가 바뀔 뿐이지, 뭐가 나아지겠는가? 빨갱이 잡던 군인과 검사들이 출세하던 시절에서 87년에 맹활약하던 사람으로 주빈만 바뀌는 것이지, 지금 같아서는 구조적으로 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삶이 그렇고 경제가 그렇다. 물론 기분은 좀 좋아질 수 있다. , 세상 좋아지는구나, 그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제는 과학이다. 기분만 가지고 세상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이미 50살을 살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50년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더 갖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아직은 아이들을 낳고 키웠다. 경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들에게 더 많이 주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에게 탐욕이 시작되고,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가 50대일 동안 한 푼이라도 더 긁어 모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소소하지만 집단적인 부패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가면? 많은 것들이 어려워지고, 다시 보수의 시대가 돌아올 수도 있다. 5년 전 대선이 끝나고 보수는 영구집권을 꿈꿨다. 박근혜가 무능하고, 순실이 황당했던 것, 그건 결과일 뿐이다. 한국의 보수가 대충 살고, 자기들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그들의 뿌리까지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지금의 50 386도 그들의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우리를 견제할 별 다른 세력도 없다. 더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영부영 50살이 되었다. 그러나 남은 50대를 어영부영 보내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언젠가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50대를 살고 싶지는 않다. 그게 내가 맨 처음 했던 생각이다.

 

우리는 20대가 되기 위해서 10대를 살았다. 우리 사회는 지금도 한국의 10대를 20대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처럼 만들어놓았다. 그렇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아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대부분의 한국인은 대학생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60살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50대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환갑이 되기 위해서 50대를 희생하는 삶, 그런 건 진짜 아니다.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나중에는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언젠가 있을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행복도 연습이고, 습관인 것 같다. 행복을 미루다 보면 행복은 오지 않는다. 그리고 50, 더 이상 미룰 시간도 없다. 지금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본다. 지금 행복한가?

 

5년 전에 송호근 교수가 한국의 50대에 대해서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고 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20대도 울고, 30대도 울고, 50대도 울고, 이게 나라냐? 이제 나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386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50대가, "나도 힘들어", 이렇게 말하고 자빠지면 우리 모두는 다 망하는 길 밖에 없다. 그 길로 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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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한국 경제사에서 뭘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공자를 물어봤더니, 이젠 경제학과에는 그런 거 안 하나보다. 사학과에서도 경제 내용이라 최근에 따로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 같다. 그리고 낙성대 연구소 얘기들을 몇 사람이. 안병직 선생이 뉴라이트 관련된 얘기로 욕 엄청 먹기는 하는데,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경제사 하는 마지막 그룹인 것 같다. 젊은 학자들은 다른 대안이 전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낙성대 연구소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걸 몇 년 전에 본 적이 있다.

학부시절에는 경제사를 전공하고 싶은 적이 있었다. 실제 사학과에서 김용섭 선생 수업도 있는대로 다 들었다. 그 시절에는 경제사 공부도 많이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우리가 배운 내용들이 실제로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80년대의 경제사, 어느 쪽이든 너무 이념적으로 공부를 했다는 생각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그것도 30년쯤 지나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몇 년 전 중고등학생에게 진로교육 시킨다고 하면서 꿈을 가지라고, 아주 생지랄들을 떤 적이 있었다. 나한테도 몇 번 문의가 왔었는데, 그딴 짓 좀 하지 말라고 했다. 꿈? 사회가 꿈을 청소년에게 권하면, 그 사회가 망한다. 지금은 청소년 꿈 1위가 교사고, 2위가 건물주다. 이건 자본주의 교육도 아니고, 그냥 양아치 교육이다.

하여간 집단적으로 돈 되는 거, 잘 나가는 거, 이런 것만 죽어라고 밝히다 보니 경제사처럼 한직에 있는 거, 전공자가 거의 없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싶은데, 아무도 안 하는 게 너무 많다.

조선초기의 경제상황에 대해서 좀 알고 싶은데, 예전에 한국경제사 전공했던 후배들이 듣자마자, 난감해한다. 자기도 모르고, 아는 사람이 아마 경제학과에는 없을 거같고, 사학과에 좀 물어본다고...

학문이든 연구든 심지어는 예술도, 많은 경우 너무 깡패처럼 한 동네에 몰려다닌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달려 있는 메일은 요즘 보지도 않고 바로 스팸함으로 보낸다. 이게 깡패들이여, 뭐여? 근본을 따져보면 안철수 현상이다. 안철수에게 밀리기 싫은 현 정부에서 이런 걸 강조하다 보니 공무원들이 알아서 기어서, 거의 모든 정부 관련 활동에 전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단다. 그런데 경제사는? 이런 질문이 생기면, 답 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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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주에 공주랑 대전에서 강연만 마치면 예전에 약속해둔 것까지, 다 끝난다. 지난 여름부터, 강연을 좀 많이 했다. 간만에 사람들도 좀 보고 싶고, 신세진 사람들 부탁도 들어줄겸. 그야말로 겸사겸사, 많이 돌아다녔다. 애들 보는 와중에 잠시 나갔다 오는 거라서, 제주도 갔을 때 딱 한 번 자고왔고, 전부 당일치기였다. 밤 늦게 들어와서 다음 날 애들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그런 생활이...

주로 목포대 같은 지방대학과 도서관들 그리고 사회적 경제 관련한 시민단체 같은 데 많이 간 것 같다. 고등학교도 좀 갔고. 이제 이 강연들이 끝나가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대략 만 명 좀 넘게 만난 것 같다. 시간이 좀 가면서 느껴지는 바가 조금은 있다. 일반 시민들을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이 만난 것은 나도 오랜만이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세상도 변했다. 사람들도 변한 것 같다. 그런 변화가 조금은 느껴지는 것 같다. 느껴지는 바가 생각보다 많다.

내가 누구랑 같이 얘기할 것이고, 누구랑 같이 세상을 고민할 것인가? 가끔 그런 걸 잊어버릴 때가 있다. 1년 가까이, 진짜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걸 좀 정리하면서 가만이 지내려고 한다.

그 사이에 방송도 정리했고, 기고하던 글들도 정리했다. 올 12월에 맞춰서,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아무 것도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태, 나는 그런 상태를 좋아한다.

예전 회사에 다닐 때, 현대중공업 출신 부장과 아주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다. 아버지 뻘도 더 되는 관계인데, 술도 많이 마셨고, 얘기도 많이 했다. 회사 그만두고 공단으로 옮겼을 때, 몇 달 후 새로 옮긴 사무실로 찾아왔던 유일한 동료가 또 그 양반이었다. 아, 종기실 부장이 진짜로 일 때문에 찾아온 적은 있었다.

그 부장 양반은 회사에 붙어 있는 사람이다. 별 이유도 없는데 7시 전에는 무조건 출근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현대중공업 내부의 깊숙한 얘기들은 그 양반한테 들었다. 나는 그렇게 뭔가에 붙어있는 게 싫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이들 보면서 겨울이 갈 것이다. 그리고는 봄이 올 것이다. 내년 봄에는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게 될지, 아직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비어있는 진공과 같은 시간을 즐긴다. 그 순간이 가장 편안하다.

오랫동안 나와 친구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대개 77~78학번, 요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가 가만히 있을 때마다,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는지 궁금해했다. 버티는 게 아니라, 제일 좋고 즐거운 때라고 얘기해도 잘 이해를 못했다.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순간들을 대부분 나는 무시한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행사는, 망년회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동료와의 신년식, 요 두 개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쉬는 김에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망년회 3개를 하기로 했다. 동료들과 한 번, 옛날 동료들과 한 번, 나꼽살 팀과 한 번. 간만에 김용민과 통화했다. 상암 근처에서 날짜 한 번 잡기로.

올 겨울은 진짜로 몇 년만에 갖는, 공식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겨울이 될 것 같다. 내년 봄까지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할 것이다.

지난 겨울은 촛불집회와 함께, 나도 생각이 정지한 순간들을 보냈다.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한데, 사실은 시간과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었다.

이제는 또 다른 흐름이 올 것 같다. 그리고 그 흐름은, 같이 만들어나가는 흐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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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늘 경쟁이 싫었다. 누굴 이긴다는 게, 싫었다. 바둑, 당구, 포카 심지어는 화투까지, 내 또래들이 좋아하는 건 아무 것도 안한다. 승부가 걸린 게, 그냥 싫었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안 하는 것만 했다. 거기에는 승부는 커녕, 경쟁도 없으니까. 승부를 피하면서도 밥 먹고 살려니까, 더더군다나 남들이 안하는 걸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밥 걱정은 안하고 산다. 경쟁, 이기는 것, 이게 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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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를 내려놓기


50대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정리할 건 정리하고, 마음 먹을 것은 마음 먹고. 에세이와 사회과학 책이 다른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살아가는 삶 사이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생각과 삶은, 조금 다르다. 글을 쓰려고 생각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덜고 또 덜어내는 수밖에 없다. 생각이 단촐해지면, 뱃살도 단촐해질까? 그럴 리가. 먹는 것이 단촐해져야.


증오하는 것을 내려놓는 50대가 되었으면 하는, 그런 작은 소망이 있다. 홍종학 장관 하는 거 보고, 나도 크게 느낀 바가 있다. 진짜 친한 양반이고, 엄청나게 친할 관계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일을 같이 했다. 그렇지만 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과 증오는 동전의 앞뒷면인지도 모르겠다. 증오하면 욕심이 생긴다. 그 증오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증오를 내려놓는 것, 그게 제일 힘들다. 속에서부터 열불이 나는데, 그게 내려놓아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내려야 한다. 그래야 지금 행복해진다. 증오하면서 행복하다, 불가능하다.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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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민주당 당원이었다. 내가 당에 갔을 때, 당 지지율 12%였다. 근혜 시대, 다른 선택을 하기가 어려웠다. 총선도 이기고, 대선도 이겼다. 당원도 차고 넘치고, 정부 돕겠다고 줄 선 사람이 서울산성을 한 바퀴 돌 정도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서울 산성의 성첩이 3만개였는데, 임진왜란 때 급하게 모은 사람이 7천명이었다고 나온다. 지금 줄 선 사람이 3만명이 아니라 6만명도 넘을 것 같다.

이제는 모든 게 조용해졌고, 내가 뭐 하는지 관심 갖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원래부터 녹색당 당원이었고, 오랫동안 거기에서 활동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지금이 녹색당으로 돌아가기 제일 좋은 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 끝나고 당적 정리할까 했는데, 그 때는 몇 명이 말렸다. 그래서 좀 더 기다렸다. 이제는 말릴 사람도 없을 것 같다.

30대 때, 이재영과 약속을 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막 원내 들어갔을 때였다. 사민주의 정당도 자리를 잡고, 녹색당도 자리를 잡으면, 이재영과 둘이서라도 공산당 만들기로 했다. 나이 먹고, 더 이상 욕심 부릴 일 사라지면, 공산당 만드는 게 친구와의 약속이었다.

그 이재영은 벌써 죽었다.

이제는 지킬 약속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그냥 조용히 살면 된다. 그래도 내 삶의 마지막은 녹색당원으로 살아가고 싶다. 언젠가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그게 지금인지, 조금 더 기다리는 때인지, 그 판단이 아직은 잘 안 선다.

내일 아침에 이재명 만난다. 나도 이제는 판단을 해야 할 순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주당 당원으로 하고 싶은 일은 이제 없다. 그러나 녹색당 당원으로 하고 싶은 일은, 아직은 조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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