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경스럽게도 내가 류승완 감독을 만날 날이 있었다.

 

이게 완전 동생 둔 형들의 얘기와 마찬가지이다.

 

류승완 감독이 해준 가장 재미있는 얘기는, 얼마 전에 그의 자식이 돼지 독감에 걸렸는데, 동생이 용한 의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 의사, 내가 소개시켜준 사람인데...

 

장하준과 몇 달 전에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그날도 진짜로 공들여서 애기한 건, 무슨 민주주의니 한국 경제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과학사 공부하는 장하준 동생에 관한 얘기였다.

 

이게 무슨 마누라 자랑하는 쪼다들도 아니고, 동생 얘기하는 형들이라니...

 

참 한심한 형들의 이야기인데, 사람 사는 게 결국 만나서 진심에 관한 애기들을 하다보면, 부인 얘기, 자식 애기 아니면 동생 얘기들인게 당연한가 보다.

 

나도 쪼다처럼 할 말 없으면, 동생 얘기나 한다.

 

형보다 잘 난 동생을 둔 사나들이 만나서 할 얘기 없으면 결국 동생 얘기나 한다. 진짜 쪼다 같은 사나들의 얘기이다.

 

장하준도 동생 얘기를 할 때면 눈에 생기가 돌고, 경제학자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 내 삶, 참 이거 아니다라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류승완이 동생 얘기를 할 때의 그 눈빛, 그 때 나는 장하준의 눈빛에서 본 그 눈빛을 연상했다.

 

장하준의 동생은 가난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장하준이 동생 생각하는 마음만은 그윽했던 것 같다.

 

류승완이 동생 얘기를 할 때, 결국 밥이나 먹고 살게 된 동생에 대한 자신감... 그 자부심은 마음 속에서 깊게 느껴졌다.

 

2.

영화 <라디오 데이즈>, 이것이야말로 류승완의 동생인 류승범을 위한 영화가 아니었던가!

 

참 이런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선 류승범을 보면서 류승완이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 어떤 행사에 관계된 적이 있었다. 무조건 사람을 모아야 하는 행사인데, 류승범을 불러달라고 누군가 부탁을 했었다.

 

제기랄... 니가 류승완을 아니까, 부탁하면 될 거 아냐...

 

그 말을 뒤로 들었던 날. 그 날이 내가 처음으로 '팬심'이라는 단어를 생각한 날이었다. 난 그냥 류승완의 영화가 좋았을 뿐인데, 이렇게 저렇게 도와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낸 못한다.

 

그 날 처음으로 '팬심'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다.

 

난 장하준의 팬은 아니고, 그의 동생의 팬이다. 사실 잠깐 장하준을 보면서 그의 동생의 얼굴이나 한 번 좋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잠깐 한 적이 있다.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장하준의 동생, 나라고 왜 안 보고 싶겠는가. 살아있는 조선인 중 최고의 천재라고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장하준의 동생, 나라고 왜 안 보고 싶었겠는가.

 

내가 정말 천재라고 생각한 외국에 있는 학자들이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얘기가 장하준 동생에 관한 얘기였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 혹은 돌아오지 못하는 학자들의 세계가 또 있기는 하다.

 

장하준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세계에서 장하준의 동생에 대한 명성이 자자하기는 하다. 나도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3.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더 높게 치는 것은 류승완의 동생인 류승범이다.

 

형을 떠난 동생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고스란한 느낌이 영화 <라디오 데이즈>에 담겨 있었다.

 

그 날, 방송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 질문, 그 속에 경성이라는 단어의 애환의 거의 대부분이 녹아있다.

 

우와, 영화 엄청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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