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지공..

낸책, 낼책 2020. 4. 29. 22:30

steady라는 단어가 있다.

동구가 붕괴한 이후 지도교수가 결국 박사 논문을 지도할 자격을 유지하지 못했다. 건강이 안 좋다나.. 그렇게 헤매던 시절, steady라는 단어를 보았다. 결국 그걸로 박사 논문을 썼다. steady state에 관한 걸 싹 다 뒤졌다.

현대식 용어로는 sustainable로 표현된다. 불어로는 durable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여전히 steady라는 단어가 좋다.

이 steady라는 단어를 가장 감명깊게 본 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이었다.

미나스트리스 성을 뚫고 들어오려는 우르크하이의 나무 기둥 뒤의 문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간달프가 말했다.

"Steady, steady, steady.."

뭐.. 이 장면을 뜻깊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겠지만, 나는 steady라는 단어의 용법에 대해서 가장 감명 깊었다.

나에게 혼자 말한다.

steady, steady..

혼자 일하는 것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steady.. 이게 어렵다. 속으로는 "right now!", 이 목소리가 막 터져나오려고 할 때, steady.. 나를 가라앉힌다.

마흔을 넘으면서 확실히 나도 캐릭터가 변했다. 30대까지는 속공 스타일이었는데, 확실하게 지공으로 변했다. 나는 먼저 움직이지 않고, 주위를 다 보고, 뒤늦게 움직인다. 별 상관 없다. 먼저 한다고 해서 터치다운 하는 게 아니라, 별의별 삽질을 다 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미루고, 미루는 스타일로 지난 10년을 보낸 것 같다.

그리고 내려진 결정은 뒤집지 않는다.

물론 늘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예기치 못한 일로 정말로 괴멸적 타격을 받고, 전멸에 가까운, 그래서 싹 망하는 일도 있다.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이 그렇다.

작년 10월쯤, 아마 그 어디쯤인거 같다. 예전에 판데믹 책 준비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접었던 게 생각이 났다. 메르스 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만 봤다. 김탁환 선생의 책 '살아야겠다'가 그 시절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올해는 적당한 때에 판데믹 얘기를 다시 한 번 다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오래된 기억을 떠듬떠듬하며, 뭘 더 공부해야 그래도 의미 있는 책을 만들지 막 그러던 중이었다. 코로나 19가 그러던 와중에 터졌다.

당연히 생각해놓은 시나리오들이 좀 있으니까, 기준에 맞게 데이타를 소팅하고, 이번 바이러스의 성향 분석 같은 걸 좀 해봤다.

역대 최강이다..

그 다음부터는 기계적인 패턴 분석이다.

요즘 다시 steady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중이다. 아직 덜 드러난 것들이 있다. 좀 더 봐야 한다.

아주 옛날에 steady라는 단어를 처음 보던 시절이 생각이 났다. 솔로 모델 같은 데에서 종종 보던 건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그 단어를 봤더니, 아주 기분 묘했다. 그건 세이 책에도 있고, 리카도 책에도 있고, 아주 다른 해석으로 존 스튜어트 밀 책에도 있다.. (이 구절은 아주 유명해졌다.)

이번에는 극한의 지공을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기다리고 기다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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