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등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을 중학교 때 처음 했던 것 같다. 누군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마흔이 넘어가면서 그 질문을 이제는 안 하게 된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매번 대답이 바뀌기는 했는데, 지금은 "살살 산다"라는 아주 손쉬운 대답을 가지게 되었다. 건강도 메롱이고, 예전처럼 밤 새고 뭔가 할 힘도 없다. 숨쉬는 것보다만 열심히, 그렇게 살살 산다.

지금은 아니지만 환갑 한참 지나서 언젠가 내가 생각한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작은 등대'라는 이름의 에세이집 하나는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배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작은 해변가에 서 있는 fire tower, 그런 삶을 살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엄청나게 큰 세상의 진리나 불변의 진리, 그딴 건 난 잘 모른다.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고민에 대답을 해줄 그런 것도 아니다. 당장 내 삶도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만나, 허걱,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그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나이를 먹고 나니까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는 건 잘 하게 되었다. 뭐, 나도 그리 잘 사는 편은 아니라서 이래라 저래라, 아예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대신 술 사다주고, 밥 해주고, 안주 해주고, 그런 건 잘 한다. 20대 때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30대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요즘은 아주 적은 사람들을 만난다. 다들 속상하고 뭔가 잘 안 풀려서 답답해하는 사람들이기는 한데, 나는 그냥 들어주기만 한다. 여행 갈 때면 운전만.

아주 먼 데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자, 이럴 주제도, 형편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 주변에 우울증은 없게 하자, 이런 작은 소망 같은 게 있다. 30대 초반에는 나도 삶이 아주 힘들었다. '명랑'을 모토로 살아간 뒤, 우울증과는 좀 거리가 먼 삶이 되었다. 유머 넘치는, 그런 건 아니다. 그래도 억지로 우스개 소리도 좀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정도는 가지고 산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삶이 아주 힘들다. 먹고 살기 어렵고, 뭔가 잘 안 풀린다. 문재인 정권 이후로 부쩍 힘들어하는 활동가들이 많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가끔 밥 먹고, 술 마시고, 시간 여유 되면 여행 같이 가고. 그런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별 이유는 없다. 최씨 부자처럼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라, 뭐 그런 건 못해도, 일상 생활의 내 주변에 우울증은 없게 하자, 그 정도는 좀 해볼려고 한다.

20대에는 나도 진리로 세상을 밝힌다, 그런 말을 믿었던 것 같다. 그런 걸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은 40대 중반에 알 게 된 것 같다. 진리는 모른다, 진심만 안다. 그렇지만 그 진심이 자기를 피곤하게 하고, 남들을 무겁게 만든다. 이제는 진리도 잘 모르겠고, 진심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서로 웃고 지내면서 사는 삶이 어떤 건지는 좀 알 것 같다. 그런 거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장공성만골고라는 말이 있다. 한 명의 장수가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만 개의 해골이 뒹군다는 얘기다. 아이 무셔라! 나도 그런 세계에서 살았다. 염병, 지금 와서 돌아보니, 지 살기 위해서 남들을 돌아볼 줄 모르는 미성숙들이다. 예전에 아주 이름 높은 종교계의 지도자들하고 몇 년간 일을 같이 하던 적이 있었다. 그 양반들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수 십년씩 면벽 수도 하고, 에 또 뭐 그런 전설들을 잔뜩 달고 살던 양반들을 가까이에서 보니까, 대부분 애정 결핍증들이시라. 잠시만 연락 안 하고, 눈에 안 보이면 안절부절이신. 많은 사람들의 삶과 영혼을 살피시다보니 정작 본인들은 극도로 심한 애정결핍증들이신.

성숙이라는 게 뭔가 싶다. 주변에 우울증 걸리지 않게 조금씩 살피고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이런 삶이 멋진 건 아니고, 티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살아봐야 잘 살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그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건 큰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엄청나게 비싼 데에 가거나, 죽어라고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해야만 서로 즐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딱 하나의 조건만 만족시키면 컵라면 하나 먹으면서도 서로 즐거울 수 있다. 얘가 나에게 뭔가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그런 마음만 없애면 서로 편해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뭔가 이루고 나면 다음 목표, 그 다음 목표, 그리고 진짜 하고 싶었던 거, 멈출 줄을 모른다. 박원순 보면서 그런 생각이 좀 들었다. 아주 유명해지기 전부터 알았다. 그렇게 멈춰 서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살았으면 아마 더 멀리 갔을지도 모르겠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끝없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과도한 노력도 결국은 감옥을 만드는 것 같다. 비워야 보인다고들 말하지만, 개인을 위해서건 사회를 위해서건, 달리기만 하고 비울 줄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 눈에 주변에 마음이 춥고 아픈 사람들이 보이겠는가? 삶은 너무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괜히 그런 말을 했겠는가? 몇몇 목사들 입에서 나오는 증오의 말들, 아주 혐오 지대루다.

나라고 뭐 별 다르겠는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지난 몇 년간, 정치를 하라거나 행정을 하라거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뭔가 하라는 얘기들을 했다. 그냥 웃기만 했다. "지금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고 있어요", 내가 답 대신 했던 말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둘째가 더 이상 폐렴으로 입원하지 않게 된 첫 번째 봄 이후로, 내 삶에 근심이 사라졌다. 뭐, 속상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아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는 거랑 비교하면 그런 건 고생 축에도 안 든다.

큰 등대나 겁나게 울트라 모던한 네비게이션 같은 건 나 말고도 할 사람 많다. 여의도의 선술집에서 소주 한 잔 마시다 보면, 세상 구할 사람들이 그 작은 술집에도 아주 차고 넘친다. 그들의 열의만 다 모아도 통일은 벌써 몇 번이 되고도 남았을 것 같다. 학회나 심포지엄 가면 세상의 모든 학문은 다 거기서 해결될 것 같다. 위대하신 석학들께서 불철주야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학문을 갈고 닦으시는데, 나까지 숟가락 하나 얹을 건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에 한 대학에서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한 적이 있었다. 안 갔다. 집에서 너무 멀다. 40대까지는 제자가 없는 게 좀 허전하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는 그런 마음도 사라졌다. 한국에 스승은 차고도 넘치는데, 나까지 스승을 한다고 해봐야 세상의 혼돈만 더 늘일 것 같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열심히 준비해서 책을 쓰면 된다. 가끔 그래도 그런 얘기를 직접 행정으로 구현하거나 방송에서 널리 알리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마운 말이기는 한데, 그렇게 넓게 알린다고 해서 세상이 그만큼 빨리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욕심일 뿐이다.

인류학에서 노마드에 대해서 볼 때는 참 재밌게 봤었다. 그게 들레쥬 손에 들어가서 다시 나왔을 때, 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감성이 나와는 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한 군데에 정착해서, 오고가는 사람들 국밥이나 한 그릇씩 말아주는, 그런 삶이 더 감성에 잘 맞는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난 더 농경적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것도 더 극단적으로 움직임을 줄여서, 등대처럼 아예 붙박이로, 그렇게 살아갈까 싶다.

그래서 언젠가 나이를 좀 더 처먹고, 스스로를 돌아볼 때 작은 등대처럼 살게 되었다고 느껴지면, 그 때는 그 제목으로 에세이집 한 권쯤 쓰고 싶다. 주변에 우울증 환자 가득한 삶을 살면, 공부고 연구고, 그게 다 뭔 소용인겨? 아부꾼들만 잔뜩 옆에 늘어서 있는 삶, 그런 걸 하려고 운동을 시작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후기 자본주의를 넘어서 말기 자본주의로 간다. 우울증 치료약을 몇 년째 먹던 사람들이 계속 자살을 한다. 글로벌 제약 회사의 음모나 국가 돌봄 시스템의 미비를 탓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풀릴 것 같지는 않다. 이게 약 먹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멀리, 넓게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아주 작게, 불을 비추는 등대 같은 삶을 살아갈까 한다. 주위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힘든 데도 자기만 달려나가는 삶, 그런 건 재미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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