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의 마이너.

대학 시절에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태학을 공부한 다음에 나는 늘상 마이너의 마이너 감성으로 산 것 같다. 운동권 내에서도 환경은 마이너고, 거기서도 생태 이런 건 다시 더 마이너로 몰린다.

대학을 중퇴하고 공장에 활동가로 들어갔던, 내가 본 최고의 조직가이자 이재영과 친구로 지내던 시절, 참 유쾌하기도 하고 맘이 편했다. 굳이 내가 노조와 만나거나 그러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 건 이재영이 했다. 이재영이 떠난 후, 나도 노동운동과 하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되었다.

민주주의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생태는 역시 마이너이고 장식품이다. 그래도 필요하니까 만나고 상의도 했다. 그렇지만 마이너라는 위치가 변하지는 않는다.

친구들 중에서는 이제 생태 얘기는 그만하고, 금융이나 거시경제 얘기를 더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뭐, 믿거나 말거나, 워낙 사람이 없어서 wto 협상은 물론이고 apec 협상에도 관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그 길을 내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새만금에 이어서 4대강 때 맨 앞에 서 있었다. 뭐, 4대강은 큰 싸움이었지만, 그런 걸로 사회가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자기들 이익에 맞을 때만 생태.. 크게 실망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워낙 평생 그런 걸 보면서 살았다.

농업 얘기는 생태 분야에서도 또 찬밥이다. 특별히 그런 걸 자기 일로 생각하는 활동가도 별로 없다. 활동가들 몇 명과 같이 일을 했는데, 너무 힘들다 보니까 결국에는 다들 유학 갔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딸 기우면서 사는 친구가 내가 단체 상근 시절에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다.

처음 책 쓸 때에도 내 포지션을 '마이너의 마이너'로 잡았다. 무슨 엄청난 대형 작가로서의 뭘 한다, 그런 생각 자체가 없다. 그리고 나에게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쓰는 주제는 내가 처음이고, 그 뒤에도 아무도 안 쓸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정도는 생각했다. 한 번 하고 지나가는 거라서, 신경을 좀 써야한다는 정도는 생각했다.

남들 다 다루는 주제는 안 했다. 나 말고도 하는 사람 많은 거,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없다. 인기 있는 주제도 안 했다. 나 같은 마이너의 마이너가 한 목소리 더한다고 해서 티도 나지 않을 게 뻔했다.

마이너의 마이너로 위치를 잡으면 장점이 많다. 트렌드 따라갈 필요도 없고, 남들 눈치 볼 이유도 없다. 메가 트렌드니, 그딴 서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말들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글을 읽을 사람들의 시대 감성 정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그걸로 족하다.

최근에도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고마운 얘기이기는 한데, 나는 둘째 초등학교 2학년 끝날 때까지, 지금의 루틴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그걸 바꾸면 아내가 일을 그만두던지, 뭔 수를 내던지 좀 복잡한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없다.

마이너의 마이너라고 해서 하는 일을 대충하지는 않는다. 최근에 더 그렇다. 책을 거의 안 보고, 책 소개하는 방송 같은 것도 거의 다 없어졌다. 그리고 나도 방송에는 정말 최소한으로만 나간다. 다들 방송에 나가서 더 유명해지는 길만이 책을 파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 얘기 듣고, 약간의 고정 같은 것도 다 그만두었다. 책을 팔기 위해서 방송을 해야한다면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그렇게까지 책을 쓸 이유가 없다. 내가 타고 태어난 소명이 책 쓰는 것도 아니고, 책을 쓰기 위해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나중에 더 나이를 먹으면 어떨지 몰라도, 지금도 책 안 쓰면 지금보다 더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다. 누군가는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책을 쓰는 거다.

농업 경제학 준비하면서 주제도 미리 골라놓고, 스토리 보드도 따로 디자인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하려고 한다. 메이저 인생들은 대충 살아도 된다. 그래도 어떻게 좀 묻어가고, 도와주는 귀인들이 있다.

마이너의 마이너는 목을 내밀고 개활지를 걸어가는 것과 같은 삶이다. 최선을 다 해도 마지막 순간에 누가 슬쩍 밀어버리는 삶과 같다.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것도 습관이 되면 괜찮다. 무시와 핍박, 반칙, 이런 게 일상이라서 크게 화나지도 않는다.

빨간색 모닝 타고 길에 나서면 에쿠스 같은 조폭차들이나 벤츠 형님, bmw 아저씨들, 별의별 희한한 방법으로 끼어든다. 괜찮다. 워낙 그렇게 산다.

그래도 마이너의 마이너로 사는 이유는? 천당 가고 싶어서 그렇다. 나쁜 일을 하고 싶어도 끼워주지를 않으니,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세상에 더 많은 기여를 하게 되니까 천당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폼나게 살고 남들 눈에 멋지게 보이기에는 메이저의 길 만한 게 없다. 그러나 천국 가기에는 마이너의 마이너가 훨씬 확률이 높다. 그게 안 되어도, 해탈은 몰라도 득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 고행이라, 굳이 도 닦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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