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 이후로 사람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감성은 바뀔 것 같다. 어떻게 바뀔까? 나도 가설 형태로만 생각해보는 중이라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68 이후로 바뀐 감성들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한다. 입생로랑도 68을 겪었다. 입생로랑도 그 때 프레타뽀르떼, 기성복 시장으로 나가고 싶어했다.

"저는 이미 새장 안에 갇혀버린 새였어요."

그는 오뜨꾸뛰르 매종에서 시작하였다. 첫 데뷔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그를 승계한 수석 디자이너. 그 때 그의 나이가 21세였다. 알제리 전쟁에 파병될 때, 그는 이 '더러운 전쟁'에 참가하는 걸 거부한다. 그리고 매우 보수적인 크리스찬 디오르에서 해고된다. 그 위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매종을 열게 된다.

매종에서 시작, 매종에서 그의 디자인 인생은 마감된다. 68혁명은 그에게 기성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준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매종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매종이 아닌 다른 방식의 옷 만드는 법을 상상하지 못했다.

패션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라인과 색상을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길을 열어준 입생로랑이 자신을 '새장 안에 갇힌 새'라고 하다니... 그게 68이 그에게 준 영감이었다.

그는 상속녀나 부자집 마담이 아닌, 스스로 성공한 직장 여성들이 자신의 옷을 입을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저렴하게 옷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물론 오뜨꾸튀르 매종이라서, 아주 싼 옷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최대한 낮추려고 했다.

그게 68이 입생로랑에게 준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입생로랑의 표정이 가장 밝고 행복했던 것은,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였다. 미테랑 정권이 열렸을 때, 그와 그의 파트너들의 표정은 진짜로 밝다. 이유없이 행복해했다. 68이후로 13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미테랑 정권이 끝나고, 입생로랑은 다시 어려워진다.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고, 마약도 하게 된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사르코지가 참석한다. 그의 장례식 필름을 보았는데, 많은 디자이너 등 그의 동료들이 완전 똥 씹은 표정이다. 입생로랑의 관이 사르코지가 온 걸 좋아할까? 아마 똥 씹은 기분일텐데...

무언가 참여하고 노력하고, 그 결과를 눈 앞에서 볼 때, 우리는 입생로랑도 생애에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그 행복감이 만들어낼 변화가 과연 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두 아이의 육아로부터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나도 입생로랑 평전 쓰고 싶다. 명박의 시절, 순실의 시대, 그 10년 동안 나도 '새장 속에 갇힌 새' 같은 느낌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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